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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천시대(兩天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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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금 전투]]<ref>松錦之戰, 1641년부터 1642년에 걸쳐 벌어진 전투로 금주를 포위하던 청군을 격파하고자 [[홍승주]]의 10만 군대가 파견되나 송산에서 팔기군에게 격파되었다.</ref>의 패배로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은 북경으로 진격하였고, [[산해관]]에서 청군을 상대하던 [[오삼계]]는 그에게 투항한다. 이자성은 오삼계를 평왕(平王)으로 봉해 북직례<ref>北直隷, 명의 수도 [[순천부]] 주변 지역인 [[허베이]]·[[허난]]·[[산둥]] 등을 통틀어 일컫는다.</ref> 일대를 관할토록 했으며, 오삼계는 이자성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충원 받아 청군의 남하를 저지하였고,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회군했다. | | === 순나라의 화북 통일 === |
| | 1642년 [[송금 전투]]의 패배로 [[홍승주]]가 지휘하던 명의 정예군 10만 명이 궤멸되면서 명 조정은 대군을 이끌 국가적 역량을 상실하였다. 이 틈을 타 [[이자성]]이 이끄는 반군은 [[낙양]]·[[개봉]]을 함락시켰으며 1644년 [[서안]]을 점령한 뒤 이를 수도로 삼아 대순(大順)을 건국, 황제를 칭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이자성의 군대는 그해 4월 [[자금성]]을 함락시켜 명나라를 멸망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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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삼계가 청군을 견제하는 동안, 이자성은 북경 약탈을 금지하는 등 군율을 엄격히 하고 도성 내 민심을 다독이면서 무너진 사회 질서를 수습하는 한편, 사천을 장악한 [[장헌충]]과 강남 일대에 잔존한 명 부흥 세력을 회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장헌충은 표면적으로 황위를 포기하고 서왕(西王)으로 봉해지면서도 사천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세가 기울어졌다 판단한 [[융무제]]와 일부 신하들이 항복하였으나, [[정성공]]이 이끄는 부흥군은 반순복명(反順復明)을 기치로 [[만력제]]의 손자인 [[영력제]]를 옹립하며 저항했다.
| |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은 약탈을 엄금하고 도성 내 민심을 다독이며 무너진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는 동각대학사를 지낸 [[구유]](丘瑜)를 좌승상에 임명하는 등 명 관료들을 재등용하는 한편, 반군에 합류했던 지식인들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공신들을 치하하여 내부 세력의 지지를 유도했다. 북경 입성 후 가장 먼저 당면한 과제는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의 처우였다. 이자성은 오삼계를 회유하였고 그가 이를 받아들이자 휘하 병사들에 대한 군령권 보장 및 평국공(平國公)으로 책봉하였다. 이후 그에게 [[북직례]]<ref>北直隷, 명의 수도 [[순천부]] 주변 지역인 [[허베이]]·[[허난]]·[[산둥]] 등을 통틀어 일컫는다.</ref> 일대의 방비를 맡겨 청군의 침공을 대비토록 했다. 이렇게 [[청나라]]를 제외한 화북 일대를 손에 넣은데 성공한 이자성은 중원 통일을 목표로 강남 정벌을 준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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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관에 실패한 채 [[묵던]]으로 귀환한 도르곤에 대해 황위를 두고 정쟁을 벌였던 [[아이신기오로 호오거]]는 그를 질책하고 회군의 책임을 물어 삭탈관직할 것을 촉구했고, 양황기의 대신들도 같은 입을 모았다. 입지가 좁아진 도르곤은 숙청될 것이라 생각하여 동복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직접 이끄는 정백기, 동생 [[아이신기오로 도도]]가 이끄는 양백기를 동원해 선양궁을 포위했다.([[갑신의 역]]) 급작스런 쿠데타에 호오거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겨우 궁을 빠져나와 [[더르기 허천]]으로 피신했고,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은 숭정전<ref>崇政殿, 조회, 연회,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청 황제의 집무 공간이자 제례의식을 거행하는 공간이다.</ref>에 남아 저항하던 중 피살되었으며, 그를 견제하던 양황기 대신들도 죽임을 당했다. 황궁 점거에 성공한 도르곤은 [[순치제]]를 폐위하고 직접 황위에 올라 연호를 기상(祺祥)이라 하였다.
| | === 남명과 장헌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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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5년 정성공은 15만의 군대를 모아 [[하문]]에 집결시키고 [[남경]]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그러나 순나라 군대의 반격에 대한 계책을 세우지 못해 밀려나기 시작했고, 1646년 9월 [[선하관 전투]]에서 명 부흥군이 패배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기울여 진다. 이자성은 정성공의 친부인 [[정지룡]]에게 민왕(閩王) 작위와 함께 [[광동]]·[[복건]]을 일임하겠다고 회유했으며, 그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이자성에게 투항한다. 정성공은 남은 군대와 함께 [[금문도]]로 밀려났고, 이후에도 수군을 이용해 번번이 상륙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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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7년 도르곤은 내부 정쟁 수습에 집중하고자 했고, 이자성 역시 정성공의 북벌 시도에 대응해야 했다. 산해관을 사이에 두고 오랜 교착 상태를 유지하던 두 나라는 여러 번의 교섭을 거쳐 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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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과 청의 등장은 명을 정점으로 하던 일원론적 천하관이 붕괴하였음을 의미한다. 주변국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공·책봉을 맺었다. 이 시기를 두 [[천자]]가 중원을 두고 공존하고 있다 하여 양천시대라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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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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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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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관의 실패와 내부 정쟁은 청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도르곤은 최대의 정적인 호오거를 몰아내기 위해 순나라와 휴전하며 산해관에 묶여있던 팔기군을 복귀시켰다. 또한 명나라 출신 항장을 기용하고 항청 한인들을 묶어 [[한군팔기]]로 재편했다. 군사적 열세에 놓인 호오거는 [[조선]]의 사신을 보내 파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묵던에 억류되어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안위가 위험해질 것을 우려한 [[열종]]과 조정은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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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조선을 끌어들이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나, 도르곤으로부터 [[효단문황후]]·[[효장문황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몽골 세력의 협조를 얻는데 성공한 호오거는 황제를 폐위하고 그 자리를 참칭한 역적 도르곤을 처단해야 한다며 반대파를 규합했다. 도르곤은 [[연주성]] 일대의 진을 치고 호오거의 병력과 [[호르친부]]의 몽골족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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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나라의 화북 통일
1642년 송금 전투의 패배로 홍승주가 지휘하던 명의 정예군 10만 명이 궤멸되면서 명 조정은 대군을 이끌 국가적 역량을 상실하였다. 이 틈을 타 이자성이 이끄는 반군은 낙양·개봉을 함락시켰으며 1644년 서안을 점령한 뒤 이를 수도로 삼아 대순(大順)을 건국, 황제를 칭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이자성의 군대는 그해 4월 자금성을 함락시켜 명나라를 멸망시킨다.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은 약탈을 엄금하고 도성 내 민심을 다독이며 무너진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는 동각대학사를 지낸 구유(丘瑜)를 좌승상에 임명하는 등 명 관료들을 재등용하는 한편, 반군에 합류했던 지식인들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공신들을 치하하여 내부 세력의 지지를 유도했다. 북경 입성 후 가장 먼저 당면한 과제는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의 처우였다. 이자성은 오삼계를 회유하였고 그가 이를 받아들이자 휘하 병사들에 대한 군령권 보장 및 평국공(平國公)으로 책봉하였다. 이후 그에게 북직례[1] 일대의 방비를 맡겨 청군의 침공을 대비토록 했다. 이렇게 청나라를 제외한 화북 일대를 손에 넣은데 성공한 이자성은 중원 통일을 목표로 강남 정벌을 준비한다.
남명과 장헌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