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景宗 · 경종

景宗 · 경종
경종은 조선 제11대 국왕으로, 정치적 혼란과 권력 공백 속에서 즉위하였다. 형 혜종의 갑작스러운 붕어와 정현왕후의 서거, 그리고 어린 원자의 나이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면서, 상왕 현종의 명에 따라 조카이자 혜종의 동생이던 경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즉위 직후 적통파의 반란을 직접 진압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굳힌 그는, 이를 계기로 정국을 재편하고 실용주의적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경종의 치세는 전반적으로 실무 관료 중심의 행정 개편, 기술관료의 발탁, 군사력 강화와 해상 정벌로 대표된다. 그는 장파와 적파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실과 출신 실무관료를 등용하여 제3세력을 형성했고, 이들과 함께 조세 기반 강화, 기계 보급 확대, 무기 개량 등 구조적 개혁을 주도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은 상공업 중심의 국가역량으로 서서히 전환되었으며,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에서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특히 1546년 병오동정을 시작으로, 일기도 정벌, 1556년 정남왜도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탕구 정책은 해상 질서 안정과 무역로 확보, 외교력 제고를 목표로 한 전략적 정벌이었다. 도독부와 간접지배 체계를 도입한 것은 단순한 무력 행사에서 나아가 온건한 행정적 통치의 일환이었다. 말년에는 세자 명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1558년 평화롭게 선위함으로써 정권 이양의 모범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친자에게 권력을 넘기지 않고 능력과 정통성을 겸비한 양자(조카)에게 양위함으로써 실리와 국정 안정의 대의를 실현하였다. 경종의 통치는 실용적이고 전략적이며, 왕권과 제도의 균형을 추구한 전환기의 군주상으로 평가된다. 동시에 정치적 통찰과 결단력, 국정의 실천력을 갖춘 국왕으로서, 조선 중기 이후의 안정과 도약을 준비한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영성대군 이효는 본래 조선 제10대 왕 혜종의 동생으로, 유년기에는 왕위 계승의 기대가 크지 않았다. 그는 형 혜종의 그늘 아래 왕업을 이을 준비나 시강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영성대군의 신분으로 학문에 몰두하며 조용히 지내왔다. 그러나 그의 총기는 비범하였고, 경전과 제서를 꿰뚫는 식견은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상왕 현종은 이러한 영성의 학식과 기품을 눈여겨보았고, 친히 경서를 강론하며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당시 혜종 역시 동생의 덕망을 인정하여 때때로 침전에 불러 간언을 구했으나, 이는 왕권의 위엄을 손상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좌의정 안현은 혜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영성대군의 총기가 아무리 출중하더라도 이는 국왕의 기품에 미치지 못하며, 간언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이는 군주의 위엄을 해치는 바입니다.”라 하며 대군의 지나친 정사 개입을 경계하였다. 이에 상왕 현종도 혜종의 정사에 영성이 간섭하는 것을 꾸짖고자 영성에게 스스로 물러나 조심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조정의 경관들에게 이르러, 영성의 학식과 기품을 간과하지 말고 그가 도리에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충심으로 보필할 것을 명하였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혜종의 병세는 갑작스레 깊어졌고, 괴질이 급격히 심해져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의원들이 온갖 약재를 다 써보았으나 호전되지 않았고, 약을 받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붕어하였다. 이어서 정현왕후마저 뒤따라 세상을 떠나니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상왕 현종은 원자가 아직 어려 국정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그간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영성대군에게 왕위를 잇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해 좌의정 안현과 우의정 심효영 등 구신(舊臣)들은 즉시 상왕에게 항의하였다. “원자가 있음에도 영성대군을 옹립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며, 영성대군을 둘러싼 안좋은 소문이 무성한 지금, 그에게 종묘사직을 맡기는 것은 백성들의 신뢰를 무너뜨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왕은 “나라의 장래를 저울질함에 있어 혈통보다 종사의 안녕을 우선해야 하며, 영성이 장차 정사를 해할 것이라는 말은 그를 도리에 따라 보필하지 못한 문무백관들의 과실이다.”라 하며 이들을 꾸짖고 물러나게 하였다. 영성대군은 상왕의 명을 받자 즉시 궁에 들어 엎드려 통곡하며 “신은 국사를 짊어질 자격이 없습니다.”라 간언하였으나, 상왕은 단호히 물리치며 “어려서부터 너는 총명하고 생각이 깊어 장차 종사를 도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 원자가 어리니 너가 종사를 이끌어 평안케 잇는 것이 좋겠다”라 하였다. 상왕이 강하게 주장하여 결국 혜종이 붕어한 지 하루 만에 영성대군은 조선의 제11대 국왕, 경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조정에는 여전히 혜종의 아들인 원손을 지지하는 적통파가 다수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혜종의 붕어와 경종의 즉위 사이에 음모가 있었다고 강하게 믿으며, 원손을 옹립하려 모의하였다. 그들은 빠르게 움직여 용양부장 민충우, 호분부장 서진림을 포섭하여 무장 세력을 조직되었고, 군을 일으킬 준비를 마쳤다. 경종은 도숙의 밀서를 통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충무부장 인규, 도승지 여찬, 우참찬 임일성, 판비변부사 정운순 등 측근을 움직여 이들을 회유하였다. 특히 서진림은 설득에 응하여 협조하게 되었고, 경종은 계획을 은밀히 진행하였다. 반란군은 동궐로 진입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청계천을 넘으려 하였으나, 경종 측의 매복으로 인해 장통교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서진림 휘하의 장졸들은 이미 경종에 회유되어 있었으며, 충무부와 금군도 협력하여 반란군을 포위하였다. 관군의 화살이 쏟아지자 반란군은 금새 와해되었고, 민충우는 무릎에 화살을 맞고 낙마하였다. 혼란 속에서 인규는 좌의정 안현을 포박하였고,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다. 경종은 이튿날 즉시 반란의 주동자인 민충우, 안현, 황보음 등을 반역죄로 주살하였으며, 관련된 선비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거나 유배에 처했다. 이를 통해 경종은 조정 내의 적파 세력을 정리하였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반란 진압 이후에도 일부 적파는 잔존하며 원자의 세자 책봉을 철회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했다. 경종은 이들에 대한 대응을 서서히 진행하며 장파 인사들을 가까이하여 정국을 재편성해나갔다.
숙청 이후에도 적파는 삼사·예문관·집현전 등 언론 기구를 통해 간접적 저항을 지속하였다. 경종은 외형상 적파를 모두 제거하지 않고, 보수 유학자들 일부를 기용함으로써 온건한 통치의 모습을 취하였다. 즉위 직후에는 중도파인 이적을 영의정에 앉혀 적파의 직접 반발을 완충하고, 상왕 현종의 유지와 이전 조정을 존중하는 신호를 보냈다. 이어서 원로인 홍언필을 기용함으로써, 보수적인 적파의 체면을 살리되 실권 자체는 차단하는 고도의 통제전략을 구사하였다. 또한, 이렇게 적파들을 특정 지점에 기용하면서 공신들로 구성된 장파의 권력이 너무 비대해지는 것을 견제하고자 했다. 동시에 경종은 역모 진압에 공을 세운 공신들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봉하여 왕권 수호에 대한 충성을 보상하였다. 인규, 여찬, 정운순 등은 군권과 감찰권 일부를 부여받았지만, 경종은 이들을 진무소에서 병조, 공조, 비국 등 다른 관서에 배치하고, 병권을 비변부 중심으로 재편하여 이들의 연대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특히 비변부는 타 관청들과 연계를 강화하여 유사시 병기·화약·군수물자 통제권까지 장악함으로써, 국왕 직속의 군사행정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 무렵, 혜종대에 도입된 실과 출신의 실무형 관료들이 국정 전면에 부상하였다. 경종은 윤지정을 영의정으로 발탁하고, 진순겸·기성헌·허운·류정경 등 실무에 능한 인물들을 각 관청(육서, 육조)에 중용하였다. 이들은 기계 개발, 군수 생산, 토목사업, 재정 개혁 등 실질적인 국정 현안에서 성과를 내며 실권을 장악하였고, 이는 장파와 적파의 구도 너머에 있는 제3의 세력으로 작용하였다. 경종은 실학파를 기존 장파, 적파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파트너로 끌어올렸고, 이를 통해 정국을 3개의 세력으로 분리하여 서로 견제하도록 했다. 그 사이에서 경종은 특유의 정치적 수완과 카리스마로 왕권 강화를 꾀했다. 이런 가운데, 1544년 사량진왜변이 발생하였다. 왜구가 사량진 일대를 습격하였고, 이는 조정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경종은 이를 단순한 외적 도발이 아닌, 왕권 강화와 국방 개편의 기회로 인식하였다. 즉위 정당성에 논란이 있던 자신이 외세의 위협에 과감히 대응함으로써 실리적 리더십을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격서, 군기시 출신 기술자들이 참여한 병기 체계가 실전에서 시험되었고, 비격진천뢰, 호준포 등 각종 무기와 기술이 도입되었다. 또한 해안 방어 체계와 수군 운용 체제가 점검되었으며, 이는 1546년 병오동정(정대마도)로 시작되는 ‘탕구 정책’ 기반이 되었다.
경종의 치세 초기는 내우외환을 정리한 후, 외적에 대한 단호한 대응으로 국왕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 국방 체계를 재편하는 시기였다. 그 핵심에는 1546년(경종 3년) 병오동정(丙午東征)으로 시작되는 일련의 정벌 작전, 즉 ‘탕구(蕩寇) 정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작전을 넘어, 조선의 기술력, 관료제, 해군 운용, 외교 역량을 총동원한 종합적 대응이자 전략적 선언이었다. 탕구 정책의 이면에는 경종의 복합적 비전이 놓여 있었다. 그는 즉위 초 정통성 시비와 반란 진압으로 국왕권이 흔들린 상황에서, 대외 정벌을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지고 왕권을 재확인하고자 했다. 그러나 탕구는 단순한 권위 재건의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 경종은 해상 정벌을 통해 조선의 해양 방어선과 무역 교두보를 안정시키고, 동아시아의 해상질서 속에서 조선의 위상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리려는 실용적 목적을 지녔다. 그는 왜구의 거점이 단순한 도적떼의 은신처가 아니라, 해상 무역과 정보 통제의 요지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대마도, 일기도, 고토열도 등은 중국-일본-조선 사이의 무역 네트워크와 사절단 항로상 중간 결절점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이곳의 불안정은 곧 조선의 외교적, 상업적 확장성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직결되었다. 경종은 이러한 위협을 정면으로 돌파함으로써, 기술적 우위와 실무적 관료 체계를 바탕으로 조선이 외교, 무역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내정적으로는 실무형 관료 체제의 정착과 공신 세력 견제라는 과제도 탕구 정책에 담겨 있었다. 정벌을 통해 실무 관료들이 병참, 기획, 기술 운용을 주도함으로써 이들이 단순한 기술 인력이 아니라 국가 정책의 핵심 축임을 입증하게 되었고, 이는 경종 치세 전반 동안의 행정 재편과 기술 장려 정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병오동정은 사량진왜변(1544)의 보복 차원을 넘어, 조선을 노략하던 왜구의 근거지를 타격함으로써 국경 해역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한 정벌이었다. 격서의 병기 기술, 병조의 병참 체계, 격서 및 군기시의 신무기 등이 총동원된 이 작전은 조선 수군이 대마도에 상륙하여 항복을 이끌어내고 도독부를 설치함으로써 완수되었다. 도독부는 기존 대마도 도주의 세습적 지위를 유지하되, 조선의 대마통감이 공동으로 행정과 치안을 감시하는 이중 통치 구조로 구성되었다. 통감은 조선 조정이 직접 파견한 고관급 관리로, 무역·해상 경계·치안 보고 등에서 권한을 가졌으며, 도주는 군정과 풍속 유지에 관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 구조는 대마도의 자율성과 조선의 해상 질서 주도권을 동시에 보장하는 현실적 절충이었다. 정벌과 도독부 설치는 주변국에도 외교적 파장을 일으켰다. 명나라는 조선이 왜구를 토벌하는 것을 반겨 조선의 정벌을 묵인했으나 내심 그 군사적 정벌이 너무 과격하여 중화질서를 흔들지 않을까 염려했다. 반면 무로마치 막부는 조선의 대마도 통제에 불편함을 표했으나, 당시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어 실질적인 대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온적인 중재에 그쳤다. 조선은 명나라와 무로마치 막부에 이번 도독부 설치는 일시적인 것이며, 왜구 소탕을 위한 일시적 조치임을 알리고 각국과의 사절을 수시로 파견하여 정당성을 알렸다. 이후 1549년(경종 6년)에는 일기도(壹岐島)에 대한 정벌이 단행되었다. 정일기도(征壹岐島)는 대마도 정벌 이후 재편된 왜구들이 이 섬을 중심으로 다시 세력을 형성하려 하자, 이를 선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정벌은 기존과 달리 "무인도화"를 목표로 하였으며, 전략적 중요성은 낮지만 경종의 단호한 국방 기조를 대외적으로 각인시키는 상징적 작전이었다. 1551년(경종 8년), 북방으로 눈을 돌린 경종은 신해북정(辛亥北征)을 통해 여진족의 동향을 정리하였다. 명나라는 경술의 변으로 인해 몽골과 대치하며 북방 방어에 여유가 없었고, 경종은 이를 기회로 삼아 직접 여진 세력을 토벌하고 간접 지배를 시도하였다. 이 작전으로 조선은 옛 인종기 동북5성 지역에 현덕도독부(玄德都督府)를 설치하여 여진에 대한 감시와 교섭 거점을 마련하였다. 현덕도독부는 여진 각 부족의 자치와 문화적 특성을 인정하되, 도독부를 통해 주요 부족장과의 무역 및 교섭 진행, 조공 및 병력 지원 요구, 화약 무기 통제, 통역 관리 파견 등의 방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형태였다. 이는 무리한 정복 대신 회유와 이권 분배를 통해 조선의 북방 안정을 꾀하려는 실용주의 외교 전략의 일환이었으며, 도독부 소속 관리들은 겸사복 춣신 무관과 실무 관리로 구성되어 외교, 군사, 무역 정보를 종합적으로 수집하는 기능도 수행하였다. 마지막으로 1556년(경종 13년) 정남왜도(征南倭島) 작전은 왜구의 해적 활동이 중국계 세력을 포함하여 남서해역까지 확산됨에 따라 이를 근절하고 조선의 해상 통제권을 확립하기 위한 대규모 해상작전이었다. 고토열도(五島列島)를 중심으로 집결하던 왜구 세력을 격파하고, 조선 해군은 왕직이라는 명나라계 무장 해적을 생포하여 명 조정에 압송하였다. 이 외교적 조치는 단순한 범죄인 인도가 아니라, 명 조정에 대한 조선의 조공질서 내 충성의 표명이며 동시에 조선이 동아시아 해상질서의 수호자로서 기능할 능력과 의지가 있음을 천명하는 신호였다. 명나라는 조선의 행동을 치하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대등한 실무 외교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이후 동남 연해 및 류큐, 필리핀 등지와의 중계 무역에 있어 명나라의 비공식적 지원을 끌어내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작전은 조선의 수군력, 정보력, 외교력을 종합적으로 활용한 정점이자, 경종의 탕구 정책의 마무리를 상징하는 작전이었다. 탕구 정책은 결과적으로 조선의 해상 주도권을 확립하고, 경종 체제의 군사·외교 전략이 실무 관료 및 기술 관료를 중심으로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음을 증명한 시기였다. 이후 조선은 해역 통제, 도독부 관리, 군사기술 발전을 통해 장기적 안보 체계를 확립하였고, 이는 정국 안정 이후의 경제 재건과 기술 확산의 토대로 작용하였다.
경종은 대외 정벌을 지속하면서도 재정의 고갈이나 백성의 과도한 부담을 방지하기 위해, 내정 개혁과 조세 기반 확충에 심혈을 기울였다. 경종은 군비 조달을 전통적인 조세 압박에 의존하지 않고, 생산력 증진을 통한 실질 세입 확대를 추구하였다. 면직물, 유리, 비단 등 전략적 제조업이 장려되었고, 이에 따른 세입은 시장 기반의 잡세로 유도되었다. 격서의 주도로 지방 수공업소에는 조면기, 방직기, 수차 등 기계 설비가 대거 보급되었으며, 농공 병진형(農工竝進型) 생산 기반이 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무 기술직 관료들은 핵심 정책 조율자로 부상하였고, 기술 주도의 행정 기반이 정착되었다. 탕구 정책으로 확보된 해상 안정성은 대외 무역 확장으로 이어졌다. 조선 상단의 일부는 일본 서부 연안, 류큐, 타이완, 필리핀에 이르는 해상 교역망을 확보하였고, 이를 통해 은괴와 면포 같은 유통 화폐 자산을 일정 수준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양이(洋夷)들과의 접촉을 통해 선진 기술과 무기·기계의 도입이 가능해졌고, 이는 명종기의 적극적 대외정책의 토대가 되었다. 경종은 기계 도입과 생산력 향상에 대한 적극적 투자를 통해 공신 세력과 반대파의 경제 기반과 영향력을 우회적으로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실무형 관료, 특히 기술·재정 분야 인재들의 등용은 경종 체제의 특징이 되었으며, 이는 이후 조선의 행정 효율성과 국정 운영의 전문성 향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역 간 개혁 속도의 차이와 민심의 불균형은 여전히 해결 과제로 남아 있었다. 누적된 군역의 부담은 단기간의 기술 정책으로 해소되기 어려웠고, 개혁의 효과 또한 지역과 계층에 따라 상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의 내정·재정 개혁은 단기적 군사 행동을 넘어 조선의 지속가능한 국력 기반을 마련하는 핵심 전략이자 국가운영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시도로 평가된다.
1556년, 남왜도 정벌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며 대외정책이 일단락되자, 경종은 국왕으로서의 책무를 서서히 세자에게 이양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세자 적(훗날 명종)은 혜종의 적장자로, 경종에게는 조카이자 양자였다. 그는 이미 1548년부터 세자에 책봉되어 십여 년간 조정의 문무와 제도를 두루 익혀왔으며, 1556년을 기점으로 대리청정을 명받아 정무를 대행하였다. 명종은 대리청정 초부터 내정과 외교 모두에 있어 경종의 실용주의 기조를 충실히 계승하였다. 실무 관료들과의 교섭을 주도하고, 주기적으로 상소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명종은 경종이 중용했던 실학계 인물들과 독자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권력 기반을 확장하였고, 경종은 이를 측근을 통해 면밀히 관찰하고 신뢰를 굳혔다. 경종이 친히 자식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에게 왕위를 넘기는 결정은 조정 내외의 파장을 피할 수 없었다. 금평대군과 의평대군을 비롯한 경종의 친자들은 명목상으로는 왕명을 따르는 태도를 취했으나, 이들이 각기 소수의 문신 및 종친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정 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종은 공신 출신 인사들과 실무 관료들을 활용하여, '국통은 덕에 있고 적통은 예에 있다'는 논리를 확산시켰다. 혜종의 적자인 세자 적이 상왕 현종의 뜻에 따라 세자에 봉해졌다는 정통성과, 세자 책봉 이래 10년간의 경륜, 경종의 군사적 성공을 함께 경험하며 조정의 대소신료와 연대감을 형성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기존에 세자의 즉위를 원했던 적파뿐만 아니라 육서 내 실무 관료들은 대부분 세자에게 우호적이었으며, 윤지정, 진순겸, 기성헌 등은 조정 내부의 신뢰 기반이 명종에게 기울고 있음을 재확인하였다. 반면 일부 장파 공신 세력과 일부 유학자들은 이례적 계승에 불안을 표시하였으나, 경종은 이들을 개별적으로 접견하거나 지방 외직으로 전출시켜 반란 모의를 사전에 차단하였다. 1558년 5월 15일, 경종은 공식적으로 상왕의 지위에 오르고, 명종은 조선의 제12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선위 조칙은 신중하게 마련되었으며, 형식적으로는 경종이 병중에 정무를 감당하기 어려워 세자에게 책임을 넘긴다는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조칙 말미에는 "세자는 혜종의 적장자로, 선왕의 정통을 잇고, 나의 가업을 계승함에 능하니, 문무의 대권을 아울러 맡기노라"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었다. 경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도 정무에 일정 정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후궁과 친자들을 별궁으로 이거시키고, 국왕과의 권력 분리 원칙을 스스로 실천하였다. 금평대군과 의평대군에게는 각각 명목상의 작위와 토지를 하사하고, 향후 권력 개입을 하지 않도록 거듭 서약받았다. 경종은 상왕이 되어서도 건강하여 6년을 더 살면서 국정을 보좌하면서, 명종의 왕권을 지탱하는 든든한 양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했다.
경종(이효)은 본래 혜종의 동생으로 태어나, 왕위 계승의 가능성이 크지 않았던 영성대군 시절을 조용히 보내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유년기에는 체계적인 시강을 받지 못했으나, 스스로 경전과 제서를 탐독하여 만물의 이치를 꿰뚫는 통찰을 키워나갔다. 그는 상왕 현종과 때때로 경서를 함께 강론하며 사변적 논의를 즐겼고, 이를 통해 정치와 역사의 흐름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성정은 내면이 강건하고 외견은 냉정했으며, 학문과 현실 정치 양면에 능통한 실용적 사유의 소유자였다.
형 혜종과는 본래 우애가 깊었으나, 경종의 총명함이 혜종의 정사에 자연스럽게 간섭하는 형태로 드러나면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혜종은 경종의 식견을 인정하면서도, 정현왕후와 함께 경종을 자주 불러 의견을 구하곤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좌의정 안현 등의 간언이 잇따랐고, 상왕 현종 또한 “정사는 군주의 위엄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며 이를 경계하였다. 결국 경종은 자진하여 정사를 멀리하게 되었으나, 상왕 현종은 그 학식과 기개를 높이 사며 대신들에게 "그의 마음을 도리에 맞게 이끌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러한 이중적 시선 속에서 경종은 침묵을 선택했으나, 이는 훗날 상왕이 직접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배경이 되었다. 혜종의 단명은 경종에게 심리적 충격이었고, 형을 해치고 즉위했다는 억측 속에서도 그는 단호하고 냉철하게 국정을 이끌며 스스로 정통성을 증명해갔다.
안희왕후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왕비로, 경종과는 학문적 대화보다는 실질적 내조에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였다. 궁궐 내 정치적 파란 속에서도 안희왕후는 불필요한 감정 개입 없이 경종의 결정과 정책을 뒷받침했으며, 특히 세자 적(명종)에 대한 내심의 복잡한 감정을 절제하고 예우를 갖추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들인 금평대군, 의평대군에게도 정치적 야망보다는 내실을 다지도록 유도하였고, 이는 경종이 명종에게 순조롭게 선위할 수 있었던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경종에게는 금평대군, 의평대군을 비롯한 2남 12녀의 자녀가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명종을 전면에 세웠고 자식들은 철저히 왕실의 일원으로만 대우하였다. 이는 조정 내 정통성 시비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경종은 자식들에게 “종사의 안녕이 곧 너희의 안녕이다”라 하며 왕위 계승에서 손을 떼게 하였다. 금평대군은 문학과 역사에 밝은 인물로 지방에서 방학관 활동을 하며 조용히 지냈고, 의평대군은 병기 제조 및 기계 기술에 관심을 두며 격서에 관여하였다. 경종은 그들의 재능을 인정하되 중앙 권력에서 일정한 선을 넘지 않도록 관리했으며, 후일 선위 직전에는 토지와 작위를 정리하여 명종과의 갈등이 없도록 조율하였다.
경종은 건강 체질이었으며, 무예와 사냥을 즐겼다. 특히 활쏘기와 야간 사냥에 능하여 왕실 사냥 시 늘 선두에 섰고, 이는 군기시와 격서의 병기 연구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사냥을 통해 병기 시험과 지형 인식을 병행하는 실용적 방식의 야외 훈련을 즐겼으며, 이로 인해 왕실 사냥이 곧 국방 훈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괴질로 형이 죽은 후로 의술과 위생에 강한 관심을 가졌으며, 격서와 한의관을 연계한 의약 실험과 정책을 도입했다. 후반기에는 약간의 신비주의적 기질이 드러나기도 했으며, 고대 방술이나 음양서적을 궁중에서 탐독하기도 했다. 이는 실무주의적인 초반과는 대비되는 변화였으나, 정책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내면의 위안을 찾는 방식에 가까웠다.
경종은 조선왕조사에서 보기 드물게, 정치적 위기 속에서 즉위한 군주였다. 형인 혜종의 단명과 이를 둘러싼 의혹, 상왕 현종의 의외의 계승 명으로 인해, 그의 즉위는 출발부터 중대한 정통성의 시비와 반발을 동반했다. 그러나 경종은 단호한 의지와 냉철한 전략, 탁월한 현실 감각을 바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이를 오히려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계기로 전환해냈다. 즉위 초반에 벌어진 적통파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그는 군사적 주도권을 직접 행사하였고, 이후 공신 세력을 견제하면서도 온건하게 포용함으로써 정국의 안정화를 꾀했다. 이러한 균형감각은 단순한 권력 유지가 아닌, 장기적인 국정 운영의 기반 구축으로 이어졌다. 특히 그는 장파와 적파의 대립 구도 속에서 제3세력인 실무형 기술 관료를 적극 등용함으로써, 정권의 성격을 바꾸는 데 성공하였다. 그의 치세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실용주의적 통치 철학이었다. 경종은 군사, 기술, 농업, 무역 등 실질적 국가 역량의 강화에 집중했고, 이러한 경향은 실과의 확대를 통해 제도화되었다. 기계화된 방직, 탈곡, 제분 설비의 전국적 보급은 조선 농업 생산력의 구조적 전환을 이끌었고, 해상 교역과 수공업 진흥 등은 조선 경제를 농업 중심에서 상공업 중심으로 탈바꿈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군사적으로도 그는 사량진왜변을 계기로 적극적인 대외 정벌에 나섰고, 대마도·일기도·남왜도·건주위 등에 대한 일련의 작전을 성공시켰다. 이로써 조선은 해상 질서의 실질적 통제권을 확보하고, 명나라 및 무로마치 막부와의 외교에서 주도권을 선점하였다. 특히 도독부 설치, 여진족 간접지배 등의 조치는 단순한 정복을 넘어 행정적 통치로 이어졌으며, 조선의 실질적 영향권이 재차 한반도 외부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그는 양자이자 조카인 세자 적(명종)에게 권력을 이양하며 평화로운 선위에 성공했다. 이는 경종이 정통성을 명분이 아닌 실리와 능력에 두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단지 혈통보다는 준비된 후계자의 실력과 조정의 신뢰를 중시한 통치철학의 연장선이었다. 자신의 친자들에게는 명예와 재산은 보장하되 정치적 욕심을 철저히 차단함으로써, 명종기 초기의 정국 안정을 선제적으로 도운 점도 눈에 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의 치세가 완전무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급속한 기계 보급과 해상확장, 생산구조 재편은 일부 농민층과 지방사족에게 혼란을 야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지역 간 개발 격차, 재정 부담 증대 등의 문제는 후대 명종기에 해결과제를 남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분명히 조선 중기의 전환점을 마련한 군주였다. 단기적 치적을 넘어 제도·행정·군사·외교에 걸친 총체적 구조 개편을 이끌었으며, 혈통에 연연하지 않고 대의를 기반으로 정통성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노선은 후대 조선 국왕들에게도 하나의 이상적 모델로 남게 되었다. 경종은 강단과 이성을 갖춘 전략적 군주였고, 동시에 냉철함 속에 종사과 후계를 위하는 책임감을 잃지 않았던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