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크 공화국 선언 쿠데타 사태 Rànké Ripūrisa hênki Ku'tet | |
---|---|
![]() | |
기간 | |
2023년 6월 28일 6시 ~ 2023년 6월 30일 1시 12분 (약 3일) | |
유형 | |
반국가 쿠데타 | |
장소 | |
랑크 비넨트 | |
원인 | |
국민민주당 쇼스페링츠 대표의 공화주의 정책의 실패 | |
대치 세력 | |
쿠데타군 | 정부군 |
![]() |
![]() |
지휘관 | |
![]() ![]() ![]() |
![]() ![]() ![]() |
병력 | |
랑크 제위군 육군 제2보병사단 (제1연대, 제2연대 6대대, 10대대, 12대대, 13대대, 제4연대) 랑크 수도방위군 제8사단 제위군 제13연대 총 8천 명 |
랑크 황제 친위대 랑크 수도방위군 제5사단 제정당군 일부 총 6천 명 |
피해 | |
부상 3명 |
사망 1명, 부상 5명 |
결과 | |
쿠데타 세력 진압, 쇼스페링츠 당대표 체포 | |
영향 | |
2023년 랑크 반선 제정파 압승 황권 강화 재확인 |
개요
랑크 공화국 선언 쿠데타 사건은 여당인 국민민주당의 당대표 쇼스페링츠가 당 내에서 급격한 공화주의 정책들을 시도하다 실패하여, 공화국을 선포하고 군사 반란을 일으킨 사건. 당시 요시노치 같은 일부 같은 노선 의원들과 함께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 나라를 세울 의도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전개
쿠데타 발생 전
국민민주당의 새 당대표로 선출된 당 내 소수파 쇼스페링츠를 중심으로 한 당 지도부는 공화주의를 표방하며 나섰다. 쇼스페링츠는 황실관리법, 행정 권한에 대한 특별법, 황실과 귀족 직위에 대한 특별법 등을 제안하였으나, 그 내용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반국민 정서라서 당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주류였고 특히나 상원 원내대표 아메리트를 중심으로 한 상원 원내지도부는 특히나 반대했었다.
이 외에도 우리민주당과 형성한 민주국가의회협의체, 시민단체와의 공화국시민을위한연대 등 공화주의 정책 협의에서도 진전을 보이지 못하자, 쇼스페링츠는 답답함을 표출해왔다. 쇼스페링츠는 측근 의원인 요시노치와 함께 대학 동문이자 선후배 관계인 육군 제2사단 사단장 하이소이프와 만나 오찬을 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쇼스페링츠는 자신의 생각과 고충을 털어놓았다. 하이소이프는 강력 공화정 지지자였는데, 쇼스페링츠에게 은근히 군사 행동을 제안하게 된다. 당시 요시노치는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쇼스페링츠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 2023년 6월 재보궐 선거에서 일부 지역에서 제정당에게 참패를 당하며 수성에 실패하자, 쇼스페링츠는 당 내 사퇴 압박과 함께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후 쇼스페링츠는 하이소이프를 몰래 찾아가 진지하게 군사 행동을 논의하게 된다. 이때 다양한 군 작전이나 규모, 계획 등을 물어봤다고 한다. 하이소이프는 자신의 후배인 수도방위군 제8사단 사단장 코하츠를 거의 반 협박하여 군사작전실로 들어오게 하였고, 이어 쇼스페링츠는 요시노치와 쇼스페링츠의 충성파 하원 의원 8명과 함께 본격적으로 군사 행동을 직접 계획하게 된다.
처음 요시노치는 반대했지만 쇼스페링츠의 지속적인 설득에 결국 찬성했고, 당 차원이 반쇼스페링츠파가 대다수임을 고려하여 당에는 알리지 않고 별개로 활동하기로 하였다. 랑크는 각 정당별 소수의 경호 병력을 둘 수 있어 민주당군이 100명 남짓 되지만 이들은 활용하지 않았다.
제2사단 병력들을 시작 즉시 의회와 제정당사로 보내고, 수도방위군 병력들로 시가지와 주요 시설을 점령해나가는 수도 진공 작전을 계획했다. 이후 쿤코드 주에 주둔하는 제13연대의 연대장 테폴이 쇼스페링츠와 접선에 성공, 법원과 집회가 가능한 대형 광장 등을 점령하기로 한다. 또한 이후 있을 교전을 대비하여 육군사령본부와 기지를 확보하는 것까지 계획하고, 28일 새벽에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모의한다. 그런데 지방에서는 군사 계획을 세우지 않았는데, 수도인 비넨트에서 속전속결로 의회와 황궁만 장악하면 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전황
6월 28일
쇼스페링츠는 사전 합의한 제2사단 일부 연대들과 코하츠 사단장과 협의를 끝내 미리 매수한 수도방위군 병력들과 새벽에 접선, 비넨트 주요 시가지를 점령하고 길거리를 행진하여 의회건물까지 나아갔다. 다만 제2사단의 모든 병력이 움직이지는 못했는데, 당일 출동 명령에 일부 연대장들이 필사적으로 항명하자 급해진 하이소이프가 일부 연대만 데리고 출동한 것이었다. 당일 아침 7시, 의회 앞에서 대시민방송을 통해 랑크 공화국을 선포함을 알리고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자신을 따르는 일부 의원들과 군 수장들과 의회에 입성하여, 의회를 임시 정부 청사로 삼겠다고 선언하고 군대를 배치하였다. 당시 의회는 아직 의원들이 모두 출근하기 전이고 벌써 출근을 했거나 건물 내에 남아있던 의원들을 일시 구금하였다고 한다. 다만 쇼스페링츠가 랑크 공화국을 선언하고 선포한 비상계엄이 법적 효력이 있을 리도, 군들이 움직일 리도 만무했다. 쿠데타 군만이 움직였고 오히려 이 소식을 접한 일부 사단들이 재빨리 진압을 준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의회 내에서 본인들끼리 쇼스페링츠를 임시 통령으로 선출하고, 국호를 랑크 국민 민주 공화국으로 정하고 국기를 내걸었다. 제정당 당사를 동시에 점령하여 모든 제정당 직원들을 일시 감금했고 주요 제정당 인사들을 체포했다. 급하게 이 소식을 들은 제정당 의원들은 제정당 당사도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듯이 궁으로 달려가 크라인 2세 황제한테 이 소식을 알리고,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자 쇼스페링츠는 군을 이끌고 궁전으로 가서 옛 봉건제도와 제국주의의 상징인 황제를 폐위한다는 목적으로 짓쳐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크라인 2세 황제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친위대를 이용해 쿠데타군을 막고 진압하라 이르기에 명한다. 급히 황궁 가장 주변에 있던 수도방위군 5사단 사단장 소로장과 친위대장 라이플이 만나 병력을 합쳐 우선 황궁 주변 방어에 들어갔다. 당시 시간이 평일 출근시간이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혼란은 엄청났다. 쿠데타군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공문을 내렸지만 대부분의 기업과 학교가 휴업령과 휴교령을 내려 출근길 대혼란은 피하게 되었다.
쿠데타군이 궁전 1km 밖 플라시오스(Pélasios) 거리에 이르렀을 때, 친위대와 수도방위군 5사단의 연합군과 마주쳐 대치를 이어갔다. 이때, 크라인 2세 황제가 발포 및 살상을 허용하면서 두 군 사이에 작은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한편 궁전에서는 궁 대변인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 사태를 알리고 궁에서는 이 사태를 반란으로 지정하기로 했으며, 시민들에게 외출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고 행동 강령들을 반포했다. 이어 황제의 옥음 방송을 라디오와 TV를 통해 긴급 속보로 송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피즈 내각은 이 소식을 듣고 우선 쿠데타에 대해 비민주적 헌정질서 파괴 행위라며 강력하게 비판하고 소위 랑크 공화국 같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했다. 그리고 황궁과 긴밀히 협력하여 진압에 힘쓴다고 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총리 경호병력과 제5연대 병력을 이용하여 정부 공사 방어에 들어갔다.
쿠데타군과 진압군 사이 플라시오스에서 격전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진압군 중 한 명인 콜시 하사가 총탄에 가슴을 맞아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쿠데타군이 물대포와 전차를 앞세워 위협하자, 병력에서 밀리는 진압군은 플라시오스를 포기하고 황궁으로 후퇴해나갔다. 당시 하이소이프는 각 군단과 친위대장에게 연락하여 '아군끼리의 격전을 피하려면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며 진압군을 무력화하여 황궁으로 진입하려고 했다.
테폴이 이끄는 제13연대는 육군사령본부에 잠입하여 지휘부 건물을 점령하였고, 비젠트 광장에 병력을 배치하여 민간인을 통제하였다. 수도방위군 제8사단은 군대를 반으로 갈라 청사 등 주요시설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최대 언론사인 SVT마저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본군단인 제2사단이 황궁과 정부만 이대로 진격하여 점령하면 쿠데타군의 승리가 코앞이었다. 이를 저지하려는 진압군과 겔럭(Geluck)에서 격전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6월 29일
본래 쿠데타는 당일에 빠르고 신속하게 반대 세력을 제압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겔럭 전투에서 사망자는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시가전의 형태로 진압군이 엄청난 지연전이 펼쳐지자 쿠데타군은 막상 제일 중요한 황궁을 점령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고, 대치 상태는 다음날인 29일까지 이어진다. 쇼스페링츠는 병력을 나누어 총리실로 향하게 하여 정부를 공략했지만, 앞서 말한 제5연대 병력에 의해 장악에 실패하고 만다.
그사이 제정당은 제정당군 200명 정도를 동원하여 제정당사를 탈환한다. 국민당은 긴급의원총회를 열고 쿠데타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냈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후 쿠데타군이 국민당사까지 점령하게 된다. 다만 육군 본부가 컨트롤 타워를 잃어버린 대신, 시간을 확보한 공군이 공군 본부에서 제4비행단, 제6비행단, 제1공수부대를 활용하여 수도 비젠트의 반란군을 포위하여 지원하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는 계엄군들이 각 청사를 방어하기 시작했고, 전국 각지에서는 쿠데타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전국에서는 크라인 2세가 선포한 계엄령에 의해 계엄군에게 통제를 당하고 있었다. 하피즈 총리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하게 해군과 공군 참모총장과 회동을 진행하여 쿠데타 진압에 만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 와중에 반란군인 수도방위군 8사단과 웨칠 지방에서 올라오던 제위군 보병 제12사단이 한동안 대치하며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소규모 전투가 벌어져 1명이 다쳤지만, 양 군 사령관들의 합의로 서로 10km가량 물러가며 대치 상황은 끝이 났다.
이렇다 할 진전이 없을 때, 크라인 2세 황제와 하피즈 총리는 공동 성명을 통해 쇼스페링츠를 반란죄의 반란 수괴로 규정하며 생포하여 체포명령을 내리게 된다. 문제는 쿠데타군 내부에서 터졌는데, 제12사단 대치하던 수도방위군 8사단의 병력 절반이 무장 해제하여 항복, 8사단 사단장인 코하츠는 항복 체포되어 압송되었다는 것이다. 남은 8사단의 병력 절반만 제2사단과 쿠데타군의 제13연대에게 할당되었지만, 병력들은 정당성 없는 쿠데타에 전의를 상실하여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쇼스페링츠는 기존 대치를 풀고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점령한 육군 본부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에 진압군은 육군 본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6월 30일
쿠데타군의 병력 중 일부가 무장 해제 후 진압군에게 항복하였다. 기존에 육군 본부를 점령하고 대기 중이던 제13연대와 나머지 제2사단 중 소수만이 남게 되었다.
현지 시각으로 0시 16분, 진압군은 욕군 본부 건물 내 남은 쿠데타군에게 최후 방송을 시작했다.
"지금 당장 무장 해제 후 항복하면 아군끼리의 격전이라는 최악의 상황 만은 피할 수 있다. 정확히 30분 후에 실탄 발사를 포함한 모든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그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반란군에 있고, 황제 폐하는 반란군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쇼스페링츠는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동료 의원 요시노치가 계속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하이소이프 등은 항전을 주장했고, 요시노치는 0시 33분 몰래 육군 본부 건을 빠져나와 진압군에게 항복했다. 이때 쇼스페링츠는 직접 건물 구석구석을 돌고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화기를 점검하며 병사들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0시 46분, 진압군들은 일제히 건물을 향해 사격을 개시하고 바리케이트를 뚫기 시작했다.
진압
쿠데타군은 이미 대부분 전의를 상실했고 이미 병력을 규합하여 각종 장비로 무장한 진압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쿠데타군은 말 그대로 싸우는 척만 했으며, 진압군도 건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중간에 두 세력 간 잠시 격전이 벌어져 양 측에 총상자가 생기기는 했지만, 아주 일부의 경우였다. 진압군이 육군 본부 건물 전체를 점령했을 때, 건물 맨 윗층에서 전세를 관망하던 쇼스페링츠를 발견, 헌병대에 의해 쇼스페링츠와 하이소이프 등을 체포, 상황을 종료시키며 3일에 거친 쿠데타를 공식적으로 진압하였다.
막상 쇼스페링츠는 체포 당시 순순히 응했다고 한다. 어짜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순순히 체포 영장을 받아들였다고. 다만 하이소이프는 격렬히 저항했는데, 이에 헌병대 인원 5명이 투입되어 겨우 하이소이프를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쿠데타 잔존 세력이 있었지만, 이마저 쇼스페링츠 체포 이후 자진 해산하거나 항복하였다.
진압 후
수도인 비넨트 전역에는 크라인 2세 황제가 내린 계엄령이 지속 유지되었고, 주요 언론들은 쿠데타의 전모를 실시간 보도하며 반란의 정당성 부족과 시민 피해 최소화를 강조했다. 진압 다음날 부터는 모든 학교가 정산 등교 결정을 내렸으며, 학교 주변 군경들의 보호 아래 일명 '질서정연'한 출퇴근이 이루어졌다. 시민들 사이에선 안도와 분노가 교차하였으며, 일부는 황제에 대한 신뢰를 재확인했고, 일부는 정치권 전체에 환멸을 표하기도 했다.
이후 군 차원에서 쿠데타 가담자 및 동조자에 대한 본격적인 검거 작전이 이어졌다. 그 결과 비넨트 내에는 150여 명의 군/정 인사가 체포되거나 조사를 받았다.
목적
의혹 및 논란
반응
제정당, 황실은 물론이고, 내각, 의회, 심지어 국민민주당까지 본 사태를 확실히 규탄하고 나섰다. 심지어 쿠데타 다음날에는 쿠데타 반대 시위까지 벌어져 시민들까지 고개를 돌렸다. 쿠데타군의 편을 들어준 세력은 거의 없었다. 국민당도 재빠른 손절 이후 당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고, 이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황실
• 크라인 2세 황제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진압에 나섰고, 최초로 단독 성명문을 기재하였다.
• 콜라브 황실 대변인은 "있을 수 없는 헌정파괴범죄"라면서, 즉시 군대를 돌리고 항복하라고 밝혔다.
• 바크 페리온 왕이자 황태자는 "정신나간 국민당과 쇼스페링츠"라는 원색적인 비난글을 SNS에 기재하였다가 삭제하였다. 이후 페리온 국왕 자격으로 공식 성명문을 내며 "반드시 쿠데타를 진압하고 헌정질서와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 코이스 황후는 자신의 SNS에 "황후로서 모든 국민들이 다치지 않고 평화롭게 사태가 마무리 되기를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
내각
시민사회
• 6월 30일 저녁, 비넨트 대광장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집결해 '공화 반대, 황정 수호' 집회를 열었다.
• 특히 청년 세대 사이에서는 "다시는 위헌, 위법적인 쿠데타는 없어야 한다"는 구호가 퍼졌고, 헌정수호시민연대가 결성되어 이후 반쿠데타 캠페인을 이끈다.
해외
• 에니에 연방 총리 키어슈는 "우방국 랑크 시민들의 힘을 믿는다"라는 입장을 발표하며 즉시 황제 정통성을 인정하고 쿠데타를 규탄했다.
• 바네리아 왕국 국왕 클레이포네이온 1세는 "황제 폐하의 안위가 걱정된다. 그러나 랑크는 그것을 이겨낼 힘이 있고, 바네리아는 언제나 랑크와 함께할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 카스티나 대통령 짐머렝은 "랑크의 비상사태가 우려되는 상황"이라면서도, "카스티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랑크의 가장 곁에 있을 것이며, 랑크의 힘을 믿는다"라는 트윗을 작성하였다.
• 일부 급진 공화주의 계열의 소규모 국가들은 유보적 입장을 보였으나, 이후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며 대부분 철회하였다.
• 국제 언론들은 “황제제 국가에서 민주적 의회가 반쿠데타에 기여한 드문 사례”라며 랑크 제도의 이중 균형을 조명하고 일제히 보도에 나섰다.
평가
대부분의 국내외 언론과 정치학자들은 이번 사태를 공화적 급진성의 폭주가 민주주의의 반역으로 이어진 사건으로 평가했다. 쿠데타 세력은 제도권 내의 정당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채 군사적 행동으로 정권을 찬탈하려 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무능과 조급함의 결과로 비판받았지만, 황제는 군 통수권자로서의 결정력, 옥음 방송을 통한 국민 통합, 절제된 진압 명령 등을 통해 상징적 권위 이상으로 실질적인 지도력을 입증했다고 정리한다.
향후 전망
내란/반란죄 수사 적용
진압 이후 체포된 쇼스페링츠는 곧바로 다티즈 서부 법원에서 구속 영장이 발부되어 구속되었고 반란수괴 현행범으로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검찰 측에서는 반란죄와 내란죄를 두고 고민을 했고, 반란죄를 적용하여 수사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사건 자체를 군사검찰에 이첩시켰다. 앞으로 모든 수사와 재판 자체를 군사검찰와 군사법원에서 받게 되었다.
쇼스페링츠는 변호사를 선임하였으며 동시에 국민당 당대쵸 축출 결정에 대해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1심에서, 군사법원 결정 하 사형이 선고되었다. 쇼스페링츠의 변호인단은 즉각 항소를 결정했다.
제위제 개헌 논의의 강화
황실 권위가 높아진 와중에도, 공화주의 진영에서는 황제의 계엄령 선포 및 군사 개입 권한이 과도하다는 비판도 제기되기도 하였다. 일부 세력은 황제의 군 통수권 제한, 계엄 선포 요건 강화 등을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할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군 개혁
군에서는 이번 사건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하다. 군 내부의 정치적 개입 차단을 위한 군사 중립법, 군 통제 위원회 창설이 논의되고 있다. 제2사단은 해체될 위기에 놓였지만, 2사단 지휘부를 전원 군사재판에 회부시키고 지휘부를 물갈이 하는 것으로 끝내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