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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눈누 공화국의 역사를 나열하는 문서이다.
[[눈누|눈누 공화국]]의 역사를 나열하는 문서이다.
 
== 고대 ==
== 고대 ==
=== 그린란드인, 대이동을 감행하다 ===
=== 그린란드인, 대이동을 감행하다 ===

2021년 8월 17일 (화) 12:39 판

눈누의 역사
Hystores le Nunn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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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Ancient Age
중세
Medival Age
근대
Pre-Modern Age
현대
Modern Age
눈누인
Nunnu peoples
웨서눈누 왕국
Kingdom of Wessernunnu
로팅게르드 왕조
Rotingerd Dynasty
눈누 제1제국
First Nunnu Empire
암흑기
Dark Age
누무네 왕국
Kingdom of Numune
눈누 대공국
Archduchy of Nunnu
눈누 제2제국
Second Nunnu Empire
눈누 공화국
Republic of Nunnu
제1 공화국
제2 공화국
제3 공화국
서슨눈누 왕국
Kingdom of Sussennunnu
서슨눈누 왕국
Kingdom of Sussennunnu
에스트눈누 왕국
Kingdom of Estnunnu
누니아 왕국
Kingdom of Nunnia

개요

눈누 공화국의 역사를 나열하는 문서이다.

고대

그린란드인, 대이동을 감행하다

고대, 눈누인들의 조상들은 원래 그린란드 이누이트와 바이킹의 혼혈인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누나트'로 칭했으며, 이후 바이킹이 브리튼 섬에 진출함에 따라 눈누인들도 브리튼 섬으로 대이동을 감행한다. 이후 그들은 바이킹의 침략에도 살아있던 브리튼인의 국가 '웨섹스 왕국'을 멸망시키고 브리튼 섬 남부에 정착한다. 이후, 브리튼 섬 북부는 덴마크계 바이킹이 차지한다.

웨서눈누, 눈누인 최초의 왕국이 탄생하다


이후 눈누인들은 평야지대에 터를 잡고, 원주민이던 브리튼인과 융합하여 최초의 국가인 '웨서눈누 왕국' 을 수립한다(856년). 웨서눈누 왕국의 초대 왕은 나못 1세였는데, 그는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토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2대 왕인 루에스 여왕이 사촌인 그렉에게 암살당하고, 결국 그녀의 아들인 나못 2세는 그렉의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 마침내 그렉은 나못 2세를 사형시키고 왕이 되었으나, 직후 서슨눈누 왕국이 웨서눈누 왕국을 침공하였으며 이때 그렉은 측근인 로팅게르드 장군에게 암살당한다.

로팅게르드 왕조의 탄생과 오랜 분열의 시작


로팅게르드 장군은 내분을 수습하고 로팅게르드 왕조를 수립한다(906년). 그는 서슨눈누 왕국(초록색)과 평화협정을 맺은 후 내치에 힘썼으며, 또한 눈누인 최초의 성문법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로팅게르드 2세는 에스트눈누 왕국(파랑색)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일궈냈으며, 후에 눈누 제1 제국이 탄생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한편, 서슨눈누 왕국은 영토는 제일 작았지만 문화를 많이 발전시켰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눈누 양식은 서슨눈누 왕국에서 처음 정의되었으며, 또한 서슨눈누 왕국의 뛰어난 제품들은 브리튼 섬 뿐만 아니라 프랑스, 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로 팔려나갔다. 그러나 서슨눈누 왕국은 에스트눈누 왕국의 오랜 침략으로 쇠퇴하였고, 결국 로팅게르드 왕조에 의해 멸망한다.

에스트눈누 왕국은 영토가 가장 넓은 왕국으로써 웨일스 원정을 많이 나갔고, 서슨눈누 왕국과 결투해 서열 정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리튼섬 중부 원정의 실패후 적자가 발생했고, 결국 로팅게르드 왕조에 흡수당했다.

중세

로팅게르드 왕조, 눈누 제1 제국을 창시하다


로팅게르드 왕조의 제 12대 왕 스베니다르 1세는 에스트눈누, 서슨눈누 왕국을 정복하고 눈누 제1제국을 창시했다(1159). 스베니다르 1세는 로팅게르드 왕조의 수도인 다모테야스와 서슨눈누 왕국의 옛 수도였던 룬테네엄을 잇는 긴 도로를 만들었고, 또한 룬테네엄을 누나스텐으로 개칭해 새 수도로 삼았다. 이후 백대법전을 반포하여 국가의 법률을 정비하고,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유럽에 눈누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또한, 스베니다르 2세는 로마로 떠나 교황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고 돌아오니 이때부터 진정한 눈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악셀레스 1세는 새로운 제도인 '륑나도르'를 창시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척박한 곳에 농민들에게 돈을 주고 직접 경작할 수 있게 하는 제도, 또 그에 대한 댓가로 1년에 두번 세금을 내는 제도, 빈민들에게 수당을 주고 군인으로 훈련시키는 제도를 합친 것이었다. 이 륑나도르 덕분에 눈누 제1 제국은 번성했고, 이 자본을 바탕으로 후대의 왕들은 여러차례 섬 북부로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이 원정 도중 재정난이 일어났고, 이때를 틈타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국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하스팅케스 전쟁을 벌였으며(1328), 이를 막아내느라 국가 경제는 파탄이 나게 된다. 이에 엡실뢰나드 2세가 륑나도르를 정비하여 재정난을 극복하려 했지만, 하스팅케스 전쟁의 전후처리/ 프랑스 왕위 계승의 문제가 합쳐져 20년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1337), 결국 눈누 제1제국은 멸망한다(1353).

암흑기에 브리튼계 소국들이 난립하다

눈누 제1제국이 멸망한 후, 당분간은 눈누인의 국가가 탄생하지 못했다. 브리튼 섬은 자유를 되찾은 브리튼인들의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고, 그들은 브리튼인들을 다시 통합하기 위해 각자 왕국을 세웠다. 그 왕국중 남부의 것들은 20년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의 속국이 되어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각자 브리튼의 주인이 되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지만, 싸울수록 경제난과 측근들의 배신이 겹치며 오히려 브리튼 섬은 갈수록 분열되었다.

눈누인들의 부활, 섬의 분할


브리튼 섬이 잘게 쪼개진 틈을 타, 섬 중부에서 살던 의형제 누미네이와 노크토헨은 군대를 결성해 브리튼인을 웨일스로 몰아내고 누무네 왕국(보라색)을 수립한다(1571). 그러나 둘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노크토헨은 왕국으로부터 추방당했고, 결국 노크토헨이 남부에 누니아 왕국(노랑색)을 세우며 남북의 대립구도가 형성된다(1624). 이후 두 왕국은 여러 정책들로 이주민들을 포섭하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자 했으나, 그에 대한 여파로 경제난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럼에도 둘은 결국 노툉게리엄 전투 등의 전쟁을 벌였고, 결국 그틈을 타 브리튼 섬을 공격한 악세룅 디피예르 1세에 의해 멸망한다.

근대

악세룅 디피예르 1세, 눈누 대공국을 수립하다


프랑스에서 병법 등을 전공한 악세룅 디피예르 1세는, 뛰어난 전략으로 누니아 왕국을 장악하고 또한 누무네 왕국을 멸망시켰다(1738). 그는 험준한 곳에 브리튼인 제후를 보내 간접적으로 다스렸고, 비교적 평탄한 지역은 왕실 직할로 두었다. 악세룅 디피예르 2세는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웨일스 정복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며, 그곳을 통해 아일랜드와 교류했다. 이후 대공들은 제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으나, 프랑스의 견제와 빈 체제의 강력함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구스테파 1세가 노르망디 전투로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후 결국 제국을 수립한다(1855).

눈누 제2제국, 제국주의에 눈을 뜨다


구스테파 1세는 노르망디를 프랑스로부터 찬탈하고 루앙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이는 프랑스에게 보불전쟁과 더불어 최악의 수치로 기록되곤 한다. 아무튼, 구스테파 1세는 제국 수립 이후 북부의 노스트데니아 왕국과 교류하는 한편 아일랜드 서부, 나이지리아 일대, 오스트레일리아 서부를 식민지로 삼았다.

이후, 뒤파뢰예스 1세가 여러 근대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다모테예스-누나스텐 도로를 철도로 바꾸었지만, 이 과정에서 재정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뒤파뢰예스는 재정난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 뒤파뢰예스 2세가 겨우 극복했다. 그러나, 아직도 돈은 부족했고 결국 뒤파뢰예스 2세는 대외 정벌을 꾀하게 된다. 이후, 그는 프랑스/아일랜드/노스트덴 에게 전쟁을 선포하여 눈누 대전쟁을 시작하였고(1911), 전쟁 후반에는 자금이 부족해지자 마침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던 독일-굴레탄-오헝 동맹과 손을 잡는다. 이때문에 눈누 대전쟁이 제 1차 세계대전의 범주에 들어가기도 한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의해 눈누 제2 제국은 전쟁에서 패할 위기에 처했으며, 결국 보다못한 서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제국이 멸망했다(1917).

현대

눈누 제1 공화국, 식민지를 반환하고 내치에 힘쓰다


혁명의 리더인 샬마카 에이륵손은 혁명당을 창당하고 제 1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우호국인 프랑스에 식민지를 넘기고 대신 내치에 힘썼으며, 또한 국내 최대 소수민족인 브리튼인에 대한 자치의회를 창설하고 행정구역을 라지엔, 콩틴으로 나누는 등 여러 개혁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자 국내 최대 위기가 닥쳤고, 결국 눈누는 친미국가임을 표명하고 먼저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눈누 공화국은 미국의 편에서 추축국을 공격했지만 이로 인해 대공황이 다시 시작할 뻔한 위기를 겪는다. 이럼에도 국가 수뇌부는 비리로 넘쳐났고, 이에 국민의 지지를 받은 노동당의 스텡귀도르 푀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는다(1956).

스텡귀도르 푀르트의 이면

스텡귀도르 푀르트는 여러 정책등으로 적폐를 청산하고 제 1공화국 이후 침체되던 경제를 성장시켰다. 이에 많은 시민들이 노동당을 지지했으나, 갈수록 그는 헌법을 자기 입맛대로 고치는 등 여러 독재정책을 펼쳤고 결국 지지층은 푀르트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이후 민주화를 원하는 청년들이 멩체스토르 시위를 벌이자, 푀르트는 그 시위를 무력진압했으며 이로 인해 국내에 반푀르트 여론이 극심해졌고, 결국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심지어 푀르트의 아들이 납치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결국 푀르트가 자진하야하며 제 2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눈누 제3 공화국과 조제피요르 게이트

눈누 제3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제1야당이던 우파당은 이미 푀르트 정권때 무너진 이후였고, 또한 공화국의 구심점이던 친 푀르트 연대도 몰락했기 때문에 당장으로써는 눈누 공화국을 통제할 위인이 남아있지 않던 상태였다. 그러던 중, 조제피요르 프랑손이 '민주 눈누 공화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정권을 잡았다. 그 사건 이후 푀르트 정권 하에 망가지던 헌법 시스템이 고쳐지기 시작했고, 또한 푀르트 정권 때보다도 성장한 경제는 많은 이들을 애국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2003년에 조제피요르 프랑손이 연임을 위해 비리 사건을 일으키는 조제피요르 게이트 가 일어나는 등 아직도 눈누 공화국이 완전한 민주화가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에 최초의 브리튼인 대통령과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오는 등 완전한 민주주의를 위한 희망은 가득찬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