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 태황제 이환

TLE팀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0월 3일 (월) 11:40 판 (→‎개항)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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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고조 태황제
大韓 高祖 太皇帝
본명
이환 (李烉)
국적
조선 (이전)
대한제국
성별
남성
가족관계
순조 숙황제 이공 (조부)
문조 익황제 이영 (부친)
고종 광황제 이천 (양동생)
효현성황후 김씨 (정비)
효정성황후 홍씨 (계비)
효헌태자 이정 (장남)
효경옹주 이연유 (장녀)
생년월일
1827년 9월 8일 ~ 1877년 5월 16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직위
대한제국 황제
소속
대한제국 황실
연호
영락永樂
묘호
고조高祖
시호
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文憲武莊仁翼貞孝太皇帝
상태
사망

개요

고조 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文憲武莊仁翼貞孝太皇帝) 이환은 조선의 24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1억 대한인들 중 고조의 위업과 그 능력에 대해 부정하는 이는 하나도 없으며, 실질적으로 근대화라는 것을 이뤄낼 수 있도록 한 군주이다.

생애

유년기

18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1]《고조 대제 행장》에 이르면 태몽이 꽤나 비범했다고 하며 출생일에 학들이 떼거지로 날아서 왕비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이걸 궁에서는 기이하다고 했다. 《행장》에 의하면 준수한 외모에 미성을 지녔다고 하며 100일 전에도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 유아기 때 《천자문》100여 자를 뜻을 배우고 외웠다는데 아버지 효명세자는 믿지 못하였다. 이후 소문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시험했음에도 고조는 당당히 통과했고 오히려 아버지 효명세자가 매우 기뻐하며 자신보다 학문을 더 좋아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수렴청정

세손 생활 4년만에 아버지 효명세자가 22세에 비명횡사하듯 갑작스럽게 죽고 고작 4살의 나이에 동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할아버지 순조 역시 44세에 죽고 세손이던 고조는 준비도 되지 않은 만 7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 현재로 따지면 소학교 1학년인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정비이자 고조의 조모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 척사윤음(斥私倫音)이 반포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기해박해, 병오박해 등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척살되었다. 이 기간동안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민생이 파탄의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고, 외세의 이양선이 나타나 조선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임자사화

수렴청정이 15세 때 끝나면서 고조는 왕권강화 정책을 집중적으로 펼쳐가기 시작하였다.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할머니 순원왕후의 의중에 따라 남양 홍씨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은 것을 시작으로 대사간 서상교를 통해 안동 김문을 견제, 오군영과 장용영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하면서 폐단을 없애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탐관오리들을 잡아내는 등 민생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이렇게 왕이 성장하면서 안동 김씨를 몰아내려고 준비를 해갈 무렵, 위기를 느낀 젊은 안동 김씨 몇몇이 독살하려고 수를 꾀하나, 이를 엿들은 노복이 궐로 들어가 고발하게 되면서 그 유명한 임자사화가 막을 올리게 되었다. 당시 노복의 말을 들은 관리는 이를 안동 김문에 넘길 생각을 않고 고조를 몰래 알현하여 이를 고발하였고, 그 즉시 고조가 장용영과 오군영의 친위 세력을 동원하여 직접 안동 김씨를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고조는 친위세력을 이끌고 긴급하게 역모죄를 명분으로 주요 세도 세력들을 추포하기 시작하였고, 사대문을 장악하여 밖으로 도주하려는 이들을 모조리 색출하였다. 남은 김문의 몇 인원들이 사병을 이끌고 저항을 하였으나, 고조가 직접 나서 "그대들은 조선과 고(孤)의 신하인가, 김(金)의 신하인가? 고(孤)와 이 조선의 신하라면 길을 비키어라" 라고 말을 하니 전의를 잃고 항복하였다.

난을 진압한 후 고조는 친국을 시작하여, 역모죄를 비롯한 수십가지의 항목으로 세도가와 연관된 이들을 모조리 체포, 국문하였다. 안동 김씨부터 시작해 연관된 이들 중 죄질이 몹시 추악한 이들은 극형을 받았으며, 나머지 친 세도가 인물들은 파직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이후 왕은 시파와 남인들을 국정에 등용하면서 조선을 개혁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우선 가장 시급하였던 삼정의 문란을 '삼정이정청' 을 설치하면서 직접적으로 개혁해 나갔으며 안동 김씨의 권력장악 수단이 되었던 비변사를 혁파하였다. 또한 기존 인재들이 모조리 임자사화로 갈려나가자 당파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하면서 국왕 친위세력을 기를 겸 개혁에 힘을 쏟아붓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고조는 임자사화를 통해 점점 침몰해가던 조선을 구해내기 시작하였다.

을묘양요

1852년 임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청나라 관리와 연이 있던 이가 이에 걸려들어 파직당하고 이 소식이 청까지 들어가면서 청 조정에서 조선에 사화에 대한 조사를 명목으로 사신단을 파견하였다. 사신단에는 많은 이들이 함께 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이때 프랑스에서 청까지 온 상인 중 모험심 넘치던 한명이 사신단에 끼어 조선까지 가게 되었다.

고조는 임자사화를 통한 친위쿠데타는 별 문제 없다며, 왕조를 위협하던 악적을 몰아낸 것 뿐이니 상국에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이들에게 뇌물을 쥐어주면서 일을 마무리시켰다. 청 사신단 또한 조사하는 형식만 취하면서 다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번 사신단 또한 그렇게 무난하게 끝나는 줄 알았으나, 프랑스에서 온 상인이 조선 인삼이 그렇게 돈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밀반출하려고 작업을 치기 시작하였다. 상인들은 서북지방 끝자락과 간도 부근에서 인삼을 몰래 기르던 이들과 협력하여 청으로 조선인삼을 팔기 시작하였고 곧 막대한 부를 쌓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조선 조정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대대적인 추포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곧 상인을 비롯하여 인삼 밀반출에 협업하던 이들이 모조리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상인은 이것을 견디다 못해 동료 몇과 탈출작전을 계획하였고, 이를 실행하여 한성, 해주, 삼화, 의주를 넘고 만주를 건너서 톈진까지 도망가는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관리 몇이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탈출한 프랑스인 상인은 곧장 본국으로 귀국하여 정부에 탄원서를 내어 자신들이 한 만행을 제외하고 조선의 횡포를 알려 이들을 문명화시켜달라 요청하였고, 프랑스 정부는 이를 수락하여 함선 몇 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향하였다. 조선 강화도에 도착한 프랑스는 조선 정부에게 사신을 보내 "항구 개항, 배상금 지불, 시신 양도" 등을 조건으로 내밀었으나 조선 정부에서는 시신 양도는 허용하겠으나 배상금과 항구 개항은 어렵다며 거절의사를 내비췄고, 결국 1855년 프랑스 함선이 조선에게 선제적으로 포격을 하면서 을묘양요가 시작되었다.

처음 프랑스군은 기세등등하게 조선을 공격하였으나 박규수의 지략으로 이는 격퇴당하였고 이에 분노한 프랑스 정부는 대대적으로 조선을 공격하여 인천을 점령하면서 조선에게 힘을 보였다. 내부적으로 반전여론에 휘말린 조선 정부는 결국 프랑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하였다.

개항

을묘양요, 현대에 부르는 말로 을묘개화의 결과로 조불상호통상조약이 채결되었다. 이 조약에는 영사재판권•무역불간섭 원칙이 있는, 산업이 빈약하던 조선 입장에서 불평등 조약이었으나 협정관세 제도가 있는 등 어느정도 상식을 갖추었긴 하였다.

프랑스에 의해 제물포, 삼화, 군산 등이 개항되면서 서역의 물건들이 조선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고조는 이러한 물건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기물이 제대로 들어오니 놀랄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만든 서역에 대한 흥미와 두려움이 동하였다. 이후 프랑스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외국으로 조선은 박규수 등을 꾸려 사신단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유럽의 진보된 문명을 보고 조선 또한 개항과 이러한 신식 문물들을 받아들이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근대화'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을 시작으로 유홍기, 김홍집 등의 개화파들이 양성되었으며 조선은 그렇게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하였다. 공장, 총포, 비료 등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문물들이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고조는 이런 문명들을 충격을 최대한 적게 받으면서 흡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가리고 있었다. 청나라에 이러한 문물들을 배운다는 목적으로 영선사를 보내 조언을 받았으며 옆나라 일본과 끊겼던 조선통신사를 부활시키면서 많은 정보를 얻어오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영국, 미국 또한 조선으로 오면서 많은 조약을 맺기 시작하였고, 조선은 그렇게 국제사회의 신생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의 많은 양의 은이 외국으로 반출되가자 고조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기존에 청에서 조공으로 요구해 개발하지 않던 광산들을 비롯해 많은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조세제도를 개편하여 후대를 위한 포석을 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수 유림세력들은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는 것에 많은 반대를 표하면서 고조에게 '영남만인소'를 올리는 등 개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비치면서 지방의 혼란을 일으켰으나 유생 김제엽의 상소가 고조를 걸주에 비유하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이들 또한 진압당하게 된다.

이러한 개혁-개항세력인 젊은 층과 보수-척화세력인 유림의 대립을 겪으면서 조선의 개항은 천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조청전쟁

차근차근 서역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의 개혁을 시작해가던 고조에게 비보가 들려오게 되었다. 함경도에서 범월인 도적떼들이 조선인 마을을 약탈하자 함경도 포수들이 월경하여 이들을 토벌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이전부터 중원에서의 전란을 피해 만주 땅으로 도망오는 이들은 널려있었고, 그 중 조선과의 경계에 있던 이들은 종종 두만강을 넘어 함경도를 약탈하였다. 참다 못한 이들이 범월인을 토벌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만주 땅을 조선인이 밟았고 이것은 청 조정에 귀에도 들어갔다.

당시 두 차례의 아편전쟁으로 위신이 땅에 떨어진 청나라는 이를 세우고자 이 일을 빌미로 조선에 강경한 통첩[2]을 보냈다. 이를 고조가 거절하자, 청은 군대를 보내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청군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고 이는 막 군을 개편하기 시작한 조선군과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군 또한 엉망인건 매한가지였으나 개혁파들의 노력과 아편전쟁으로 군대 양성에 대해 관심을 가진 고조의 지원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청천강 인근에서 청군과 조선군이 한번 크게 붙었고, 조선군이 청군에게 피해를 주면서 조청전쟁의 승기는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이후 평양성에서 한번의 격전을 벌인 끝에 청군은 조선에서 후퇴하게 되었고, 고조는 이때를 기회로 여겨 한성근과 어제연 등의 무장에게 명을 내려 압록강을 넘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프랑스의 중재로 조선과 청나라는 적대행위를 중지하게 되었고, 평양조약으로 조선과 청은 사대관계 청산, 배상금 확보 등으로 근대화 자금을 모으며 조선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대한제국

1864년의 조청전쟁 승리 이후 조선은 인조와 효종에게 제를 지내며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았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고조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고, 조선이 전쟁동안에 사용한 신무기들이 큰 활약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자 수구파들 또한 척화노선을 틀어 고조의 치세 아래서의 유교질서 유지로 바꾸었다. 1866년 빗발치는 제국 선포 상소를 받아든 고조는 이를 끝내 받아들여 환구단을 쌓으라 지시하였고, 1867년 환구단에 제를 지내며 연호를 영락(永樂)[3]으로, 국호를 대한(大韓)[4]으로 하여 제국을 선포하였다. 또한 다음 해(1868년)부터 서역의 역법을 도입하겠다고 하였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 고조는 기존에 보수파의 반대로 느리게 진행하였던 개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새 부대에는 새 술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개화파로 공직을 채웠으며 서역과의 인재교류, 신식 학당 설치 등을 하면서 신생 대한제국을 근대국가로 만들어나갔다.

이렇게 국가를 발전시켜가던 고조에게는 말년으로 갈 수록 안 좋은 일이 들려오게 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제국 선포 후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태자 이정이 1869년 폐렴으로 사망하여 후계가 불안정해진 것이 있다.

태자가 사망하자 후계가 불안정해져 정부 내에서도 약간의 혼란이 일었으나 고조는 일축하며 다시 정력적으로 일을 하니 다들 쉬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조 또한 늙어가는 몸을 느꼈고, 후계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대한제국의 어린 황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근대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워 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1874년 고조는 병을 크게 앓았다. 이를 이겨내긴 하였으나 고조는 몸이 예전만큼 성하지 않음을 느꼈고, 이화학당을 다닌 황족 중 한명을 부친 문조 익황제의 양자로 들여 황태제로 삼으려 하였다.

후보는 여럿이 있었으나 총 셋으로 추려지게 되었다. 흥선군의 아들 이재황, 덕평군의 아들 완원군 이재철, 대한제국 선포 이후 추존된 장조의 4대손인 경은군 이재성이 있었다.

이중 이재황과 이재철은 부친이 살아있어 정치를 하는 것에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고, 결정적으로 경은군의 총명함과 열정이 고조의 눈에 들어왔기에 경은군은 문조 익황제의 양자로 들여 고조의 황태제로 정식 책봉되었다. 1876년 이 당시 경은군은 만 16세였기에, 고조는 자신의 건강을 고려하여 척신들에게 경은군을 잘 보좌할 것을 명하였고 경은군에게도 자신의 정치방법에 대해 직접 전수하였고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치국정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써 황태제에게 주었다.

그렇게 후계까지 준비를 다 해놓은 고조는 1877년 5월 16일 천붕하였다. 황태제와 척신들이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유언으로 '상복은 3일만 입고, 죽은 후에는 효헌태자의 능 앞에 묻어달라' 하였다.

묘호는 기계문명을 받아들이고 인묘와 효묘의 원수를 갚은 공로를 사 고(高), 주명과 삼한의 천명을 계승한 점을 사 조(祖), 그리하여 고조(高祖)로 결정되었다.

가계

* 증조부: 정조 선황제 이성
* 할아버지: 순조 숙황제 이공
 * 할머니: 순원숙황후 김씨
* 부황: 문조 익황제 이영
 * 모후: 신정익황후 조씨

* 정비: 효현성황후 김씨(1828년 ~ 1843년)
* 계비: 효정성황후 홍씨(1831년 ~ 1904년)
 * 아들: 효헌태자 이정(1854 ~ 1869년)
* 후궁: 순화궁 경빈 김씨(1832년 ~ 1907년)
* 후궁: 정빈 윤씨
* 후궁: 화락당 숙의 김씨(1814년 ~ 1895년) 
 * 딸: 효경옹주(1856년 ~ 1903년)

여담

  • 야사에 따르면 고조는 계비 삼간택 때 김재청의 딸인 경빈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와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홍재룡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간택하자 3년 뒤에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빈 김씨는 계비 삼간택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야사라고 한다. 고조는 경빈 김씨를 위해 친히 낙선재를 지었을 정도라고 한다.
  • 《고조실록》 1권에서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얼굴은 준수한 건 물론이고 목소리도 좋았다는 뜻이다. 다만 17세 때 천연두를 앓은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고조가 즉위할 때 신하들이 절실하고 시급한 여섯 가지 일들을 아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 궁위를 엄하게 하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더욱이 어리신 나이라 보통 한가로이 계실 때쯤 무리들과 쉽게 친숙해지고 자질구레한 장난감으로 이러한 무리들은 쉽게 유혹하니 심지를 고혹시켜 성공에 누를 끼침은 모두 이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묘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셨으나 환시를 거느리심이 매우 엄해 항상 말을 붙이지 아니하시어 전하께서는 힘쓰소서.'라면서 언급된다.(《고조실록》 1권, 고조 즉위년 12월 16일 병오 1번째기사) 고조가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승은을 입기 위해 유혹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아마 앞서 말한 《실록》에 언급된 내용을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하기에 안달났다' 이런 뉘앙스로 호사가들에 의해 널리 왜곡되어 알려진 것 같다. 《실록》을 보면 알다시피 '고조가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했다'보다는 '젊은 나이에 즉위해 궁인들이 쉽게 유혹을 해서 누를 끼친다' 이런 식으로 실제로 얘기했기 때문이다. 당시 젊은 임금은 외모와 상관없이 궁인들의 관심 대상이었는데 승은 받기가 더 수월한 이유도 없지 않아 있다.


  1. 고조의 증조부 정조 이후로 처음 책봉된 왕세손이었으니, 정통성은 말도 안될 정도로 강하였다.
  2. 조선왕이 직접 북경에 입조하여 황제께 조아리라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에 청군을 주둔시킬 것, 조선 공주를 황제의 후궁으로 보내게 할 것 등이 있었다.
  3. 옛 고려(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썼다 알려진 연호로, 국가를 중흥시키겠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4. 옛 삼한(三韓. 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고 하여 이를 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