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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관에 실패한 채 [[묵던]]으로 귀환한 도르곤에 대해 황위를 두고 정쟁을 벌였던 [[아이신기오로 호오거]]는 그를 질책하고 회군의 책임을 물어 삭탈관직할 것을 촉구했다. 청 내부에서 입지가 좁아진 도르곤은 자신이 직접 이끄는 정백기, 동생 [[아이신기오로 도도]]가 이끄는 양백기를 동원해 호오거가 이끄는 부대를 공격하며 난을 일으켰다.([[갑신의 역]]) 기습적인 공격에 호오거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패주하여 [[더르기 허천]]으로 피신했고,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은 숭정전<ref>崇政殿, 조회, 연회,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청 황제의 집무 공간이자 제례의식을 거행하는 공간이다.</ref>에 남아 저항하던 중 피살된다. 황궁을 점거하는 데 성공한 도르곤은 [[순치제]]를 폐위하고 동복 형제들의 권유로 황위에 올라 연호를 기상(祺祥)이라 한다. | 입관에 실패한 채 [[묵던]]으로 귀환한 도르곤에 대해 황위를 두고 정쟁을 벌였던 [[아이신기오로 호오거]]는 그를 질책하고 회군의 책임을 물어 삭탈관직할 것을 촉구했다. 청 내부에서 입지가 좁아진 도르곤은 자신이 직접 이끄는 정백기, 동생 [[아이신기오로 도도]]가 이끄는 양백기를 동원해 호오거가 이끄는 부대를 공격하며 난을 일으켰다.([[갑신의 역]]) 기습적인 공격에 호오거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패주하여 [[더르기 허천]]으로 피신했고,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은 숭정전<ref>崇政殿, 조회, 연회,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청 황제의 집무 공간이자 제례의식을 거행하는 공간이다.</ref>에 남아 저항하던 중 피살된다. 황궁을 점거하는 데 성공한 도르곤은 [[순치제]]를 폐위하고 동복 형제들의 권유로 황위에 올라 연호를 기상(祺祥)이라 한다. | ||
1645년 정성공은 15만의 군대를 모아 [[하문]]에 집결시키고 [[남경]]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그러나 순나라 군대의 반격에 대한 계책을 세우지 못해 밀려나기 시작했고, 1646년 9월 [[선하관 전투]]에서 명 부흥군이 패배하면서 | 1645년 정성공은 15만의 군대를 모아 [[하문]]에 집결시키고 [[남경]]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그러나 순나라 군대의 반격에 대한 계책을 세우지 못해 밀려나기 시작했고, 1646년 9월 [[선하관 전투]]에서 명 부흥군이 패배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기울여 진다. 이자성은 정성공의 친부인 [[정지룡]]에게 민왕(閩王) 작위와 함께 [[광동]]·[[복건]]을 일임하겠다고 회유했으며, 그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이자성에게 투항한다. 정성공은 남은 군대와 함께 [[금문도]]로 밀려났고, 이후에도 그는 수군을 이용해 번번이 상륙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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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14일 (월) 23:12 판
송금 전투[1]의 패배로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은 북경으로 진격하였고, 산해관에서 청군을 상대하던 오삼계는 그에게 투항한다. 이자성은 오삼계를 평왕(平王)으로 봉해 북직례[2] 일대를 관할토록 했으며, 오삼계는 이자성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충원 받아 청군의 남하를 저지하였고,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회군했다.
오삼계가 청군을 견제하는 동안, 이자성은 북경 약탈을 금지하는 등 군율을 엄격히 하고 도성 내 민심을 다독이면서 무너진 사회 질서를 수습하는 한편, 사천을 장악한 장헌충과 강남 일대에 잔존한 명 부흥 세력을 회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장헌충은 표면적으로 황위를 포기하고 서왕(西王)으로 봉해지면서도 사천 일대에 대한 통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명 부흥 세력의 경우 대세가 기울어졌다 판단한 융무제 등이 항복하였으나, 정성공이 이끄는 부흥군은 반순복명(反順復明)을 기치로 만력제의 손자인 영력제를 옹립하며 저항했다.
입관에 실패한 채 묵던으로 귀환한 도르곤에 대해 황위를 두고 정쟁을 벌였던 아이신기오로 호오거는 그를 질책하고 회군의 책임을 물어 삭탈관직할 것을 촉구했다. 청 내부에서 입지가 좁아진 도르곤은 자신이 직접 이끄는 정백기, 동생 아이신기오로 도도가 이끄는 양백기를 동원해 호오거가 이끄는 부대를 공격하며 난을 일으켰다.(갑신의 역) 기습적인 공격에 호오거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패주하여 더르기 허천으로 피신했고,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은 숭정전[3]에 남아 저항하던 중 피살된다. 황궁을 점거하는 데 성공한 도르곤은 순치제를 폐위하고 동복 형제들의 권유로 황위에 올라 연호를 기상(祺祥)이라 한다.
1645년 정성공은 15만의 군대를 모아 하문에 집결시키고 남경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그러나 순나라 군대의 반격에 대한 계책을 세우지 못해 밀려나기 시작했고, 1646년 9월 선하관 전투에서 명 부흥군이 패배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기울여 진다. 이자성은 정성공의 친부인 정지룡에게 민왕(閩王) 작위와 함께 광동·복건을 일임하겠다고 회유했으며, 그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이자성에게 투항한다. 정성공은 남은 군대와 함께 금문도로 밀려났고, 이후에도 그는 수군을 이용해 번번이 상륙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