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14번째 줄: | 14번째 줄: | ||
<div style="font-size:13.5px;letter-spacing:1px;margin-bottom:10px;color:rgba(235,193,82,.8);">2. 생애</div> | <div style="font-size:13.5px;letter-spacing:1px;margin-bottom:10px;color:rgba(235,193,82,.8);">2. 생애</div> | ||
1499년 겨울, 조선 성종 30년에 성종과 정목왕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혁은 태어날 때부터 조정과 백성 모두에게 주목을 받았다. 조선은 이미 성종 치세에 들어 광종·인종 대에 다져진 법제와 군제, 관료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여진과 일본과의 무역 및 국경문제가 지속되며 장기적 과제가 되었고, 국내적으로는 점차 방대한 관료체제와 재정 운용의 부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때였다. | 1499년 겨울, 조선 성종 30년에 성종과 정목왕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혁은 태어날 때부터 조정과 백성 모두에게 주목을 받았다. 조선은 이미 성종 치세에 들어 광종·인종 대에 다져진 법제와 군제, 관료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여진과 일본과의 무역 및 국경문제가 지속되며 장기적 과제가 되었고, 국내적으로는 점차 방대한 관료체제와 재정 운용의 부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때였다. | ||
이혁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선왕들의 국정운영과 치세를 배우며 성장했다. 성종은 그가 장성하기 전부터 | 이혁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선왕들의 국정운영과 치세를 배우며 성장했다. 성종은 그가 장성하기 전부터 홍문관에 보관된 문서와 명나라에서 반입된 새로운 서적들을 읽도록 허락해 주며 “학업은 모든 것의 기본이니 과하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가르쳤다. 정목왕후는 또한 장남인 제안대군 못지 않게 궁중에서 학문과 예절을 세심히 가르쳐, 이혁은 사서오경뿐 아니라 농서와 병서 문서까지 두루 익혔다. | ||
특히 세자 교육을 받을 무렵부터 이혁은 아버지 성종과 함께 경연에 들어가 신료들의 토론을 직접 듣고 의견을 묻는 자리에도 자주 참여했다. 이때 이미 홍언필은 이혁을 두고 “경연에서 논어를 논하되 물정에 밝으니 장차 성군이 될 자질이 있다”고 평했다. | 특히 세자 교육을 받을 무렵부터 이혁은 아버지 성종과 함께 경연에 들어가 신료들의 토론을 직접 듣고 의견을 묻는 자리에도 자주 참여했다. 이때 이미 홍언필은 이혁을 두고 “경연에서 논어를 논하되 물정에 밝으니 장차 성군이 될 자질이 있다”고 평했다. | ||
이혁의 세자 책봉은 조정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왔다. 성종에게는 이미 적장자인 제안대군(이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안대군은 용맹하고 무예를 좋아했지만 문치에는 큰 뜻이 없었다. 반면 차남 이혁은 어릴 적부터 서책과 국정문서를 가까이하며 성종의 정책을 세밀히 꿰뚫어보았다. | 이혁의 세자 책봉은 조정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왔다. 성종에게는 이미 적장자인 제안대군(이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안대군은 용맹하고 무예를 좋아했지만 문치에는 큰 뜻이 없었다. 반면 차남 이혁은 어릴 적부터 서책과 국정문서를 가까이하며 성종의 정책을 세밀히 꿰뚫어보았다. | ||
51번째 줄: | 51번째 줄: | ||
그러나 이적은 "전하, 8도는 오랜 국체와 같아 조정과 향리의 질서가 이미 이에 맞춰 굳어졌사온데, 이를 바꾸면 필시 각 고을 수령과 사족이 동요할 것입니다"라며 반대했다. 정광필 역시 "도제는 국통과 군정을 관통하는 큰 틀이니, 쉽게 바꾸면 백성은 누가 다스리는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하물며 지방에 삼원이나 향학도 다 자리잡지 못하였는데 이 일은 차후에 다룸이 마땅합니다"라 경계했다. 신충극도 "도를 늘리면 필히 국정은 더 복잡해지고 재정은 크게 위축될 것입니다. 이 일은 이익이 될지 폐단이 될 지 모릅니다"라 하였다. | 그러나 이적은 "전하, 8도는 오랜 국체와 같아 조정과 향리의 질서가 이미 이에 맞춰 굳어졌사온데, 이를 바꾸면 필시 각 고을 수령과 사족이 동요할 것입니다"라며 반대했다. 정광필 역시 "도제는 국통과 군정을 관통하는 큰 틀이니, 쉽게 바꾸면 백성은 누가 다스리는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하물며 지방에 삼원이나 향학도 다 자리잡지 못하였는데 이 일은 차후에 다룸이 마땅합니다"라 경계했다. 신충극도 "도를 늘리면 필히 국정은 더 복잡해지고 재정은 크게 위축될 것입니다. 이 일은 이익이 될지 폐단이 될 지 모릅니다"라 하였다. | ||
이에 현종은 고민 끝에 경상도를 경상도와 동진도로 나누어 시범 적용토록 하고, 삼원과 군영삼직 체제를 일단 감영의 관원들과 아전들이 겸하여 재정을 절약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관리들은 삼원과 군영삼직이 뿌리잡지 못했는데 이들 관청을 겸직으로 운영하면 필히 폐단에 이를 것이라며 일을 숙고하여 천천히 논의하여 진행할 것을 종용했다. | 이에 현종은 고민 끝에 경상도를 경상도와 동진도로 나누어 시범 적용토록 하고, 삼원과 군영삼직 체제를 일단 감영의 관원들과 아전들이 겸하여 재정을 절약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관리들은 삼원과 군영삼직이 뿌리잡지 못했는데 이들 관청을 겸직으로 운영하면 필히 폐단에 이를 것이라며 일을 숙고하여 천천히 논의하여 진행할 것을 종용했다. | ||
그러나 현종은 대신들이 왕권을 견제하는 것이라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오랜 과로로 스스로 정사를 돌볼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현종은 조바심에 더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종은 결국 경상도를 둘로 나누어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향후 확대할 것을 독단하고 고령의 임수의를 다시 조정에 불러들여 이 일을 추진토록 하였으며, 이와 함께 허운을 필두로 | 그러나 현종은 대신들이 왕권을 견제하는 것이라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오랜 과로로 스스로 정사를 돌볼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현종은 조바심에 더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종은 결국 경상도를 둘로 나누어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향후 확대할 것을 독단하고 고령의 임수의를 다시 조정에 불러들여 이 일을 추진토록 하였으며, 이와 함께 허운을 필두로 집현전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토록하여 새로운 도의 경계를 정하도록 했다. | ||
국정에 무리가 겹치자 현종은 밤마다 신경통과 불면으로 국서를 보다가 쓰러져 며칠을 의식없이 병상에 누워있기까지 했다. 결국 정광필과 홍언필, 박회가 연달아 상소를 올려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어 백성과 군사들이 불안하지 않게 하시옵소서"라 간하였다. 믿고 중용한 임수의와 허운뿐 아니라 세자도 이렇게 간언하자 현종은 며칠을 침전에서 생각하다가 "내가 이미 몸을 돌보지 못하고 일까지도 독단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과인이 선왕의 뜻을 끝내 어기고야 말았구나"고 중얼거렸다. | 국정에 무리가 겹치자 현종은 밤마다 신경통과 불면으로 국서를 보다가 쓰러져 며칠을 의식없이 병상에 누워있기까지 했다. 결국 정광필과 홍언필, 박회가 연달아 상소를 올려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어 백성과 군사들이 불안하지 않게 하시옵소서"라 간하였다. 믿고 중용한 임수의와 허운뿐 아니라 세자도 이렇게 간언하자 현종은 며칠을 침전에서 생각하다가 "내가 이미 몸을 돌보지 못하고 일까지도 독단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과인이 선왕의 뜻을 끝내 어기고야 말았구나"고 중얼거렸다. |
2025년 7월 27일 (일) 09:55 판


顯宗 · 현종

顯宗 · 현종
조선의 제9대 국왕 현종(이혁)은 1499년 성종의 차남으로 태어나, 학문과 정무를 두루 익히며 성장했다. 세자 시절부터 대리청정을 통해 국정을 맡아 재정·군정·농정을 폭넓게 다루며 실력을 쌓았고, 즉위 후에는 공납을 폐지하고 별세육목을 정비하며 화폐경제와 농업 생산력을 높였다. 또 모내기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안찰사·순찰사 체계를 정비해 지방 통제를 강화했으며, 군영삼직으로 군권을 분산해 지방의 군란을 방지하고자 했다. 중반 이후에는 무역을 대폭 확대하고 도관삼원을 시범 설치하여 지방의 치안·경제·의료를 전문화했으며, 이를 《도영제범》으로 체계화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선왕들의 개혁을 더 체계화하고 심화함으로써 치세를 이어 나갔다. 치세 말기에는 운동을 하지 않는 습관과 평소 병약했던 체질에 과로와 신경쇠약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13도제 같은 크고 작은 실책이 일자 정치적 불안을 우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얼마 안가 완전히 상왕으로 물러나 국정을 이양했다. 그의 치세는 실용적 개혁과 재정·행정·군사의 균형을 통해 조선을 본격적인 화폐경제 정착을 이루기 시작한 시기로 평가된다.
1499년 겨울, 조선 성종 30년에 성종과 정목왕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혁은 태어날 때부터 조정과 백성 모두에게 주목을 받았다. 조선은 이미 성종 치세에 들어 광종·인종 대에 다져진 법제와 군제, 관료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여진과 일본과의 무역 및 국경문제가 지속되며 장기적 과제가 되었고, 국내적으로는 점차 방대한 관료체제와 재정 운용의 부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때였다. 이혁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선왕들의 국정운영과 치세를 배우며 성장했다. 성종은 그가 장성하기 전부터 홍문관에 보관된 문서와 명나라에서 반입된 새로운 서적들을 읽도록 허락해 주며 “학업은 모든 것의 기본이니 과하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가르쳤다. 정목왕후는 또한 장남인 제안대군 못지 않게 궁중에서 학문과 예절을 세심히 가르쳐, 이혁은 사서오경뿐 아니라 농서와 병서 문서까지 두루 익혔다. 특히 세자 교육을 받을 무렵부터 이혁은 아버지 성종과 함께 경연에 들어가 신료들의 토론을 직접 듣고 의견을 묻는 자리에도 자주 참여했다. 이때 이미 홍언필은 이혁을 두고 “경연에서 논어를 논하되 물정에 밝으니 장차 성군이 될 자질이 있다”고 평했다. 이혁의 세자 책봉은 조정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왔다. 성종에게는 이미 적장자인 제안대군(이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안대군은 용맹하고 무예를 좋아했지만 문치에는 큰 뜻이 없었다. 반면 차남 이혁은 어릴 적부터 서책과 국정문서를 가까이하며 성종의 정책을 세밀히 꿰뚫어보았다. 홍언필은 조정 회의에서 “적장자를 제치고 차남을 세자로 삼으면 종친과 사족이 동요할까 두렵사옵니다. 왕통은 곧 종사의 뿌리입니다”라며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정광필은 “적장자는 무예에만 마음을 두고, 차남 이혁은 이미 군정과 농정, 화폐까지 헤아립니다. 선왕 세종께서도 적장자가 아니었으나 태평성세를 여셨나이다”라며 현실을 강조했다. 결국 성종은 대신들과의 여러 차례 경연 끝에 이혁을 불러 직접 문답을 주고받았다. 이혁은 논어와 서경, 그리고 격서에서 보고된 기계 개발 보고까지 인용하며 답을 이어갔고, 이어 각 도에서 올라온 부역 장부를 놓고 “북변의 지방은 개혁에 반대하는 상소가 다른 지역보다 많이 올라오는데 이를 살펴 지역 사정에 맞도록 시급한 것만 먼저 처리하고 나머지는 유예토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며 현실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정광필은 “전하, 이미 세자가 천하를 두루 살펴 그 시비를 아나이다”라며 감탄했다. 마침내 1512년 이혁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 결정은 조정에 파장을 일으켰으나, 성종이 관료들과 신뢰를 이어온 덕에 조정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1526년 성종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성종은 자연스럽게 이혁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것을 의논했다. 성종은 병상에서 “내가 처음 국정을 맡았을 때처럼 너도 백성을 두려워해라. 나는 비록 백성을 위해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너는 이 길을 따라가서는 아니된다”라고 당부했다. 이혁은 대리청정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국정을 직접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육조에서 올라오는 예산 집행 장부와 각 도 병력 동원표를 하나하나 검토했다. 또한, 부왕의 정책이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밤낮으로 보고를 받고 고민했다. 특히 수시로 평시청과 상서의 관리들을 격려하러 갔고, 진행상황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는 한편 과로에 시달리는 신하들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조정이 바쁘고 신하가 궁해야 백성이 편하다는 세종의 말을 받들어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현종은 이 시기부터 정무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팔도 각지에서 행해지는 치수공사, 관학정비, 장시랑 관리와 양전사업에 대한 총체적인 우선순위와 단계적 방안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관리들과 논의하여 사업의 진행을 늦추거나 앞당기는 등 세심한 부분에서 선왕들의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러한 면모 이면에는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라는 점이 일종의 컴플렉스로 작용하면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세종의 행적을 따라가고자 하는 면모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대리청정을 보좌한 신충극은 “전하께선 이미 성군이 될 자질을 모두 갖추셨사옵니다. 군사와 농사, 상공업까지 하나도 소홀히 보지 않으니 이는 백성들의 큰 경사입니다.”라며 경연에서 찬탄했다. 그러나 홍언필은 “허나 너무 자주 향리와 장시를 살피시면 백성이 놀라오니, 법도와 예로써 다스림도 잊지 마옵소서. 또한, 국본의 건강은 종사의 가장 중대한 일이옵니다.”라며 절제를 권했다. 1529년 성종은 더 이상 정무를 보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깊어지자 스스로 상왕으로 물러날 것을 문무백관에 알렸다. 조정의 대신들은 아직 지방에 끝내지 못한 일이 많다며 이런 중대한 과업을 성종 없이 어떻게 진행할 수 있겠냐며 반대하기를 몇 번이었다. 그럼에도 성종의 뜻은 강하여 끝내 선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조정은 즉시 이혁의 즉위 절차를 서둘렀고, 이혁은 “부친의 뜻을 이어, 백성을 살피는 데 더욱 힘쓰겠다”고 밝혔다. 즉위를 앞둔 이혁은 다시 경연에서 “이제 내가 부친께 배운 바를 본격적으로 펼칠 때가 되었소. 다만 부왕께서는 백성의 삶을 살펴 불편함이 없도록 일을 결정하라 하셨소. 이에 따라 일은 반드시 신중하게 헤아려 천천히 해나가겠소”라고 천명했다. 이를 두고 홍언필은 “그러하옵니다. 온건히 하되 백성의 이익은 잊지 않으시면 종사가 태평할 것입니다”라 했다.
현종이 즉위 초기에 가장 먼저 손댄 것은 세제 개혁이었다. 이미 성종 대에 화폐경제가 정착 단계에 있었으나, 지방에서는 여전히 공납과 잡세가 난립해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현종은 이를 정리하고자 공납을 완전히 혁파하여 전세에 통합시키는 동시에, 지방에서 별도로 걷던 잡세들을 "별세육목(別稅六目)"으로 통일하였다. 이는 예두세(상인), 공상세(수공업자), 어량세(어부), 광세(광부), 삼세(심마니), 염세(염전업자)로, 백성의 생업에 따라 공평하게 부담을 지우기 위한 조치였다. 이 정책은 호조와 상서가 주도하여 시범적으로 경기도와 충청도의 몇 고을에서 먼저 시행토록 하여 전국적인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차츰 확대했다. 박회는 별세를 내는 이가 작물로 조세를 부담하는 것보다 그들이 가진 것을 팔아 나온 화폐로 납부토록 하여 경제를 활성화하도록 방안을 강구했다. 별세, 잡세의 종류를 규정하고 화폐로 징수하도록 하자 지방 재정의 투명성과 중앙 보고 체계가 대폭 개선되었다. 그러나 지방의 토호와 향리들은 종래 자신들이 임의로 부과하던 각종 세목을 빼앗긴 데 불만을 품었고, 일부 고을에서는 향리와 결탁한 사족이 상언을 올려 반발하기도 했다. 이에 현종은 암행어사와 순찰사를 보내 부정을 적발하고, 선의원을 통해 여론을 수렴토록 하여 정책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했다. 현종은 농업 부문에서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미 성종 대에 남부 지방 일부에서는 모내기(이앙법)가 점차 확산되었지만, 여전히 관개 시설이 부족하거나 보수적인 농민들의 저항으로 북부와 내륙에서는 아직도 직파법이 주류였다. 현종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격서와 농서에 명해 각 도의 방학관과 향학을 통해 모내기 교육을 실시하게 하고, 수차·저수지·보가 정비된 고을부터 점차적으로 확대하도록 했다. 이로써 1535년경에는 충청도 내륙과 강원 일부 고을까지도 모내기가 보급될 수 있었다. 이러한 농업 장려책은 별세육목 개혁과 맞물려 농민 부담을 경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농민들은 전세만으로 납부를 일원화하고, 늘어난 수확에서 일정 부분을 화폐로 바꾸어 내도록 해 생계 안정과 국가 재정의 안정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현종은 지방 관리들의 비리를 막고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암행어사와 순찰사 제도를 제도적으로 정비하여 훗날의 폐단이나 악용을 막고자 했다. 기존의 순찰사 대신 감영의 도부서를 세워 안찰사(按察使)를 감사 담당으로 지방을 수시로 순회하게 하여 도내 군현의 장부를 열람하고 부정을 조사하도록 했다. 이들은 일정 임기 후 다른 도로 교체 파견되어 지방관과 결탁할 여지를 줄이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안찰사의 봉급을 높게 주고, 우수한 자를 본보기로 오래 중용하고 사족과 결탁한 자는 엄히 벌하도록 하여 부패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이는 중앙권력에서 거리가 먼 안찰사라는 직책이 후대로 갈수록 청요직으로 진출하기 위한 등용문이자 삼사에 버금가는 직책으로 변모하게 했다. 이를 통해 중앙은 각 도의 물자 동원 능력과 조세 실적, 군사 훈련 수준을 정기적으로 파악했다. 신충극은 이 체계에서 중요한 조정자로서, 감사·순찰 보고서를 모아 의정부와 국왕에게 올리며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실무를 맡았다. 현종은 또한 군사 체제의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각 지방 군영에 삼직(영장, 종사관, 부장)을 엄격히 두어 병력 동원과 무기·화약 관리를 분리하도록 했다. 영장(없을 경우 감사)은 군영의 작전과 지휘를, 종사관은 인사와 병적 장부를, 안찰사는 무기 관리와 감사를 전담하게 하여 부정을 방지했다. 이렇게 군권을 분리하여 지방 병권이 한 손에 집중되지 않도록 했다. 이는 지방의 군란을 막는 한편, 지방군의 출병을 늦추는 단점도 있었다. 이를 두고 정광필과 홍언필 등 대신들은 "변방의 급한 변란에는 오히려 대응이 더뎌질 수 있다"며 우려했고, 이에 최안지는 북변 지역과 삼남의 수군은 예외로 두고 상황을 살펴 추후에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현종이 흡족하여 받아들였다.
현종은 치세의 중반에 이르러 더 적극적으로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근간에는 관료제를 지탱할 재정을 더 확보할 방안이 시급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현종은 무관들의 우려에도 북방의 여진과 일본, 더 나아가 유구와의 교역을 확대했다. 그는 북방의 무역소를 늘리고 삼포에 들어오는 세견선을 더 확대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무역의 총량을 늘리면서 여진 상인과 일본 상인들에게 무역 혜택을 주되, 조선의 경제 질서에 포함되도록 해 세입을 늘리고 불법 거래를 막도록 노력했다. 이를 위해 박회가 화매소 장부를 개정하고 전국 화폐 유통을 관리했으며, 중앙에서는 상서가 무역에 관한 일도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리게 했다. 또 현종은 남해안의 조창과 연계된 항구를 정비해 수운과 무역을 결합하도록 해 상업을 크게 활성화했다.
현종은 그 치세 후반에 이르러서는 지방 행정에 더 관심을 가져 경기지방에 "도관삼원(道官三院)"을 시범 설치할 것을 논의했다. 이는 포도소(치안), 화매소(경제), 활인소(의료)로 구성된 삼원이었다. 이들 삼원은 경기감염 근처에서 먼저 설치되었고, 재정이 증가함에 따라 충청도, 경상도 등지로 순차적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포도소는 군영과 연계되어 치안을 전담하며, 도내 산발적 도적 사건과 상공업 갈등을 조정했다. 화매소는 단순한 화폐 환전소를 넘어서 각종 세입과 무역 수익, 별세를 통합 관리했고, 활인소는 의료 및 약재 판매를 통해 백성의 건강을 돌보는 동시에 국가 재정을 보조했다. 이 세 기관은 도부서 및 감영과 병렬적 상호 관계(실제로는 상하관계)를 이루었으며, 이적이 안찰사로 있는 동안 직접 시찰하며 각 도의 운영 상황을 의정부에 보고하며 이후에 이 업무를 추진하는 요직으로 등용되었다고 한다. 홍언필은 "치안을 군영에만 맡기지 않고 따로 기관을 두는 것은 신선하나, 초기 비용이 크니 무리해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이적은 "작은 도둑을 잡는 일에 군을 대동하는 것은 우도할계이며, 이를 빌미로 군란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몇몇 선례대로 포도대장을 두어 관리토록 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라고 진언했다. 현종은 이에 포도소는 시급한 곳만 먼저 설치토록 하고 그 이후에 판단하여 확대하도록 명하였다. 대신 화매소의 확대는 현종이 직접 격려하여 진척시켰다. 이러한 지방 관청의 확대는 화폐경제 정착을 위한 자극이자 백성을 구휼하는데 긴요한 것이었으나 역설적으로 중앙의 재정을 크게 압박했으며 이에 따라 결국 호조의 건의대로 학비를 관학(영학, 향교, 소교)에서 자체적으로 부과할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했으며, 조정에서는 학비의 상한만 지정하여 관리했다.
현종은 이 시범 운영 성과를 집대성하기 위해 경연에서 각 도 감사와 안찰사들의 사례 보고를 수집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영제범(道營諸範)》을 편찬토록 했다. 이 책은 각 도 삼원의 운영, 감사·순찰 체계, 군영 삼직 및 병적 관리, 지방 군사 전략, 무역과 조세, 별세의 실제 사례까지 종합해 규범화한 것이다. 현종은 "각 도의 행정은 같을 수 없으나, 법제와 제도는 같아야 한다"며 이를 각 감영과 도부서에 배포하게 했다. 박회와 최안지, 신충극, 이적은 이 편찬 사업에 핵심적으로 참여해 도별 실적과 문제 사례를 정리하고, 앞으로 전국 확대 시 보완할 점을 의논했다. 이렇게 현종 치세 중반에는 무역과 지방 행정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조선은 명실상부한 화폐경제 국가로서 자리 잡아 갔으며, 향후 전국 도관삼원의 본격적 확산과 군영 개편으로 이어지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현종은 치세 말기에 이르러 증가하는 국정 부담 속에서 과로로 인해 점차 건강이 악화되었다. 자주 두통과 신경통을 호소했고, 밤에는 시름시름 앓으며 잘 자지 못했다. 홍언필은 "전하, 백성이 편안한 것은 군주가 온전함에서 비롯됩니다. 부디 정사를 경중으로 가리시옵소서"라 간하였으나, 현종은 "선왕들께서 모두 몸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돌보셨거늘, 내가 어찌 편히 누울 수 있겠는가"라며 더 무리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신경 쇠약과 불면, 식욕 부진으로 더욱 수척해졌다. 나아가 오랜 수면 부족으로 판단력이 흐려지고, 경연에 나서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나 현종은 스스로 많은 업적을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며, 신경질적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문제는 십삼도제 논의에서 대신과의 충돌로 극에 달했다.
그러던 와중 지방의 세입과 군정을 더 치밀히 하려는 의도로, 현종은 기존 8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13도제 도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미 《도영제범》 편찬 때부터 각 도가 담당하는 행정과 세목, 군사 작전이 지나치게 방대해 지역마다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종은 경연에서 "도마다 풍습과 사정에 맞도록 정책을 펴고자 하여도 도 안에서도 상황이 다른 곳이 많으니, 더 잘게 나누어 감찰과 병참을 치밀히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적은 "전하, 8도는 오랜 국체와 같아 조정과 향리의 질서가 이미 이에 맞춰 굳어졌사온데, 이를 바꾸면 필시 각 고을 수령과 사족이 동요할 것입니다"라며 반대했다. 정광필 역시 "도제는 국통과 군정을 관통하는 큰 틀이니, 쉽게 바꾸면 백성은 누가 다스리는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하물며 지방에 삼원이나 향학도 다 자리잡지 못하였는데 이 일은 차후에 다룸이 마땅합니다"라 경계했다. 신충극도 "도를 늘리면 필히 국정은 더 복잡해지고 재정은 크게 위축될 것입니다. 이 일은 이익이 될지 폐단이 될 지 모릅니다"라 하였다. 이에 현종은 고민 끝에 경상도를 경상도와 동진도로 나누어 시범 적용토록 하고, 삼원과 군영삼직 체제를 일단 감영의 관원들과 아전들이 겸하여 재정을 절약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관리들은 삼원과 군영삼직이 뿌리잡지 못했는데 이들 관청을 겸직으로 운영하면 필히 폐단에 이를 것이라며 일을 숙고하여 천천히 논의하여 진행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현종은 대신들이 왕권을 견제하는 것이라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오랜 과로로 스스로 정사를 돌볼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현종은 조바심에 더 신경질적으로 대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종은 결국 경상도를 둘로 나누어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향후 확대할 것을 독단하고 고령의 임수의를 다시 조정에 불러들여 이 일을 추진토록 하였으며, 이와 함께 허운을 필두로 집현전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토록하여 새로운 도의 경계를 정하도록 했다.
국정에 무리가 겹치자 현종은 밤마다 신경통과 불면으로 국서를 보다가 쓰러져 며칠을 의식없이 병상에 누워있기까지 했다. 결국 정광필과 홍언필, 박회가 연달아 상소를 올려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어 백성과 군사들이 불안하지 않게 하시옵소서"라 간하였다. 믿고 중용한 임수의와 허운뿐 아니라 세자도 이렇게 간언하자 현종은 며칠을 침전에서 생각하다가 "내가 이미 몸을 돌보지 못하고 일까지도 독단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과인이 선왕의 뜻을 끝내 어기고야 말았구나"고 중얼거렸다. 결국 1538년, 세자(훗날 혜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같은 해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나 요양에 들어갔다. 세자는 이미 왕세손과 왕세자의 자리에서 오랫동안 교육을 받아 경연에서 신하들과 토론하며 익히 국정을 배워온 터였다. 그리하여 조정은 큰 혼란 없이 세자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현종은 종종 상왕으로서 세자의 정사에 조언을 덧붙이며 국정을 이양했다. 현종은 혜종에게 분도(分道)의 일은 잘 살펴 능히 백성이 편할 때 추진하여라고 말하며 십삼도제는 경상도만 분할하고 오랫동안 그 이상으로 행하지 않았다.
1538년 현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 국정은 적장자 혜종이 맡았다. 그러나 혜종은 즉위 후 5년 만인 1543년에 급서하였다. 이때 상왕 현종은 다시 정국의 핵심 고문으로 나서 혜종의 아들, 즉 자신의 손자인 명종(1539년생)을 곧바로 즉위시키지 않는 대신, 혜종의 동생이자 자신의 차남인 영성대군(1525년생, 훗날 경종)에게 먼저 왕위를 잇도록 대신들을 설득하였다. 이는 크게 세 가지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첫째, 명종은 아직 만 5세의 유년으로, 조정 대신들과 사족들 사이에서 "너무 어린 군주가 즉위하면 외척과 권신들이 국정을 농단할 빌미를 준다"는 우려가 컸다. 둘째, 상왕 현종은 이미 군권과 재정을 장악해 본 경험에서 "유약한 임금은 도리어 조정의 합의를 약화시켜 분란을 부른다"는 현실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영성대군은 18세의 장성한 왕자로, 이미 국방과 재정 문제를 수년간 부친을 보좌하며 경연과 정사에 참여해왔으며 현종도 영성대군의 명석함을 잘 알고 있었다. 현종은 이를 통해 안정적 치세를 이어가고자 한 것이다. 이 이면에는 현종 스스로도 차남으로 왕이 되었기에 일종의 자기투영도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셋째, 현종은 혜종의 유지를 살피면서도 자신의 손자인 명종을 결코 홀대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들에게 "장차 이 나라는 명종이 이을 것이니, 경종은 다만 그 성숙을 기다리도록 도와야 한다"고 분명히 하여 경종 즉위 직후 명종을 왕세자로 책봉토록 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왕통을 혜종의 직계로 돌려놓기 위한 장치였으며,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왕통의 정당성을 흔들지 않는 결론으로 받아들여졌다.
현종은 광종·인종·성종 등 선왕들의 개혁 정책을 체계적으로 계승·발전시켰다. 특히 조선 중기 성리학적 통치 틀 속에서도 제도적 실효성을 우선시하여 국가 행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였다. 그의 치세는 실용주의적 개혁과 재정·군정의 균형을 중시한 정치 스타일로 평가받는다. 종의 개혁은 이후 조선 중기 정치 기반과 지방 행정 체제의 틀을 마련하였다. 도관삼원과 《도영제범》 등은 후대에도 확대·정착되어 명종 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지방 행정 개편과 군영 개편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그의 후계 구상(경종 즉위 및 명종 세자 책봉)은 왕위 계승의 혼란을 최소화하여 조선 국통(國統)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 말년에 심각한 과로와 만성병(두통, 신경쇠약 등)이 겹치면서 현종은 피로에 지쳐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 결과 국정 운영이 다소 독단적으로 변하고 정례 회의인 경연에 불참하는 날이 많아졌다. 신료들은 그의 건강을 우려하며 휴식을 권고했으나, 현종은 이를 무시하고 개혁을 강행하다가 큰 피로를 겪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현종은 지방 세입과 군정을 강화하기 위해 종래의 8도를 폐지하고 13도제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준비 부족과 대신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적·정광필·신충극 등 대신들은 8도제 폐지에 따른 사회 혼란과 재정 부담을 지적하며 반대했으며, 결국 경상도만 분할하는 선에서 성급함을 뒤로 물러섰다. 1538년 현종은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즉위한 혜종을 보좌하며 종종 고문 역할을 맡았으나, 실질적인 권한 이양은 늦어져 중앙 정계에 일부 불만이 존재했다. 이후 혜종의 조기 사망으로 왕위가 동생 경종과 그의 아들 명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명확한 후계 구도가 흔들리는 불안을 노출하기도 했다.
현종과 왕비인 인순왕후와의 관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인순왕후는 부드럽고 검소한 성격으로 현종의 절제된 생활을 더욱 뒷받침했다. 특히 현종이 심적으로 힘들 때나 신경질적인 면모를 보였을 때, 이를 진정시키고 심리적 버팀목이 되어주며 현종의 치세를 보좌했다. 현종이 불면과 과로로 몸이 쇠약해졌을 때도 정성으로 간호했으며, 직접 현종을 돌보는데 온 힘을 다했다. 현종은 상왕이 된 뒤에도 자주 인순왕후와 함께 책을 읽거나 후원을 거닐며 담소를 나누었다고 전한다. 현종은 자식들에게도 무척 애틋했다. 특히 적장자인 혜종에게는 세자 시절부터 국정의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설명하며 책임감을 가르쳤고, 차남 영성대군과도 자주 시를 주고받으며 가정 내 유대를 돈독히 했다. 특히, 현종은 스스로 차남이었기 때문에 모든 왕자를 동등하게 대하도록 노력했다. 따라서 국정이 안정적일 때에는 직접 모든 왕자들의 교육을 맡아 하였다. 반면 인순왕후는 아들들의 심리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었다. 이에 따라 현종의 아들들은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으로 나고 자랐다. 그의 취미는 바둑과 음악이었다. 어릴 적에는 성종이 물려준 농서와 격서에서 기계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했으며, 병서 속 진형도를 손수 베껴보고 그 원리를 탐구하기도 했다. 또한 향연에서 풍악을 듣는 것을 즐겼지만, 사치스러운 연회보다 소규모로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는 자리를 더 선호했다. 현종은 건강이 악화된 뒤에도 밤마다 명나라에서 들여온 의서와 양생서를 읽으며 병을 이겨보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왕이 되고 시간이 지나 노년에 이르러 미신이나 불교에도 심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