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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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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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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왕국 올덴부르크-마운트리기온 왕조 제13대 국왕 테오필리스 李熙喆 | Theophili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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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왕국 올덴부르크-마운트리기온 왕조 초대 국왕 테오필리스 Teofilis | |||||||||||||||||
본명 | 테오필리스 요하네스 폰 울덴부르크-마운트리기온 (Theophilis Johannes von Oldenburg-Mountrigion) | ||||||||||||||||
출생 | 1964년 5월 10일 | ||||||||||||||||
스위스 바젤 | |||||||||||||||||
즉위 | 2024년 1월 17일 | ||||||||||||||||
노르웨이 왕국 오슬로 오슬로 왕궁 | |||||||||||||||||
재위기간 | 노르웨이 왕국 제13대 국왕 | ||||||||||||||||
2024년 1월 17일 ~ 2025년 3월 20일 | |||||||||||||||||
스웨덴 대공국 초대 국왕 | |||||||||||||||||
2025년 1월 22일 ~ 2025년 3월 20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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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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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왕국의 왕 문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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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왕 문장 | 스웨덴의 왕 문장 |
개요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국왕. 울덴부르크 왕조의 방계인 울덴부르크-마운트리기온 가문 출신의 국왕이다.
2024년 1월 10일 즉위하여 2025년 3월 20일 퇴위하기까지 1년 2개월 3일동안 재위한 군주이며, 노르웨이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이다.
생애
1964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세르오지오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오필리스의 집안인 올덴부르크-마운트리기온 가문은 이탈리아와 독일계 혈통으로, 최초에는 피렌체의 장인가문에서 시작해 르네상스시기에 금융업 기반을 다졌던 가문인 리조니 가문을 가문의 근원으로 하고 있다.
마운트리기온 가문은 리조니 가문의 파브리지오 리조니의 둘째 아들 페데리코 마운트리기온 대에 갈려졌는데, 가문이 갈라지면 아예 이름을 바꾸지만 당시 리조니 가문의 봉지였던 피렌체 근교의 요새인 마운트리기온를 페데리코 마운트리기온에게 상속하면서 본가와의 연관성을 들어낼 겸 자신 가문의 본거지를 드러내고자 마운트리기온(Monteriggioni)가 성씨가 되었다.
이후 마운트리기온 가문은 1498년 피렌체 정부가 전복된 후 1450년 마운트리기온에서 추방되었고 이후 피아첸차, 밀라노, 끝내 뮌헨까지 추방되며 이탈리아에서 가문은 단절당한다. 이후 금융업을 주업으로 하던 가문이었기에 당시 한자동맹에 참여하며 중심지로 부상한 울덴부르크로 가문이 이동하고 울덴부르크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울덴부르크 가문과 정략결혼을 통해 방계 가문이지만 정계에 입문할 수 있었고 안정적인 삶을 다시 꾸리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 프로이센에 붙어먹으며 북독일에 편입되는데 일조하며 이탈리아의 마운트리기온에 대한 계승권리가 어거지로 인정되어[5] 융커계급에 들어가게 된다.
융커계급에서 1차대전에 패배의 책임이 지어지자, 테오필리스의 조부 마르첼로 리조니는 비자금과 함께 스위스 베른으로 망명하게 되고, 그곳에서 금융업을 이어나간다. 마르첼로 마운트리기온는 표면상 가톨릭 신자였고 종교에 관심이 없었고 부친인 세르오지오 마운트리기온는 외동 테오필리스를 가지게 되었다. 테오필리스는 바젤에서 자랐는데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1984년 19세에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 학사를 취득하였고, 1986년 25세에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수학해 철학 석사를, 이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신학 석사를 28세에 취득했고 30세엔 스위스 개신교회의 목사안수를 받았다. 신학 박사는 33세에 취득하게 되었다. 이후 고향인 바젤의 교회에서 목회에 임하였고 43세까지 봉직하며 10년간 임했다.
이후 모교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아 역사신학과 영성신학을 가르쳤고, 58세까지 교편을 잡으며 15년간 봉직했다. 이후 스위스 바젤의 고향에서 지내다가 노르웨이 왕국의 왕위가 궐위되자 울덴부르크 가문의 방계인 울덴부르크-마운트리기온 가문의 적장자로 선정되어 원로원이 추대하였고 2024년 왕위에 올랐다. 2024년 국교인 루터교로 개종하며 세례명은 공포되지 않았는데, 요한 금구로 알려졌다. 이후 시리아의 성 에프렘이 세례명으로 고려되었다는 관계자의 발언이 있었으나 이후 본인이 세례명을 요한 크리소스토모(이하 요한금구)라 밝히며 논란이 종결된 바 있다.
국왕 재위 시절, 왕립 트리니티 대학교를 직접 세우는 등, 국왕의 업무와 함께 교육사업을 진행한 바 있다.
2025년 3월 10일 리틀 총리의 사의 표명 SNS글에서 퇴위 소식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었으며, 왕실 내부에서도 이를 대외적으로 시인하는 분위기였다. 그 후 3월 20일 퇴위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최장 재위 군주로서, 제9 ~ 14대 의회와 제13 ~ 19대 총리를 거쳤고 제10 ~ 14대 의회를 소집하고 제14~19대 총리를 임명하였다. 또한 두 차례의 헌법[6]을 공포한 바 있다.
어록
믿음을 옷입듯 입으라 했으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이는 갑옷을 입고 있음과 같습니다. |
광장에서 모 이용자에게 받은 질문에 대한 대답[7] |
지금 정국은 작년의 정세상의 위기에 있어서, 같은 소금이지만 세상을 황폐하게 하는 소금이 뿌려진것과 같은 역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듯, 세상에 이로운 소금이 되어 같은 소금일지라도 이로운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
새 시대의 표어를 공개하며 #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때를 알고 가는 그의 뒷모습, 그림자를 보는 우리는 그의 유산을 알고 기억하는것 만으로도 그분께서 만족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동요할것도,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남은 사람은 그 역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
윈스턴 처칠이 돌연 노르웨이를 떠나자 |
즉위사
즉위 수락 연설을 하는 테오필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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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존엄한 국민들의 동의로 말미암아 왕좌에 앉아 기름부음을 받는다. |
하느님의 보호 아래, 제 13대 노르웨이의 왕에 취임한 나 테오필리스가 나의 기름부음에 동의한 국민들의 신의 아래에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음을 장엄하게 선언한다. 그대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정의와 자유의 정신으로 지혜로운 국민들이 헌법에 따라서, 국민 화합과 국가 그 자체의 상징으로서 취임한 짐은 이 막중한 무게에 있어서 그 책무가 막중함을 알고 있습니다. 짐은 짐의 책임인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 권익을 보호하며, 영예로운 나라인 노르웨이의 이름을 드높이는 일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짐의 자리에서 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음을 그대들에게 고하는 바입니다. 짐은 짐의 통치에 있어서 국민화합과 국가 주권이라는 두 막중한 홀과 보주를 반드시 보호하라는 지엄한 헌법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하겠음을 선언합니다. 또한 문민의 통치라는 시대의 의제에 대해서 짐은 그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심히 알고 있습니다. 짐은 이 두 요구에 대해 왕의 역할로써 이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는 그릇으로써 국민의 화합이라는 역할에 충직하겠습니다. 짐은 짐의 통치에 있어서 네 자의 사자성어를 통치 이념으로 걸고자 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저의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不忘思義" 불망사의, 의를 항상 잊지 말고 생각하라. 이 말에는 두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선현이신 공자의 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해하지 아니하고, 사회의 질서를 지키라는 하늘의 지엄한 명령을 말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군신유의(君臣有義)를, 그리고 가장 작은 사회인 가족에게 있어선 동온하정(冬溫夏凊) 하는 것입니다. 이는 문민국가 실현이라는 시대의 의제에 있어서 가장 정도(正道)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의로는 하느님의 통치와 율법에 복종하고, 하느님의 은혜와 그 율법을 이루고 세상의 구원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살아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말합니다. 또한, 의는 믿음으로서 스스로를 의롭다 칭한다는 위대한 선현이신 마르틴 루터께서 말씀하신 부분까지도 포함합니다. 하느님은 공의로운 신이시기 때문에, 그 율법과 복음, 은혜는 틀린 적이 없기에 이를 믿고 따라 스스로를 의롭게 칭한다면 마땅히 문민국가라는 시대의 부름에 짐은,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저로서 그 책임을 다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두가지의 의를 잊지 말음으로서 우리 우리 노르웨이는 언제나 번성하여, 의인의 나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지혜로운 국민들과 그 맞추면 안 될 일이 없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땅 위에 꿈을 펼쳐놓는 전설이 울려 퍼지는 밤을, 바위가 많고 파도 속에 깎여 나갔지만, 수많은 사람의 집이 되는 이곳을, 우리나라의 평화가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나라 만대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2024년 1월 17일 하느님의 보호 아래, 노르웨이의 왕 테오필리스 |
퇴위사
주님의 인도에 따라, 겸손히 왕위를 내려놓는다. |
하느님의 보호 아래, 제 13대 노르웨이의 왕이자 초대 스웨덴의 왕인 나 테오필리스가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이신 하느님 아래서, 백성들에게 퇴위를 고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께 국왕으로써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벌써 제가 여러분들의 환대속에 입국하여 임금이 된지 1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의회는 9대의회로 시작하여 벌써 14대 의회에 이을렀습니다. 몇번의 해산도 있었으나, 꾸준히 민주주의가 유지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2차례의 개헌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도 꾸준한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 덕에 저희 왕실은 그 치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기존의 노르웨이 왕국의 왕실이었던 글뤽스부르크 선조(先朝)와 울덴부르크 선조(先朝)가 아닌 저의 가문인 마운트리기온 가문이 뿌리깊은 역사를 가진 노르웨이 왕국의 왕실이 될 수 있었던것은 국민 여러분의 동의와 환영 덕분이었습니다. 봄과 겨울이 한번씩 지나며 많은 이들이 우리 노르웨이를 거쳐갔습니다. 여러 위기와 분란도 있었지만 잘 헤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성숙해지는 노르웨이 국민 여러분의 의식 덕에 저희는 재위초에 있었던 전쟁도, 지금 외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도 휘말리지 않고 평화를 영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신 사랑과 관심덕에 역대 선왕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으나, 이제 현실적 이유에 의해서 더이상 직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게 되었습니다. 올해 군입대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직의 의무를 다하기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주신 신뢰에 충분히 보답하지 못해 송구스러우나, 직을 충실히 행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앉아있는것보다는, 더 지혜롭고 출중한 사람이 이 자리를 이어받는것이 옳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는 노르웨이 왕실의 평화로운 왕권의 이양에서 잘 증명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이루고자 한 바를 모두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저는 이제 노르웨이의 왕으로 시작하여, 스웨덴의 왕위를 통해 연합왕국의 왕실로 등극하기까지의 여정에서 뒷막으로 내려가고자 합니다. 언제나 그러했듯, 앞으로도 그러할 것처럼 우리 노르웨이는 적법한 절차를 통하여, 특히 헌법이 보장하는대로 원로원이 지혜로운 국왕을 다시한번 선출하여 기름을 부울것입니다. 큰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가장 위에 인용한 성경구절에서, 사울은 자신이 하느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고, 그분이 정하신 가장 중요한 율법조차 어기며 패역하였습니다. 그로써 그는 자신을 진실로 세우신 하느님에게서 '후회한다.(삼상 15:11)' 라는 평가를 들으며 새로 기름부음을 받을 사람을 찾으라 사무엘에게 이르십니다. 사울은 자신의 권력에 도취하여, 자신만만하고 실로 교만해졌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따를 준비를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결국 자신을 세우신 하느님에 의해 파멸을 맞이합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왕관을 겸손히 내려놓지 못했기에, 하느님에게 징벌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저 또한 이 이야기를 왕위에 있음으로서 새삼 깨닫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주신 신뢰와 사랑이 그릇됨이 없으나, 제가 그것을 감당하기엔 모자라고 실로 그 영광을 하느님께로 다 돌리지 못하였기에 제가 항상 떳떳한 임금이라 자랑하기에도 양심의 가책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울이 그러하지 못하였기에 저는 잠언에서 일러주는 지혜를 깨닫습니다. 저를 세운건 첫째로는 국민 여러분의 총의요, 둘째로는 헌법의 적법함이요,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느님이 세우신것이니 이 자리를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립니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는것은 아닙니다. 왕은 하느님이 세우셨기에 절대영원하다, 이런 주장은 입헌군주로써 적법하지 않습니다. 실로 배격해야할 주장입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의 총의와 동의를 통하여, 왕실원로들에 의해 승인되고 니다로스 대주교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하느님께 순종하기로 이 왕관을 통해 맹세하였습니다. 마치 출애굽기에 나오는 제사장의 이마에 쓰는 금패처럼, 왕관으로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맹세한 셈이 된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사람들의 발을 닦아주신것과 같이 저도 국민들에게도 항상 봉사하고 순종하는 존재로써 이 자리와 왕관의 무게를 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써 이 자리는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의 자리에 도취하여 그 자리를 세상높은줄 알았으니, 결국 파멸을 맞았습니다. 저는 그 선례를 따르지 않고자 합니다. 저는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으니, 다시 자리에서 내려와 다른 자리에서 섬김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시간부터 왕위에서 내려와 다시 국민으로서 봉사하겠습니다. 궐위된 왕위는 헌법에 따라 왕실추밀원 결정에 의해 계승될것이오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신뢰와 사랑 속에 왕위를 내려놓습니다. '나의 뜻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2025년 3월 20일을 기해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왕위에서 퇴위함을 선언한다. 2025년 3월 20일 하느님의 보호 아래,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왕 테오필리스 |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테오필리스 (Theophilis di Oldenburg-Mountrigion) |
세르오지오 (Sergio di Oldenburg-Mountrigion) |
마르첼로 (Marcello di Oldenburg-Mountrigion) |
안토니오 (Antonio di Oldenburg-Mountrigion) |
헬렌 판 블로멘투인 (Helen van Bloementuin) | |||
아우구스타 (Augusta) |
함부르크의 카를 요세프 (Karl Josef) | ||
함부르크의 로라 (Laura) | |||
아타나시아 마리아 (Athanasia Maria) |
알프레트 폰 휘텐베르크 (Alfred von Hüttenberg) |
요안니스 폰 휘텐베르크 (Ioannis von Hüttenberg) | |
소피아 폰 리트베르크 (Sophia von Rietberg) | |||
요안나 폰 휘첸도로프 (Joanna von Hötzendorf) |
하르트만 폰 휘첸도로프 (Hartmann von Hötzendorf) | ||
알렉산드라 뮐러 (Alexandra Müller) |
가문
가문은 생애에도 적혀있듯이 이탈리아의 도시인 피렌체의 외각에서 대장장이를 생업으로 삼았던 집안인 리조니(Rigioni) 가문이 본가이다. 리조니 가문은 시조인 발데마로 리조니(Valdemaro Rigioni)를 시조로 한다. 발데마로 리조니는 대장장이 길드의 장이었고 재산을 아들 둘에게 나누어 줬는데, 첫째에 대한 기록은 없다. 둘쨰인 중시조 파비오 리조니(Fabio Rigioni)는 갑옷공장을 밑천으로 금융업 가문으로 성장시켰다.
이후 르네상스의 꽃인 시기에 활동한 안드레아 리조니(Andrea Rigioni) 등이 있다. 안드레아 리조니 대엔 엄연한 도시귀족이 되었고 같은 도시귀족인 파치가문의 음모와 몰락,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몰락 이후 마지막 피렌체 공화정의 시뇨리아 체제를 향유하며 마운트리기온를 소유하는 등, 17세기 최전성기를 즐긴 가문이 되었다.
마운트리기온 가문은 안드레아 리조니의 증손인 아드리아노 리조니의 아들 파브리지오 리조니의 둘째 아들 페데리코 마운트리기온 대에 분가하는데, 이때 리조니 가문의 봉지였던 피렌체 근교의 언덕 위에 있는 요새이자 작은 마을인 마운트리기온를 1480년경 상속했고 이때 분가하여 마운트리기온(Mountrigion)가 되었다.
1498년 피렌체 공화국 정부가 전복되고, 마운트리기온 성을 다시 도시정부로 귀속하고자 음모를 꾸려, 이단혐의로 교회법정에서 이단이라 선언되었고, 공격당하였고 결국 알렉산데르 6세에 의해 파문되어 마운트리기온의 당주였던 페데리코 리조니의 첫째 아들 세르지오 마운트리기온는 1950년 교수형 후 화형당하였고 둘째 아들인 알프레도 마운트리기온는 생존하여 피아렌차로 추방되었다. 셋째 아들인 니콜라스 리조니는 무역에 종사해 도시귀족으로 남아있었으나 생매장 당하여 무덤을 찾을 수 없다.
피아렌차로 피렌체 공화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알프레도 마운트리기온는 계속해서 밀라노까지 전전하다가 열병으로 죽었고, 그의 장자인 살바토레 마운트리기온는 본가였던 리조니 가문의 적선으로 여비를 받아 독일로 넘어간다. 뮌헨에서 한자동맹에 참여하며 중심지로 부상한 울덴부르크로 금융업에 뛰어들고자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처음엔 도시정부에 기용되어 세리로 일했고, 이후 금융업에 참여하며 도시에 기반을 둘 수 있었다. 이후 마운트리기온 가문은 정략결혼을 통해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본가였던 올덴부르크 가문의 4번째 딸과 결혼해 이름값을 올렸다. 다만 울덴부르크 대공국의 통치가문은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이었기에 유효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도시의회에서 자기이름정돈 올릴 정도가 된 것이다.
이후 북독일 연방에 가담하는데 찬성표를 던지며 정부의 환심을 샀고, 북독일 연방을 추진하는데 동조하고 투기하며, 독일제국이 세워질때 마운트리기온의 땅이 봉지라는 어거지 주장이 먹혀서 남작작위를 받아냈다. 당시 독일정부는 작위를 좀 뿌리며 재정을 채우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에 편승했다고 볼 수 있다.1914년 제1차 세계대전때 징병을 피하기 위해 뇌물을 썻고, 군수산업에 뛰어들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패전할거같다는 정보가 극비로 돌았고, 재산을 처분하며 현금화해 스위스에 보내놓은 융커계급의 마르첼로 리조니는 제1차 세계대전이 패배하자 가족을 데리고 독일을 버린채 스위스로 피신한다. 이후 제2차세계대전동안 스위스에 징병되는 일도 있었으나, 큰 문제 없이 전쟁을 마칠 수 있었다. 오히려 영국의 전쟁채권으로 나름의 배팅에 성공한 편이었다. 마르첼로 마운트리기온는 2남 1녀를 두었고 장남이었던 세르오지오 마운트리기온는 외동 테오필리스를 낳았다.
현재 마운트리기온 가문의 봉토인 몬테리조니는 이탈리아 정부의 소속이며, 기념비 하나가 세워져있다. 본가인 리조니 가문과는 관계가 현재 없다.
여담
- 신학자 칼 바르트와 대단히 닮았다. 스위스 출생인 점과 스위스 개혁교회 소속이라는 점 등, 칼 바르트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하기도 하였다.
- 말은 없지만 하루에 한번씩 밴드를 관찰하고 간다.
- 개인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왼쪽에 노르웨이를, 나머지 위쪽과 오른쪽에 스웨덴의 상징을 배치하였고 그 가운데에 가문 문장이 배치되어있다.
- 즉위 1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우표가 제작된 적이 있다. 노르웨이 우정청 즉위 1주년 기념우표
- 왕실 전통에 따라, 이(李)씨로 된 한문명을 지었으며, 이희철(李熙喆)이다. 현재 활동명으로도 사용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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