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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반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7월 18일 (금) 07:48 판 (→‎남명 정권과 장헌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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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한병조(滿漢竝朝)

순나라의 화북 통일

1642년 송금 전투의 패배로 홍승주(洪承疇)가 지휘하던 명의 정예군 10만 명이 궤멸되면서 명 조정은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명군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이자성(李自成)은 세력을 모아 재기하여 낙양·개봉을 함락시켰으며 1644년 서안을 점령한 뒤 이를 수도로 삼아 대순(大順)을 건국, 황제를 칭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이자성의 군대는 그해 4월 자금성을 함락과 동시에 북경을 점령하였고 숭정제는 이를 비관하며 자결한다.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은 약탈을 엄금하고 도성 내 민심을 다독이며 무너진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는 동각대학사를 지낸 구유(丘瑜)를 좌승상에 임명하는 등 명 관료들을 재등용하는 한편, 반군에 합류했던 지식인들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공신들을 치하하여 내부 세력의 결집을 유도했다. 북경 입성 후 가장 먼저 해결할 과제는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였다. 이자성은 그의 친부 오양(吳襄)을 우대하며 투항을 권유했고 그가 이를 받아들이자 평국공(平國公)으로 봉한 뒤 북직례[1] 일대의 방비를 맡겨 청군의 침공을 대비토록 했다. 이렇게 화북 일대를 손에 넣은 이자성의 다음 목표는 화남 지방이었다.

남명의 몰락과 장헌충의 저항

숭정제의 자결 후 만력제의 손자인 주유숭(朱由崧)이 남경에서 홍광제로 보위에 오른다. 신하들은 임시 조정에서도 정쟁을 일삼았지만, 그는 이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으며 사치와 향락에 몰두했다. 1645년 5월 유종민(劉宗敏)이 이끄는 순군이 과주(瓜洲)에서 장강을 건너 남경으로 향하자 홍광제는 소수의 신하들만 대동한 채 도주하였고 도성에 남아있던 수많은 문무백관이 투항하면서 손쉽게 남경이 함락되었다. 도주한 홍광제는 태평부[2]를 거쳐 황득공(黃得功)의 군영까지 도망쳤지만 끝내 사로잡혀 이듬해 남경에서 처형되었다.

홍광제 사후 명 부흥세력은 당왕 주율건(朱聿鍵)을 융무제로 추대하였다. 그러자 절강에 있던 노왕 주이해(朱以海)는 그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감국(監國)을 자칭하면서 황위를 두고 내분이 발생했다. 그 사이 순군은 1646년 절강과 복건을 연달아 함락시킨 뒤 융무제를 사로잡았고, 주이해는 간신히 주산도로 도망갔다가 1651년 금문도에서 정성공 세력에 합류한다. 융무제 역시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에 그해 11월 광주에서는 동생 주율오(朱聿鐭)가 소무제로, 조경(肇慶)에서는 계왕 주유랑(朱由榔)이 영력제로 각각 즉위했다. 둘은 서로가 참칭했다고 주장하며 대립하다가 광주 삼천에서 전투를 치뤘고 소무제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지만, 12월 말 순군이 소무제의 군대를 격파한 뒤 광주를 점령하였고 소무제는 곧 자결을 택했다. 소무제 사후 분열되었던 명 부흥세력은 뒤늦게나마 영력제를 중심으로 결집했으나 이미 대세는 크게 기울어졌으며, 유일하게 남은 저항 세력은 정성공 뿐이었다.

한편 이자성과 함께 민란을 주도하던 장헌충(張獻忠)은 1641년 양양을 함락시키고 1643년엔 무창에서 대서왕(大西王)을 칭했다. 이듬해 8월 성도부를 함락시키면서 사천 지방 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은 그는 나라 이름을 대서(大西)라 하고 황제를 자칭했다. 그 뒤 남명의 잔존세력들을 흡수하며 세력을 키우고 명의 관제를 따라 행정 질서를 정비했다. 이자성에게 있어 장헌충은 청나라를 제외한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1. 北直隷, 명의 수도 순천부 주변 지역인 허베이·허난·산둥 등을 통틀어 일컫는다.
  2. 太平府, 명나라 시기 장강 하류 남안에 위치해 있던 행정구역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