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iny634, 2024 - | CC-0



대동아공영권
[ 펼치기 · 접기 ]


대동아공영권
大東亜共栄圏 |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깃발 엠블럼
설립 1943년 11월 5일 대동아회의
1946년 5월 9일 대동아공영조약 및 설립
해체 1990년 7월 20일[1]
화폐 일본 엔 (円)
의장 가네무라 슌에이
(1990년 1월 21일 ~)일본 내각총리대신 당연직
이념 군국주의, 전체주의, 식민주의, 천황제 파시즘
인구 약 22억 명1985년

개요

대동아공영권(大東亜共栄圏)은 1943년 제1차 대동아회의 당시 선언되고 1946년 대동아공영조약을 통해 개설되어 1990년 해체된 일본 주도의 국제 협력기구, 실질적인 식민제국이었다. 냉전 시대 대게르만국아인하이츠팍트미국자유 국가 기구와 함께 3대 진영에 속했다.

후신은 1992년 개설된 아시아태평양공영기구. 일본과 만주, 몽강, 그리고 독립한 광동국등이 참가했다.

역사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은 대동아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번영하는 권역이라는 뜻으로, 일본의 영토 확장 정책이자 프로파간다 구호로 시작했다. '아시아 민족이 서양 세력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여 서양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며 1940년 8월 1일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외상의 담화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메이지 유신부터 시작한 일본의 근대 사상의 헤게모니는 아시아주의로 시작하여 대동아공영권으로 종결되었다. 자원 부족과 경제 제재에 시달리던 일본이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고 더 거대한 블록 경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시작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이 사용되었다.

회원국


대동아공영권
[ 펼치기 · 접기 ]


회원국은 총 17개국이었다. 일본은 대동아회의 의장국이자 공영권의 수장국이었으며, 나머지 국가들은 사실상 일본의 괴뢰국에 준했다. 그나마 공영권의 곡창지대인 중국과 추축국으로 참전했었던 태국 정도가 일본 외에 발언권이 있는 국가들이었다.

동인도(자유 인도국)은 1975년 인도 전쟁 패전으로 멸망하였다.

경제

대동아공영권 국가들의 GDP를 종합하면, 1960년대 이후 아인하이츠팍트, OFN 등 3대 진영 중 가장 경제력이 높았다. 80년대 세계 경제력의 40% 이상이 공영권의 지분일 정도로 그 경제블록의 규모가 거대했다.

물론 세계 소득 상위권을 기록하는 일본을 제외한 국가들의 1인당 GDP는 서구에 비해 현격히 낮았으며, 세계 인구의 절반에 근접하는 막대한 인구수로 커버하였다. 일본조차도 1960년대까지는 독일, 미국에 비해 생활 수준이 저질이었고, 1970년대에서야 호각이었으며 80년대에 서구를 넘어섰다.[2]

이는 공영권이 거대한 제국주의적 약탈경제의 성격을 띄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일본은 공영권 국가들의 경제 성장을 분명히 도왔지만, 이것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 등 일본에 대한 원자재 공급 용도의 1차산업, 또한 가내수공업 등 2차산업에 한정된 발전만을 하고 그 굴레에 갇히도록 고의적으로 공영권 국가들의 경제 구조를 설계하였다.

이는 회원국들이 공산품을 만들어낼 능력이 전무해짐을 의미했고, 일본은 회원국들에게 사들인 원자재로 자이바츠들을 통해 만든 공산품을 공영권에 팔아넘기며 연간 10%씩 경제가 성장했다. 이에 당연히 공영권은 철저히 일본에 경제가 종속되는 고리를 일본은 만들어냈던 것이며, 그 40여년의 경영은 현재도 일본 경제를 지탱하는 천문학적인 자본을 벌어다주었다. 그리고 일본 이외의 아시아 국가들은 현재도 빈곤과 일본이 설계한 1차산업 중심 산업구조에 허덕이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욱일의 통치 아래서 아시아인들의 삶은 서구 식민통치 시기보다 후퇴했다. 대동아공영이라 함은 실상 일본민족 사영(私栄)이었던 셈이다.

의사결정기구

대동아회의

  1. 1989년 12월 26일 대일본제국 붕괴가 이루어졌으나 이듬해 7월 20일 공식 해체때까지 만주, 몽강, 태국, 극동 등이 잔류한 채로 유지됐다.
  2. 1962년 본토 기준일본 1인당 GDP는 1,930달러로 독일 4,167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쳤고 미국 3,243달러보다도 크게 낮았다. 다만 이는 당시 경제성장이 덜 됐던 조선반도와 대만을 포함한 것임은 감안해야 하며, 열도는 2,561달러로 미국과 나름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