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마 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주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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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마의 정치인. 개마공민공화국의 유일 여당이었던 개마 노동자당의 서기장 대리로 1977년부터 1980년까지 3년간 재임했다.
생애
서기장으로서
1977년 9월 15일 천우봉 서기장이 위급한 상태에 빠져 공무를 수행할 수 없자 개마의 총리였던 그가 대리로 서기장 직을 맡게 되었다. 본래 그는 6개월만 임시로 서기장 대리를 맡기로 되어있었으나, 천우봉의 소련 독살설이 퍼지고 개마 노동자당 내의 친소파가 당내 친중파의 거두였던 천우봉 서기장의 사후 그 지분을 넓히자 이를 막기 위해 긴급 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친소파 당원들을 숙청하였다. 명목상 불온 사상을 가진 사상가들을 체포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개마 노동자당 내의 친소파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이 가장 크게 탄압당했다. 이 시기 사망한 인원만 무려 3만명이 넘는다고 추정된다. 자세한 것은 개마 노동자당 숙청 사건 참조.
하지만 국민들에게는 별 인기가 없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숙청을 통해서 공포감을 조장해 국가를 숨막히는 경찰 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1970년대 말 개마에 불어닥친 불경기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물가 상승률이 폭등했고 이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았음에도 박근조 서기장은 이를 우파 폭동으로 여기고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는 1980년 7월 반정 당시 일부 시민들이 쿠데타군에 동조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8월 반정과 실종
1980년 8월 5일, 친소파 장군들은 박근조 서기장과 친중파들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이를 개마 8월 반정이라고 한다. 쿠데타는 명목상으로는 친소파가 많았던 개마 인민방위군의 주도 하에 이뤄졌으나, 사실상 박근조로 인한 친소파 절멸을 우려한 소련이 쿠데타군을 지원하여 이뤄진 것이며 실제로 소련 붕괴 이후 비밀 문건이 드러나며 경제적 지원은 물론이고 일부 소련군이 쿠데타군으로 위장하여 쿠데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친중파 대부분이 숙청당했는데, 정작 박근조 서기장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8월 반정으로 집권한 천도현 서기장은 박근조 전 서기장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가 개마를 중공의 위성국으로 만드려는 음모를 진행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그 누구도 박근조 서기장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반정 도중에 박근조 서기장이 총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도현 서기장이 친중파 대숙청과 국민 공포심 조장을 위하여 이를 감추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나돌았다.
그런데 2017년, 현재는 개마의 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구 서기장 관저를 개보수할때 지하 1층에서 시작되어 청진시 외곽까지 연결되는 기다란 지하 통로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박근조 서기장이 이 비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는지 아닌지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1923년생인 박근조 서기장이 현재까지 살아있다면 97세인만큼 살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나 2000년대 초까지 도쿄, 오사카 등 일본의 주요 도시에서 박근조와 비슷한 모습을 한 개마인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나왔기 때문에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게 아니냐는 추측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