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역사 (고려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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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려공화국(고려국사)의 역사를 소개하는 문서.

'고려'라는 국호는 서기 427년 공식적인 국호로 선포되었으나, 그 국체의 기원은 B.C.3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계통을 따지면 직접적인 계승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의 역사까지 합쳐 4천년에 이른다. 고려는 요수문화의 가장 직접적인 계승자이자 중원 정주문명과 북방 유목문화권의 중계점에 위치한 독특한 조건을 활용하여 1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동아시아의 균형추로써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상고시대

고려의 기원은 대체로 B.C.8000년~B.C.3000년경 요강 연안에서 형성된 요강문화(신락-홍산문화)로 보고 있으며, 요강문화의 유산을 대거 물려받은 조선, 그리고 조선의 영향을 받아 수립된 북부의 부여와 남부의 삼한(진) 등이 고려사의 도입부를 구성한다.

요강문화는 비슷한 시기 존재했던 황하문명에 비해 문화에서 문명으로의 발전은 다소 늦었으며 그 과정에서 황하문명과의 대규모 교류 흔적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B.C.2000년경에 이르면 요강 동안지역에서 1천명 이상 규모의 도시국가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황하문명 계통의 국가들과 구분되어 '발'혹은 '조선' 등으로 불리는 연맹체를 수립하였으며 B.C.4세기에 이르러서는 왕을 칭하며 연과 국경 영토분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B.C. 3세기에 이르러 연의 침공으로 요강 동안지역은 연의 지배하에 복속되고 청천강-대동강 연안의 평야지대에 위치한 왕검성 세력이 새롭게 조선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왕검성 시대의 조선은 부자세습이 정착하며 연맹왕국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마지막 왕 준왕 시기 연 출신의 망명 장수 위만이 쿠데타를 일으켜 조선왕위를 차지하고 위씨 왕조를 열었다. 위조는 연에서 수입한 철기를 조선에 전파하고 2대 위기문을 거쳐 3대 위우거에 이르기까지 남방의 진과 중원의 한나라 간 중계무역으로 큰 부를 쌓았으나, 일방적으로 직무역을 차단당한 진과 한 모두의 불만을 산 끝에 한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B.C.108년 왕검성이 함락되고 멸망한 옛 땅에는 낙랑군을 비롯한 군현이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인 B.C.3세기 경에는 동시베리아 지역에서 남하한 주민집단과 조선계 주민들이 조선의 영향을 받아 동요강 상류-은강 중류 유역과 동해안 일대에 일단의 도시국가군을 형성하였다. 이 중 은강 유역의 도시국가들은 퉁구스계의 숙신 등과 교류 및 항쟁을 거듭하며 부여 해씨 왕조로 발전하였으며, 동해안 북부의 집단은 옥저, 남부의 집단은 예 등으로 불렸다. 은강 평원지대에서 연맹왕국으로 발전한 부여와 달리 옥저와 예는 동해안 지역의 지형조건으로 인해 국가체계를 수립하는데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의 고려 동북방은 고고학적 발굴 결과 예맥계와 숙신계가 뚜렷한 영역 구분 없이 공존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 이 중 부여에서 갈라져나온 홀본 세력이 고려로 발전하여 오늘날 고려의 직계 조상이 된다.

한편 조선 남부지방에서는 역시 조선의 영향을 받은 한(韓)계 주민들이 높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도시국가들을 수립하는데, 오늘날 천안시 지역에 위치해있던 목지국이 이들의 맹주로 여겨지며 특히 목지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연맹체를 마한이라 칭했다. 이와 함께 낙동강 중류-형산강 일대의 진한, 섬진강-낙동강 하류의 변한 등이 마한과 함께 삼한을 형성하였으며 통칭 진국이라고도 하였다.

고대

고조(高趙) 시대

초기-고구려 시대

B.C.40년경, 부여 왕실의 방계였던 추모는 왕위계승전에서 패하여 부여 남부로 탈출하였으며, 압록강 인근 홀본(현 안환도 환주시)에 위치한 고구려국(혹은 홀본국)에 이르러 국왕 연타발의 사위가 되었다. 이후 B.C.37년 연타발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며 고씨를 칭하여 고려 고왕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상류의 맥계 국가들을 병합하고 인근 말갈 및 부여계 세력과 교전을 벌이며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2대 국왕인 유리명왕대에 홀본에서 압록강 연안의 국내성으로 천도하였다.

고왕조 건국 초기에는 추모왕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며 은강 연안 평원지대를 차지하여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던 부여가 주요 항쟁 대상이었으나, 이후 1세기 후반~2세기경에 이르면 중국 왕조들과의 투쟁이 격렬해진다. 2세기 초반까지는 중국 군현 및 요동 공손씨 정권 등이 주요 교전 대상이었으나, 242년에 이르면 동천왕의 서안평 공격에 관구검이 지휘하는 위나라 중앙군이 전면 침공하는 등 그 규모도 대거 확대되었다. 결국 위진남북조 시기의 혼란기를 틈타 311년 국가적 숙원이었던 서안평을 점령하면서 압록강 하구까지 진출에 성공하였고, 이어 313년 낙랑군, 314년 대방군이 고려에 의해 멸망하고 편입된 반면 부여는 285년 선비 모용부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국력이 쇠락하면서 고려-부여 관계는 역전을 맞이했다.

한편 고왕조의 건국과 비슷한 시기 조선 동남부 형산강 유역에서는 진한의 사로국이 영역을 확대해 신라로 발전하였으며(B.C.57년), 조선 중부에서는 추모왕의 의붓아들이자 홀본왕 연타발의 외손인 온조가 홀본 유민들을 이끌고 건국한 백제가(B.C.18년) 목지국으로부터 마한의 주도권을 빼앗아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고려는 대방군을 점령하면서 백제와 국경을 접하였으며, 이에 고려와 백제는 369년 치양 전투를 시작으로 장장 150년에 걸친 피튀기는 혈전을 벌였다. 여제전쟁 초기 백제는 남평양(현 한해도 한성시)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391년 광개토대왕의 등장으로 고려가 요동 영유권을 확립하고 부여를 정복하였으며 한강 이북까지 진격함에 따라 여제간 균형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백제는 왜,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고 한수 이북의 영토를 일부 회복하는 등 이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였으며, 특히 광개토대왕의 사후 장수왕 대 발발한 내전과 숙청을 틈타 신라, 북위 등과 연계하여 고구려에 대한 견제를 추진하였다. 신라 역시 400년 이래 노골적인 고려의 내정간섭을 탈피하고 고려의 남부영토를 획득하기 위해 백제와의 동맹을 택하였다.

중기-고조 고려 시대와 조선반도 통일

그러나 427년 평양성 천도와 함께 공식 국호를 '고려'로 선언한 장수왕은 450년대까지 고구려 국내의 정치적 사안을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468년 신라의 실직주를 침공하여 점령한 데 이어 치밀한 사전 공작 끝에 475년 백제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개로왕과 왕제 부여문주를 비롯한 백제 왕족들을 대거 학살 혹은 압송하고 백제의 도성인 한성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한성백제의 멸망 직후 백제는 왜에 체재중이던 진사왕의 손자 부여사나와 개로왕의 둘째아우 부여곤지가 서로 백제왕위를 자처하며 귀국은 하지도 못하는 최악의 대공위시대가 도래했으며, 왕족들이 모두 죽거나 끌려가 섭정조차 세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백제 지방군과 신라군의 대응마저 늦어 고려군의 쾌속 남진을 저지할 수 없었다. 고려군은 백제 북부를 무인지경으로 휩쓸어 금강 하구의 기벌포와 덕근군(現 홍청도 은진시)에 이르렀으며, 477년에서야 신라의 지원으로 왕위 경쟁에서 승리한 부여곤지가 귀국해 완산성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이미 국가 체제가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이 때 백제가 멸망하지 않은 것은 고려가 주 전선이었던 북방전선에서 유연과의 지두우 분할을 기획하면서 상당한 시일과 인력이 소모될 것으로 예상되는 백제 지역 평정을 일시 중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백제 중앙의 처참한 몰락을 지켜본 서남부의 마한계 신규 편입세력들은 완산으로 몰려와 공백상태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정쟁을 벌이며 끈 떨어진 왕실을 압박했고, 나제동맹이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판단한 신라마저 백제의 남은 유산이라도 차지하겠다는 생각으로 백제 동부 국경지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481년 백제에 이어 신라를 공격하여 수도 서라벌을 점령, 소지마립간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죽령 이남 40개 성을 획득하였으며, 486년에는 대가야까지 공격해 멸망시킴으로써 나제간 동맹은 물론 상호 연락까지 차단하였다.

이러한 장수왕대의 왕성한 남진정책은 고려가 조선 최대의 생산력과 산업잠재력을 지닌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게 하였으며, 470년대까지 상호 동맹을 통해 고려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었던 조선 남부 국가들은 고려의 동맹국을 빙자한 번국으로 전락하였다. 490년대 후반 북위와의 대치와 물길과의 전쟁은 고려의 남방 통제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사건이었으나, 고려는 이를 남방 국가들로부터 병력을 차출해 전선에 동원해버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결국 문자명왕 시기 고려의 북방 전쟁에 끌려다니며 남은 국력을 소진한 남방 국가들은 백제와 신라의 주도로 가야 소국들에 대한 흡수합병을 시도하였으나, 고려는 태종 안장왕대에 들어와 가야 병합 시도를 빌미로 대대적인 침공을 가해 523년 백제가 멸망하였으며 528년에는 신라가, 529년에는 조선반도 최후의 독립국이었던 고자국이 멸망하면서 조선반도 전역이 고려의 강역에 편입되었다.

후기-여수전쟁과 고조 고려의 멸망

태종 안장왕의 조선반도 통일로 고려는 드디어 한반도의 드높은 생산력을 기반으로 북방에서의 전쟁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으나, 정작 안장왕은 통일 3년만에 백제왕실 출신의 부여자상에게 암살당하였고, 그 아우인 안원왕은 545년 평양성을 피로 물들인 후계내전에 대처하지 못하여 왕권의 실추를 야기했으며, 안장왕의 암살 혐의로 백제왕실 출신 인사들을 가혹하게 처리하면서 구 백제 유민들의 반감을 자극하였다. 결국 통일 30년만인 559년 금마성주 해이강이 완산성을 점령하고 백제 부활을 선포한데 이어, 565년에는 이에 자극받은 동남부에서도 금관태수 김사종이 금관국 재건을 선포, 566년에는 책성 일대에서 부여계 주민들이 숙신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국내 정세는 혼란에 휩싸였다.

안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평원왕은 이러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우선 동부여 출신인 동부 세력을 동원하여 책성 지역 반란을 진압하였다. 자신들의 세력기반인 책성 지역의 혼란상을 눈뜨고 볼 수 없었던 동부 세력의 호응으로 이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 570년이 되면 책성 일대는 완전히 평정되었다. 그러나 577년 후주의 침공으로 남부지방 평정은 미루어졌고, 이들 지역은 580년이 되어서야 구 신라 박씨왕가의 공격으로 후금관이 무너지고 582년 후백제가 멸망하면서 23년간의 조선반도 재통일이 완수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서남북의 내우외환을 진압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며 특히 책성 일대를 사실상 사유화한 동부의 연씨 가문이 급부상하였고, 이들이 병권을 관할하는 막리지 지위를 독점, 세습하며 안원-양원왕대 약화된 왕권에 큰 위협이 되었다. 평원왕과 뒤를 이은 세종 영양왕은 이를 제어하기 위해 온달과 같은 수도의 하급 귀족 및 평민세력을 등용하며 친위세력을 육성, 견제를 시도하였으나, 중원대륙에서 남북조시대가 종결되고 통일제국인 수나라가 등장하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안보환경에 직면하면서 이들 고위귀족 세력에 협조를 요청할수밖에 없게 되었다.

590년 수의 중국 통일 이후 수의 조공 요구로 점차 고조되던 여-수간 갈등은 598년 영양왕의 요서 선제공격으로 본격적인 열전(熱戰)으로 비화되었다. 수 고조는 국경 방어에 실패한 자신의 차남 진왕(양광)을 자진시키는 극약처방까지 동원하며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보급문제와 악천후가 겹쳐 대패하였고, 이에 고려 측이 수에 대해 저자세를 보여 수의 체면을 세워주는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에 고조와 뒤를 이은 고종 양용 치세 전반기까지 여-수관계는 나름 안정된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나, 고종이 국내 관롱집단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할 명분을 찾던 중 610년의 국서 분쟁사건으로 재차 고려 원정을 시도하면서 양국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수나라는 612~614년 사이 전투병력만 연 180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으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고려 역시 남방의 한인들과 말갈병을 동원하는 한편 돌궐, 토욕혼 등과의 연계로 수의 북방 방어선을 붕괴시키는데 성공하며 전쟁은 수의 처참한 실패로 종결되었다.

여수전쟁은 수의 원정 실패를 넘어 돌궐, 토욕혼 등 주변 민족들의 중원 침공으로 수 제국이 붕괴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고려의 완벽한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고려 역시 통일제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의 고갈이 뚜렷해졌고, 특히 수천리 떨어진 국경지대에서의 전쟁에 병력과 물자를 대며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피지배민으로 대접받던 한인들의 불만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618년 세종 영양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권을 두고 세종의 이복동생 고건무와 고태양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였다. 고건무를 지지한 군부와 고태양을 지지한 평양 중앙귀족 사이에서 약 1개월간 지속된 내전은 평양성을 초토화시켰고 두 왕제가 모두 사망하는 비극으로 종결되었다. 당시 9살이었던 고태양의 아들 고보장은 평양에서 탈출하여 619년 막리지 연태조의 후원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때부터 태왕의 정치적 발언권은 거의 박탈되다시피 하였고, 연태조는 평양성과 압록책 일대에 웅거하고 있던 고건무계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낙랑군왕의 작위를 받았으며 스스로 국상을 임명해 사실상 태왕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연조(淵趙) 시대

이러한 왕실의 분열과 친위세력의 부재 속에 한계를 느낀 보장왕은 628년 연태조의 사망을 틈타 평양 순행 중 낙랑군왕부에 대한 봉기를 시도하였으나 낙랑군왕세자 연개금에게 패배하여 유나라로 망명하였고, 차기 태왕으로 지명된 안원왕의 고손자 고차성[1]이 즉위를 거부함에 따라 연개금은 마침내 평양에서 고려 태왕위에 올라 고려 역사상 두번째 왕조인 연조를 개창하였다.

앞서 여수전쟁의 여파로 수나라가 멸망(620년)했고, 농서는 토욕혼에게 점거당했으며, 중원은 한화된 선비족 관롱집단이 이연을 중심으로 관중에 건국한 당, 돌궐이 하북을 점거하고 건국한 유, 한족 장수 이밀이 하내-산동을 점거하고 세운 제, 토번계가 촉 지방에 침투하여 건국한 성, 남조의 부활을 선언한 후진과 주강 이남지역에 건국된 베트남계 왕조 후월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 중 유나라는 고려와 연합하여 수제국을 붕괴시킨 전력으로 초기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수의 붕괴 이후 보장왕의 망명과 거란·해 등 주변 군소민족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 등 문제로 충돌이 빈발했고, 연조는 다가올 대규모 전쟁에 대비해 국내 체계의 대대적인 정비를 과제로 떠안게 되었다. 태종 연개금은 요수(現 요강) 동안에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국경 방어선을 정비하는 한편, 돌궐의 하북 진출 이후 막북을 차지한 설연타와 하내의 제 등과 연계하여 유를 견제하였다. 또한 그동안 귀족 세습의 폐해가 심했던 고려 관직체제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와 숙청으로 삼한계가 중앙 조정에 출사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이 과정에서 예맥계 중앙귀족들의 합의체였던 제가회의가 예맥계와 삼한계의 대립으로 붕괴됨으로써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편 기존 중앙귀족들과 고조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불교를 탄압하고 제나라로부터 도교를 수입하여 친위세력으로 육성하였다.

태종은 635년 유나라가 요동성을 공격하자 친정하여 이를 격퇴하였으며, 638년 유가 재차 공격해오자 이를 물리치고 요수를 건너 임유관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유는 두 차례의 고려 공격이 실패하면서 거란, 해 등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것은 물론 국내 한족의 반란과 설연타, 제 등의 침공을 동시다발적으로 겪어야 했다. 이에 유는 보장왕의 압송을 조건으로 고려에게 원군을 요청하려 하였으나 보장왕이 말갈로 도망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고려는 대신 640~642년에 걸쳐 말갈과 거란에 대한 원정을 진행하여 설연타를 압박, 유를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660년 왜가 금관 일대를 침공하자 이를 진압하고 661년에는 대마도를 정벌하여 성과 보루를 쌓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러한 유와의 화친 기조와 강력한 왕권은 태종의 사망(666년) 이후 정종 연남생의 치세에도 이어졌으나, 귀족집단의 상호 견제와 갈등 속에 수립된 절대왕권은 결국 말기에 이르러 그 부작용이 맥계 귀족들의 반란이라는 형태로 폭발하였다. 678년 정종의 남방 순행을 틈타 동복동생인 부여공 연남건과 연남생이 예맥계 귀족들의 지지 하에 반란을 일으켜, 태자 연헌성이 살해당하고 양왕 연남건이 왕위에 오르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정종은 남방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던 중 치양에서 반란군에게 패한 뒤 자결하였고, 양왕 치세 하에서 태종 시기의 개혁은 흐지부지되고 맥계의 관직 독점과 세습 현상이 재발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679년 고려 내부의 혼란을 감지한 흑수말갈의 반란에 이어 이를 후원하는 설연타의 침공이 천리장성 북부를 휩쓸었고, 680년에는 황하 이북을 통일한 유가 수륙병진으로 재차 고려를 침공하였다. 양왕은 친히 병력을 이끌고 압록책으로 나아갔으나 요동반도 비사성과 대동강 하구에 상륙한 유군은 요동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양왕의 친위군마저 격파하여 평양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중세

대조(大趙) 시대

유의 평양 침공이 발생하자 지방에서 집결한 이들 중에는 홀한욕살 대중상이 있었다. 당시 홀한부는 100여년 전 책성 지역의 반란 이후 연씨 가문의 영지로 집중적으로 육성되었으며, 자연히 연씨 일족이 세습해왔던 자리를 태종대 개혁의 일환으로 속말부 출신의 신흥 무장귀족이었던 대중상을 발탁, 욕살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왕 연남건의 즉위 후 그를 지원한 예맥계 귀족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홀한욕살 자리도 그 대상이 되었고, 수년간 책성 일대를 경영하며 말갈 부족을 복속시키고 홀한해까지 영토를 넓힌 대중상 이하 홀한부 인사들은 이러한 처사에 크게 반발했다. 이에 조정은 기존 욕살의 행정권을 분리하여 도독위를 신설하고 홀한도독에 왕가 인사인 연수림을 보임하여 갈등이 격화되었는데, 이 와중 유의 침공으로 평양이 위태로워지자 대중상은 아들 대보림, 대조영과 함께 출정하여 681년 1월 평양성 포위망의 북쪽을 강타하고 평양에 입성하였다.

홀한군의 활약으로 평양 포위가 해소되고 유나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철군하여 고려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나, 홀한을 비롯해 중앙과 갈등을 빚던 지방군 지휘관들이 대거 평양에 집결한 상황은 중앙귀족들에게는 위기이자 기회였다. 이에 양왕과 그 친위세력은 681년 3월 10일 승전축하행사를 빌미로 이들 지방군 지휘관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대거 학살하였으며 대중상과 장남 대보림 역시 살해당했으나 대중상의 차남 대조영은 목숨을 보전해 평양성 밖 홀한군 진영으로 탈출하였다. 하루아침에 생사고락을 함께 한 주군을 잃어 분개한 지방군들은 1개월에 걸친 평양성 포위 끝에 양왕 연남건과 고위귀족들을 처형하고 평양성 공격을 이끈 대조영을 왕위에 옹립하였다.

대조는 이렇듯 기존 맥계 귀족들에 대한 신흥 무장귀족들과 지방세력의 반발, 더불어 연조의 도교 우대에 대한 불교계의 반발 등이 폭발하여 수립된 정권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위귀족가문의 관직 세습을 철폐하는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수나라 시기 처음 실시된 과거제도가 제나라를 거쳐 천통 10년(680년) 고려에서 최초로 시행되었으며, 지방행정에도 대대적인 정비가 시작되어 천통16년(696년)에는 전국을 24부로 편성하였다.

태종 시기에는 연조 말기 극심했던 주변국의 침공에 대응하여 적극적인 대외 군사행동을 벌였다. 인안 2년(721년) 흑수말갈의 침공을 받은 두막루를 구원한데 이어 다음해에는 두막루왕 낙사구의 귀부를 받아 영토로 편입하였다. 흑수말갈과 동맹관계에 있던 유 현종은 이러한 고려와 흑수말갈의 충돌을 틈타 다시금 고려 침공을 준비하였으나, 태종이 친정한 고려군은 722년 임유관 인근 마도산에서 유와 거란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수도 연성에 입성하여 후연 혜의제 고운의 후손 고세성을 국왕으로 하는 괴뢰정권 신연(新燕)을 수립했다. 이로부터 신연이 거란에 의해 멸망하는 834년까지 약 110여년동안 만리장성 서부는 고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왕조(王趙) 시대

근세

이조(李趙) 시대

근대

공화국 시대

  1. 안원왕 대 수도 내전에서 패배한 소부인 부씨의 아들 고장은의 증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