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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끝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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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광목성대는 데스티니634와 커피와 사탕이 공동 연재하는, "만약 대한제국이 망국하지 않았다면?"을 주제로 한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역사
1860-80년대
1864년 고종이 즉위하지 못하고 경은군 이재성이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분기점이 시작되어, 1871년 조선은 신미양요를 통해 늦게나마 개항을 이루게 된다. 일본 역시 1854년의 개항과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시작으로 아편전쟁으로 인해 약해진 청나라를 상대로 패권을 노리게 되었다.
조선은 1870년대에 메이지 유신 정도는 아니더라도, 흥선군 이하응의 주도 아래에 부국강병을 위한 기계문명을 양무운동식으로 받아들이며 착실히 근대화를 향해 발전해나갔다. 1875년에 운요호 사건이 벌어져서 일본에게 강제로 개항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는 일본이 조선에 대해 중국에 대한 도전에 있어 그 가치를 인정하게 하였고, 운요호 사건과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부상하지 못한 여파로 조선을 중국에 맞서는 최전선의 첨병으로 쓰자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다. 청나라는 이로 인해 만주로, 더 나아가서는 대륙으로 오는 길을 일본이 마련하는것을 벼르고 있었고, 역시 조선을 묶어두기 위해 사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1880년, 경은군은 20세가 되어 친정을 시작했다. 이때 청나라 조정은 흥선대원군을 지지하였으나, 일본은 경은군의 친정을 지지하면서 청일 양국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이때 경은군은 끝내 친정을 관철하였고, 직후 일본과 은밀하게 청을 몰아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1882년, 청나라의 군대 일부가 몇몇 고위 친청파들과 단독으로 정국을 장악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은 한층 심해지고, 청은 조선을 속국으로 두는 무역장정 체결과 중국 상인의 조선 시장 진출 등을 강요하게 되며 마침내 조선의 분노는 흥선군은 물론이고, 위시한 지청 성향의 수구파들까지 청나라에 등을 돌리게 만들며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경은군은 지금같은 기회가 없다고 판단하고, 일망타진을 통한 대반격을 노렸다. 이미 조선 내에서 세력이 커진 반청 개화파와 손을 잡고 궁극적으로는 일본과 연합해 중국을 축출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왕의 은밀한 지시가 있었기에 근왕정신까지 더해진 1884년의 갑신정변은 원 역사보다 더욱 큰 규모로 벌어져 압도적으로 개화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일본 역시 조선에 대한 구원을 승인하고 경은군은 일본군의 주둔을 허용하자 조일연합군의 대청전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1885년 3월 17일, 결국 최후통첩을 거절한 조선을 청이 속방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침공하기 시작하고, 조선군이 대응하며 일본군도 힘을 보태자 1차 조청일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점에서의 목표는 일단 조선의 중화질서로부터의 독립이었다. 1871년에 이미 개항하고 나름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조선군과, 말할것도 없이 아시아 최초의 조직된 군대인 일본군이 연합해 청에 대항하자 무능한 청군은 크게 패주하였고, 결국 남만주까지 밀리게 된다. 1886년 1월 한성에서 맺어진 강화조약으로 조선은 청에서의 독립을 승인받게 된다. 하지만 아직 일본과 조선이 국력이 모자랐던 탓에 조선 독립 이외에 무엇을 요구하진 못했다.
1886년 5월에 경은군 이재성은 조선을 대조선국으로 격상하고 국왕에서 대군주로 격을 올려 즉위한다. 이렇게 조선은 주권국이 되었지만, 이때로부터 1945년 일본 패망까지 이어질 일본의 60년에 걸친 간섭이 시작되었다.
1889년엔 일본이 대일본제국 헌법을 공포한다.
1890년대
하지만 일본의 야욕은 조선을 독립시킨 것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앞서 1879년 류큐처분으로 오키나와를 병합한 바 있던 일본은 1차 조청일전쟁에서 무참히 패주하는 청군을 목도하고 아시아 패권에 대한 욕심을 품게 되었다. 또 결정적으로 중국 남부에 대한 방어 요충지이자 사탕수수 산지인 대만을 원했다.
1890년에 조선은 국민개병을 위해 징병제를 시작했다. 이는 일본과 17년 차이로서 조선 역시 근대화의 의지가 있음을 드러냈다.
1894년, 일본은 조선 대군주 경은군에게 황제를 칭하고 헌법과 근대적 정부를 조직하라고 권하기 시작했다. 이제 충분히 힘이 쌓였다고 판단하고 조선의 칭제를 통해 청을 자극해 전쟁 명분을 만들 셈이었다. 경은군은 칭제가 이르다고 판단했기에 이를 꺼려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조선 내에서 칭제 요구가 높았기에 일본의 권유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1894년 5월 10일, 경은군은 드디어 환구단을 쌓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하고 연호를 성무(聖武)로 하여 즉위한다. 그렇게 비록 일본의 입김에 따른 것이었으나 대한제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의 예상대로, 청나라는 성무제의 칭제에 대하여 이를 승인하지 않고 중화정통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며 황제즉위를 취소하라고 통첩을 보냈다. 이에 성무제가 일본에 대청 전쟁을 제안하자 이를 기다렸던 일본은 한국으로 군대를 파견하며 전쟁을 압박했다.
그리고 1894년 7월 23일, 풍도에서 일본 해군이 예고없이 청 북양함대를 공격하면서 2차 조청일전쟁이 시작된다. 이어서징병제 실시로 10년 전보다 크게 향상된 한국군 또한 공격적으로 간도를 향해 진출하면서 2차 전쟁이 발발했다.
9월 17일의 황해해전을 계기로 일본이 뤼순, 웨이하이웨이등을 점거해 10년전과 달리 대륙 내지까지 유린당하기 시작하자 청나라는 끝내 한국과 일본에 평화를 제안한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서 일본은 대만과 요동반도를 획득했고, 한국은 간도의 영유권을 인정받으며 동아시아의 패권이 일본으로 이동했다. 이 세계관에선 러시아의 삼국간섭에 대하여 일본이 강력히 반발하며 결국 배상금을 깎고 요동은 가져가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모노세키 조약 직후, 동아시아 |
1899년, 한국은 흠정대한국 국제를 공포, 시행하면서 헌법상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고, 1900년 하원인 사민원과 상원인 중추원을 필두로 제국의회를 개설해 일본에 이은 동양 2번째 헌정국가가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한편 러시아 제국은 극동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키우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01년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발발하자 한국 역시 조금 격은 안 맞았으나 9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때 한국은 만주에서 영토를 조금 넓힐 생각을 하다가 러시아군이 빠르게 만주로 돌입해 만주를 모조리 차지해 버리면서 참전의 성과를 거의 거두지 못했다. 이 때문에 나름 만주 점령론 열풍이 불던 한국 내에선 반러감정이 크게 확산하게 된다.
일본 역시 만주를 식민화하는 러시아를 큰 위협으로 간주해 전쟁을 준비했다. 1902년 결국 일본은 한국과는 한일동맹을, 그리고 그레이트 게임 중이던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었다. 한국의 경우 만주 진출 좌절로 인한 반러감정이 극에 달해있었기에 한일동맹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이전까지 은근히 한국을 속국으로 보던 일본과 겉으로나마 대등한 동맹을 맺었다는 점에서 한국 입장에서 나쁠 것은 없었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에게 만주 철도 중 남만주의 이권은 일본에게 넘기고 한국도 여기 꼽사리를 껴서 단둥, 푸순 등 만주 남쪽의 일부 땅을 요구하며 러시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러시아가 거부하자 결국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초반부터 한국에게 이번에도 군사 통행권을 얻어냄은 물론 한국 육군을 선두에 세워서 만주의 러시아군을 공격했다. 대가는 단둥 지역의 영토였다.
러일전쟁은 러시아가 발트 함대를 끌어오는 초강수를 뒀다가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하고, 육상에서는 봉천 전투에서 한일연합군에 완패하며 한일동맹 측에 승기가 기울게 되었다. 결국 1905년 10월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는 남만주의 이권양도, 사할린 일본 할양 등의 조건에 동의하고 종전에 이르렀다. 물론 한국에게 단둥 땅을 주기 위해 명목상 만주의 주인인 청나라도 조약에 함께 서명했다.
1911년에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청나라가 멸망했고, 1912년엔 일본에선 메이지 덴노 사망으로 메이지 시대가 종식되어 다이쇼 시대가 열렸다. 1913년 근대화를 이룩한 성무제가 향년 53세로 사망하면서, 아들 이준용이 연호를 대형(大亨)으로 하고 대한제국 제2대 황제로 즉위하여 대형 시대가 열렸다.
1차대전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 일본이 영일동맹에 따라 협상국으로 참전하자 한국은 한일동맹에 따르 역시 협상국으로 참전한다. 당시 막 즉위한 대형제 이준(李埈)은 굳이 1차대전 개입을 원치 않았고 어차피 해군이 미약한 한국이 크게 영향을 줄 것도 아니었지만 정계와 육군에서는 일본과 함께 중국의 독일 이권, 특히 만주에서의 한국 영향력 확대에 관심을 보여 참전했다.
이때 1차대전 시 일본도 일본이었지만 한국 역시 꾸준히 쌓아온 산업기반이 조금이나마 빛을 발하여 협상국에 군수물자를 팔아넘겨 많은 이득을 취하고,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은 주요 7대 열강국에 이어 상위 중견국 정도의 국력을 확보해 국제사회의 일각을 차지한 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1918년 1차대전이 끝나고 한국도 명목상 승전국이 됐다. 일본이 자국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칭다오 전투를 비롯한 독일 동방전력와의 전쟁에서 한국의 육군력을 일부 요청해 투입했기 때문에 한국은 나름 전리품에 대해 기대했다. 일각에서는 독일령 톈진 조계의 한국 이양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협상국 대두는 일본의 무분별한 확장을 경계하였고, 당연히 그 최대동맹인 한국이 세력을 넓히게 해줄 생각도 딱히 없었다. 그 결과 일본은 남양군도라도 얻었지만 한국은 그야말로 독일이 뱉은 배상금을 약간 분배받은것 말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더군다나 이때 일본은 괜히 한국의 지분을 지켜줄려 하면 자국의 이익도 줄어들까 우려해 적극적으로 한국의 이익을 요구하지 않았고, 이때 한국이 은근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전간기 1920년대
1918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으로 러시아가 붕괴하자, 1차대전의 정산을 위해 당시 일본 총리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국을 향해 시베리아에 함께 개입할 것을 제안했다.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따로 점령하고 나머지 연해주는 한국에게 넘긴다는 내용으로 밀약이 맺어져, 1918년 시베리아 개입이 시작된다.
1차대전의 전선에 직접적 참전을 하지 않은 한일 간섭군은 일본이 7만명, 한국이 2만명 정도를 투입하며 서방보다 많음 병력을 보냈다. 일본은 이때 바이칼 호까지 진격하게 된다.
1919년 합의대로 블라디보스톡은 일본령 우라지오가 됐고, 나머지 지역엔 하바롭스크(백력)을 주도로 한 뒤 관리비용으로서 한국의 외지 대한제국령 연해주를 성립, 이후 한국의 연해주 관리를 위한 '원조'를 했다. 1920년에 들어 적백내전에서 적군이 승리하는 기세를 보이자 볼셰비키는 한국과 일본의 점령지를 공격했고, 결국 연해주를 제외한 전지역에서 철수했다.
1921년 일본에서 첫 입헌내각인 하라 다카시가 취임하자 한국에서도 이 영향을 받아 1922년 일진협회 소속의 홍영식이 1922년 한국 사민원 총선거를 통한 입헌내각을 이루었다. 헌정 우위의 정치가 잠시나마 확립됐으며, 사회적으로 자유주의적 풍조가 불던 이 시기는 일본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그리고 한국에서는 대형태평(大亨太平)이라 훗날 불리었다. 이때는 한국은 남만주에 연해주까지 장악해 나름 국제적 열강으로 인정받았다고 자부했고[1]이 시기 중국이 군벌시대에 접어들어 깨지고 있던 판국에 아시아 제2의 국가로서 입지를 얻긴 했다.
하지만 이 짫은 민주주의도 잠깐, 1923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대지진은 일본뿐만 아니라 일본 경제권에서 착실히 성장하던 한국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다. 당시 일본으로 진출했던 대장군 고무신의 일본 지부 주가가 폭락하자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대거 회수한 것을 필두로 발생했던 금융공황으로 한국의 실직자들은 급격히 늘어났고, 여기에 연해주의 관리비용으로 인한 채무까지 쌓여가기 시작했다. 한편, 이를 기점으로 일본 정계 내에선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함께, 군부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군국주의적 여론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1925년에 소련과 수교를 맺어 연해주의 영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일본 역시 우라지오 영유를 인정받게 된다. 동년에 일본은 소련과의 수교가 무색하게 반공법률인 치안유지법을 제정하는데, 이때 일본 내에선 "한국에 농민이 많아 공산주의가 확산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한국도 반공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하며 첫 노골적 내정간섭을 해왔다. 하지만 대형제는 이를 받아들여 1927년 한국 의회는 국가보안법을 공포한다.[2]
1928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해가자 일본이 장제스 견제를 위해 동북군벌을 영향력 하에 두고자 장쭤린을 압박한다. 하지만 장쭤린이 듣지 않자 6월 4일 관동군은 황고둔 사건을 일으켜 장쭤린을 살해해버렸다. 아들 장쉐량이 동북군벌을 이었지만, 일본이 아버지를 죽였음을 알고 있던 장쉐량이 국민정부에 합류하는 동북역치를 벌이자 순식간에 일본은 만주에서 축출당하고 만다.
거기에 1927년 쇼와공황에 이어서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전 세계를 강타하자 일본은 그나마 남아있던 이성마저 상실해버렸다. 한국 역시 도미노로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말할것도 없었다.
1930년대
그러던 1931년 관동군의 독단으로 만주사변이 벌어졌다. 만주를 공격한 일본은 한국에게 한국군이 월경해 만주사변을 돕는다면 만주국에서의 한국인 이주 등을 비롯해 한국의 이권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해왔다. 당시 땅을 확장하고는 싶었으나, 국력이 모자라 거만한 정치인들을 상대하며 울화통이 터지던 한국 육군은 흔쾌히 수락하고 병력을 파견했다. 한국의 월경은 의외로 동북군의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1932년 만주국이 세워졌다. 이때 일본 내에서는 기시 노부스케를 필두로 공황타개를 위해 일한만(日韓満) 블록이라는 새로운 경제권을 고안하게 된다. 하지만 일한만 블록이란 단어 자체가 한국을 만주국 급의 속국으로 두겠다는 의미였고 이때부터 서서히 예속이 시작되었다.
1934년 푸이가 만주국 황제로 즉위하고, 1935년에 일본이 수동사변을 일으켜 점점 중국을 압박했다. 이러는 와중에 만주 경영에 있어 한국의 지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은 나름 잘 지켜져, 한국인 이주민들이 만주국 내에서 한족보다 우월한 위치를 확보해 갑질을 하는 등의 상황까지 이루어졌다.
이때가 한국에서 가장 친일주의가 성행하던 시기로, 만약 일본이 중국을 먹는다면 만주를 한국에 위임하지 않겠냐는 희망섞인 전망도 나올 정도였다. 이러한 한국 내의 친일경향을 반영하듯 1935년 10월 쇼와덴노와 대형제의 양황제 회담이 이루어지고 1936년에 양국은 합동 군사훈련을 벌였으며 한국 원수부는 중일전쟁 시 일본을 지지하는 방침을 결의했다.
1935년 11월 25일, 한국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일본이 주도하는 방공 협정에 서명했다. 상술하듯 한국 내에서는 친일 식자층을 중심으로 "일본과 함께 대동아공영 성전에 나선다면 지나를 정복하고, 또한 고구려 고토 만주를 되찾아 옛 기자의 위상을 회복할수 있다."는 내용의 친일 선동이 이루어졌다. 반공 성향이 강하던 대형제도 방공협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2차 대전
이러한 한일우호에 금이 가기 시작한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부터였다. 일본은 이때부터 만주를 확고히 장악하기 위해 자국 자본을 대거 투입하면서 만주에 있어 한국의 지분을 크게 줄여버렸고, 또한 한국에게 한일동맹 당사국으로서 중일전쟁에 참전하라는 요구를 했다. 결국 한국은 이를 받아 들여서 1937년 8월 29일, "지나사변"에 일본의 동맹군으로서 참전했다. 그 대가로는 만주에 대한 한국의 우월한 영향력을 내걸었다. 물론 이미 만주국에서 한국 자본을 밀어내는 중이던 일본에게 그럴 생각은 없었다.[3]
이때만 해도 일본은 한국과의 오랜 우호적 관계를 고려하여 직접적으로 간섭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고, 단지 예속된 동맹국으로서 한국의 육군력이나 좀 써먹을 계획이었다. 만주도 다는 아니고 조금은 던져줄 생각이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침엔 대형제가 친일적 성향[4]을 띠기에 대형제의 지도 하에 한국의 친일주의가 계속 이어진다면 굳이 한국을 점령할 것까진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1938년 10월 우한 전투 이후 도쿄에서 열린 전승 축하연에서 국빈 초청받아 참석했던 대형제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급변하게 된다. 대형제는 이미 당시 59세에다 천성이 병약하여 30대 때부터 병치레를 했었기 때문에 사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대형제의 장남이자 황태자인 이주(李鑄)가, 일본의 내정 간섭에 강한 불만을 품은 개혁파였다는 것이다.
1939년이 되면서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국민당 정권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데다, 1939년 5월에 대형제가 결국 사망하게 되면서 아들 이주가 연호를 건고(建考)로 하여 즉위하자 일본 측에 요구에 대해서 한국이 강경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아지는 등[5] 제국의 전략이 흔들려가고 있었다. 이에 건고제가 장제스와 결탁하는 등 최악의 상황을 우려한 일본은 결국 대한(対韓) 정책이 급변하고 마쓰오카 요스케를 중심으로 한국을 직접통치하자는 강경파가 득세하게 된다. 심지어 마쓰오카는 석조전을 일거에 점령하고 한국을 병합해 총독부를 설치하자는 정신나간 주장을 하지만, 당시 실권자였던 도조 히데키는 통감부를 설치하는 선에서 정리하도록 한다.
1940년 5월 14일, 대형제의 1주기를 맞이해 한국에서는 추도 열병식이 열렸다. 이때 주한 일본군 사령관 미나미 지로(南次郎)는 도쿄에서 전달받은 명에 따라 바로 5.14 정변이라 불리는 무력 반란을 벌였다. 이때 한국 석조전, 제국의회 의사당, 행정각부가 일본군에 장악되었다. 특히 내무대신 박중양의 적극적 반역 행위로 한성 내의 군경이 일본군을 저지하지 않아 정변은 매우 손쉽게 성공한다.
미나미는 석조전을 일본군이 포위한 가운데 내무대신 박중양 등을 대동한 채 건고제를 영접하기 위해 나아갔다. 미나미는 건고제에게 소련의 위협을 역설하고 소련이 곧 한성으로 내려와 황실을 죽일 것이라는 위협을 늘어놓은 뒤, "대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는 논리를 펼치며 통감부 설치와 외교권 이양 등을 비롯한 한일협약을 강요했다. 건고제는 크게 반발하지만[6]박중양이 황제에게 일본만이 소련을 막을 강력한 열강임을 주장하면서 협박하자 결국 미나미의 주요 요구를 윤허했고[7] 기묘조약(제1차 한일협약)이 맺어져서 1940년 7월 25일 한국통감부가 초대 통감 미나미 지로를 필두로 출범한다. 내각총리대신에는 지일파 원로 윤치호가 선임되었다.[8]
태평양 전쟁
그러다가 미국은 일본의 한국과 인도차이나 점령을 지켜보고 더이상 참지 못한채 1941년 일본에게 석유 금수조치를 발령했다. 석유의 80%를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은 재앙을 맞닥뜨렸고, 이어서 미국으로부터는 한국 및 인도차이나, 중국에서의 일본군 철수를 요지로 하는 헐 노트를 받았다.
한편 이 당시 한국에서는 1940년 9월부로 전전시대 양당이던 일진협회와 대한민주당이 해산당하고, 민족충정회가 유일 정당으로서 서게 되었다. 1941년 10월 당시 미국과 일본의 전운이 고도되던 시기 한국에서 사민원 총선거가 치러졌고, 345석 중 321석을 민족충정회가 장악했다. 이때 일본의 개입에 의해서 대한제국 총리는 윤치호에서 친일 군인 홍사익으로 교체됐다.
이에 일본 역시 이를 일본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했으며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다. 진주만 공습의 결과에 따라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는데, 한국은 1941년 12월 12일 황제 건고제의 명의로 대 미영 선전포고를 전달했다. 일본은 한국에게 태평양 제도 공략을 위하여 한국군을 통감부가 차출할 수 있고 물자 공출권이 통감부에게 주어진다는 굴욕적 협약에 다시 서명하게 했다.
일본은 초반에 동남아를 점령하면서 승승장구하지만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과 1942년 8월 ~ 1943년 2월의 과달카날 전역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일본 군국주의의 끝도 다가오기 시작했다. 1943년이 되면서 일본의 불리함은 가시화되었으며 한국에 대해 더욱 강한 압박을 가하면서 민중의 드높던 일본 지지도 역시 점점 추락하기 시작했다.[9]
그러던 중인 1944년 5월, 일본 본국은 통감을 미나미 지로에서 아베 노부유키로 교체한다. 한성으로 온 아베에게 주어진 임무는 한국의 민심이 흔들리니 한국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당시 통감부가 지탄받던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이중과세였는데, 일본의 여타 점령지들에서 그러하였듯 한국 국민이 정부와 통감부에게 세금을 따로 내야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아베는 한국정부의 조세권을 박탈하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판단을 내려, 1944년 7월 5일 조세파동을 통해 한국의 조세권 박탈, 대신 통감부에 대한 조세를 증액하며 부수적으로 한국의 사법권을 박탈한다는 발표를 한다. 이는 4년전 기묘조약에 이어 2차 한일협약의 체결을 요구한 것이었다.
당연히 건고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격분하며 옥새를 찍는 것을 일시 거부했고, 황실회의나 요직에 배정된 종친들 대부분도 격노하며 반대를 외쳤다. 아베는 이에 사민원 의장 박중양을 만나서 일단 사민원 에서 의결하고 황제는 통감부에서 알아서 하겠다고 하여 1944년 7월 22일 한국 제국의회는 단 1표의 반대[10]표를 차이로 융일파의 의견이 통과, 제2차 한일협약을 추인하였다.
1944년 8월 2일 갑신조약[11]은 옥새를 위조한 가운데 맺어졌다. 총리 홍사익, 사민원 의장 박중양 등이 일본 천황의 대리인 일본통감 아베 노부유키와 함께 조약문에 서명하였다.
이제 아베는 즉위 이래 일본의 골칫거리였던 건고제를 감금시켜놓기로 결심하였고, 일본군을 이끌고 건고제를 잡으러 석조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석조전의 황제 집무실을 텅 비어 있었으며, 건고제를 보필하던 시종들 중 그 누구도 건고제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는 이가 없었다. 결국 갑작스레 발생한 이 "한국황제 실종 사건"은 일본 측에 있어서 딜레마로 떠올랐고, 어떻게 한국 내에서 황제의 실종에 분개할 신민들을 컨트롤하냐는 난관에 봉착한다. 그러던 중 박중양이 지난 한일협약이 통과된 이후 의원의 절반 이상이 재야로 물러나 사실상 거수기로 전락한 사민원에서 선거를 통해 건고제를 폐위하고 새롭게 덕있는 황제를 세워 일본 천황 폐하에 따르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달리 답이 없던 당시 한국통감 아베 노부유키도 이를 받아들였다.
내전
1944년 8월 23일, 한국 사민원 은 "유감스럽게도 주(鑄)[12]의 마음이 부덕하여 천하와 백성을 살피지 못하니, 군주로서 종통을 이을 자격이 없으므로 대한의 황제로서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골자로 건고제 폐위 결의문을 345명 중 333명의 찬성으로 가결시키고 이어서 중추원에서도 건고제 폐위를 의결하여 건고제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다만 이 폐위는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무효로 보고 있고, 1952년 한일평화협정에도 해당 선언은 황실회의 내의 과반수 이상의 황족, 황사와의 합의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무효임이 확인되었다.
이후 1944년 8월 29일, 폐위 6일 만에 건고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서경 평양부에서 한일동맹의 파기 및 대일 선전포고, 폐위의 원천무효를 천명하면서 현지의 군대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이것이 바로 한국 내전의 시작이였다.
드디어 황제가 모습을 다시 드러내자 이내 다급해진 일본은 빨리 괴뢰정권을 수립할 것을 획책, 후임 황제로는 까무러치게도 쇼와 덴노가 직접 대한제국 황제의 작위를 겸했다. 이는 박중양을 위시로 한 대신들이 한국 황제의 옥새를 배편으로 쇼와에게 봉납했다. 졸지에 반도의 군주가 되게 생긴 쇼와는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이내 형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에게 어느정도 설득을 받은 쇼와 천황이 이를 수락하여 "대일본제국 천황이자 대한제국 대황제"라는 일종의 이중제국 형태의 완전한 괴뢰국화였다. 1944년 10월 19일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한성을 대신해 도쿄 어소의 후원에서 간이 환구단을 쌓고 대한제국 황제의 작위를 쇼와에게 바치는 황제 즉위식이 거행됐고, 면류관을 쓴 쇼와는 "소화제 이유인"으로서 대일본제국 황제 겸 대한제국 황제가 되었다. 동시에 쇼와는 전주 이씨 가문의 종주로 추대되었으며, 때문에 천황과 황족이 성씨를 가지지 않는다는 오랜 규칙이 일시적으로 깨졌다. 이는 일본사에서 천황이 성을 가진 몇안되는 사례이기도 했다. 이 시기를 바로 대한 제2제국이라고 한다.
1944년 10월 26일 내각총리대신에 박중양이 지명되었고, 이어서 관동군이 대한식민령 남만주와 연해주를 공격함은 물론 본토 일본군도 상륙해 남부지방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반면 건고제가 이끄는 정통정부는 남만주와 남부지방 사이에 끼어 있었다.
이러한 대치 상황은 관동군과 남한파견군[13]도 건고제 지휘하의 한국군을 상대로 괄목한 진격을 하지 못하면서 대치가 이어졌다. 1944년 12월에는 대한제국령 연해주로 일본군이 입성했다. 일본은 한국령 남만주와 연해주에는 동북 군정청을 설립하여 직접 관했다.
1945년 4월, 미군이 오키나와까지 진격하기 시작하자 남한 파견군 일부가 오키나와 방위를 위해 빠지면서 제2제국 측은 위기를 맞았다. 반면 건고제에게 있어서 이는 기회로, 이때를 틈타 임진강에서 대공세를 단행하여 1945년 5월 27일 결국 제2제국은 부산으로 파천하고, 황성 한성부가 다시금 수복되었다. 그러나 북부의 관동군을 상대로 한 공세는 돈좌되었다.
1945년 6월 3일, 건고제는 한성에서 연합국에 대한 강화협상 요청 방송을 단행하고 연합국의 의지를 반영하여 전후 한국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사실상 미군에게 한국 점령이나 또는 일정 수준의 징벌, 본인의 권력 축소까지도 어느정도 용인한 것이었다. 1944년 8월의 대일 선전포고에도 불구하고 건고제는 공식적으로 연합국과의 전쟁 상태도 종식하지 않았었다. 엄밀히는 워싱턴과 교섭은 했으나 당시만 해도 동아시아의 군주제에 대해 부정적이던 미국이 황제제도 유지에 대한 답이 불분명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한성 수복 이후 미국이 한국의 군주제를 향후 인정하되 민주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전보를 보내자 바로 강화협상 방송을 내보낸 것이었다.
1945년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1945년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그리고 8월 9일 당일에 소련이 대일전개입을 선포하고, 일본의 만주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제국은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문제는 이때 소련군이 관동군 치하의 연해주는 차치하고 한반도 본토까지 침공하기 위해 밀고 내려왔다는 것이였는데, 소련 측의 논리는 아직 한국의 항복문서 서명이 없으므로[14] 여전히 추축국이라는 것이였다.
이때 한국 측에서는 소련군에 맞서 국토를 지킨다는 결의로 불타올랐다. 어차피 부산부에 주둔한 제2제국 정부는 본국이나 마찬가지인 일본이 사실상 사망한 이상 한국이 소련을 막는다고 뒷통수를 칠 능력도 없었기에, 이때 만주에 있다가 당시 나진에서 복무하던 20대의 장교 박정희가 압록강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치는 사이 증원부대가 도착, 소련군의 한국 침공은 함경북도의 극히 일부만 먹은 정도에 그쳤다.[15]이 소련군을 향한 분전으로 박정희는 유명인사가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자 위한정권[16] 초대 황제인 소화제인 쇼와 덴노가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한다. 제2제국은 전의를 상실하고 와르르 무너졌고, 박중양을 비롯한 제2제국 구성원들은 부관연락선[17]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약 11개월 만에 가장 괴상한 이중제국도 끝을 맺는다.
전후
1945년 9월 2일 일본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연합국 점령하 일본이 들어서게 되었다. 9월 9일에는 일본 건을 처리한 맥아더가 인천을 통해 상륙해왔고, 이내 한국은 그날 항복문서가 아닌 평화협정에 서명하였다.
한국의 영토는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압록강-두만강 이남으로 되었고, 미군은 한국군을 일단 육군 10만 명만 남기고 전역 조치할 것을 주문했다. 남은 군대와 경찰은 미군 대신 치안유지 일선에 투입되고, 한국군의 경우 조직은 고스란히 계승한 채로 반공일선의 육군으로 육성될 방침이었다. 한국의 장군들의 경우 제2제국 참여자들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섰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 중국이나 만주국에서의 전쟁범죄는 어느정도 묻어둔 채 직위에 유지시켰다.
민주주의와 황제권 축소와 국민주권 명시를 골자로 한 개헌, 근대화 이후 제정된 신분이였던 반족계급의 폐지를 통한 신분제 제거 등 사회개혁에 대한 요구도 담겼다. 그리고 한성에 주한미군 사령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1927년 이래로 불법화 당했던 무산정당들 또한 기회를 얻어 1945년 10월 21일 김일성의 대한공산당, 1945년 11월 17일 여운형의 대한사회당 등 무산자 정당들이 창립되었다. 반전, 반일 성향의 원로로서 말년에는 가택연금 중이던[18] 노장 이승만도 미군에 의해 1945년 9월 12일부로 연금이 해제, 그는 속출하는 좌익정당들에 맞서 한국 내의 우익을 대표하게 되었다.
1945년 12월 9일, 한성에서 이승만이 주도하는 대한자유당이 출범하였다. 자유당은 오늘날 민자당의 직계 전신으로서 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 정치의 중추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1945년 11월, 이승만은 건고제를 영접했는데 이 자리에서 건고제는 준동하는 좌익세력에 대한 대항마로서 이승만이 적합하다고 보았고 "경을 믿겠소"라는 정치적 중립을 아슬아슬하게 지킨 한마디로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1946년 3월, 소련군이 함경북도에서 철군했다. 소련군은 나진 및 그 일대에서 학살이나 강간 등을 벌였고, 만주국과 대한식민령 남만주에서 끌려간 일본인이나 한국인에 가려져서 그렇지 여기서도 약 수천 명이 시베리아로 끌려가 노역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1956년 일본과 한국이 공동으로 소련과 국교를 회복하면서야 돌아온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도조 히데키 등 일본, 그리고 박중양이나 홍사익 등 한국 전범들이 법정에 섰다. 이 자리에서 일본의 여러 전범들이 이곳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것과 비교해서 박중양을 위시한 한국 전범들은 건고제가 한국에서 재판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결국 1946년 5월 도쿄에서 한성으로 송환결정되었다. 박중양은 1946년 5월 12일, 고지마치구의 일본이 제공한 저택에서 음독자살했다. 그의 나이 74세. 박중양의 유언은 "앞으로도 일한의 우호는 대한민족을 위해서 반드시 목표가 되어야 한다."였다.
홍사익은 송환 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1946년 5월 전후 첫 사민원 총선은 총 345석 중 이승만의 자유당이 181석을 얻어서 무난하게 승리했다. 그러나 사회당(113석)이나 공산당(27석)의 무시할수 없는 세력은 한국정치의 불안함을 더하게 되었다. 더해서 이승만은 전후 첫 총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1948년에 대한제국 국제가 성립되면서 한국은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시하기 시작했고, 1949년 미군이 한국의 점령을 종료했으나 같은 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주한미군의 영구주둔과 기지 제공을 허용하였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특수지위국에 분류되었다.
1950년대
그러는 동안 1946년부터 재개된 국공내전은 지리하게 전개된 끝에 1950년경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중화민국은 크게 밀려나 난징, 상하이를 비롯해 동남지방을 겨우 지킨 채로 방어라인을 쳤으며, 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에 나섰다. 중공은 1950년 춘계 대공세를 단행했지만 난징 사수에 대한 국민당 측의 강력한 의지와 험난한 동남부 중국의 지형에 이기지 못하고 1951년에 양자가 휴전협상을 체결했다.
한국과 일본은 국공내전에서의 공산당의 우위로 인해 특히 미국의 입장에서 강력한 공산주의에 대한 기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이에 미국은 1952년에 일본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재무장을 요구하고, 이어서 한국의 이승만 총리에게도 45년 이래 10만으로 제한된 군 병력 제한을 해제하겠다고 통보했다. 또한 미국의 한일 양국에 대한 경제원조는 덤이었다.
1952년에 한일평화협정이 조인되어 양국 국교회복, 일본의 피해보상금 제공, 건고제 폐위 무효의 건 등이 합의되었다. 이때 건고제가 도쿄로 쇼와 덴노를 만나러 갔는데, 두 사람이 겉으로는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악수하며 대화한 일화는 유명하다.[19]
1950년대 한국의 경제는 괴뢰정권의 관리하에 있었던 탓에 그나마 보존된 남부지역의 산업 기반을 거점으로 해서 북부지역 산업을 복구하고, 상당 부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경제성장은 이승만의 친미드라이브로 미국의 신임을 얻자 성과는 나왔다. 1946년 16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56년에 289달러로 증가하였다.[20]
군사적으로 대한 국방군은 이승만의 주도로 병력을 10만명에서 30만 명까지 늘리게 되었다. 이승만은 1957년의 연설에서 소련이 12년 전 감행한 한국 침공을 잊지 않고 있다는 언급을 하면서 반소 기치 아래에서 한국이 군사적 역할을 하겠다는 야망을 드러냈다. 또 이때부터 사민원이 곧 징병제 법안을 통과시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등장 국가
북소리 종소리 온 나라에 진동하니 바로 이곳이 삼한의 만세 터전이네 -한 태조 고황제, 열성어제(列聖御製) 中 |
동북아시아 한반도에 위치한 국가이자, 세계의 마지막 제국. 정치 체제는 입헌군주제, 양원제를 채택했다. 일본의 압박 때문에 대 미영 선전포고를 감행하지만 1944년 8월부터 내전으로 추축국에서 이탈하여 일본, 만주국과 교전한 탓에 패전국은 아닌 특수지위국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맥아더를 위시로한 미군의 점령기(1945~1949)와 대대적 개혁, 그리고 수십년에 걸쳐 개척한 남만주와 연해주의 상실, 반도로의 축소는 피할수 없었다. 종전 후 한성으로 돌아온 건고제는 맥아더와의 단독 협상으로부터 제국 칭호의 유지와 국체 유지를 조건으로 갖가지 민주주의 시책을 수용해, 1948년 흠정대한국 국제 대신 대한제국 국제가 성립되었다.
전후에는 이승만이 주도하는 대한자유당이 1960년까지 집권하며 친미, 반소의 기치 아래 재건에 나섰다. 내전으로 인해 국토 곳곳이 파괴되어 있던지라 이때 한국의 사회는 큰 격변을 맞이했다. 1952년 일본과 한일평화협정을 통해 1944년 건고제의 대일선전포고 이후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는 한편 경제정책을 주로 나선다.
하지만 이승만의 지나친 독선, 징병제 부활 등 공산주의에 대한 첨병이라는 지위를 이용한 군사국가화 도모로 인하여 국민의 반발을 사고 1960년 4.19 안보투쟁을 계기로 이승만은 실각, 대한사회당의 조봉암이 집권하였다. 그러나 60년 총선에서 부상한 극좌 정당 대한 사회민주당은 자유당과 사회당 모두에 위협이 되었고, 1962년 대연정을 통해 사회당의 조봉암과 자유당의 장면이 당을 하나로 합하여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1963년 총선을 앞두고 사민당의 시위가 거세지자, 상대적으로 우익 지지층에서 인기가 없는 조봉암 총리를 대신해 내전시 근황파로 활약하고 소련군의 침공을 저지한 이력이 있는 박정희 대장을 민자당이 영입하면서 총선에서 압승했으며 이후 박정희가 1977년까지 3선 총리를 지낼 때 한국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적 성장을 이룩한다.
현재는 대략 원역사의 대한민국보다는 조금 더 높은 1인당 GDP에 인구 8천만 명을 갖춘 선진국이자, 이탈리아보다는 한 계단 위인 강대국의 말석에 들어섰다. 현 내각총리대신은 황교원.
기뻐하다가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든다.덧없는 세상 꿈은 새벽하늘과 같네. 먼저 떠나든 뒤에 남든 결국 같은 것. 함께 갈 수 없는 것을 이별이라 생각하네.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세구(辭世句) 中 |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대일본제국이 해체되면서 만들어진 일본의 체제. 정치 체제는 입헌군주제, 양원제를 채택했다. 1955년 창당된 자유민주당과 1964년 창당된 일본공명회의 양강 체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 안보투쟁 이후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풍이 커지면서 세계 유일의 직선총리제 국가로 거듭났다.
그 외 외교적으로 큰 차이점이 있다면 한국과의 관계가 우호적인 편이라는 것으로, 양국의 악연이 1940년에서 1945년의 5년이 끝이었고 그 이전엔 대중국 전쟁부터 시작해 협력 관계였기 때문에 크게 서로에게 악감정이 없다. 일본에서도 한국 점령기에 대해선 나름 사과를 하는 편이다. 한일 수교가 1952년에 되었으니 당연한 수준. 다만 쇼와천황과 건고제의 악연은 나름 재미있는 요소였다. 둘은 각각 1989년, 1987년에 죽었다.
경제적 위상은 원역과 비슷하다. 1인당 국민 소득으로 따지면 한국보다 약간 낮지만 인구가 더 많아서 아시아 내에서 강력한 경제대국이 되어 있다. 현 내각총리대신은 자유민주당의 기시다 후미오.
설사 이 몸이 북쪽 에조(蝦夷)섬 땅끝에서 썩을지라도 내 혼만은 저 동쪽의 주군을 지키리. -히지카타 토시조 |
미국이 세운 '분열된 조국'계획에 따라 사할린에 세워진 국가. 정치 체제는 대통령제, 단원제를 채택했다. 수도는 도요하라 특별시(현실의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위치해있고, 관동국에서의 한민족과 같이 이곳 화태에서는 일본인이 주요 민족이다. 일본에 대한 귀속의식 때문에 미국에서는 화태를 그냥 둘 경우 일본으로의 복귀를 우려하였고 미국의 방관아래 화태 막부정부시기라 불리는 독재정이 감행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1987년 화태 민주항쟁때까지 40여년간 이어지게된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어느정도 화태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생기기는 했어도 자신들을 "일본계"라고 여기는 것 자체는 명확하다. 사실상 일본과는 미국 때문에 통합을 못하고 있는 사이이다. 인구는 약 270만명. 경제적으로는 약 2만 달러의 국민소득을 가져서 원역의 한국, 일본보다는 현저히 낮고, 인구가 많은 중화민국과는 그나마 격차가 조금은 비등비등하나, 몽골을 제외하고 최저 1인당 경제력을 가진 관동국보다는 높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불모지에 가까운 가라후토 지방의 특성상 인구가 특정 지역에만 과잉되는 현상이 빈번하고, 이 현상이 더 나아가서는 인프라와 인력의 분배가 전부 대도시로 밀집되는 등의 사회문제, 일명 '도요하라폴리스'라 불리는 도시의 인구과잉현상이 심한 편이다. 현임 대통령은 일본계 화태인인 에다노 유키오.
혁명(革命)은 만찬(晩餐)도, 수필(隨筆)도, 그림도, 한 폭의 자수(刺繡)도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서서히, 조심스럽게 앞뒤를 가리며 점잖게 순순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마오쩌둥 |
국공내전 끝에 중국 공산당이 중국 북부의 전 지역 및 대부분의 타 지역들을 차지해 세워진 국가. 정치 체제는 사회주의, 일당제를 체택했다. 대체로 영토가 조금 작은 걸 빼면 원역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위구르와 티베트는 중국에게 병탄된 상태이고, 동남지방에 할거하는 중화민국을 강력하게 압박하는 위치에 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도 일어났다. 문화재는 국민당이 지배하는 지역보다 중공 치하의 북경을 비롯한 화북에 압도적으로 많았던 탓에 상당수가 소실됐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집권한 이후 중화민국에 대한 무력 통일 방침을 폐기하고 미국, 일본, 한국 등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엄연히 대륙에 존재하는 탓에 굳이 공산당 치하의 중국으로 원역처럼 많은 투자가 모이지는 않았고 결국 개혁개방은 그럭저럭한 성과만 거두어 소득수준은 대략 태국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막대한 인구수와 대륙에서 나오는 자원을 이용해서 독일을 뛰어넘는 세계 3위의 경제대국으로서의 자리는 확보할 수 있었다.
상임이사국 진출 역시 중화민국이 난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서방은 굳이 중공에게 상임이사국 승격을 시키지 않았다. 다만 1978년에 유엔 가입에는 성공하고 승인국이 되기는 했다. 그와 별개로 양안관계는 아직도 상호 미승인 상황이다. 현 주석은 시진핑.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망국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한다면 중국인은 노예로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장제스 |
국공내전 끝에 중국 국민당이 대만, 난징 등 동남 지방의 일부 영토를 차지해 세워진 국가. 정치 체제는 공화제, 이원집정부제를 체택했다. 국공내전은 잠정적으로 패배하여 동남지방에 할거하는 신세가 되었으나, 난징과 상하이를 어떻게든 사수하여 대륙에 거점만은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2024년 현재에도 중국의 정통 정부로서 국제사회에 인정받고 있다. 이 때문에 홍콩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으로 반환이 되었고, 지리적인 이유를 들어 일국양제제도는 도입되었다.
정치는 1975년까지 장제스의 일인독재 체제였다. 대륙에 교두보라도 남은 상황이라 본토수복은 원역처럼 꿈같은 얘기는 아니었고 이에 따라 장제스의 권력은 더욱 굳건했었다. 대약진운동 시기에 실제로 국광작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5년 장제스의 사망 이후로 아들 장징궈가 세습으로 1988년까지 집권한다. 그러나 장징궈의 자유화 정책에 힘입어 난징에서 중산문 운동이 벌어지자 정부가 계엄령을 통해 강력 진압하기도 하나 결국 국민에게 굴복하면서 민주화에 동의했다.
오늘날엔 상하이, 홍콩의 국제금융과 서방의 지원, 장제스 시기에 이루어진 개발독재 덕에 세계 경제력 8위로서 대략 화태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은 국민 소득을 가졌고, 한국이나 일본과는 협력기구를 만들어 교류하는 중이다. 상하이라는 국제도시를 가졌다는 점과 여러 이유들이 합쳐져서, 해당 기구에서 굳건한 중재자 및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나라의 외무장관이 평화 협정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고 말한다면, 그 시간에 본국에서는 최신 군함과 전투기들을 만들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오시프 스탈린 |
소련이 무너지고 난 뒤,옛 소비에트 구성국들과 러시아를 합쳐져 세워진 국가. 정치 체제는 대통령제, 단원제를 채택했다.
나는 곧 '만주'이며, 너는 곧 '후룬'이다. 너의 나라가 크다 해도, 내 어찌 취하겠는가? 내 나라가 넓다 하여도, 너 어찌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청 태조 고황제 |
미국이 세운 '분열된 조국'계획에 따라 구 대한식민령이었던 남만주 지방에 세워진 국가. 정치 체제는 입헌군주제, 단원제를 채택했다. 만주국 심양에서 체포한 푸이를 그대로 관동국 황제로 옹립했다. 수도는 묵던특별시.
푸이를 기점으로 1967년 ~ 1994년에 아이신기오로 푸제, 그리고 1994년부터 아이신기오로 푸위가 황제로 있다. 관동국은 이미 남만주의 정체성이 중국과 분리되어 있다는 명목으로 독립되었는데, 사실은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대부분 대륙을 장악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이 인위적으로 만든 국가이다.
민족구성은 한국인이 40%, 한족이 약 45%, 그리고 만주족 등 나머지 민족이 있다. 경제적으로는 동아시아국가들 중에서는 꽤 가난한 편인데, 어디까지나 관동국의 지리학적인 존재 이유는 중국 공산당을 겨누는 미국의 대전략에서 한국의 '방패'로서 기능하기 때문.
다만 마셜정책으로 경제적인 원조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닌데다 만주,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유라시아 철도 덕에 세계 기준 약 16위에 달하는 GDP를 보유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반작용으로 부의 배분이 철도를 통해 이득을 볼 수 있는 상류층에 몰린지라,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등의 사회문제가 부상하고 있다. 인구는 약 1,600만명.
여담
제목인 광목성대(廣木聖代)는 대한제국의 표어인 광명천지의 빛 광(廣), 조선의 시 '뿌리깊은 나무' 에서 따온 나무 목(木), 마지막으로 태평성대의 성대(聖代)를 조합해서 만들었다. 광목의 경우, 경우에 따라선 늘상 외세의 침략이 잦은 한반도에서 이민족을 대상으로 한 전쟁이 많았듯, 불교에서 악귀들을 상대하는 광목(廣目)천의 앞글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커피와 사탕이 관여한 작품들 중 마지막으로 대한제국이 주인공 국가가 될 세계관이다. 이후부턴 등장하더라도 특별히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않을 예정. 물론 Destiny634에게는 첫 번째 대한제국 기반 세계관이기도 하다.
본 세계관 내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1940-52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언제나 우호적이었던 역사를 가졌다. 이 때문에 한일관계는 매우 양호한 편이며 욱일기를 단 일본 해자대 군함이 좌독기를 단 대한해군과 함께 중국에게 시위를 하는 모습도 흔하게 볼수 있을 정도. 다만 일본이 5년간 한국을 사실상 지배하면서 여러가지 깽판을 친건 사실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 정도는 이루어진 상황이다. 다만 연해주를 한국에게 넘긴 것에 대한 문제는 일본과 한국 양국의 학계에서 나왔다 하면 뜨거운 감자가 되는 대화주제인데, 영토를 확장한게 결과적으로 일본이 한국에게 양보한 것인지, 아니면 한국이 일본한테 관리비용에서 나오는 빚을 떠넘겨받은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
하지만 일본 극우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평가는 나쁜 편이다. 박정희 이후로 한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부상한 것에 대한 열패감, 또는 한국은 제국 칭호를 아직도 가진 것에 대한 열패감 등 질투의 감정이 주를 이루며, 또 한국이 전쟁을 제대로 돕지 않아 중일전쟁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한국 극우들의 경우도 일본에 대해서 평가가 심하게 갈리는데, 대전기동안 애시당초 만주를 협력의 대가로 넘길 생각이 없었다는 점에 대한 분노와 사실상 블라디보스토크를 제외하면 쓸모가 미미한 수준인 프리모예를 독박씌우듯 떠넘겨 결과적으로 경제적 불황을 초래해 괴뢰국화를 시도했다는 사실에 몇십년동안 기획한 국제적 배신이라며 분개하는 여론과, 어찌 되었든 일본을 등에 업어 영토를 확장하고, 군부가 집권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견딜만하지 않았느냐며 애써 이를 무시하려는 여론으로 갈린다.
본 세계관은 일종의 실험용 세계관이기도 하다. 언어적 고증, 전개적 재미를 위한 실험을 위해서 만든 세계관이기도 한 셈.
- ↑ 물론 실제 한국의 국력은 상위 중견국 정도였다.
- ↑ 영종실록(대형제의 묘호)에 따르면, 대형제 역시 볼셰비키 혁명과 러시아 황실의 참혹한 최후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가졌고, 특히 일본이 농민이 혁명의 주역이 될수 있다고 경고하자 더욱 두려워하여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것에 가깝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의 국보법은 일본 치안유지법보다도 더욱 강경했다. 애초에 조항 수부터 7조 짜리인 일본과 다르게 한국은 총 19조였다.
- ↑ 이 조치에 대해 일본은 지나사변에 따른 임시 대여 개념이라고 주장했으며, 중국을 제압한 뒤에 한국에 넘겨줄 것이라고 단언했다.
- ↑ 사실 친일이라기보다는 딱히 일본을 제지하지 않는 방관의 입장에 가까웠다. 애시당초 대형제의 아버지였던 성무제는 최소한 기록에 따르면 일본을 상시 경계하는 동시에 이익을 위해 손을 잡는 모습을 보였으니, 정확상 대형제에게도 일본을 어느정도는 경계하라 일찍이 교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 ↑ 처음엔 동원령 등에 반대하거나 만주 내에서 일본의 비중을 줄이라는 등의 요구를 간간히 보냈고, 심한 경우에는 마음에 들지 않은 몇몇 인사들에게'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 담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공신석상에서는 마치 이중인격이라도 되는것마냥 선대 황제와 별 반 다를 게 없어보이는 태도를 유지했다.
- ↑ 경의 나라는 대한과 친교를 맺은 지가 70년이 되어 가는데, 어찌 이리도 무도하게 벗의 나라를 짓밝는가!?
- ↑ 다만 이조차도 와신상담한 게 아니였냐는 의견이 최근엔 강세다. 훗날 건고제의 행적을 살펴보면 전혀 틀린 추측이 아닐수도 있다.
- ↑ 박중양이 아닌 이유는 일본 입장에서 적당한 지일파 인사를 총리로 세우는 것이 한국 민심에 좋았기 때문이다. 다만 1944년 한국 내전때 박중양은 결국 대한 제2제국의 총리로 채택된다.
- ↑ 심지어 통감부 설치 때까지도 한국인 반수는 일본에 우호적이거나 최소한 전쟁이 끝나면 나아지리라는 입장이였고, 태평양 전쟁때는 정부의 대미선전포고에 대해 프로파간다를 벌였지만 일본의 전세가 불리해지고 수탈과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민심이 떠났다.
- ↑ 이후에 여운형 의원으로 밝혀진다.
- ↑ 공교롭게도 60년 전 한일우호의 시작이 된 갑신정변과 정확히 한 갑자를 돌았다.
- ↑ 건고제의 휘
- ↑ 남부 한국에 파견된 군단
- ↑ 이탈리아와는 달리 한국은 항복을 선언했어도 주변이 다 일본의 점령지였던지라 항복문서를 받을 길이 없었다.
- ↑ 독소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소련은 여기에 공업도시인 나진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은근슬쩍 합병하려고 했으나 미국에 의해 제지당하고 1946년 3월 철수한다.
- ↑ 현대 한국에서 대한 제 2제국을 부르는 명칭이다.
- ↑ 부산 - 시모노세키 간 연락선. 현재는 비행기가 상용화되어 사라졌고 1980년대까지는 운영했다.
- ↑ 한성이 수복되자 제2제국 정부는 이승만을 다시 부산으로 끌고간다.
- ↑ 물론 건고제든 쇼와든 속으로는 상대를 매우 껄끄러워하고 있었다. 황제들의 처세술이라고도 볼수있는 부분.
- ↑ 1956년 일본은 423달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