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

RAMBO1969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10일 (일) 21: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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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연방공화국 대원수
조형
趙亨 | Cho-Hyung
시호 天虎
출생 1914년 8월 24일
광성도 광산구
국적 광성민국

광성황국
잼민족

사망 2010년 8월 1일 (향년 96세)
신경현 부석군
임기 광성연방공화국 대원수
2010년 8월 11일
광성민국 대통령 권한대행
1997년 7월 2일 ~ 2000년 4월 2일
광성황국 총리
1996년 6월 26일 ~ 1997년 7월 2일
광성 연방군 합동참모의장
1991년 1월 1일 ~ 1995년 12월 3일
광성 연방군 공군참모총장
1985년 10월 16일 ~ 1991년 1월 1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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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아들 조령
본관 배천 조씨
학력 미국 보병학교 고등군사과정(OAC)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 졸업
종교 카톨릭(세례명:베드로)
소속 정당 보수연합당
성향 중도 보수
임관 공군사관학교 (1기)
복무 광성 연방군
1949년 7월 28일 ~ 1995년 12월 3일
최종 계급 대원수(광성 연방군)
최종 보직 광성 연방군 합동참모의장
주요 보직 주월광성군사령관
공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별명 람보
약력 한국 전쟁 참전
베트남 전쟁 참전
대남 국지전참전
서훈 연화대훈장
국가영예훈장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
미합중국 레존훈장
미합중국 동성훈장
중화민국 은휘훈장
남베트남 최고훈장
외 5개


개요

광성연방공화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베트남전 당시 파월 광성군 사령관으로 유명하다. 비교적 덜 알려져 있기는 한데 사실 한국전쟁 당시 공군 장교로 참전하여 북한군 점령지를 돌며 폭격을 펼쳐 전과들을 다수 올렸다. 이때의 전공과 경험들은 국군 전사 연구나 실전 사례 교육에서 비중이 높게 다뤄지고 있다.

주월광성군사령부 설립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자 주도자이다.

그리고 군인 시절 절대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됀다." 라는 정신을 몸소 실천하여 언론을 포함한 많은 시민들의 호감을 샀다. 이후 총리로 취임한 후 문민통제를 실현하는 것에 가장 앞장섰다.

광성군 역사상 최초로 대원수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영구제명되었다, 다시 대원수가 된 유일한 인물이다.

생애

공군 장교

1949년 공군사관학교 입학하여 1951년 8월 5일에 첫 졸업및 임관하여 공군 장교로써의 삶을 시작한다. 임관 직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이미 광성은 전투부대 파병을 실시하던 터라 당시 조형 소위도 파한을 가게된다. 본인의 회고록 '한국전의 기억'에서는 이때가 자신의 삶, 그 어느때 보다도 긴장되는 순간 이었다 회고하고있다.

내가 임관한 첫 해인 1951년에는 이미 광성군은 한국전 발발로 다들 파한을 가던 터였고, 그때 내 첫 부임지를 확인해 보니 '부산'으로 적혀있었다. 나는 그때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이 주마등 처럼 스쳐가며 식은땀이 흘렀다. 들은 바에 따르면 한국은 현재 공산세력의 파상공세로 패배 직전에 내몰렸고, 거기 가면 다 죽는다는 것을 이미 한차례 소문으로 들었기 때문에 나는 한국행 배를 타던 그 순간에도, 단 한순간도 긴장을 풀어본 적이 없다. 부산에 도착하고 한국전이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갈때 비로서 "살았다"라는 감정이 들었다." - 한국전의 기억 p91

한국 전쟁

비행장 방어

1951년 12월, 최전방 속초리비행장에서 근무도중, 불시 북한군의 비행장 기습 공격으로 인해 육군지원 없이 비행장을 방어를 해야할 상황에 놓이자, 당시 조형 소위는 비행단원들을 긴급 소집하고 북한군 약 2개 연대를 긴급 소집된 총기만 소지한 사병과 일부 파일럿을 동반하여 각각 비행장 북측과 서측 방면에서 진군하는 북한군 11연대와, 2연대를 단 1개 중대급 병력으로 각개격파하고 이후 긴급이륙한 아군 공군기에 의해 상황을 정리하였다. 이 일로 대위로 2계급 특진을 받고, 그 용맹함과 노고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을 서훈 받았다.

북폭 편대 편대장

1951년부터 1953년 정전협정 까지 휴전선 인근 격전지와 아군 지원임무, 북한군 주요 점령지와 주요 시설 및 거점을 타격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실제로 기록된 바에 의하면 당시 편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북폭 편대를 이끌고 휴전선 인근과 그 이북으로 약 97 가량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기록되있다. 작전 성공률은 80%에 육박하였다. 당시 조형 대령은 그 노고를 인정 받아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을 서훈 받았다.

베트남 전쟁

월남 파병이 결정되면서, 1개 중대급 병력으로 게릴라전을 펼쳐 2개 연대를 격파한 경험이 있고, 무엇보다 한국 산악지역에 능숙하며 공군 지휘관으로써 식견이 넓을 것이라는 정부의 결론으로 적임자로 판단되어 파월 광성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본인이 육해공 장성들 가운데 월남 파병을 아주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에도 있다.

1961년 즈음 조형 당시 소장은 파월 광성군 사령관으로 내정 되어 미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과정 졸업 및 미육군지휘참모대학을 졸업으로 어느 정도 육상전 교육을 받고 이후, 미 육군 장성들의 성향을 파악하여 미군 지휘부와 담판에서 많은 양보를 얻어내어 한국군 복지 지원 확보, 전투장비 신형으로 교체, 지휘권 확보 등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조형은 과거 한국 전쟁에서 게릴라전을 맞붙은 경험을 살려 신형전술기지 연구하고, 광성군 전술교리 개발를 통해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또한 베트남의 독립 전쟁사를 꼼꼼히 검토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명분이 매우 약하며, 오히려 월맹군측이 민족 지도자 호치민의 지도 하에 "독립전쟁"을 벌이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걸 포착, 라인코리아 총리에게 "미국의 공식 요청 하에 파병을 결정"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중을 기울였어도, 역시 명분약한 전쟁에 끼어드는 걸 반대했던 야당의 공세에 밀려, 결국 날치기로 파병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야당 의원들 역시 일단 파병이 결정 된 후에는 박고담 의원을 필두로 한 주요 인사들이 위문을 와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정현모의 경우는 대권 잠룡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가 "광성군은 용병"이라 비난한 데 대해 "우리 장병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다고 믿고, 현지에서 고투를 치르고 있다."고 반박해 에드워드 케네디의 사과를 받아냈다는 후문.

베트남전쟁은 사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세력의 독립전쟁이라는 인식은 당시 라인코리아의 최측근이었던 김페잇 보수연합당 국회의원조차도 공개적으로 떠들고 다녔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해외에서도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대다수의 미국동맹국들도 베트남 파병을 거부했고, 그래서 광성군의 파병이 그만큼 미국한테는 중요했다.

이 베트남 전쟁 전후를 다룬 책 '월남전의 기억'이 있다.

내 인생에 있어서 한국전 참전과 월남전 참전은 큰 의의를 가진다. 그 중에서 나는 월남전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자 광성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가난에 찌들어 살던 광성을 구원하였고, 피흘려 싸운 대가로 우리 국민이 성장할 기폭제를 마련해 주었고, 대외적으로 광성의 지위를 상승 시켰으며, 자유의 성군(聖軍)으로써 최선을 다했음을 전세계에 알려주었다. - 월남전의 기억 p113

광성 연방군 전용 전투식량 요구

미군의 C레이션은 무엇보다 동양인 입맛에 안맞는다. 1965년 파월 초기 한국군도 겪었던 문제다.[1] C레이션의 음식은 너무 기름지고, 동양인의 담백하고 고 탄수화물 식단에는 맞지 않아 조형 사령관은 미군에 강력하게 광성형 전투식량을 개발과 연구에 도움을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주장은 미군 지휘부에서 결국 승인하여 광성에 전투식량 공장을 건설하여 이득을 보기도 하였다.(이는 조형 사령관 본인이 의도한 바도 있지만 주변 참모들의 주된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공군 전투비행단 증파

내가 공군 지휘관으로써 속초리비행장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기습에 대응할 때, 공군의 부재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체감 했다. 만약 내가 북한군과 전투할 때 우리 공군기가 조금만 늦게 이륙했더라도 나는 이미 전사하여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월남의 지형또한 한국과 유사한 바, 라인코리아 총리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내 1개 공군 전투비행단을 증파해줄 것을 요청했다. - 월남전의 기억 p203

공군 지휘관 출신으로서 앞으로 제공권 장악과 공중지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이였기에, 이후에 정부 승인으로 제 8전투비행단[2]월남 공군지원단이 도착하여 대민지원과 아군과의 연합작전으로 많은 전공을 올렸다.

독자 지휘권 확보

조형 사령관은 광성군이 미군사령부 예하부대로 배속된 것을 보고,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일단 주된 이유는 현재 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있으며 작전 방식또한 문제가 있다는 것 이였다. "만약 우리가 미군에 배속되어 미군의 지휘를 받는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는가? 미군은 우리를 위험한 곳에 몰아넣고 방패로 삼을 것이다."[3] 이러한 판단으로 미군 지휘부에게 조형은 광성군의 독자 지휘권을 강력 요구하였고, 결국 독자 지휘권을 확보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만약 광성군이 미군의 배속을 받았다면 주월광성군사령부주월광성군전사의 공식 전사자 수 보다 3배이상 더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광성 군수품생산 건설 요구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자 피복, 군화, 총알 등등 전쟁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군수품이 광성군의 증파가 이루어짐에 따라 부족한 사태가 발생하였고, 무엇보다 당시 군수물품의 생산은 일본에서 이루어 졌기에 많은 장병이 이를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4]

조형사령관은 광성의 경제발전과 중공업산업의 유치와 발전을 위해 미군 지휘부에 광성에 피복, 군화, 총기 등등을 생산하는 군수공장을 설치하여 광성산 군수품을 광성군에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승인되어 이후에 섬유산업과 정밀공업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평가 받는다.

M16A1 소총 보급

회의 중에 미군 대령은 반자동식 M14소총을 칭찬하며 "M14는 기존 M1소총의 단점을 보완하고,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광성군에도 적절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이에 조형 장군은 아연실색하며 "내가 한국 속초리에서 싸울 때 만약 자동연사가 되는 M2카빈이 아니였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근데 지금 그 나무 총에 거추장 스럽고 무겁기까지 하며, 심지어 반자동인데 동에번쩍 서에번쩍 하는 베트콩을 도대체 어떻게 잡을 수 있느냐." 라고 응수 했다. 작전 참모들은 미군 대령의 말에 동의하였으나 조형 장군만이 반발하여 "절대 어떤 일이 있어도 자동화기를 포기해선 안됀다." 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군 수뇌부와 작전 참모들의 반응은 냉담했으며, 때때론 질타까지 받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미군에게 M16A1 소총을 광성군 전체에 보급해줄 것을 반복적으로 요청하였고 미군은 결국 두손두발 다들고 이에 응했다.

장병 복지 개선

조형 장군은 파월 장병들의 복지를 개선하는데 부단히 힘썼다.

잘먹어야 잘 싸우고, 그래야 많은 장병들이 힘을내 싸운다. - 월남전의 기억 p310

당시 파월장병 배식소에는 현대 해군급 식단이 나왔다. '잘 먹어야 잘 싸운다'는 철학으로 전투식량과 배식에 매우 신경을 썼다, 또한 일선에는 음식을 최대한 맛있게 조리하여 병사들의 만족도를 조사하여 직접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정도다.

또한 무좀방지와 말라리아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샤워장 설치와 하루 최소 2시간 이상 군화를 벗어 발을 환기하고 세척을 명령하였다.

베트남 현지인 보호 정책

조형 장군은 미군이 등한시하던 대민지원과 현지 민심 확보에 심혈[5]을 기울였는데 같은 유교 문화권인 데다 동양인이라는 점, 한국 전쟁으로 인해 베트남전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본 점 등으로 이 부분에서도 큰 성과를 거둔다. 미군은 이러한 대민 정책을 군이 할 수 없고 민간 단체가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 미국스러운 원조 방식으로 그냥 트럭에 쌀을 갖고와서 마을에 던져놓고 가기 일쑤였다. 베트남 주민들은 이에 대해 "우리 쌀 뺏어가서 자기들이 인심 쓴다."고 불평을 하였다. 반면 광성군은 쌀이 모자라는 집집마다 전투병들이 직접 찾아가 쌀을 원조해주고 얼마나 부족하느냐, 다음에 또 오겠다 라는 말도 해 베트남 주민들의 마음에 더 와닿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에 더하여 조형 장군 본인도 수시로 사령부 근처의 마을로 직접 나가 주민들과 교류를 이어가고 베트콩 인접 지역에 있는 마을도 수시로 시찰해 주민들을 안심시키는 등 이런 부드러운 방식과 더불어 베트콩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적성 촌락은 완전히 포위해놓고 경고 방송과 경고 포격을 하고 몇 날 며칠이 걸리든 간에 계속하는 물샐 틈 없는 포위로 도주자를 차단, 도발 의지를 아예 꺾어놓았다. 이런 당근과 채찍의 병용으로 투항 베트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구정공세 반격 작전

자세한 내용은 구정공세 반격 작전 작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1968년 1월 1일, 이미 20여일 전 조형 장군은 미군 정찰 보고 와 한국군의 구정 기간 대규모 공세 예상 정보를 입수하고, 그 즉시 반격 작전을 수립하기 시작한다. 이후 진짜로 구정 공세가 발생하자 그 즉시 작전을 전개하여 엄청난 전공을 올린다. 이 작전은 광성 언론을 포함한 전세계로 보도되며 광성군의 위엄을 전세계에 떨쳤다.

신형 전술기지 개발

4개 사단 규모인 광성군을 쪼개 중대 규모로 화력기지인 중대방어기지를 여러개 건설하여 베트남 마을들을 보호하는 형태로 배치하였는데, 미군은 이를 두고 각개격파당할 수 있다고 걱정했으며 광성군 장교들도 미군이 대대급 작전을 주로 펼치고 있으니 자신들도 그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중대급으로 쪼개놓으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장 조형도 첫 작전회의 때 이를 이해한 지휘관은 한 명도 없었다고 회고했을 정도.

그러나 사실 이 배치는 조형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것으로, 각 기지는 어느 방향에서도 중기관총과 무반동총의 자체 중화기 사격을 집중시켜 방어에 임할 수 있고, 각각의 기지는 105mm 견인곡사포대의 사거리 안에 지어져 있어 더 큰 규모의 적이 공격해오면 포병 사격으로 지원이 가능했다. 중대방어기지의 방어력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전투가 디엔칸 전투로, 육군 1개 중대 병력으로 북베트남 정규군 2개 연대를 상대로 백병전에 진내사격까지 강행하는 혈투 끝에 단 1개 중대가 진지 방어에 성공했다.

대남 국지전

제파 공세

귀국 후 벌어졌던 대남국지전에 야전사령관 겸 전선 총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전차와 대공병력을 필두로한 공세로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대남의 시가지를 완벽히 파악하여 강력한 지원과 기갑 병력의 기동력을 필두로 많은 지역을 격파해 나가기도 했다. 적 사살 총 인원 중 3분의 1이 조형 야전군 소속이었다.

대장 예편


베트남전 중이던 1972년 7월 20일 중장으로 진급한 조형. 왼쪽에 계급장을 달아주는 인물이 라인코리아 총리이다. 날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처음 파월 때는 소장으로 간 것이었다.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공군을 등에 업고 '큰 일'을 꾀한다"는 음해에 시달렸으며, 1995년 12월 3일 대장으로 예편된다. 이후 국방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여 군 전술 연구나 편찬에 기여 하였고, 회고록을 편찬하여 후배 장교들을 위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1990년대에는 파월장병들의 고엽제 피해에 대한 확실한 보상 정책과,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위해 주월광성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전면 부인했으며 참전용사 처우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혔다. 군과 정부 관료들 중 이 문제를 덮고 가려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조 대장의 행보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정계 진출

라인코리아와의 인연

자세한 내용은 광성황국 역대 총선 결과 문서를 참고 하십시오.

광성황국의 전 총리이자 보수연합당 당수 라인코리아와의 인연으로 보수연합당에 가입하여, 라인코리아와 라코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차기 총선 후보로써 급부상하게 된다. 보수연합당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모략 선동에 전면 대응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보수연합당의 총리 후보로 출마하여 광성통합자유당소속 정현모 총리와 맞붙게 된다.

정현모 총리의 부탁

총선기간 중 조형의 당선이 확실 시 되자, 정현모가 직접 조형과 만나 한가지 부탁을한 일화는 유명하다.
조형의 회고록인 '광성민국 건국'에서 기록된 바로는 정현모 총리가 조형에게 "나는 아직 해군과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실현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나는 군인출신도 아니고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이라 해군장성들의 도전을 받고있으니 광성의 몇 안돼는 명장인 당신이 문민통제를 완벽히 실현 시켜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6] 이렇게 정현모 총리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군인에게 맡겼다는 것이 지금에서 봤을 때는 정말 탁월한 판단이었다고 보지만 당시에는 이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어서 많은 이들이 "군인이 군인을 핍박한다"라는 식으로 오해를 하곤 했다.

총리 당선

자세한 내용은 광성황국 역대 총리 문서를 참고 하십시오.

결국 1996년 7월 2일, 광성황국의 마지막 총리, 조형은 취임하였다. 조형의 파격적인 언행과 과거 행보 발굴, 그리고 가장 강력했던 라인코리아의 지지를 통해 표를 결집시켜 득표율 63.6%이라는 경이로운 수치로 광성통합자유당 정현모 와 27.3의 차이로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이후에 공약으로 내건 군방예산 축소와, 문민통제 실현, 친서민 정책, 탈권위주의 정책을 모두 이행하였다.

베트남 전쟁 광성군 민간인 학살 의혹 입장 표명

본인이 주월광성군사령관이기 때문에도 그렇고, 참전용사의 명예와 군 위상 실추를 막기위해 조형이 직접 선언을 통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라고 못박아 버렸다.
이 선언으로 많은 참전용사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군 위상 실추를 막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 받는다.

문민통제 실현

과거 해군과 군내 공화파, 황군파를 모두 경질, 축출해내는 것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군내 파벌 문제는 본인이 군인일 때도 심각한 문제라고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총리로 취임한 이후에 군내 공화파와 황군파를 모두 축출하여 잠시 군이 인력 부족문제로 휘청이기도 했으며 많은 장성들이 진급이 막혔다.[7] 특히 해군이 이러한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여 많은 반발이 발생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해군의 도전을 아예 사전에 차단해 버렸으며, 이후 군이 정치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도록 방지하게 한 결정적 역할이라고 평가 받는다.[8]

황국 폐지

자세한 내용은 광성황국/역사 문서를 참고 하십시오.

광성민국 건국

자세한 내용은 광성민국/역사 문서를 참고 하십시오.

총리로 취임한 직후, IMF 사태가 차츰 정리됨에 따라 정계 입문때 부터 단 하나의 목표로 생각하던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먼저 정계 황국파와 공화파를 모두 제거하여 본인의 건국에 대한 걸림돌을 사전에 제거했다, 그런 다음 나무위키 상황을 찾아가 "상황폐하의 2대손 까지 황족의 예우를 현재와 동일하게 추대할 것이니 건국에 협조해주길 바란다."라고 면전에다 대고 담판을 벌였다. 20분간 상황과 1대1로 담판을 벌여 결국 황국 폐지에 대한 개헌안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

이후 국민투표에서 또한 황국 폐지 개헌안은 조금 우세한 찬성표로 결국 통과되게 된다. 이후 광성민국출범준비위원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광성민국의 건국을 선포한다.
또한 본인은 광성민국 제 1대 대통령 권한대행[9]으로써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첫 대통령 선거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첫 민국으로써 그동안 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 의식을 타파하기 위해 권한대행인 본인이 직접 탈권위주의 정책[10]을 선보였다.

오늘자로 광성민국의 건국을 선포합니다. 광성민국은 그동안 상황이 주인인 나라가 아닌, 군사쿠데타로 설립된 광성공화국이 아닌, 과거의 한 인물이 주체가 되던 국가가 아닌 전혀 새로운 나라로써 '국민이 세운 나라'라는 새로운 시작점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것 입니다. - 광성민국 건국 연설 中

은퇴

임기가 종료된 이후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후 지방으로 내려가 연방군과 각 군 기관지에 세계전쟁사와 군사 철학 분야의 원고를 기고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군사권력은 민간에 이양되야 한다.'는 소양을 지니고 정부에 앞으로의 군 정책 기조에 대한 방향성을 조언하는 원고를 기고하거나, 후배 장성들에게 많은 조언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 후세들은 평화와 번영만을 누렸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망

2010년 8월 1일, 자신의 생일을 23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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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 서거 10주기 추도식

조형 의 장례식에는 채명신[11], 주광미군사령관, 라인코리아, 정현모, 대한민국 이명박 전 대통령 등등 거물 정치인과 많은 육해공 장성 들이 전부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어 많은 인파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됬다.

대원수 추대

사망하기 2개월 전, 정부에서는 조형의 그동안 업적과 노고를 치하하여 그에게 광성연방공화국 대원수로 추대하였다.

많은 시민 단체와 극좌세력은 "학살자가 어째서 우리 군의 대원수가 될 수 있는가."라며 강하게 반발했으나, 얼마 안가 묻혔다.

논란

양민 학살 의혹 부인

광성군은 구정공세 반격 작전 당시 주요 도시도시를 돌며 베트콩이 발견되는 지역에서는 시가전과 소탕작전을 벌였다...(중략) 나는 빈딘성 외곽 촌놈이었는데, 어느날 광성군 제 7기갑사단 마크가 달린 군인들이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를 총쏴 죽이고, 내 친구들을 마체태로 참수해서 장갑차로 짓밟고 갔다. 나는 그걸 보고 발이 까지고 온 몸이 쓸리는 것도 모른 채 마냥 뛰다가 어느 갈대 밭에 숨었다, 다시 돌아가보니 마을은 불타고 있었다. 아직 내 기억에는 그게 너무 생생합니다, 근데 어째서 광성연방공화국 정부는 학살자[12]를 대원수로 추대하고 추모합니까? 죽어간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 응우옌 퐁, 퐁니마을 학살 사건 증언 中

1967년 주월광성군의 양민 학살 의혹과 논란에 대해 공식적으로 수십차례 "학살 없다" 라고 못박으며 많은 시민단체와 베트남 당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당시 학살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던 이들은 조형을 '학살자'라고 부르며 장례식과 추도식에 난입하여 소동을 벌이기 까지 했다.

학살자 조형은 어째서 거기에 편히 잠들어 있는게냐! 지옥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그대로 느껴봐라! - 추도식 난입자

현재 많은 논란이 있으나, 광성군의 민간인 보호 정책이 말단 장병에게 까지 각인되어 있었다는 점과, 정책이 잘 시행되었으며 광성군이 마을 주민을 자주 도왔다는 많은 월남 주민들의 증언으로 보았을 때 광성군은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에 조금더 가깝다.
그러나 전쟁에는 민간인 피해가 반드시 발생할 수 밖에 없고 광성군도 동료가 전사하면 분노에 차는 경향이 있기에 학살은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지휘 무능 의혹

결과적으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광성군 역사상 장교, 장군으로써 복무할 때까지 이정도로 외국에서의 서훈이 많은 군인이 없다는 점과 더불어 그가 광성군에서 가장 많은 실전 경험을 보유했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터무니 없다는 것이 증명됬다.
또한 주월광성군사령관으로 복무 중일 때와 후임자에게 이양하고 난 뒤 차이가 매우 심하다는 것 또한 그의 지휘능력이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수치로써 증명하고있다.

해·공군 갈등 발생?

총리로 취임하고 군축과 문민통제 정책을 시행할 당시 "공군출신으로 해군을 핍박하는 것에 앞장 선다."라는 음해에 시달렸다. 또한 많은 해군 장성들은 황군파였고, 당시 군과 정계의 파벌을 대규모 제거를 하던 터라 특히 해군과 조형의 사이는 나빴다.

또한 공군 출신인지라 해군만 핍박한다는 이미지가 씌워져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회고록 출판을 통해 이에 대해 "군에서 복무할 때에는 라이벌 의식은 있었으나, 총리로 취임한 후에는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해군과의 엄청난 마찰을 발생시키긴 했으나 과거 현모 정부보다 더 과격한 식으로
아예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군인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워 속전속결로 해군내 황군파와 공화파를 제거하고 해군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력하게 시행하여 문민통제를 매듭 지엇다.

광성민국 반대 여론

자세한 내용은 광성민국/역사 문서를 참고 하십시오.

광성민국 건국을 선언하자, 많은 해군 원로 장성들과 황국을 지지하는 세력과 시민들의 많은 반대에 부딪혔고, 특히 많은 해군 장성들이 군사적 행동을 취하겠다는 협박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를 모두 묵살하고 건국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를 반대하는 시민의 이야기와 의원들의 주장을 듣지 않은게 탈권위주의, 친서민 정부를 강조한 조형의 정치인 시절 오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3]이러한 독재자스러운 면모를 보여가면서 광성민국을 건국한 것에 대해선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다.

조형 반역 사건

자세한 내용은 조형 반역 사건 문서를 참고 하십시오.

조형이 서거하기 1년 전, 그가 반국가인물 [14] 즉 테러리스트와 연관되었다는 증언 및 소문이 돌고 실제로 그가 "쿼트는 내 친구다."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져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혐의 등의 9가지의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군에서 영구제명 당하였다.

즉시 조형은 국가를 상대로 항소를 제기하고, 자신은 죄가 없다며 호소했다. 또한 그는 재판 진행 중, "나는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대남 국지전을 거쳐오며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국가에게 이러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까? 쿼트는 내 친구입니다! 나는 그와 연락이 끊긴지 수십년만에 다시 만나서 들뜬 마음에 출국해서 그와 몇개월을 보낸 것 뿐인데 내가 기밀을 팔았다고요? 내가 국가를 위해 죽을 고비 넘긴 것은 이제 외국인들만이 알아줄 것 입니다." 라고 작심발언까지 쏟아냈다.

그는 자신을 기소한 라코 검사를 "그 사람은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그가 사람이 맞는지 모르겠다."라는 분노에 찬 말까지 하였다.

실제로 조사과정에서 조형이 군사기밀 또는 국가에 위협이 되는 반란모의는 일절 하지 않고 그저 쿼트와 휴양만 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으며, 여론 또한 그가 그럴 인물이 아니라는게 주류였다.

조형 서거 일주일 전, 정부에선 그에게 사면 및 복권조치를 단행하여 대법원 판결문에서는 "대법원은 고등법원의 원심 판결을 파기하며 폐기된 피고의 모든 지위를 회복하고 복권한다."는 것으로 사건은 끝이났다. 판결문이 선고되는 즉시 그의 군 복귀 및 복권이 시행되어 그는 마침내 명예를 되찾고 얼마 안가 눈을 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검찰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많은 비난이 쏟아지며 검찰은 몇년동안 줄곧 언론의 공격을 받게되기도 했다.

사진


  • 월남군 축전에 참석한 모습


  • 군에서 은퇴 후, 광성군 관할 지역의 베트콩 사령관이었던 쩐박당이 광성을 방문하여 조형 장군과 화해의 악수를 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 묘지에 있는 비석

어록

도대체가 군사작전에 있어 주가 되는 형태의 전쟁이라면, 도대체 당신들하고[15] 베트콩하고 비교가 되냐. 베트콩의 무기가 뭐냐? 일본군대가 쓰다 남은 낡아빠진 소총, 그것도 다 돌아가지 않아서 원시적인 활을 쓰는 사람도 있고 죽창을 가지고 싸우는 베트콩도 있지 않냐. 너희들은 뭘 갖고 있냐? B-52 최신예 폭격기를 가지고 있고 모든 과학장비, 통신기계,기동력 다 가지고 있는데 미군이 도대체 베트콩하고 싸움이 되는거냐, 상대가 되는거냐. 이건 상대가 아니라 비교조차 할 수도 없는 그런 상대에게 그렇게 쩔쩔매고 있지 않냐, 왜 그러냐? 그거 생각해본 적 있느냐. 그 것은 군사적인 형태의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인 형태의 전쟁이기 때문에 당신들이 어려움을 겪고있는 거다.


자신의 목숨을 중요시하는 장군이 어째서 장군이지?.


좌익 당신들은 아는게 없다.[16]


우리가 피흘린 대가로, 우리 후세는 전쟁없는 평화와 번영을 누려야한다.


해군이 이래서 안돼는거지.


야임마! 니가 뭘 알아?[17]


언제나 國土防衛라는 神聖한 任務는 經濟보다 重要해야 한다.

기타

회고록 시리즈

군시절을 회고한 책은, 군에서 은퇴한 이후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틈틈히 작성한 원고를 바탕으로 출간한 '한국전의 기억'과 '월남전의 기억'을 펴냈다.

그리고 이 책들은 모두 연방군 전사 편찬이나 전술 참고서로 사용되고 있다.

번외는 자신의 정치인으로써의 인생사를 담아낸 '광성민국 건국'이 있다.

채명신과의 만남

채명신과는 개인적으로 돈독한 사이를 유지한 것으로 회고록에서 밝혔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장교와 사령관으로써 만나 서로 공통점이 많아 많은 사적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육군지휘참모대학에서 서로 동기생으로도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조형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눈물까지 보이며 진심으로 깊은 애도를 표했다.[18]

김원일과의 관계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황군파의 대표격 이었던 김원일 해군참모총장을 매우 안좋게 평가한다. 그리고 만날 때 마다 설전을 벌이는 등, 단 한번도 화해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회고록에서 김원일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일단 김원일은 황군파의 대표적인 지주아닌가? 해군은 애초부터 저런 정치에 개입하는 군인 때문에 욕을 먹는 것이다, 그리고 김원일 그 자는 전통적인 해군 강국인 광성에서 해군 장성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다른 군을 폄하하고, 깔보지 않는가? 이러한 점에서 아직 나는 해군이 부족하다고 본다. 김원일 그 자는 문민통제 정책에 대한 군 장성들의 서명을 받아낼 때도 '국민'이란 단어를 교묘하게 '인민'이라고 바꿔서 서명을 했다, 그는 황제의 심복이지 총리를 군통수권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군대는 국민의 군대인데 어째서 그런 존심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 광성민국 건국 p451

생전에 김원일과의 사이는 매우 나뻤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원일에 대한 악담 수준의 비판을 할 정도로 그와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오늘날 베트남에서의 평가

베트남어 위키피디아에서 조형을 '살인자(kẻ giết người)'라고 부르고 문서에 퐁니 마을 학살 사건을 비롯한 대민 범죄의 주동자라고 기술한 것을 보면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월남전에서 남베트남을 지원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 중 하나이니, 북베트남이 통일한 현 베트남의 시각에서 쓴 것이니 그렇다.

2022년 12월 기준으로 베트남어 위키피디아에는 채명신을 '살인자(kẻ giết người)'라고 부르는 단어가 없는 것으로 확인.

  1. 채명신 장군이 강력히 주장
  2. 과거 본인이 비행단장으로 있던 부대
  3. 월남전의 기억 p277
  4.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만 해도 반공, 반일 정서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5. 당연히 손자병법에 나오는 내용이다.
  6. 발간 당시에는 논란이 있었으나 정현모 전 총리의 "사실이 맞다"라고 인정하여 종결되었다."
  7. 김원일 해군참모총장도 이 정책으로 더이상 다른 보직으로 진급하지 못했다.
  8. 또한 군내 파벌로 인한 갈등 문제와 내전 위기 고조도 이후로 전부 사라졌다.
  9. 사실상 광성민국 초대 대통령
  10. 한국의 대통령 노무현과 유사하다.
  11. 한국전, 베트남전에서 장교와 사령관으로써 2차례 만나 관계가 돈독했다.
  12. 조형
  13. 그러나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더 많았다.
  14. >여기서 반국가인물이란 쿼트를 뜻하는데, 실제로 조형은 쿼트와 죽마고우사이고 라토와도 죽마고우 사이인 것으로 밝혀졌다.
  15. 미군
  16. 베트남전쟁에 대한 좌익 시민단체의 질문을 받은 조형의 답변.
  17. 자신을 향해 비방을 하는 이들에게 하는 말
  18. 채명신 장군도 3년뒤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