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게르만국
Großgermanisches Reich
국기 국장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
국명 변경 이전 민주혁명 이후
대독일국 독일국
뵈멘-메렌 공화국
데너마크 공화국
슈바이츠 연방
상징
국기
하켄크로히츠(Hakenkreuz) 기
국장
라이히스아들러(Reichsadler)
국조
검독수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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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승전 1945년 10월 2일[1]

히틀러 사망 및 보어만 정권 출범 1965년 4월 30일
보어만 사망 및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 출범 1985년 5월 2일
11.9 민주혁명 1988년 11월 9일
헌법 개정 및 독일국 출범 1990년 10월 3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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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게르마니아
최대도시
게르마니아
위치
유럽 중부, 아메리카, 중동, 아프리카 및 시베리아
주변국
비시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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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
게르만어
공용 문자
알파벳
민족
독일인을 비롯한 각종 유럽인
군대
국방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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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군사독재, 전체주의, 일당독재, 파시즘
정부 수반
총통
국가 원수
총통
행정 수반
총통
여당
국가사회주의 게르만 노동자당
경제 체제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통화
라이히스마르크
8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게르마니아 국민대회당


개요

대게르만국(Großgermanisches Reich)은 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국명을 변경했을 때부터 1990년 독일국 출범 전까지 중부 유럽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존속했던 국가이다.

역사

1945년 10월 2일, 기적적인 과학적 발견과 하이젠베르크의 실험의 성공으로 워싱턴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며, 기나길던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당시 나치 독일 지도자들이 꿈꾸던 레벤스라움을 달성했다 판단한 총통 히틀러는 1946년 국명을 기존 대독일국에서 대게르만국으로 변경하여 게르만 민족을 위한 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새롭게 들어선 대게르만국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및 유럽 등지에국가판무관부와 식민지들을 정비하였으며, 그중에서도 최중요 식민지들 중 하나인 러시아에는 노예제를 정착시켰다.

이후, 히틀러의 강압적인 정책과 군사통치가 계속되었으며 당시 기술력 부족으로 많은 사망자를 내면서까지[2] 세계수도 게르마니아 계획을 완수했다.

196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후계자는 보어만으로 정해둔 상태였지만 당시 대게르만국 내에서는 부르군트로 사실상 좌천된 상태였던 힘러를 제외하면 괴링, 하이드리히, 보어만의 권력싸움이 계속되었는데[3], 결과적으로 재빠르게 행동한 마르틴 보어만이 게르마니아 국민대회당을 장악, 이후 숙청, 암살, 친위 쿠데타 등의 방법으로 중앙집권을 이뤘다. 한편, 보어만은 집권 이후 국가판무관부를 제외한 독일 본토에 한해서는 히틀러 정권 당시 계속되던 경제적 개입주의를 완화시켰다.

다음 해인 1966년 가을에는 노예제의 직접적, 간접적 피해를 받던 슬라브인들을 비롯한 피지배인들을 중심으로 점차 노예제 폐지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어만 정부는 11월 20일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고, 일부 지역에선 발포 명령과 가스실형이 내려지는 등, 히틀러 시절과 별 다를 바 없는 초강경 대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시위와 폭동에 러시아 지역에서 통제권 유지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상대가 악화되었고, 결정적으로 러시아의 혼란을 틈타 일본 육이 서진하여 시베리아 중립지대를 더 장악,몽강의 비밀루트를 통해 은근히 슬라브 반란군을 지원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자 결국 더 이상 폭동이 계속되면, 일본제국과의 핵전쟁[4]으로 이어지리라 판단한 대게르만국 정부는 이판사판으로 하부 국가판무관부들의 반발을 거스르면서 최소한 노예제의 폐지를 약속했고, 동시기 일본도 슬라브족 반란군에 대한 지원을 끊으며 우선은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1968년에는 동유럽의 속국들에서 발생한 국가전복 시도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 대장이 수용소형에 처하거나, 폭력을 동원하여 사살하는 등 모두 강압적으로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보어만의 허가가 전무했다는 점을 들어 보어만 총통은 하이드리히를 제거하기로 결정, 그가 유태인을 숨겼다는 누명을 씌워 위신을 실추시킨 뒤, 은근슬쩍 그의 시베리아 발령을 영구화 시키면서 최소한 얼마간은 그를 중앙정계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이후에도 동유럽인들의 산발적인 저항에 지쳐버린 보어만은 결국 어느정도 변화를 주면서 정책을 완화하기로 결정, 당의 지시 아래 기업들이 구조를 개편하면서 점차 노예제를 완화시켜갔으며 1969년 새해, 마침내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하였다.

지나치게 비대한 영토에 대한 안정도 부족으로 인한 일시적인 경제 침체를 거쳐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어느정도 안정화가 이루어진 국가판무관부에서 나오는 자원들을 토대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라인강의 영광이라고도 부른다.

또, 보어만은 후계자를 정하고 확고히 하여, 자신처럼 숙청을 통해 정권 안정화를 이룬 일은 없도록 하였다.

1985년 5월 2월, 아메리카 국가판무관부발 자유주의 사상[5]이 퍼지면서 점차 국민들의 민주화의 요구가 거세지던 와중 노쇠한 보어만이 사망하였고, 유력 정치인이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정권을 이어받았다.

여러모로 미국발 쿠데타 이후부터 독일의 상황이 좋지만은 않던지라 슈뢰더는 최대한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고자 하였으나, 점차 폭력적 진압의 빈도가 높아졌고 1988년 10월에는 2주 연속으로 브란덴부르크 지역에서 일어난 평화적 민주시위를 대상으로 폭력 진압이 발생해 수백명의 대학생 사망자가 발생하자 국민적 분노를 샀다.

1988년 11월 9일 이 소식을 접한 다른 지역의 국민들이 시위에 동참하였고 이를 11.9 민주혁명이라고 이른다. 이때를 기회삼아 비시프랑스는 내부 쿠데타와 친게르만파 숙청을 통해 자주독립을 꾀하며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아프리카 지역의 게릴라 활동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자유프랑스군과의 비밀 협상으로 이들을 본토로 불러들이고자 하기까지 했다.

점차 거세지는 시위에 여러 불법 정당들이 창당되었고 슈뢰더 정권은 결국 1989년 봄, 민주정권을 약속하였으며 1990년 슈뢰더가 정계에서 물러나며 게르만 최초의 민주적 선거가 일어났다. 이후 들어선 민주정부는 속국과 일부 덜 중요한 국가판무관부의 독립을 보장하였으며 국명을 다시 독일국으로 바꾸었다.

한편, 부르군트 및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민주 혁명에 반대했던 나치 인사들은 군벌로 변모하여 독일 본토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0년 계획의 실행으로 아예 새로운 나치국이라고 해도 무방한 오스트아메리카 국가판무관부는 반동적으로 변한 본토에 결별을 선언, 대아메리카국으로 독립하여 존 스미스 총통의 지도아래 독자노선을 이끌기 시작했다. 민주화 이전 거대한 라이벌이었던 일본제국은 인도네시아 내전으로 인한 경제침체 이후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오히려 민주적으로 변한 독일[6]에게 세계 패자를 서양에서 동양으로 바꾸겠다며 전보다 더 강경한 냉전을 펼칠 것을 천명, '인도양 해방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마다가스카르를 공격하여 괴뢰국인 말라가시 왕국을 수립하는 등, 독일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 다만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다소 차이가 있다.
  2. 이 과정에서 유태인과 슬라브인이 상당수 동원되었다.
  3. 또다른 후보였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부르군트 계획에 간섭하던 도중, 힘러에게 암살위협을 여러번 받은 후에 비밀리에 도쿄로 망명하면서 결과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4. 이 시기 이미 일본 육군이 해군에 이어 핵무기 개발을 완료한 상황이었고, 하와이 왕국에 이어 캄차카 반도에 미사일기지가 설치되었다.
  5. 초기부터 사상적으로 개조시킨 아메리카 국가판무관부에서는 역설적으로 얼마 못 가 잦아들었으나,체제적으로 아메리카보다는 자유로웠던 독일에서는 장기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6. 이 시점에서 일본은 세계 권위주의 국가들의 대부분을 후원하는 입장이었고, 독일이 약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자유 인도를 이용하여 중동에도 손을 뻗치는 등 확장에 적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