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평황제 이휼

TLE팀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6월 1일 (목) 23:28 판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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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5대 황제
광종 평황제 | 光宗 平皇帝
본명
이휼 (李烅)
출생
1922년 8월 7일
대한제국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
사망
1999년 1월 28일 (향년 76세)
대한국 한성부 제중원
국적
대한제국(이전)
대한국
재위기간
대한국 황태자
1928년 9월 30일 ~ 1967년 1월 4일
대한 제5대 황제
1967년 1월 4일 ~ 1999년 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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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가족관계
성조 강황제 이진 (부친)
성명강황후 민씨 (모친)
태후 윤씨 (정비)
효현태자 이헌 (장남)
온양공주 (장녀)
안양공주 (차녀)
연호
헌문憲問
묘호
광종光宗
시호
장경의선현온성명평황제章敬懿宣賢溫成明平皇帝

개요

광종 장경의선현온성명평황제(章敬懿宣賢溫成明平皇帝) 이휼은 대한의 5대 황제이다.

대한 성조 강황제 이진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28년 정식으로 황태자로 책봉받았다. 1945년 대한국 체제 수립 후 민주화 및 입헌군주화 된 대한에서 황태자로 활동하였으며 1967년 황위를 계승해 연호를 헌문으로 하여 즉위하였다. 1998년 태자가 사망하자 원손 이곤을 황태손으로 책봉하였으며 1999년 훙하였다.

생애

유년기

융희 12년(1922년) 8월 7일 대한제국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에서 성조황후 사이에서 첫 아들로 태어나 곧 원자로 책봉되었다. 강명 원년에 황실에는 여러 악재가 겹쳤었는데, 황자 출생이라는 흥복이 일어나자 많은 이들이 근심을 하나씩 떨쳐내기 시작하였다.

본래 순종은 딸은 둘이 있었으나 아들은 조졸한 아기씨 하나 뿐이였기에 부친 성조가 태어났을때부터 애지중지 하였으며, 전통적인 관례를 깨고 황후가 직접 양육하였다.

정친왕 이영이 특히 광종을 아꼈으며, 광종 또한 어릴 적부터 정친왕을 따랐다고 한다.

태자 시절

광종은 20세기 당시에도 여전히 유아사망율이 높아서 수 년동안 아명으로만 불리었으나, 만 5세가 되던 해에 건장함을 드러내면서 본명 『휼』을 받았다.

1930년 만 8세가 되는 해에 황태자로 정식 책봉되었다. 황태자로서의 업무는 완벽하게 수행하였는데, 순방과 얼굴마담으로의 역할은 물론 제왕학과 역사에 특출나게 재능이 있었다.[1]

이후에는 정치적으로 그리 많은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부친의 성정을 닮아 정계와 거리를 두는 등의 행적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아대전 이후에는 대민지원과 황실 지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선한 황태자』 인상을 만들었다.

이후 1958년부터 성조의 윤허 하에 대리청정을 맡았으며, 1967년 성조가 만 68세의 나이로 훙하자 연호를 헌문으로 하여 즉위하였다.

재위

민중의 황제

1967년 강명 45년의 해가 지고 1968년 헌문 원년이 밝은 것처럼, 대한국 또한 전쟁기와 복구기를 거쳐서 고도성장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대한의 제조업은 그 빛을 발하여 전세계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고, 산업이 발달하자 문화또한 양성되었다.

헌문제 시기에 특히 발전한 것이 대한의 문화다. 전통적인 시화에 그림을 추가하면서 만들어진 대한식 소설, 혹은 만화는 점점 그림의 비중과 이야기의 비중이 반절씩 섞이게 되면서 대중적이게 바뀌었고, 사회 분위기 또한 젊은 황제가 즉위하면서 자유롭게 변하였다.

헌문제는 또한 《열린 황실》을 지향하며 혹시라도 있을 제정 폐지위협을 없애기 위해 국민들을 향해 친근한 인상을 만들었고, 그 자신도 『자애로운 민중의 황제』역할을 확실히 굳혔다.

1972년 5월 17일 효현태자 이헌의 탄일에 황태자 책봉식을 TV생중계로 송출하는 것을 윤허하는 것 또한 황실개방정책의 일환이였다. 또한 헌문제시기 기존의 케케묵은 황실전범을 수정하여 조금 더 "인간적"이게 바꾸었다.

헌문제는 그렇게 대한에 당연하듯 녹아들었고, 헌문제의 후계까지 황손 이곤, 이현이 태어나 안정화되면서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져갔다.

황태자 급사

그러나 1998년 4월 16일 효현태자 이헌이 항공사고로 급사하면서 정국은 전환되었다.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훙서와 당시 만 3세, 2세인 황손들의 불안정한 입지는 노쇠하여 죽음이 다가온 황제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황실 또한 두 파벌로 갈렸다. 황제의 조카인 정연군 이형주가 황제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위를 이어야 한다는 파벌과 황태자의 아들인 황손 이곤이 연소할 뿐 제위를 이어야 한다는 파벌로 말이다.

이 두 파벌의 주장 또한 첨예하였는데, 정연군파는 "황손이 즉위를 하게된다면 장성할 동안 황제가 할 업무를 누가 맡느냐"는 것이었고, 다른 파벌의 주장은 "혈통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적장손을 내치고 황질을 즉위시키는 것은 전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헌문제는 황손 이곤을 황태손으로 책봉하고, 황질 정연군과 두 딸 온양공주와 안양공주를 섭정으로 임명하여 황제가 장성할 동안의 대리를 맡겼다. 추가로 이를 황실전범에 성문화하여 후대에 있을 위기도 대응하였다.

이러한 초유의 사태가 진정이 되자 헌문제는 모든 활력을 다하였는지, 더욱 죽음에 가까워졌다. 결국 헌문 32년(1999년) 만 76세의 나이로 훙하였다.

예고된 바와 같이 황태손 이곤이 연호를 광영(廣映)으로 하여 즉위하였다.

훙서 이후

광영황제 이곤이 헌문 32년(1999년) 2월 1일 즉위식을 치뤄 정식으로 대한의 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정연군 이형주와 두 황녀들 또한 정부의 협찬을 받아 황실 내외로 광영제를 보좌하였다.

그러나 훙서 이후에도 일이 많았다. 황위계승권 문제로 다툴 당시 정연군의 장남 상영군이 기자들에게 시달리면서 개인사생활이 없어지는 고통을 받아 결국 2000년 생을 스스로 마감하였다.[2]

열린 황실의 계승권 문제가 불궈지면서 원래라면 별 신경도 안쓸 문제에 전국민적인 관심이 쏟아지자 세 섭정들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로 사회에서 온갖 접촉이 쏟아졌었다.[3]

그러나 정부의 보호조치와 황실근위대로 남은 『시위대』의 엄호, 언론보도 보호조치를 통해 시사에서 멀어지자 이러한 가십은 순식간에 묻히면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가계

* 증조부: 익평대원군 이희
* 조부: 고종 광황제 이천 (1860년 ~ 1910년)
 * 조모: 성빈 이씨 (1863년 ~ 1926년)
* 부친: 성조 강황제 이진 (1899년 ~ 1967년)
 * 모친: 성명강황후 민씨 (1901년 ~ 1997년)

* 정비: 태후 윤씨 (1925년 ~ 2008년)
 * 딸: 온양공주
 * 딸: 안양공주
 * 아들: 효현태자 이헌 (1964년 ~ 1998년)

여담

창작물에서

  • 응답하라 1977, 1988, 1996 모두 등장. 1977에서는 시내를 순방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1988에서는 거리 시민들과 대화하는 모습으로 민중의 황제 모습을 보여주었고, 1996에서는 대한국 황위계승문제때 현명한 결정이 뉴스에 나오는 모습으로 잠깐 얼굴을 비췄다
  • Hearts of Iron IV 본편에서 이벤트로 등장하고, 1967년까지 진행하면 이벤트와 함께 강명황제가 헌문황제로 바뀌는 이스터에그가 있다.
  • 위 게임의 대체역사모드 Kaiserreich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서 강명황제가 암살당하고 권력이 공백이 왔을때 군주사회주의자가 정권을 장악하면 헌문제를 황제로 올린다.


  1. 훗날 대한국 시절에 여가시간때 역사학을 연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2. 또한 이때 임신 중인 약혼녀도 있었다 하였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다.
  3. 온양공주와 안양공주의 자녀들 또한 이러한 관심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