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3대 재정경제부 장관
김종인
金鍾仁 | Kim Chong-in
출생 1940년 7월 11일(1940-07-11) (83세)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거주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재임기간 김대중 정부 제7대 경제수석비서관
1999년 3월 21일 - 2003년 3월 30일
김대중 정부 재정경제부 장관
1993년 3월 17일 - 1995년 12월 23일
김영삼 정부 보건사회부 장관
1989년 7월 19일 - 1992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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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 김재열
모 이필기
배우자 김미경
자녀 슬하 1녀
학력 뮌스터 대학교 (경제학 / 학사)
뮌스터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박사)
종교 천주교
정당
의원 선수 8
의원 대수 11, 13, 14, 15, 17, 19, 20, 21

김종인(金鍾仁)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이다. 제23대 보건사회부 장관과 제3대 재정경제부 장관, 경제수석비서관, 제11·13·14·15·17·19·20·21대 국회의원[1]을 지냈으며 새정치민주연합새한국당이라는 거대 양당 모두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큰 영향을 끼친 원로 정치인이다.

여의도에서는 각종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킹메이커로 불린다. 그가 승리를 이끌어낸 선거만 해도 한나라당 비대위원 시절의 19대 총선16대 대선, 민주당 비대위 대표 시절의 20대 총선, 그리고 새한국당 비대위원장 시절의 17대 대선 등이 있다. 특히 2016년의 20대 총선[2] 2019년의 17대 대선[3]에서는 참패가 예정되어 있던 정당들의 이미지를 변화시키고 승리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그의 능력을 알아볼 수 있다.

생애

1973년 독일에서 귀국해 32세의 나이로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가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서강대 학생 시절에 김종인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고 한다. 35세의 나이로 아내를 김미경 교수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김미경은 현재 이화여대 명예교수이자, 처삼촌이 박정희 정부의 재무부장관 김정렴, 4촌 처남이 전두환 정부 경제수석 이진설일 뿐만 아니라, 친척에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 윤영철, 신민당 국회의원 이택돈도 있다.

1977년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신현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료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하는데 기여했다. 1980년 정부측 개헌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였고,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직접 작성해 원내 정당들을 돌아다니며 필요성을 알려 결국 관철시켰다. 이후 전두환노태우와 함께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 때문에 일부 민주계 인사들은 김종인을 군사정권의 부역자로 비난하곤 한다.

그 후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5년에도 전국구 32번으로 출마했으나, 민주연합 바람으로 인해 당선권에서 큰 폭으로 벗어나 낙선했다. 이후 민주정의당을 불임정당이라고 비판하며 탈당, 김대중의 영입으로 민주연합에 전격 입당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재정경제부 장관과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재임하며 기업구조조정과 체질개선을 진두 지휘하는 한편, 재벌의 폭주를 견제하는 등 균형잡힌 경제적 성과를 이뤄냈다고 평가받는다.

김종인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4년 총선 직후, 이미 5선 국회의원이자, 보건사회부 장관, 재정경제부 장관, 경제수석을 지낸 중량감있는 정치인이자 관료였다. 2004년 12월에 예정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연스럽게 새정치국민회의의 대선후보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떠오른 국민회의 내 후보군은 김종인, 한화갑, 정동영으로 압축되었다. 여기에 열린우리당의 후보인 노무현을 포함해 4명이 최종적으로 경선을 치렀다. 결과적으로 노무현의 역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된 2007년까지 새정치국민회의에 남아있었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초 국민회의가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꾸자 탈당을 선언하고, 재야로 물러났다. 김종인은 3년간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으로 정치와는 거리를 두며 야인으로 있다가, 2011년 12월에 중도 확장을 노린 한나라당박근혜 비대위원회에 영입되어 경제민주화와 관련된 정책 설계를 맡기도 했다. 당시 이회창, 이한구 등으로부터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는 포퓰리즘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은 152석의 과반을 차지하며 총선에서 압승했다.

그리고 2012년 9월부터는 한나라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를 도와 여러가지 정책의 설계를 담당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명박이 다시 한 번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그의 설계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한나라당 시절 공약한 경제민주화도 이명박-박근혜 갈등으로 한나라당이 분당되면서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았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이와는 별개로 2014년 12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박근혜가 창당한 미래한국당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입당은 끝내 고사했다. 그렇게 야인으로 3년을 보냈으며, 2016년 1월 20대 총선을 앞두고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곧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어 2월부터 민주당의 수장이 되었다. 민주당은 2006년부터 10년간 패배만 거듭해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고, 안철수가 혜성같이 정계에 등장해 문재인 등 친노세력과 연합해 2014년 서울시장에 당선, 새정치연합을 창당해 중도에서 중도좌파 포지션을 가져가면서 민주당의 지지율은 일부 조사에서 10% 이하로 내려가는 등 말 그대로 호흡기만 붙어있던 상황이었다.

비대위 초기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 박경미 홍익대 교수, 주진형 전 한화증권 대표 등의 인재를 영입하며 어수선한 당을 정비하기 시작했으며, '90년대 정당'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하지만 비대위, 선대위를 모두 거머쥐고 절대적인 공천권을 휘둘러 안팎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특히 셀프공천이 가장 욕을 많이 먹었다. 결과적으로 2016년 4월 민주당이 4당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예측과 정반대로 국회 1당을 차지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수도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반면 호남에서는 새정치연합과 박근혜의 미래한국당에게 의석을 내주기도 하는 등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대신 민주당은 호남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전국정당으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총선 이후 의원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제안하면서 전통적 지지층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으며[4], 새 대표로 반기문을 추대하려한다는 설, 안희정 충남지사의 탈당을 권유했다는 설 등이 퍼지며 급속히 당내에서 힘을 잃는다. 결국 2016년 8월 새로 선출된 추미애 전 대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직에서 퇴임하였다.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정의당 당선 (49번) 초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32번) [5]
1989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 (11번) 재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 (9번) 3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 (5번) 4선[6]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당선 (2번) 5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6선[7]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7선[8]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8선

소속정당

소속 기간 비고
민정당 1963 정계 입문
무소속 1963 탈당
국민의당 1963 - 1964 창당
무소속 1964 - 1973 탈당
민주공화당 1973 - 1980 입당
무소속 1980 정당 해산
민주정의당 1980 - 1988 창당
무소속 1988 탈당
1988 - 1992 입당
1992 - 2008 당명 변경
민주당 2008 당명 변경
무소속 2008 - 2011 당명 변경 후 탈당
2011 - 2013 입당
무소속 2013 - 201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민주당 2016 - 2017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
무소속 2017 - 2019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결별
2019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
2019 - 현재 합당
(비상대책위원장직 유지)


각주

  1. 모두 비례대표
  2.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이후 내상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안철수계가 보수당의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민주당 의원들을 흡수하며 당이 붕괴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3. 물론 대선 7개월 전에는 비상대책위원장의 임기가 끝나, 이준석 대표 체제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가 새한국당과 미래한국당을 다시 합치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며 거기에 더불어 이준석 대표 체제에서도 선거대책위원장 자리를 맡아 선거를 진두지휘했다는 것이다.
  4.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민주당의 거목 김대중 전 대통령이 눈을 뜨고 살아있는 데다, 그 김대중 대통령이 과거 의원내각제 개헌 파동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한 점을 생각하면 지지층의 이반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5. 그가 치렀던 선거 중 유일한 낙선이다.
  6. 1999년, 경제수석비서관 취임으로 인한 사퇴
  7. 2013년 탈당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
  8. 2017년 3월 탈당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