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 태황제 이환

TLE팀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6월 1일 (목) 23:23 판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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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초대 황제
고조 태황제 | 高祖 太皇帝
본명
이환 (李烉)
출생
1827년 9월 8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사망
1877년 5월 16일 (향년 49세)
대한제국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국적
조선 (이전)
대한제국
재위기간
조선국 왕세손
1906년 ~ 1910년
조선국 제24대 국왕
1834년 ~ 1867년
대한 초대 황제
1867년 ~ 18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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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가족관계
순조 숙황제 이공 (조부)
문조 익황제 이영 (부친)
고종 광황제 이천 (양동생)
효현태황후 김씨 (정비)
효정태황후 홍씨 (계비)
효헌태자 이정 (장남)
정녕옹주 이연유 (장녀)
연호
영락永樂
묘호
고조高祖
시호
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文憲武莊仁翼貞孝太皇帝
개요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시자 조선의 24대 국왕이신 고조 태황제께서는 1827년 9월 8일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에서 문조 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아들로 출생하셨습니다. 대제께서는 이 나라 대한의 창건자이시요, 7천만 대한인의 영원하신 국부이시자 나랏님입니다.

대제의 치세는 그야말로 전 조선의 격동기였습니다. 기계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시동을 가하던 때였으며, 이 전 조선 신민들이 피와 땀을 흘려 후세대를 위하던 때 였습니다. 대제께서는 조선 반도에만 갇혀있던 민족을 해방시켜 저 드넓은 만주 땅을 다시 통일시키는 발판, 심양과 간도 지역을 다시 받아오셨습니다. 또한 단군 이래로 끊어진 민족의 천명을 거두어 연호를 영락으로 지어 만주의 한, 대한제국의 황제, 중화의 천자로서 즉위하셨습니다.

대제께서는 외동아들이신 효헌태자께서 있으셨으나, 태자께선 어린 나이에 요절하시어 영특하기로 자자한 경은군을 문조 익황제의 양자로 입적시키어 제국의 뒤를 잇도록 하시었습니다.

- 인게임 '고조 태황제 이환' 설명

고조 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文憲武莊仁翼貞孝太皇帝) 이환은 조선의 24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1억 대한인들 중 고조의 위업과 그 능력에 대해 부정하는 이는 하나도 없으며, 실질적으로 근대화라는 것을 이뤄낼 수 있도록 한 군주이다.

생애

유년기

18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1]《고조 대제 행장》에 이르면 태몽이 꽤나 비범했다고 하며 출생일에 학들이 떼거지로 날아서 왕비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이걸 궁에서는 기이하다고 했다. 《행장》에 의하면 준수한 외모에 미성을 지녔다고 하며 100일 전에도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 유아기 때 《천자문》100여 자를 뜻을 배우고 외웠다는데 아버지 효명세자는 믿지 못하였다. 이후 소문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시험했음에도 고조는 당당히 통과했고 오히려 아버지 효명세자가 매우 기뻐하며 자신보다 학문을 더 좋아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수렴청정

세손 생활 4년만에 아버지 효명세자가 22세에 비명횡사하듯 갑작스럽게 죽고 고작 4살의 나이에 동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할아버지 순조 역시 44세에 죽고 세손이던 고조는 준비도 되지 않은 만 7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 현재로 따지면 소학교 1학년인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정비이자 고조의 조모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 척사윤음(斥私倫音)이 반포되었고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기해박해, 병오박해 등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척살되었다. 이 기간동안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민생이 파탄의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고, 외세의 이양선이 나타나 조선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임자사화

수렴청정이 15세 때 끝나면서 고조는 왕권강화 정책을 집중적으로 펼쳐가기 시작하였다.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할머니 순원왕후의 의중에 따라 남양 홍씨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은 것을 시작으로 대사간 서상교를 통해 안동 김문을 견제, 오군영과 장용영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하면서 폐단을 없애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탐관오리들을 잡아내는 등 민생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이렇게 왕이 성장하면서 안동 김씨를 몰아내려고 준비를 해갈 무렵, 위기를 느낀 젊은 안동 김씨 몇몇이 독살하려고 수를 꾀하나, 이를 엿들은 노복이 궐로 들어가 고발하게 되면서 그 유명한 임자사화가 막을 올리게 되었다. 당시 노복의 말을 들은 관리는 이를 안동 김문에 넘길 생각을 않고 고조를 몰래 알현하여 이를 고발하였고, 그 즉시 고조가 장용영과 오군영의 친위 세력을 동원하여 직접 안동 김씨를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2]

고조는 친위세력을 이끌고 긴급하게 역모죄를 명분으로 주요 세도 세력들을 추포하기 시작하였고, 사대문을 장악하여 밖으로 도주하려는 이들을 모조리 색출하였다. 남은 김문의 몇 인원들이 사병을 이끌고 저항을 하였으나, 고조가 직접 나서 "그대들은 조선과 고(孤)의 신하인가, 김(金)의 신하인가? 고(孤)와 이 조선의 신하라면 길을 비키어라" 라고 말을 하니 전의를 잃고 항복하였다.

난을 진압한 후 고조는 친국을 시작하여, 역모죄를 비롯한 수십가지의 항목으로 세도가와 연관된 이들을 모조리 체포, 국문하였다. 안동 김씨부터 시작해 연관된 이들 중 죄질이 몹시 추악한 이들은 극형을 받았으며, 나머지 친 세도가 인물들은 파직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이후 왕은 시파와 남인들을 국정에 등용하면서 조선을 개혁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우선 가장 시급하였던 삼정의 문란을 '삼정이정청' 을 설치하면서 직접적으로 개혁해 나갔으며 안동 김씨의 권력장악 수단이 되었던 비변사를 혁파하였다. 또한 기존 인재들이 모조리 임자사화로 갈려나가자 당파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하면서 국왕 친위세력을 기를 겸 개혁에 힘을 쏟아붓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고조는 임자사화를 통해 점점 침몰해가던 조선을 구해내기 시작하였다.

을묘양요

1852년 임자사화의 결과는 다른 일을 불러 일으켰는데, 안동 김문과 엮여있던 풍양 조문과 여흥 민문까지 같이 걸려들면서 이들 사이에 암암리 퍼져있던 천주교도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였다. 이전에도 척사윤음 등의 어명을 내린 적이 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임자사화의 불구덩이에서 천주교들은 멀쩡할 수 없었고, 왕권강화와 민심 평정의 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1853년 이뤄진 계축박해로 인해 많은 천주교도들과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까지 사망하였다.

프랑스 선교사의 사망은 알음알음 퍼져 조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의해 본국까지 도착하였고, 프랑스는 <신앙의 자유>와 <탄압받는 형제>들을 구하기 위해 조선을 향해 뱃머리를 돌렸다. 처음 제물포 항에 닿은 프랑스의 군함은 조선 조정에게 신앙의 자유와 개항장의 마련을 요구하였으나, 해안선 가까이 다가온 군함을 공격한 조선군 해안포에 의해 군함이 피해를 입고 후퇴한 후, 프랑스가 다시 더 많은 함대를 이끌고 침공하자 그제서야 신앙의 자유, 항구 지대의 개항 등 여러 조항을 담은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조선과 프랑스는 맺게 되었다. 조불수호통상조약의 뒤를 이어 조영, 조미 등의 통상조약까지 차례대로 맺은 조선은 비로소 국제사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개항

을묘양요, 현대에 부르는 말로 을묘개화의 결과로 조불상호통상조약이 채결되었다. 이 조약에는 영사재판권•무역불간섭 원칙이 있는, 산업이 빈약하던 조선 입장에서 불평등 조약이었으나 협정관세 제도가 있는 등 어느정도 상식을 갖추었긴 하였다.

한편 조선 내부에서도 무력에 의한 개항에 의해 척사파와 개화파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으나, 임자사화로 권위가 한껏 높아진 이환이 개화던 척사던 일단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진정시킨 후 청, 일본, 그리고 프랑스 및 여러 서방국가들에 시찰단을 보내어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일본 쪽에는 조선통신사의 부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였고,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보내었다. 각지의 외국으로 간 조선인 유학생들은 이러한 서양 문물에 충격을 받고, 개화를 지지하였으며 이환 또한 자신의 친위세력이자 이들 개화파들의 신문물에 대한 설명을 듣고 개화를 결심하였다.

18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무역에서 척사파의 말대로 손해만 무지막지하게 볼 줄 알았던 조선은 뜻 밖에 상품을 얻어내었는데, 홍삼이 아편 치료에 큰 효과를 보인다고 알려지면서 청나라에서 크나큰 수요가 생겼다. 이 덕분에 재원을 마련한 조선은 미국, 프랑스 등에서 방직기계와 총기, 화포 등을 들여오면서 근대화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프랑스에 의해 제물포, 삼화, 군산 등이 개항되면서 서역의 물건들이 조선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고조는 이러한 물건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기물이 제대로 들어오니 놀랄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만든 서역에 대한 흥미와 두려움이 동하였다. 이후 프랑스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외국으로 조선은 박규수 등을 꾸려 사신단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유럽의 진보된 문명을 보고 조선 또한 개항과 이러한 신식 문물들을 받아들이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근대화'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을 시작으로 유홍기, 김홍집 등의 개화파들이 양성되었으며 조선은 그렇게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하였다. 공장, 총포, 비료 등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문물들이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고조는 이런 문명들을 충격을 최대한 적게 받으면서 흡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가렸다. 개혁-개항세력인 젊은 층과 보수-척화세력인 유림의 대립을 겪으면서 조선의 개항은 천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조청전쟁

차근차근 서역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의 개혁을 시작해가던 고조에게 비보가 들려오게 되었다. 함경도에서 범월인 도적떼들이 조선인 마을을 약탈하자 함경도 포수들이 월경하여 이들을 토벌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었다. 이전부터 중원에서의 전란을 피해 만주 땅으로 도망오는 이들은 널려있었고, 그 중 조선과의 경계에 있던 이들은 종종 두만강을 넘어 함경도를 약탈하였다. 참다 못한 이들이 범월인을 토벌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만주 땅을 조선인이 밟았고 이것은 청 조정에 귀에도 들어갔다.

당시 두 차례의 아편전쟁으로 위신이 땅에 떨어진 청나라는 이를 세우고자 이 일을 빌미로 조선에 강경한 통첩[3]을 보냈다. 이를 고조가 거절하자, 청은 군대를 보내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청군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고 이는 막 군을 개편하기 시작한 조선군과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군 또한 엉망인건 매한가지였으나 개혁파들의 노력과 아편전쟁으로 군대 양성에 대해 관심을 가진 고조의 지원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청천강 인근에서 청군과 조선군이 한번 크게 붙었고, 조선군이 청군에게 피해를 주면서 조청전쟁의 승기는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이후 평양성에서 한번의 격전을 벌인 끝에 청군은 조선에서 후퇴하게 되었고, 고조는 이때를 기회로 여겨 한성근과 어제연 등의 무장에게 명을 내려 압록강을 넘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프랑스의 중재로 조선과 청나라는 적대행위를 중지하게 되었고, 평양조약으로 조선과 청은 사대관계 청산, 배상금 확보 등으로 근대화 자금을 모으며 조선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대한제국

1864년의 조청전쟁 승리 이후 조선은 인조와 효종에게 제를 지내며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았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고조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고, 조선이 전쟁동안에 사용한 신무기들이 큰 활약을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자 수구파들 또한 척화노선을 틀어 고조의 치세 아래서의 유교질서 유지로 바꾸었다. 1866년 빗발치는 제국 선포 상소를 받아든 고조는 이를 끝내 받아들여 환구단을 쌓으라 지시하였고, 1867년 환구단에 제를 지내며 연호를 영락(永樂)[4]으로, 국호를 대한(大韓)[5]으로 하여 제국을 선포하였다. 또한 다음 해(1868년)부터 서역의 역법을 도입하겠다고 하였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 고조는 기존에 보수파의 반대로 느리게 진행하였던 개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새 부대에는 새 술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개화파로 공직을 채웠으며 서역과의 인재교류, 신식 학당 설치 등을 하면서 신생 대한제국을 근대국가로 만들어나갔다.

이렇게 국가를 발전시켜가던 고조에게는 말년으로 갈 수록 안 좋은 일이 들려오게 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제국 선포 후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태자 이정이 1869년 폐렴으로 사망하여 후계가 불안정해진 것이 있다.

태자가 사망하자 후계가 불안정해져 정부 내에서도 약간의 혼란이 일었으나 고조는 일축하며 다시 정력적으로 일을 하니 다들 쉬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조 또한 늙어가는 몸을 느꼈고, 후계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대한제국의 어린 황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근대교육기관인 '수학원'을 세워 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1874년 고조는 병을 크게 앓았다. 이를 이겨내긴 하였으나 고조는 몸이 예전만큼 성하지 않음을 느꼈고, 수학원을 다닌 황족 중 한명을 부친 문조 익황제의 양자로 들여 황태제로 삼으려 하였다.

후보는 여럿이 있었으나 총 셋으로 추려지게 되었다. 흥선군의 아들 이재황, 덕평군의 아들 완원군 이재철, 대한제국 선포 이후 추존된 장조의 4대손인 경은군 이재성이 있었다.

이중 이재황과 이재철은 부친이 살아있어 정치를 하는 것에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고, 결정적으로 경은군의 총명함과 열정이 고조의 눈에 들어왔기에 경은군은 문조 익황제의 양자로 들여 고조의 황태제로 정식 책봉되었다. 1876년 이 당시 경은군은 만 16세였기에, 고조는 자신의 건강을 고려하여 척신들에게 경은군을 잘 보좌할 것을 명하였고 경은군에게도 자신의 정치방법에 대해 직접 전수하였고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치국정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써 황태제에게 주었다.

그렇게 후계까지 준비를 다 해놓은 고조는 1877년 5월 16일 천붕하였다. 황태제와 척신들이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유언으로 '상복은 3일만 입고, 죽은 후에는 효헌태자의 능 앞에 묻어달라' 하였다.

묘호는 기계문명을 받아들이고 인묘와 효묘의 원수를 갚은 공로를 사 고(高), 주명과 삼한의 천명을 계승한 점을 사 조(祖), 그리하여 고조(高祖)로 결정되었다.

가계


여담

  • 야사에 따르면 고조는 계비 삼간택 때 김재청의 딸인 경빈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와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홍재룡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간택하자 3년 뒤에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빈 김씨는 계비 삼간택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야사라고 한다. 고조는 경빈 김씨를 위해 친히 낙선재를 지었을 정도라고 한다.
  • 《고조실록》 1권에서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얼굴은 준수한 건 물론이고 목소리도 좋았다는 뜻이다. 다만 17세 때 천연두를 앓은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고조가 즉위할 때 신하들이 절실하고 시급한 여섯 가지 일들을 아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 궁위를 엄하게 하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더욱이 어리신 나이라 보통 한가로이 계실 때쯤 무리들과 쉽게 친숙해지고 자질구레한 장난감으로 이러한 무리들은 쉽게 유혹하니 심지를 고혹시켜 성공에 누를 끼침은 모두 이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묘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셨으나 환시를 거느리심이 매우 엄해 항상 말을 붙이지 아니하시어 전하께서는 힘쓰소서.'라면서 언급된다.(《고조실록》 1권, 고조 즉위년 12월 16일 병오 1번째기사) 고조가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승은을 입기 위해 유혹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아마 앞서 말한 《실록》에 언급된 내용을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하기에 안달났다' 이런 뉘앙스로 호사가들에 의해 널리 왜곡되어 알려진 것 같다. 《실록》을 보면 알다시피 '고조가 미남이라 궁인들이 유혹했다'보다는 '젊은 나이에 즉위해 궁인들이 쉽게 유혹을 해서 누를 끼친다' 이런 식으로 실제로 얘기했기 때문이다. 당시 젊은 임금은 외모와 상관없이 궁인들의 관심 대상이었는데 승은 받기가 더 수월한 이유도 없지 않아 있다.
The Last Empire
Land of the Light and Night TLE [GWR] TLE [Hoi4] The Last Empire For the Future
  1. 고조의 증조부 정조 이후로 처음 책봉된 왕세손이었으니, 정통성은 말도 안될 정도로 강하였다.
  2. 이 임자사화의 고조 독살시도는 현재 사학계에서는 고조의 조작이라는 설이 정론이다.
  3. 조선왕이 직접 북경에 입조하여 황제께 조아리라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에 청군을 주둔시킬 것, 조선 공주를 황제의 후궁으로 보내게 할 것 등이 있었다.
  4. 옛 고려(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썼다 알려진 연호로, 국가를 중흥시키겠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5. 옛 삼한(三韓. 고구려, 백제,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고 하여 이를 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