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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앙피르 Le empir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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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쿠스 카드메우스 드라코(Akus Cadmeus Draco) 아코스(ἄχος) | ||||||
국적 | 프랑스 제3공화국 | ||||||
거주지 | 프랑스 제3공화국, 베르사유 궁전 | ||||||
사망 | 1936년 9월 18일 | ||||||
프랑스 제3공화국, 베르사유 궁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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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르앙피르는 베르사유의 용에서 이르는 용으로, 프랑스 식민제국과 운명을 같이 한 용이다.
젊은 시절에 대하여 많은 기록은 남아 있으나 많은 부분이 신뢰할 수 없으며 교차검증되지 못한 점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프랑스 식민제국의 성장이 거듭할수록 구체화되며 르앙피르는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판매하기 전까지는 그의 동료였던 점 등으로 역사에 얼굴을 비친다.
결국 르앙피르의 죽음 직후 프랑스 식민제국의 명목상 붕괴가 이루어진 점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후대의 역사가들은 평했다.
역사적 의의
르앙피르는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그가 스스로 칭한 제국이라는 이름은 이후로도 파시즘이나 다양한 확장주의 정책을 비난할 때 사용되며 해외에서도 유사하게 이용된다.
영국의 에릭 아서 블레어 또한 이러한 언어를 통해 비난받았으나, 그는 르앙피르의 행위는 객체와 같이 특정한 국가, 단체, 개인에 대해 중심된 식민적 정책이며, 세계시민주의의 목적성은 각각의 개인이 형제애적 단결을 숭상하는 프랑스 혁명정신에 가까운 것으로 일컬었다.
즉, 르앙피르의 행위는 상호간의 거래가 아닌 일방적 착취이며 이러한 것을 통해 이득을 얻는 대상이 하나인 동시에 상호간에 애정을 갖지 못하는 삭막한 도시화된 체제를 일컬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일생
유년기
갈리아의 군인
수아송 왕국
샤를마뉴와 함께
프랑스의 실세
베르사유의 용왕
영향
르앙피르가 프랑스에 미친 영향은 분명히 나쁜 점도 있으나 다양한 장점과 단점이 혼합되어 있다. 르앙피르는 프랑스 금본위제의 기반이 되어 국가를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였고,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을 조정하는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더욱이 베르사유의 화려한 모습은 르앙피르와 그의 회의가 추진해 이룩된 결과물로, 현재 프랑스 베르사유에 갔을 때 관광상품의 대부분은 르앙피르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더욱이 나폴레옹의 확장 정책에 대하여 르앙피르의 영향력을 크게 보는 쪽과 작게 보는 쪽이 대립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르앙피르가 없었다면 러시아에 진입하기도 전에 실패했으리라는 것이 통설이다.[1][2][3]
특히 프랑스 식민제국의 경우, 르앙피르의 초기 재산 축적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동시에 돈 잡아먹는 식민지이기도 한 것을 르앙피르의 개인 재산을 통해 버티기도 하였다.
프랑스 왕국시절에도 국왕들의 경제적인 성공에는 전부 르앙피르의 협력이 있고 실패에는 비협력이 있었을 것으로ㅜ자주 파악하며, 현대 프랑스 교육에서는 서술하지 않으나 프랑스 혁명에서도 르앙피르의 영향이 크게 나타났던 것으로 파악한다. 즉, 르앙피르는 왕을 쫓아내기 위해 했던 행위가 결국 자신에게까지 돌아온 것으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