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광황제 이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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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일 (목) 23:26 판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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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2대 황제
고종 광황제 | 大韓 高宗 光皇帝
본명
재성(載星) → 천(𠀡)[1]
출생
1860년 12월 21일
조선 한성부 익평대원군 사저
사망
1910년 8월 29일(향년 49세)
대한제국 한성부 창덕궁 교태전
국적
조선 (이전)
대한제국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제
1876년 4월 12일 ~ 1877년 5월 16일
대한 제2대 황제
1877년 5월 16일 ~ 1910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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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가족관계
순조 숙황제 이공 (양조부)
문조 익황제 이영 (양부)
고조 태황제 이환 (양형)
풍계군 이당 (친조부)
익평대원군 이희 (친부)
영명광황후 권씨 (정비)
성빈 이씨 (후궁)
순종 효황제 이택 (장남)
성조 강황제 이진 (차남)
경친왕 이원 (삼남)
정친왕 이영 (사남)
경선공주 (장녀)
경순공주 (차녀)
연호
광무光武
묘호
고종高宗
존호
체천계원조극돈륜정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2]
시호
강문장인무의열성광황제[3]
군호
경은군(景恩君)[4]
개요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이신 고종 광황제께서는 1860년 12월 21일 장조 사도장헌세자 이선의 서장남인 은언군의 손자, 익평군의 장남으로 출생하셨습니다. 경은군의 작위에 봉작되면서 초명으로 이재성을 쓰시었습니다. 대제께서는 어릴 적부터 영특하여 조선 왕실의 복이라고 칭송받으셨으며 그 명성이 높아 고조 태황제께서 양동생으로 입적시켜 대한의 뒤를 잇도록 하셨습니다.

고조 태황제께서 대한을 건국하시어 동아문명의 토대를 마련하셨다면 고종 광황제께서는 이를 완성하시어 구주를 비롯하여 세계 만방에 제국의 위엄을 드높히셨습니다. 연호를 광무로 지어 대제께서 통치하던 시절은 찬란한 서광으로 제국을 향해게 하였습니다. 서양 열강들과 어쩔 수 없이 채결하였던 불평등 조약도 북방의 노서아, 또는 아라사라고 불리는 강국도 이 제국과 고종 황제의 맹진을 막을 수 없었으니 이는 비로소 칠천만 제국인이 아주의 등불로 일어서는 것은 운명과 다름없다는 것을 반증해주었습니다.

고종 광황제께서는 다섯 분의 황자와 두 분의 황녀를 두셨으니 장남이신 순종 효황제께서 영광스런 제국을 이으셨습니다.


- 인게임 '고종 광황제 이천' 설명

고종 강문장인무의열성광황제(康文莊仁武毅烈聖光皇帝) 이천은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이다.

조선의 방계 왕족 익평군의 서자로 출생하여 궐 밖에서 생활하였으며, 소학을 6세에 외고 여러 경전을 10세가 되기 전에 읽으니 당시에 집안에 수재가 태어났다며 많은 소문이 났다.《고조 대제 행장》에 따르면 【가까운 종친 경은군의 그 총명함이 도성에 널리 알려졌으니 수학원에서 그 능력을 쉬이 펼치게 하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의 비범함이 현대까지도 잘 드러나있다[5].

생애

유년기

1860년 장조 의황제의 증손자인 익평군의 서자로 태어난 고종은 3세에 아버지 익평군을 여의게 되었다. 원래라면 익평군의 가계를 이어 가주가 되었어야 했으나 어린 나이와 서출이라는 한계로 덕안군이 입양되어 본가의 뒤를 이었다. 덕안군과 고종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하며, 덕안군은 아버지를 여읜 고종을 딱하게 여겨 그를 부족힘 없이 챙겨주었다.

1867년 고조가 환구단을 쌓고 즉위하면서 사도세자를 장조 의황제로 추존하자 군주의 4대손은 왕족으로 인정한다는 범례에 따라 1870년 경은도정에 봉작되었다. 이후 1872년 일괄적으로 남자 황족을 군으로 정한다는 칙령에 따라 경은군으로 승작되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이 깊어 고서를 탐독하였으며 개화 이후 들어온 신식 문물과 서역의 도서를 읽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한다.[6]

1871년에는 황족과 고위층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 수학원이 세워지면서 군의 신분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덕평군 이변의 아들 완원군과 완순군, 인양군 등과 자주 어울렸다 한다. 학당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칭송을 받았으며 이는 훗날 고종 즉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874년 고조가 큰 병을 앓고 후계를 진지하게 고민하자, 경은군은 후계를 고를 때 가까운 종실인 것과 고조가 그의 총명함과 영민함을 마음에 들어하여 1875년 궐로 불러들여 관직을 하게 되었다.

1876년 문조 익황제의 양자로 입적시킨 후 황태제로 공식 책봉되었으며 고조에게 직접 치국에 대하여 배우게 된다. 고종은 고조에게 유연한 국정운영과 왕권강화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이는 훗날 고종 치세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후 고조가 훙서하자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여 대한의 2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위기의 시대

즉위를 하였울 무렵 고종의 나이는 고작 만 열 일곱이 불과하였다. 고조에 비하면 충분한 나이었지만, 개화와 격변에 시대에서는 너무 어린 나이었다. 선대가 남긴 노련한 신하들이 보내는 의심의 눈길, 정통성이 부족한 군주, 그리고 외세의 위협까지. 모든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878년 즉위 1년 후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대한제국 정부의 명을 받아 사세보 일대의 해안을 측정하러 갔을 때, 세이난 반군이 운양호를 공격하면서 일어난 운양호 사건은 곧 조정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새로 즉위한 군주의 권위와 제국의 위엄을 드높여야 되겠다 생각한 고종은 곧 사세보로의 전면적인 공격, 일전에 프랑스가 일으킨 을묘양요를 일본에 재현시키기로 하였다.

약간의 피해가 있었지만 선대가 남겨놓은 인재들의 도움으로 규슈를 영향권으로 확보하는 것에 성공한 고종은 황제를 향하는 의심을 지워가기 시작하였다.

1881년에는 선대 고조가 추진하던, 탈아입구를 명목삼아 시행할 선거라는 것을 고종은 친히 관리를 뽑는 관선 관리와 민중이 뽑은 관리를 포섭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보해야겠다 생각하여 칙명으로 부현회규칙을 발표하면서 최초로 실시하였다. 물론 제한적으로 실시하였고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이는 최초의 대한제국의 선거였고 서양이 대한제국을 야만적인 국가에서 문명화를 따라오는 국가로 보게 바꾸었다.

그리고 그의 능력을 시험하는 사건이 찾아오게 되었다. 1882년 청나라가 대한이 남만주 비무장 지역에서 훈련을 하였다는 날조를 하여 대한에게 평양조약의 재합의를 논하자는 통첩을 하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한창 발전하고 있는 대한제국에게 평양조약의 준수와 만주진출은 중요한 사항이였기에 이 통첩을 고종과 대신들은 거절하였으며, 이를 빌미로 한청전쟁[7]이 발발하게 된다.

청군 또한 이번에는 중무장하여 북양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게 하였고, 초반에 방심했던 대한군은 몇몇 교전에서 청군에게 패퇴하고 뒤로 물러나게 된다. 북양함대는 신생 대한의 함대를 몇 번의 교전으로 패퇴시키며 해상봉쇄를 시작하였고, 제국에는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이때, 고종이 직접 나섰다. 고종은 친위대를 거느리고 북쪽 평양성으로 향하였고, 군을 독려하면서 전쟁에서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전 한인이 고조의 적법한 후계이자 대한의 부정할 수 없는 군주인 고종을 따랐다.[8]

이후 치룬 여러 격전에서 전열을 정비한 대한제국은 청군을 말 그대로 쓸어버리게 되면서 전쟁을 끝내가기 시작하였다. 청군은 패퇴하였고, 대한군은 파죽지세로 나아가 심양에 태극기를 꽂아넣었다. 해상봉쇄 또한 청군의 방심과 훈련부족으로 한국 함대가 급습을 해 풀리게 되어 역으로 천진을 한국군이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청이 대한에게 찢어지는 것을 본 러시아 극동군은 이때 한창 노리고 있던 북만주 쪽으로 【러시아 인민의 피해보상과 대한제국을 돕는다】 라는 명분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였고, 러시아와 한국 양쪽에서 청나라는 공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산해관까지 대한제국군이 진출할 기세를 보이자, 청 조정은 대한제국•러시아 제국과의 협상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협상에서 대한제국이 차지한 송화강 이남 만주지역은 대한제국에게 완전히 넘어오게 되었고, 북만주지역은 러시아의 관리에 들어기게 되었다. 또 청 조정에서 대한제국에게 배상금까지 넘기면서 한청전쟁은 그렇게 끝나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고종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선대의 8촌이라는 낮은 정통성, 미숙한 군주라는 결점을 극복하고 그는 자신을 대한제국과 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발전의 시대

위기를 극복한 후 대한제국은 점점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고종의 지시 아래 서역문물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산업이 커지면서 대한제국은 중진국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1880년대 정부가 추진한 【제 1차 5개년 계획】을 통해 제국 내부를 관동하는 철도와 항구, 기타 산업시설을 확보하였고 내실을 튼튼하게 다지게 되었다. 점점 발전하는 과정을 보면서 불평등 조약도 차차 개정해나가기 시적했고, 지식인층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서양의 문명이 들어오면서 깨어있는 이들은 대한제국 또한 서양처럼 법과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젊고 혈기넘치는 고종 또한 이들의 생각에 동의하여, 대한에 헌법이라는 것을 들여오기 시작하였다.

고종의 윤허로 1880년대 초중반부터 다시 제작되기 시작한 대한의 헌법은 외국으로의 답사와 고문 초대를 통해 여러가지 헌법 틀을 확인하였고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헌법을 참고하여 대한제국의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1886년 대한제국 최초의 헌법인 《흠정대한국헌법》이 완성되었다. 헌법 완성을 시작으로 제대로 된 법제를 꾸려가기 시작하였고, 대한제국은 그렇게 근대적 관료국가로 나아가게 되었다.

1891년에는 국정운영에 민의를 반영하려고 선거인의 범위를 늘려, 만 25세 이상의 남성으로, 15원 이상의 직접국세를 납부하는 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였다.

이렇게 평화롭게 발전을 이어가면서 고종을 향한 지지는 굳건해졌고 그의 권위는 안정되었다. 1881년 태자 탄생은 이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고, 대한제국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문명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치세 말년

그러나 고종의 치세 말년은 대한제국이 쌓아온 모든 것을 시험하게 하였다. 1899년 의화단의 난을 시작으로 폭풍이 몰아치게 되었고 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많은 충돌은 대한제국에 전운을 불게 하였다.

결정적인 1902년 러시아와의 충돌은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파탄내게 만들었고, 대한제국의 북만주 진출과 완충지대 확보 욕구, 청나라-북경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욕은 러시아의 심기를 심하게 거슬리게 만들었고, 결국 1902년 초가을에 한국과 러시아는 전쟁을 시작하였다.

한국군의 선제공격을 시작으로 러시아군과 대한군은 많은 곳에서 교전을 이어갔으며, 일전일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군의 목숨을 건 분전과 러시아 극동군의 무능, 그리고 극동에 찾아온 추위가 대한제국을 향해 승리를 보내주었고, 결정적으로 러시아 극동함대와 발틱함대가 대마도 해협에서 대한제국 해군에게 대패하면서 러시아와 대한제국은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차르의 전제정에 대한 회의로 명목상이라도 입헌군주제로 전환되게 되었으며 대한제국은 북만주와 해성도, 해삼위를 확보하게 되면서 열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천붕

1904년까지 이어진 한러전쟁의 끝으로 대한제국 내에서 고종의 위엄은 고조와 비슷할 정도가 되었다. 1850년대 개항 이후 반백년 만에 열강과 어깨를 겨룰 수 있게 하엮으니 어찌 존경을 하지 않겠는가. 더군더나 경제를 발전시켜 신민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였으니, 황제에게 부정적인 말을 담는 순간 반역이라 하여 심문당할 수 있던 때였다.

고종은 전쟁 이후 피로를 느끼며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고, 본인은 뒤에서 황태자가 운영하는 제국의 진로를 잡아주는 등을 제외하면 일절 국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1910년 8월 29일 고종은 태자, 성친왕, 경친왕과 황후, 황비 등과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훙하였다. 고종 사후 대한제국에는 전국적인 추모열기가 불었고 몇몇 이들은 고종을 내세에서 모시겠다며 자결하기도 하는 등의 소동이 있기도 하였다.

황태자는 연호를 융희로 하여 즉위하였고, 고종의 위업을 기려 묘호를 고종으로 하고 시호를 강문장인무의열성광황제(康文莊仁武毅烈聖光皇帝)으로 올렸다.

가계

평가

긍정적 평가

세상의 위대한 군주가 누구인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서양에는 에드워드 7세, 동양에는 광무제가 있다고 말을 할 것이다.
- 이승만
고조 대제가 제국을 세워 한민족이 살아갈 국가를 건설한 설계자였다면, 고종 그러한 국가를 완성한 완성자였다. 그의 뛰어난 행정능력과 외교, 그리고 정치 수완은 제국의 건설자인 고조의 무거운 짐을 이을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전 한민족이 격동의 시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고종 실록' 편

대한제국의 젊은 군주, 17세의 나이로 즉위해 격동의 개화기 속을 보낸 고종은 자칫 잘못하면 나라가 한 순간에 나락으로 갈 수 있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에 맞지 않는 진중한 행동과 침착함, 그리고 통찰력을, 때로는 과감함을 보여주었다. 과감함은 대표적으로 4차 조청전쟁[10], 혹은 한청전쟁이라 부르는 전쟁에서 낮은 권위를 직접 세우기 위해 전선 코앞인 평양으로 간 점[11], 통찰력은 아와지 조약에서 한국의 열세를 인정하고 규슈의 작은 영향권만 받아오고 힘을 기른 점이 그것이다.

또한 바다로 가는 것에 제국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점을 알고 있어, 18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해군 함정들을 구입하기 시작하여 한 때 동아시아를 누볐던 대한제국 해군의 시작을 알렸기도 하다[12].

2017년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한국 황실의 중시조로, 후사가 귀했던 조선-대한 왕실에 되는 황자를 낳으면서 후사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기도 하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고종은 당시 대한제국에 반드시 필요했던 명군이다. 중진국의 함정에 빠질 수 있던 대한을 열강의 지위로 올린 군주임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흠정대한국헌법을 제정해 제한적인 입헌군주제를 실시함으로서 후대 융희 데모크라시가 수월히 진행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부정적 평가

조선인이 낳은 최악의 호자(胡子)는 바로 저놈의 군주일 것이다!
- 위안스카이
여담

  • 외모가 준수하였다고 한다. 고종의 아들 순종, 성조, 경친왕과 딸들 모두 【Fair Prince】나 【Fair Preincess】로 불린 것이 이를 나타내준다.
  • 비속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고종실록》의 말기로 갈 수록 사관이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라 하여 얼버부린 부분이 늘었고, 끝내 고종이 이를 눈치채고는 【사관은 제대로 기술하라】고 전교를 남겨 고종이 한 말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
창작물에서

  • 개화기를 다룬 드라마 '광야'의 고조의 뒤를 이은 주인공. 유년기의 천진난만하지만 총기있는 모습과 장년기의 근엄하고 진중한 황제의 모습의 갭차이로 인터넷 등지에서는 밈화 되었다.
  1. 1877년 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피휘의 관습을 따라 바꾸었다.
  2. 體天繼元肇極敦倫正聖訓弘嶪係基宣歷建幸坤正營義泓烋修
  3. 康文莊仁武毅烈聖光皇帝
  4. 즉위 전 고조에게서 받은 작위. 본디 경은도정(景恩都正)에 봉해졌으나, 일괄적으로 황족 남손은 군으로 봉한다는 칙령에 따라 경은군으로 승작되었다.
  5. 흔한 군주 신격화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제로 고종이 보인 행보를 보면 그의 능력이 진실된 것임을 알 수 있다.
  6. 물론 서역의 책을 읽는 것과 신문물을 접할 수 있던 것은 전적으로 형인 덕안군의 배려가 있었다.
  7. 혹은 제4차 한중전쟁(4th Sino-Korean War)
  8. 고종실록 7권 임오년(1882년) 기술.【황제가 말하길, “수많은 신민이 평양으로 나를 따라 왔으니 어찌 이들을 버릴 수 있겠는가. 죽더라도 짐은 이 평양 땅에서 죽겠노라”고 하였다.】
  9. 첩실이었으나 아들 고종이 즉위한 이후 추증되었다.
  10. 1차는 정묘호란, 2차는 병자호란, 3차는 독립전쟁, 4차가 임오대전. 서양에서는 청을 China로 뭉뚱그리고, 조선과 한국은 Korea로 뭉뚱그려서 1937년 일어나는 한중전쟁을 5차 한중전쟁(The 5th Sino-Korean War)이라고 부른다.
  11. 이것에도 정치적인 계산이 들어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개화기 당시 많은 부를 쌓기 시작했던 평양과 의주 등 관서 지역이 차별로 인해 홍경래의 난이 일어날 정도로 중앙 조정에 불충하였던 점을 새로 즉위한 국왕이 직접 친정함으로서 선대의 군주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주려 했다는 노림수라는게 바로 그것.
  12. 물론 구식 함정들을 사들이고, 개보수를 한 것에 불과하였지만, 기술이 쌓이면서 어느정도 구색을 갖추었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