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마니아 제국
Germanianisches Kaiserreich
IMPERIVM GERMANIAE
국기 국장
Kaiser ist unsere Stärke
황제가 우리의 힘이다
국가 Königgrätzer Marsch
국조 검독수리
지도
1857년 - 2031년
건국 전 멸망 후
프로이센 게르마니아 합중국
유럽 안보 동맹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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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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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2,142,132km2
수도 베를린
최대 도시
접경국 러시아, 프랑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루테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스웨덴, 네덜란드, 제노아, 파르마, 모데나, 교황령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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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169,000,000명
인구 밀도 78.89명/km2
인종 구성 독일인 62.6%
폴란드인 19.0%
체코인 6.3%
덴마크인 2.7%
스웨덴인 1.9%
이탈리아인 1.6%
프랑스인 1.4%
기타 4.5%
공용어 독일어
지역어 프랑스어, 체코어, 리투아니아어, 라트비아어, 이탈리아어, 스웨덴어, 슬로베니아어, 폴란드어, 에스토니아어, 헝가리어
공용 문자 라틴 문자
종교 국교 없음 (정교 분리)
분포 개신교 51.6%
로마 가톨릭 32.2%
정교회 4.0%
유대교 1.6%
기타 0.6%
무종교 10.0%
군대 게르마니아 황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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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전제군주제(외견적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국성 호엔촐레른 (Hohenzollern / 호언촐런)
입법부 게르마니아 제정 의회 (상원)
게르마니아 민정 의회 (하원)
국가 원수 (황제) 라인하르트 2세
정부
수반
총리 디트하르트 로스바흐
군부총장 공석[1]
사법총장 드라크 폰 브라이텐베르크
집권 여당 전독일제국당 게르마니아 민주당 사회민주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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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PPP)
£13,520,000,000,000 | 세계 4위
1인당 £80,000
GDP
(명목)
£11,221,600,000,000 | 세계 4위
1인당 £66,400
신용 등급 무디스 A1
S&P A+
Fitch A+
공식 화폐 게르마니아 탈러 (GET)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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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형 SI 단위
시간대 GMT+00:00 ~ GMT+02:00
법정 연호 게르마니아 황력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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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 1972년
대한수교 1957년
무비자 입국 양국 모두 90일
ccTLD
.ge
국가 코드
GER, DEU, GKR, 320

개요

중부 유럽에 위치한 전제군주제 국가였다.

상세

로마 제국 이후 등장한 유럽의 제국중 가장 규모가 컸다. 총 1억 7천만명에 달하는 인구와 군국주의적 정치에 기반한 세계 최강의 군대, 영국과 교황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을 그 아래에 둔 외교력 등으로 인하여 현재 초강대국중 하나로 평가받았었다.

본래 게르마니아는 유럽의 중심이 되는 국가가 아니었다. 게르마니아라는 정체성이 드러난 것은 0년의 토이토부르크 전투 때의 일이나 이때까지만해도 원시 부족에 지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게르마니아가 유럽 내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한 것은 게르마니아를 구성하는 국가중 하나인 프로이센이 7년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의 일이다. 프로이센은 7년 전쟁과 뒤이은 제1차 유럽 전쟁에서 프랑스 혁명군을 격파함으로서 패권국으로 올라섰다. 이후 국명을 프로이센에서 "게르마니아 제국"으로 바꾸고,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 터키와의 전쟁이었던 제2차 유럽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 그리고 소수 민족 독립 운동을 탄압하면서 공포 정치가 단행되었고 이는 수많은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 저항군에 대한 탄압으로 표면상으로는 저항이 존재하지 않는 안정적 국가였으나, 군부의 지나친 정치 간섭과 부패한 기업인들의 정경유칙/군경유착 등으로 인해 내부적으로는 썩어들어가고 있던 국가 그 자체였다. 결국 2031년, 선황 라인하르트 1세를 시해하고 황위에 오른 라인하르트 2세에 의해 제정과 억압적 군국주의 체제가 폐지되고 민주적인 공화정 체제가 세워지면서 게르마니아 합중국이 건국되었다. 이후 게르마니아 합중국이 멸망하고 브리타니아령 게르마니아 총독령이 설립되며 현재에 이른다.

내부적으로는 전제군주제와 귀족 과두정에 가까운 정치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매우 호전적이고 군국주의적인 군사 정책을 통하여 독자적 패권을 확보하고 있다. 경제, 국방, 외교 등에 있어서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쥐어잡고 있는 영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강대국이었다. 국방으로만 치면 영국과 싸워도 영국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만큼의 강력한 국방력을 추구하고 있었다.

UN의 상임이사국이며, 유럽 안보동맹의 회장국이었다. 국성은 호엔촐레른(Hohenzollern). 한국에서는 독일, 독일 제국, 게르만, 게르마니아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독일 현지에서는 Deutschland라고 하기도 했다.

상징

역사

7년 전쟁과 제1차 유럽 전쟁에서의 승리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프리드리히 2세는 황력 1795년 붕어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동성애자였던 관계로 자식을 낳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는 가운데 프리드리히 2세의 형제중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루트비히 폰 호엔촐레른이 왕위를 이어 하인리히 1세가 된다. 그는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장군 출신이었다.

1798년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 제정이 폐지되었고, 이후 자코뱅당이 집권하며 과격한 공화주의적 개혁이 이뤄졌다. 이를 우려한 영국, 오스트리아 등 여러 왕실 국가들이 공화주의의 확산을 위해 프랑스를 공격하는 프랑스 혁명 전쟁을 일으켰는데, 프로이센 역시 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가까이 붙어있었던 국가인만큼 대프랑스 동맹중에서도 특히 많은 군사적 영향력을 가졌다. 여기에는 하인리히 1세의 강력한 군국주의 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플뢰뤼스 전투에서 네덜란드를 침공하려는 프랑스군을 저지한 프로이센군은,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끌었던 이탈리아 원정군을 궤멸시키고 1805년 8월 5일 카스틸리오네 전투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포로로 붙잡았다. 1809년 파리를 점령하고 정부를 해산시킨 프로이센-오스트리아-영국 연합군은 전쟁 승리를 선언했다.

1811년 하인리히 1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 하인리히 2세가 즉위했다. 하인리히 2세의 치세는 1844년까지 이어졌으며, 하인리히 2세 시대에는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특히 독일이 크게 발전하던 때였다. 영국에서 발명된 증기 기관은 프로이센에도 소개되어 프로이센을 유럽 내에서 가장 활발한 제조업 국가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하인리히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하인리히 3세의 시대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프로이센이 최대 중흥에 이른 시점이었다. 1857년 독일에서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나자, 하인리히 3세는 이들을 탄압하는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자들의 의견을 일부 수용하여 프로이센의 정치 개혁을 이끌었다. 그중 하나는 제정 선포로,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났던 그 해 하인리히 3세는 게르마니아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프로이센의 칭제(稱帝)는 "제국은 오직 로마와 신성로마를 이은 오스트리아만이 할 수 있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당시 유럽에 큰 파장을 몰고왔다.

오스트리아와의 경쟁과 제2차 유럽 전쟁

오스트리아만이 칭제를 할 수 있다는 인식을 깨고 게르마니아 제국이 세워진 시점부터 독일의 주도권 경쟁을 두고서, 오스트리아와 게르마니아의 기나긴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1904년, 게르마니아와 오스트리아 제국간의 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은 시작 7일만에 너무도 큰 피해를 우려했던 양국 수뇌부들이 일시 협정을 맺고 휴전하여 중단되기는 하였으나, 유럽 내에서 곧 큰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사건이 되었다.

그러던 1921년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태자였던 리하르트 요제프 폰 호엔촐레른이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던 크로아티아에서 괴한의 흉탄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게르마니아는 이를 오스트리아의 사보타주로 간주하고 즉각 오스트리아와의 휴전 협정을 파기하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였다. 게르마니아의 북부 팽창을 우려한 스웨덴이 오스트리아와 연합을 맺고, 반대로 스웨덴을 견제하려는 영국이 게르마니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점차 이 전쟁은 큰 규모로 커져나갔다. 이 전쟁을 제2차 유럽 전쟁이라고 부른다.

제2차 유럽 전쟁에서 우세를 점한 것은 군사적 우위에 있었던 게르마니아로, 처음에는 참호전으로 인하여 양측간의 소모전 양상이 드러났으나, 1926년 독가스와 전차의 발명으로 오스트리아는 게르마니아에 밀렸다. 동시에 게르마니아와 대치했던 프랑스 역시 스페인-게르마니아-영국군의 압박 속에서 사실상 패전하였고, 1928년 오랜 전쟁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오스트리아-오스만-프랑스-이탈리아-스웨덴 동맹은 영국-스페인-게르마니아-러시아 동맹과 종전 협정을 맺으면서 제2차 유럽 전쟁은 게르마니아측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2차 유럽 전쟁의 의의는 이전까지 합스부르크 및 오스트리아에 주도권이 있던 독일을 호엔촐레른 가문의 게르마니아 제국이 뺏어왔다는 것으로, 본격적인 패권 국가로서의 게르마니아 제국 역시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유럽 안보 동맹의 체결 그리고 러시아와의 전쟁

이때가 게르마니아 제국의 최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게르마니아 제국은 팽창하는 국력을 바탕으로 유럽 국가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였다. 붕괴된 오스트리아 제국을 자국의 영토로 합병하였으며, 스위스, 체코, 이탈리아 북부 등의 지역을 점령하면서 유럽 내 최대 국가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동부에는 러시아 제국이, 서부에는 대영제국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패권을 이루기 어려웠다. 이런 어려운 사정을 타파하기 위하여 리하르트 2세의 치세에 독일과 이해 관계가 맞는 국가들을 묶어 만든 군사 동맹이 유럽 안보 동맹이다.

유럽 안보 동맹은 초기에는 헝가리, 스페인만이 가입국이었으나 이후 약소국가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가입하게 하였다. 이로서 유럽 안보 동맹과, 게르마니아의 속국인 프랑스 등의 지역을 모두 포함하면 교황령, 러시아 제국, 브리타니아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게르마니아에 종속된 상태가 되었다.

게르마니아는 러시아 제국이 심각한 빈부격차 문제와 제국 내에서 성장하던 사회주의자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것을 틈타, 러시아 제국 침공을 감행하였다. 여기에는 러시아 제국과 경쟁하던 브리타니아 제국도 참여하였다. 점점 국력이 약화되어가던 러시아 제국은 게르마니아의 침공이 이뤄지자마자 소수 민족들의 폭동,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반란으로 붕괴되어버렸으며 1965년, 전쟁 개시 4년만에 게르마니아는 러시아 황제를 포로로 잡아 항복 문서에 서명케하였다. 이로서 동유럽의 패권 역시 모두 게르마니아로 향하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한 군국주의 체제의 성립

1975년, 게르마니아 적군파의 공격으로 인하여 정부 청사에 폭탄테러가 일어나, 황제인 리하르트 2세와, 법무장관/총리가 사망하고 부총리가 부상을 입는 피의 화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게르마니아 황제의 테러로 인한 사망은 전국민적인 충격을 몰고왔으며 제국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과 제국 경찰간의 내전에 준하는 시가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사회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공화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제국에 대한 항거 역시 심해졌다. 치안은 매우 불안정했고 설상 가상으로 소수 민족들의 독립 운동까지 일어나면서 게르마니아 제국은 위기를 맞았다.

결국 리하르트 2세의 뒤를 이은 황제 라인하르트 1세에 의해 대숙청이 일어나면서 공포 정치가 이뤄졌다. 이 시기 사회주의 세력은 거의 씨가 말라버렸으며, 소수 민족 독립 세력 역시 탄압으로 인하여 대학살을 면치 못했다. 단순한 교전중 사망 뿐만 아니라 공포 조장을 목적으로 억울하게 살해된 민간인만하더라도 대략 250만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이 시기 황제로의 권력 집중이 이루어져, 안그래도 전제군주적인 성격이 강했던 게르마니아 제국은 라인하르트 1세 개인의 리더십으로 운영되는 철권 독재 국가로 바뀌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정당들을 마음대로 해산하고, 자유주의 성향의 현직 장관까지 이적 행위를 빌미로 숙청시켰다. 결정적으로 군부를 손에 넣었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군부는 본래 내각, 황실, 사법원에서 각각 1명씩 구성하는 군부위원장들의 삼두 정치로 운영되었는데, 라인하르트 1세가 이를 취약한 체제라고 공격하면서 국가 안정을 위해 군부위원장 직함을 군부청장으로 바꾸고, 군부청장을 자신이 직접 임명할 수 있게 법을 바꾸었다. 게다가 군부청장의 권한 역시 더욱 강화되어 전시에는 내각의 결정을 독단으로 뒤엎을 수 있었고 군사 통솔권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황제 중심의 권위주의, 군국주의 체제 하에서 제국은 숨 막히는 독재정이 되어버렸고 내각은 그저 이름뿐인 황제의 자문 기관 정도로 격하당하였다. 전제군주정 국가인 대영제국에서조차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지나치게 극심하며 황제의 욕심도 지나치다고 공격하였을 정도였다.

쇠퇴

라인하르트 1세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은 날의 카리스마와 통솔력이 떨어졌고, 판단력도 흐려졌다. 자연스럽게 라인하르트 1세의 신망을 받던 간신들이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나라를 좌지우지하기 시작하면서 게르마니아 제국은 쇠퇴하게 된다. 정경 유착, 군경 유착이 극심하였으며, 부패한 정치인들의 창궐로 인해 국세는 거의 관리가 되지 않았다. 내각은 이를 막으려하였으나 이는 황제의 권위를 빌린 간신들의 내각불신임으로 간단히 저지되었다.

동시에 게르마니아의 개혁을 요구하는 자유주의, 사회주의자들의 시위 역시 극심하였으며 심지어 황정 자체를 폐지하고 공화정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터져나왔다. 이미 이 시점에서 게르마니아 황실과 체제는 민중의 지지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르마니아 정부는 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경찰 병력과 군 병력을 동원해 유혈진압하였으나, 시위가 너무나도 극심하였던 탓에 에스토니아와 같은 몇몇 지역에서는 군대가 통제력을 잃고 반군에게 영토를 내어주는 일도 있었다.

황태자 라인하르트 빌헬름 폰 호엔촐레른은 1인 리더십으로 운영되는 제국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여 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내각의 편도 들어주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 1세가 고령이었던 탓에 황태자의 즉위 가능성이 점쳐지자, 황제의 측근들은 비교적 자유주의적이었던 라인하르트 황태자의 행보를 방해했다. 2026년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의문의 사고로 인해 사망하는데, 여기에 라인하르트 1세의 간신들이 연루되어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대해 앙심을 품은 황위 계승 서열 8위의 황손 노르베르트 라인하르트 폰 호엔촐레른은 2028년 쿠데타를 일으켜 라인하르트 1세를 시해하고, 간신들을 모두 숙청하는 게르마니아 황실의 난을 일으켰다. 이어서 공개 연설을 통해 라인하르트 1세가 황태자를 살해하여 존속 살해를 저질렀으므로 기존 게르마니아 황실이 자신의 존속 살해를 비난할 권리는 없고, 제국의 개혁을 위하여 황제가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라인하르트 2세는 제국의 낡은 체제에 과감히 매스를 댔다. 귀족 제도를 폐지하고, 황제가 임명하던 제정의회원과 민정의회원 의원직을 폐지하였으며, 보통 선거권을 도입하여 재산의 높고 낮음과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가 평등히 투표할 수 있게 하였다. 군부 폐지와 같은 군국주의 체제의 해체 역시 이뤄졌으며 결정적으로 스스로 황제에서 퇴위하고 게르마니아 제국의 폐지와 게르마니아 합중국의 선포가 이뤄졌다. 이로서 게르마니아 제국은 173년만에 멸망하고 민주공화정 체제로의 이양이 이뤄졌다.

멸망 이후

기존 게르마니아 체제에 저항하던 시민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라인하르트 2세의 즉위를 반겼다. 그러나 기존 귀족 계층과 보수 성향의 군부는 이에 반발하였으며, 새 황제의 개혁을 인정하지 않고 내전을 일으켰다. 그렇게 게르마니아 제국 잔존 세력과 게르마니아 합중국간의 내전이 일어나면서, 게르마니아 영토는 쑥대밭이 되었고 곳곳에서 소수 민족의 혁명이 일어나 독립하는 사태가 일어났다.[2]

합중국 총통으로 취임했던 라인하르트 2세는 자신의 즉위를 지지해줬던 대영제국에 SOS를 치는 과오를 범했다. 대영제국은 기본적으로 게르마니아의 강력한 군사력을 통제하기 위하여, 군국주의에 반대했던 라인하르트 2세를 도와준 것이지 딱히 그의 민주공화정으로의 개혁을 지지하려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브리타니아는 내전 안정화를 명목으로 게르마니아 합중국의 뒷통수를 치고 내전에 개입하여 게르마니아의 핵심 도시들과 군사 시설들을 점거했다. 분노한 합중국 정부는 대영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했으나 이미 이 시점에서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게르마니아는 단 두달도 버티지 못하고 멸망하여 대영제국의 식민지인 브리타니아령 게르마니아 총독령이 되었다.

지리


"마스에서 메멜까지, 에치에서 발트해까지"라는 독일인의 노래의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동쪽으로는 발트해에 맞닿아있었으며 서쪽으로는 구 벨기에 지역까지 영토가 뻗어있었다. 영토 면적은 2,142,132km2로 대영제국과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 내 국가중에서 그 영토가 넓었다.

게르마니아의 뿌리가 되는 국가인 프로이센은 발트해 연안의 작은 국가에서 시작했지만, 대독일주의를 표방하며 지속적으로 영토를 넓혀간 결과 제2차 유럽 전쟁 때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독일 영토를 장악했고, 이후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으며, 게르마니아-러시아 전쟁을 통해 동유럽도 확보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와 스위스, 라인강 너머의 프랑스 본토까지 손에 넣었다. 게르마니아의 외교에 있어서 사실상 속국이나 다름 없는 유럽 안보 동맹의 가맹국까지 포함하면 그 영토를 그야말로 유럽의 동서남북 전체에 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독일주의가 실현된 국가로, 게르마니아 합중국 건국 이후 각 지방들이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해버리는 바람에 합중국 건국 시점에서 게르마니아는 전체 영토의 대략 1/3 정도를 상실하게 되었다.

행정구역

정치

외견적으로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나, 전제군주제에 다름이 없다는 평이다. 총리는 여타 나라와 마찬가지로 국민이 선출하는 의회를 구성하는 의원들의 투표로 선출되지만, 황제에게는 내각이나 총리를 사퇴시킬 권한과 의회를 해산할 무한한 권리가 주어졌다. 또한 총리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군부총장은 황제의 직속 신하로서, 황제가 직접 임명했으며, 내각과 입법부는 이를 거부할 권한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1세 이후 지속되었던 군국주의적인 정책이 특징으로, 본래부터 군국주의 성향이 강하였으나 제2차 유럽 전쟁, 게르마니아-러시아 전쟁 그리고 20세기 중후반의 정치적 혼란을 겪으면서 점점 더 권위적인 군국주의 색체가 강해졌다. 한해 정부 예산의 대략 10%~15%가 군사 예산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붕괴 시점에서는 이름만 민정이지 실질적으로는 군부 독재라고 봐도 될만큼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이 많았다. 명목상의 행정 수반은 제국 총리이지만, 군사의 최고 수장인 군부총장은 총리에 맞먹거나 혹은 그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전시에는 총리를 대신하여 정치 전반을 통제하며, 평시에도 군사 통솔권은 총리가 아니라 독일 황제의 직속 신하인 군부총장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견제할만한 입법부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보통 선거 제도가 실시되지 않고 있어, 1인 1표가 아니라 대학 졸업자나 고소득자, 군인 등 사회 특권층에게 더 많은 투표에서의 혜택이 돌아갔다. 이 때문에 "제4계급"[3]은 정치에 참여할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적었다.

황제


게르마니아 제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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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게르마니아 제국이 선포되면서 프로이센의 왕이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제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후 2031년, 라인하르트 2세의 퇴위까지 약 174년간 직위가 존속하였다.

게르마니아 제국의 황제는 게르마니아 제국의 국가 원수로서, 명목상의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실질적으로는 전제군주에 가까운 권력을 누렸다.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진 것은 라인하르트 1세 시기의 공포 정치 때문으로,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며 내각까지 숙청하겠다며 위협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부를 자신의 직속으로 두어 정치 통제를 더욱 용이하게 하였다. 그 이전까지 군부는 내각과 황제, 사법부가 추천한 인물 3명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였는데, 라인하르트 1세의 치세동안 체제 안정을 명목으로 군부총장이라는 직위가 생기고 이를 황제가 직접 임명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었다. 이러한 결과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게르마니아 황제가 가진 권한은 엄청나 내각이 그저 이름 뿐이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 1세가 고령이 되어감에 따라 판단력이 약화되어 21세기 초반 이후로는 온갖 간신들이 들끓어 국정이 마비되는 수준에 이르렀고 국가의 발전도 거의 정체되었다. 보다 못한 황손 라인하르트 2세가 라인하르트 1세를 시해하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아예 제국을 폐지하는 수준의 개혁을 이루어내 결국 제정이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내각

라인하르트 1세 이후 유명무실한 황제 자문 기구가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엄연히 선거도 치뤄졌고 의회도 구성되어졌다. 라인하르트 1세의 사망 이후, 라인하르트 2세는 내각이 가지고 있던 의원내각제적 권한중 상당수를 복구시켰고, 동시에 전독일제국당, 게르마니아 민주당, 게르마니아 사회민주당의 거국내각을 통과시켜 의회민주제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 세 정당은 각각 군국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를 대변하는 정당들로 독일의 3대 정당이었다.

의회

상원에 속하는 제정의회와 하원에 속하는 민정의회가 존재하였다. 제정의회 의원의 50%와 민정의회 의원의 15%를 황제가 뽑았기 때문에 이 역시 거의 의미가 없었다. 게르마니아 합중국 건국 직전의 원내 구성은 제1당이 전독일제국당(58석/166석), 제2당이 게르마니아 민주당(33석/100석)이었다. 의회의 정원은 제정의회가 240석, 민정의회가 450석이었다.

경제

붕괴 직전에는 경제력에 있어서 대영제국에 이은 제2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 경제 규모로서는 세계 4위였으나, 1위, 2위, 3위가 각각 브리타니아 제국과 그 식민지인 중화제국, 인도제국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2위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빈부격차가 꽤나 심각한 국가로, 제1~3계급에 비해 제4계급의 소득 수준이 매우 낮았다. 노동자에 속하는 제4계급의 소득 수준은 산업혁명에 비해 조금밖에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선진국이기도 하고 복지 시스템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제4계급과 1~3계급의 수준 차이가 클 뿐이지 제4계급의 생활 수준은 크게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다. 진짜로 산업혁명 시기 빈곤한 노동자 수준의 생활을 하는 시민들의 비율은 10~15% 정도. 물론 브리타니아에 비하면 형편 없긴 했다.

제조업과 금융업이 발달한 국가였다. 관광업 등의 서비스업도 대단히 발달했었다.

사회

신분제가 존속하고 있었으며, 군부의 힘이 매우 강력한 정치 체제 탓에 사회 분위기는 매우 경직되어있었다. 특유의 기독교적 엄숙함이 요구되기도 한다.

문화

외교

브리타니아-게르마니아 관계

제2차 유럽 전쟁의 승전국인 두 국가는 정치 체계상 비슷하여 협력 관계에 있기도 하였으나, 서방 세계에서 가장 큰 두개의 국가로서 일반적으로는 경쟁 관계에 있었다.

게르마니아 제국이 붕괴하기 직전까지는 게르마니아가 군사적으로 브리타니아와 거의 비등한 수준의 군사력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전면전이 일어난다면 브리타니아와 1대 1로 싸움이 가능한 유일한 국가라는 평을 들었다.[4] 이러한 이유 때문에 브리타니아는 불필요한 희생을 막기 위하여 게르마니아 제국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게르마니아 제국이 지나친 군사력 추구로 인해 스스로 무너져내리자, 그마나 유지되고 있었던 유럽에서의 힘의 균형이 붕괴되어버린 탓에 게르마니아 제국은 해체된지 2년도 안되어 대영제국에 종속되어 식민지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각주

  1. 베르겐 폰 헤르만스부르크의 사망으로 인한 공석화.
  2. 사실 덴마크나 스위스 같은 몇몇 지역들은 이미 주민투표로 독립 과정에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나 체코, 벨기에, 폴란드, 에스토니아 등 주민투표 자체가 불허되었음에도 무장 독립한 지역들이 더 많았다.
  3. 노동자 계층을 의미한다.
  4. 그러나 질적이 아닌 양적으로는 게르마니아가 너무나도 열세였다. 게르마니아와 그 동맹국의 인구를 합쳐도 3억이 안되었는데, 브리타니아는 전시 징집 가능 인구만 7억명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