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슬란드의 역사

에쒸비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23일 (월) 03:01 판

상위문서:프리슬란드


식민지 바네베네센

프리슬란드 독립전쟁

헤스페로스벨트의 해운국가이자 상업국가인 베른하이어와 마그니우스는 제해권 장악과 해운무역을 통한 수익을 국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다 16세기 들어 마그니우스가 식민지 지배의 최종승자가 되면서, 자유도시의 정세에도 격변이 생겼다. 판크라티온의 자유도시들은 마그니우스 식민지 중 최대 흑자 산출국이었다. 마그니우스가 판크라티온의 경제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향력을 토대로 벌인 상품거래 독점과 정치적 간섭은 그들의 수익을 유지시켰을지언정, 판크라티온의 불만을 고조했다.

마그니우스는 Divide and Rule 에 의거해, 베른하이어로부터 프라이란트의 통제권을 확보했음에도 나바르 연맹과 통합하지 않고 이를 그대로 유지시켰다.

1500년에 즉위한 참주령의 참주 유스티니아누스 역시 센크란시우스의 뒤를 이어 판크라티온 동부를 탈환하고자했다.

1501년, 마그니우스의 영향권으로 편입된 말루스 시에서 마그니우스의 높은 관세와 선박 독점으로 인해 물가가 치솟으면서, 말루스 시 시민들의 생계는 감당할 수 없었다. 말루스 시 시민들은 관세 완화와 입항 선박의 자유화를 요구했으나 마그니우스의 주둔군은 이를 무력 진압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말루스 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말루스 시 항구에서 무력충돌로 비화되었다.

영성교의 중재하에 무력충돌이 더 확대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나, 말루스 시민들의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다.

말루스 시 봉기를 계기로 판크라티온 동부에서는 헤스페로스벨트 열강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확대되었다. 영성교의 수장 사도성은 지속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 참주와 밀약을 맺었고, 참주가 지원하는 물자와 장비가 영성교 신자들을 통해 비밀리에 공급되었다.

5년간 고조된 불만은 1502년에 다시 확산되었다. 1502년, 마그니우스령 프라이란트 동맹의 선원들에게 급료가 미지급되고, 식사 역시 부패한 염장고기와 곰팡이가 핀 빵이 배급되자 선원들이 일제히 파업에 나섰다. 이 파업으로 프라이란트 동맹의 마그니우스 선박 물류가 마비되면서 마그니우스령 프라이란트 동맹의 물가가 급상승하고, 식량과 물자가 부족해졌다.

프라이란트 동맹의 자유도시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국 선박의 입항을 허가할 것을 요구했으나, 마그니우스는 이를 묵살하고 반발에 대한 본보기로써 말루스시를 유혈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이 피난한 영성교 교회가 마그니우스군에게 포위당했다. 1달간의 포위 끝에, 영성교의 말루스 주교 라오니스는 투항하는 대신 포위를 풀 것을 합의했으나, 투항하자마자 마그니우스군의 진압으로 교회의 시민 다수가 죽거나 부상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라이란트 동맹 내 영성교 신자들이 일제히 봉기했다. 사도성 역시 말루스 시 참극의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시성하면서 영성교 신자들의 봉기를 유도했고, 봉기에 성공한 도시들을 중심으로 자유도시연맹이 결성되었다. 자유도시연맹은 프라이란트 동맹의 자유도시들을 제압한 뒤, 마그니우스령 프라이란트 동맹의 세력을 장악했다.

마그니우스는 나바르 연맹과 다른 자유도시들을 규합한 자유령 연합을 결성했다. 자유령 연합은 마그니우스의 지원을 토대로 자유도시연맹을 압박했다. 1505년, 봉기의 시발점인 말루스 시가 마그니우스군의 상륙으로 함락당했고, 그 이듬해인 1506년에는 수도 격인 판크라티온 시 조차 함락당하기에 이르렀다.

판크라티온 시 공략에 투입된 병력은 대부분 용병이었다. 마그니우스는 용병들에게 급여의 절반을 선불로 지급하고, 남은 절반은 작전 후 후불로 지급하기로 했다. 그러나 본국의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용병에게 선불을 지급할 수 없었고, 이 상황에서 용병대의 지휘관이 자유도시연맹군에게 저격당했다.

미지급된 급여로 인한 불만과 지휘관의 저격으로 인해 통제력이 상실된 상황에서, 판크라티온 시는 마그니우스측 용병들에게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주민들 역시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으며,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사도성 메사누스에 의해 이 사실이 판크라티온 동부에 알려짐에따라, 자유령 내부에서 대규모 민심 이반이 발발했다. 참주 유스티니아누스는 성전을 선포하며 대규모 원정을 동부에 감행했다. 유스티니아누스 참주의 대규모 동진에 자유령 연합은 허를 찔렸다. 자유도시연맹도 동진을 계기삼아 가르강티아 시에서 재결성되었고, 1509년에는 판크라티온 시를 탈환한다.

판크라티온 참화는 자유령 연합 내부에서도 영성교 신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자유령연합의 도시와 병력이 참주령과 자유도시연맹에 투항하면서 자유령 연합의 세력권은 와해되었다.

1510년의 말루스 시 공방전을 계기로 마그니우스는 판크라티온 동부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최후의 발악으로 대평원의 유목민족을 포섭해 참주령의 후방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는 자유령 연합에게 불리한 형세로 기울어졌고, 대부분의 거점을 상실한 자유령 연합은 일부 해안 지대만을 점거했다.

자유령연합이 완전히 붕괴하게 된 계기는 마그니우스의 철수 결정이었다. 자유령 연합을 통한 신대륙 통제의 이익이 불확실하다고 판단한 마그니우스는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마그니우스의 철수로 인해 자유령 연합은 존재의의를 잃었다. 1513년, 동부 해안에서 벌어진 에코스트 전투에서 자유령 연합은 대패하게 되었다.

자유령 연합 최후의 사령관 코르날리스가 자유도시연맹에 항복하면서, 자유령연합은 완전히 붕괴된다.

프리슬란드 자유국

총재정권

1514년, 자유령연합의 붕괴를 계기로 판크라티온은 재통일되었다. 그러나 동부의 자유도시연맹과 영성교의 총본산 사도령은 옛 참주령의 복귀만큼은 반대했다. 참주 유스티니아누스 역시 회귀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참주직을 그대로 유지할 때의 반발 대신 변화를 받아들여 영성교의 인정을 받고, 참주시절 쌓아올린 기득권을 이용하는게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양자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면서, 참주령과 자유도시연맹은 1530년 월 일에 건국헌정을 발표했다. 동시에 판크라티온의 행정구역을 자유주와 자유시로 구성한 다음, 각 주와 시에서의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 최초의 선거에서, 자유도시연맹을 재건하고, 승리에 기여한 에버하트 게르벨이 당선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시 참주 자리에서 퇴위하는 대신 건국 원로이자 비선실세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에버하트 게르벨은 건국헌정의 신체제는 신대륙의 과거인 판크라티온으로부터 탈피, 자유라는 미래의 가치를 표방하는 땅이라는 의미의 '프리슬란드'로 명명했다.

프리슬란드는 결성전쟁 과정에서 파괴된 동부 자유도시들의 재건, 구 참주령과 구 자유령의 연결 등 대대적인 국토 개간/개척 사업인 '리프론티어'에 착수했다. 그동안 유목민족들의 공백지로 남겨진 대평원이 이 시기를 거치며 많이 개발/개간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목민들의 거주지였던 대평원이 동부와 서부로부터 침범받으면서, 유목민족들은 프리슬란드의 리프론티어 정책에 반발했다.

리프론티어 과정에서 유목민족들은 프리슬란드 개척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유목민족과의 갈등은 프리슬란드의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프리슬란드 정부는 외교적 합의와 군사적 강행을 병행하며 대평원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유목민족들은 부족 단위로 분열되어 프리슬란드의 확장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반세기 가까이 진행된 리프론티어 정책은 1560년에 프리슬란드 정부와 유목민족의 연합체인 혈족연맹의 합의하에 한정선이 결정됨으로써 마무리지어졌다.

그러나 합정선은 대부분 혈족연맹의 유목민들을 가두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면세 등의 혜택을 받는 대신 참정권과 시민권이 제한/배제되면서 프리슬란드 사회문제로 자리잡는다.

프리슬란드는 대륙 동서부의 해안으로부터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대륙 각지역의 자원을 개발하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결정적으로, 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프리슬란드가 열강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프리슬란드 동부와 서부를 잇는 대규모 철도망 수요가 생기면서, 철도 건설 붐이 일었다. 이를 시작으로 철강 수요가 늘어났고, 전기와 석탄, 기타 물자 수요가 급증함에따라 이를 공급하기 위한 산업이 활성화되었다. 헤스페로스벨트와 오플란 등지로부터 유입되는 이민자들은 풍부한 노동력이 되었다. 드넓은 프리슬란드 영토의 특성상 다양한 식재료가 풍부하게 공급되었고, 풍족한 식생활은 프리슬란드 이민을 자극했다.

불과 반세기만에 프리슬란드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1565년에 설치된 말루스 시에 설치된 주식시장은 불과 50년만에 주식 거래량이 10,000배 가까이 늘었고, 철도 길이와 전기 생산량, 선박 건조 톤수, 철강생산량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거대한 영토와 인구, 자원과 이민자들의 잠재력을 토대로 프리슬란드는 기존 헤스페로스벨트 열강들 못지 않게 성장했다. 자유시장경제를 통한 무한경쟁은 거대 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주요 산업을 독점한 거대 자본인 트러스트는 대규모 투자와 고용으로 프리슬란드 경제를 장악했고, 정치/사회적으로도 로비와 정경유착, 예술/사회적 재단 설립, 기부와 장학금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성장과 발전은 노동자들의 희생에 기반한 것이었다.

프리슬란드의 이주한 노동자, 농민 대부분은 제대로 된 급료와 가격을 받지 못했다. 자유시장경제 특성상 노동자 복지는 뒷전이었고,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도 '경쟁의 패배자'로 간주되었기에 복리후생에 인색한 분위기였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조합 등이 결성되었으나, 노동조합은 불법으로 규정되어 군경과 사설 무장세력에 의해 무력으로 탄압받았다.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와중에도, 트러스트를 비롯한 거대 자본가들은 경쟁자들을 합법과 불법을 가리지 않는 방법을 제거하면서 더 많은 부를 쌓았다. 프리슬란드의 빈익빈 부익부는 17세기에 들어서도 악화되었고, 1629년의 대파란은 그동안 누적된 프리슬란드의 사회문제가 일제히 터져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프리슬란드 내전

건국헌정

대파란

1629년 10월 30일, 말루스 시 증권 거래소에서 대규모 주식 폭락이 발생했다. 본래 말루스 시 증권 거래소 주가는 계속 상승세였으나, 프리슬란드 중부 지방 은행의 자금 조달이 은행원의 태업으로 인해 늦어진 것을 계기로 해당 은행과 연계된 거래에 영향을 끼치면서 주가 하락으로 이어졌다. 거품경제가 극심했던 프리슬란드 경제는 1629년 11월부터 급속도로 하락했다.

주식이 급강하하면서 천문학적인 금액이 증발했고, 주가가 떨어지면서 주식 투자자들의 재산도 소멸했다.

증발에 가까운 금액과 재산 손실은 여러 기업의 부도로 이어졌고, 상품 구매력이 없는 대다수 시민들이 빈곤층으로 추락하면서 잉여 재고량을 감당할 수 없었던 기업의 부도가 이어졌다. 실업률 급증과 함께 공련의 사회주의 혁명에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은 이 기회에 공련식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고자 했으며, 공련 역시 프리슬란드에 혁명을 수출했다.

사회적으로 총기 소유가 일상이었던 프리슬란드 특성상 무장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식량을 수송하는 열차와 차량이 각지에서 약탈당했다. 자유국군과 경찰, 주방위군의 공권력으로 이를 제압하기란 무리였고, 기업가와 상류층에 대한 공격도 빈번해졌다. 농촌 역시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농민과 어민들은 급락한 농산물 가격을 해결하기 위해 농작물과 축산물, 수산물을 폐기했고, 그것을 가져가려는 자들을 공격했다. 더군다나 지력을 고갈시키는 화학농법으로 인해 대평원의 농경지가 황폐화되면서 식량수출국인 프리슬란드가 식량수입국이 되었다.


휴버트 론의 대두

대파란을 전후로,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체제였던 프리슬란드 정계는 파편화되었다.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이 가시화됨에따라, 자유당과 민주당은 소수 자본가를 제외하고 지지를 잃었다.

동시에 프리슬란드 정계에는 신흥 정당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휴버트 론의 책임사회당이었다.

휴버트 론은 본래 노동운동가로, 노동자들의 권익 보장을 위해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노동자들을 변호하고, 재판에서 자본가들의 책임을 이끌어내려 했으나, 정경유착이 만연한 프리슬란드 특성상 재판 역시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부분의 재판에서 패배한 휴버트 론은 법에 문제가 있다면 정치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변호사 경력을 토대로 정계에 입문했다.

'자본으로부터의 자유로울 자유'를 모토로 프리슬란드 정계에 두각을 드러낸 휴버트 론은 사회주의자 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공련혁명을 계기로 반공주의와 영성교 신앙을 제창하면서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책임사회당을 창당한 휴버트 론은 대파란을 계기로 정계 주도권을 장악했다. '자유에는 책임'이라는 메세지는 노동자들에게 먹혀들었고, 책임사회당의 개혁과 재분배야말로 공련식 사회주의와 기존 체제로 인한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강조해 자본가들의 신임을 얻었다. 무엇보다 반공과 영성교 신앙을 통해 종교인과 인텔리, 농촌의 보수층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대파란을 계기로 신속히 지지층을 결집시킨 휴버트 론은 파격적인 공약들을 내세웠다. 기존의 민주당과 자유당이 연합한 민주자유당은 형식적 대책만 내놓고, 사회당은 공련식 사회주의 체제를 주장하는 와중에 다양한 계층을 포괄한 휴버트 론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1629년 11월, 하르벤 슈미트 대통령이 대파란의 책임으로 사임하면서 부통령 일 베르티신이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휴버트 론이 트러스트 자본가들의 유착을 고발하면서 일 베르티신 역시 불과 5달만에 사퇴하고 만다.

1630년, 연말 총선 결과, 프리슬란드 정계 원내는 책임사회당이 75%, 민주자유당이 5%, 사회당이 20%를 차지했다. 휴버트 론은 압도적인 원내 지지를 바탕으로 복리후생과 국책사업을 주축으로 한 대파란 수습 정책을 입안하며 지지를 공고히 다졌다. 결정적으로 1630년 5월 노동절 연설에서 자유와 책임을 주제로 한 연설을 라디오 방송으로 전파해 여론을 장악했다.

그 결과, 1630년 6월 대선에서 휴버트 론은 압도적인 우위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수정헌정

프리슬란드 대통령에 당선된 휴버트 론은 정권을 잡은 직후, 부의 재분배 정책을 본격적으로 이행했다. 자본가들 역시 휴버트 론이 대안이라고 생각했으며, 대파란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 휴버트 론에게 반발할 수 없었다. 프리슬란드 경제는 휴버트 론의 정책을 거치면서 다시 정상궤도에 올랐다. 1630년대부터 실업률은 완화되었고, 정부 주도하의 복지와 물자 분배로 기아를 막았다.

1634년, 휴버트 론은 프리슬란드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다. 휴버트 론은 재분배된 부를 바탕으로 상향평준화에 의거한 성장과 국력 신장을 공약으로 삼았다. 국내 경제 회복과 함께 군사력을 강화하면서 해외열강들에 견줄 수 있는 프리슬란드의 건국을 목표로 삼았다.

수정헌정의 2대 대통령으로써 업무를 위해 주 지지층인 농민들을 만나고자 순회에 나서던 중, 1635년 10월 9일에 알 수 없는 자에 의해 암살당한다.

휴버트 론의 암살과 함께 프리슬란드 정계는 다시 분열되었다. 책임사회당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구심점은 휴버트 론이었다. 그러나 휴버트 론의 사망으로 구심점이 와해되면서 책임사회당 내 계층간 차이로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영성교 교인들과 농촌 보수층, 인텔리들은 책임사회당에서 탈당해 국가공화당을 창당했다. 영성교식 금욕주의와 기술 관료정을 통한 '철인정치'를 모토로 자유에 걸맞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 국가공화당의 이데올로기였다. 한편, 대파란 직후의 혼란이 가라앉으면서 휴버트 론에 대한 불만 세력이 민주자유당으로 집결하면서 프리슬란드 정계는 삼각구도가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