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카라컨테이너|body={{카이저라이히}}<br>{{리워크}}<br>{{Tabber}} {{카라 독일 제국}} '''독일 제국(German Empire, 독일어:Deutsches Kaiserreich)'''은 보통 '''독일(Germany)'''로 불리는 중앙 유럽에 위치한 국가이다. 제국은 호엔촐레른 왕조가 통치하는 {{카라링크|독일 제국의 구성국|27개 구성국}}으로 이루어진 군주국이기도 하다. 독일은 열강 중 하나로 여겨지며, 그 영향력은 전 세계에 걸쳐 발휘되고 있다.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리를 통해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되었다. {{카라링크|대전쟁}}의 승리자로 독일은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을 거느린 거대한 {{카라링크|독일 제국의 식민지|식민 제국}}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독일은 몇몇 동유럽 국가들과 중유럽, 북유럽 국가들이 참여하는 군사 동맹인 {{카라링크|라이히스팍트}}와 경제 동맹인 {{카라링크|미텔오이로파}}의 지도국이기도 하다. 독일은 북쪽으로는 북해, {{카라링크|덴마크}}와 발틱해에, 동쪽으로는 {{카라링크|폴란드}}, {{카라링크|리투아니아}}와 {{카라링크|발틱 연합 공국}}에, 남쪽으로는 {{카라링크|오스트리아-헝가리}}와 {{카라링크|스위스}}에, 서쪽으로는 {{카라링크|프랑스 코뮌}}, {{카라링크|플란데런-왈로니}}와 {{카라링크|네덜란드}}에 국경을 접하고 있다. 식민지까지 포함하면 {{카라링크|스페인}}, {{카라링크|프랑스 공화국}}, {{카라링크|라이베리아}}, {{카라링크|아비시니아}}, {{카라링크|이집트}}, {{카라링크|소말리아}}, {{카라링크|남아프리카}}, {{카라링크|포르투갈}}, {{카라링크|시암}}, {{카라링크|청나라}}(정확히는 {{카라링크|팔성연합}}과 {{카라링크|산둥군벌}})와 {{카라링크|오스트랄라시아}}와도 국경을 접하고 있다. == 역사 == === 통일 === "철의 재상"이라 불리는 프로이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 하에 독일은 마침내 통일되었다. 독일 제국은 1871년 1월 18일 루이 14세가 지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선포되었다. 빌헬름 1세는 1888년 3월 9일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3세도 불치병으로 즉위 99일 만에 사망했다. 이에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카라링크|빌헬름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이 너무 무르다고 생각한 카이저는 1890년 철의 재상을 해임하고, 더욱 카이저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으로 대체했다. === 해가 지지 않는 제국 === 빌헬름 2세는 식민지 확장에 매진해 {{카라링크|알프레드 폰 티르피츠}} 제독의 조언에 따라 {{카라링크|영국}}과 건함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국제 무대에서 독일의 고립이 심화되었다. 1911년 빌헬름 2세가 모로코를 요구하면서 유럽은 아가디르 위기와 함께 처음으로 전면전에 가까워졌다. 무책임한 카이저라는 별명을 가진 빌헬름 2세의 명성에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추가된 순간이었다. 물론 이 위기가 전쟁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발발을 겨우 몇 년 동안 지연 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가 곧 보여주었듯이, 빌헬름 2세의 도박은 성공했고 그는 그가 생각한 모든 목표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를 향해 가장 강력한 비난을 쏟아내던 비평가들마저도 카이저의 결단력에 많은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 벨트크리그 === : ''본문: {{카라링크|벨트크리그}}'' {{카라사진|right|S 7 teaser 0.webp|160|1914년 8월 1일, 벨트크리그를 선포하는 카이저.}} {{카라링크|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혁명가에 의해 암살당했다. 한 달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을 선포했고, 독일은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했다. 신속하게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로 진격한 독일군은 서쪽으로는 마른에서, 동쪽으로는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전선이 나아가지 못해, 지독한 전쟁의 정체 상태를 만들었다. 1917년 {{카라링크|러시아}}는 {{카라링크|러시아 내전|혁명}}으로 붕괴했고, 수천 명의 병사들이 동부 전선에서 서부 및 남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국내 전선의 전망은 암울했고, 기아, 박탈감, 전쟁에 대한 피로감과 분노는 {{카라링크|9월 항쟁|1918년 9월 사회주의 봉기}}로 이어졌고 빠르게 확산되었다. 결국 군부대를 투입한 진압이 필요하게 되자, 1918년 11월 {{카라링크|수권법}}이 제국의회(Reichstag)에서 통과되었다. {{카라링크|독일 제국 (카이저라이히)/정당#사회민주당|사회민주당}}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공개적인 시위에 나섰다. 이들이 성탄절 시위를 벌일 때, 제국수상 {{카라링크|조지 폰 헤틀링|헤틀링}}은 슐레지엔의 퓌르스텐슈타인 성에서 {{카라링크|에리히 루덴도르프|루덴도르프 장군}}을 만났다. 정치적 동향이 더 악화될 것을 두려워한 헤틀링은 건강 문제로 사임할 것이라는 의사를 장군에게 전달했다. 분노한 루덴도르프는 수상과의 만남 도중에 떠나 스파에 있는 OHL본부로 향했다. 1918년 12월 10일 제국수상 허틀링은 사임 요청을 카이저에 전달했다. 카이저는 이를 재가했고, 즉시 유명한 육군 원수 {{카라링크|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제국수상으로 지명했다. {{카라사진|left|Novemberinsurrections-reichstag.webp|240|1918년 11월 13일, 수권법이 통과되는 제국의회.}} 그러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전쟁은 1919년 3월, 4년 반의 소모전 끝에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를 통해 마침내 앙테르의 방어선을 넘어서는 데 성공하며 순식간에 전개되었다. 방어선이 무너지자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던 프랑스 정부는 {{카라링크|샹틸리 휴전|휴전}}을 받아들였다. {{카라링크|베르사유 조약}}에 프랑스가 서명한 이후 생디칼리스트 세력은 독일의 비밀 원조를 통해 {{카라링크|프랑스 내전}}을 일으켰고, 독일은 프랑스에 요구한 영토를 온전히 가져갈 수 있었다. === 루덴도르프 독재정 === : ''본문: {{카라링크|루덴도르프 독재정}}'' 프랑스를 상대로 놀라운 승리를 거둔 독일군은 조약으로 얻은 영토를 보호하고 오스만 제국의 남부 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신속히 재배치되었다. 1919년 가을 베르사유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비록 영국의 지속적인 반발로 독일이 원하는 상당 부분은 철회되어야 했지만, 승리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카라사진|right|Paul v. Hindenburg, Erich Ludendorff.webp|160|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두 사람으로 꼽히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 그러나 전쟁이 야기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는 계속되었다. 인구의 대부분은 1919년에야 해제된 영국의 봉쇄에 의해 기아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었으며, 경제는 사람들과 비슷하게 처참한 상태였다. 동원령 해제 때문에 돌아온 병사들로 많은 도시에 실업자가 폭증하였다. 외부적으로는 미국과 다른 중립국들과의 무역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동쪽의 괴뢰국들은 계속해서 혼란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제국은행(Reichsbank) 총재 {{카라링크|루돌프 헤븐슈타인}}은 {{카라링크|카를 헬퍼리히}}, {{카라링크|얄마르 샤흐트}}, {{카라링크|한스 루터}} 등 저명한 경제학자들로 구성된 대책팀을 구성했다. 헤이븐슈타인과 OHL은 증세와 세금의 중앙집권화를 통해 구성국들의 권리를 축소하는 세제 개혁을 선호했다. 이 개혁안은 바이에른과 알자스 대표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라링크|독일 제국 (카이저라이히)/정당#중앙당|중앙당}}의 지지를 받았고, 힌덴부르크 수상에 의해 가결되었다. 추가적인 대책이 논의되었지만 실제로 시행까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반면 {{카라링크|폴란드 국경 지구}}의 붕괴로 인해 실패한 이주 정책은 융커들을 돕지 못했고, 폴란드-독일 사이의 경제적 유대관계를 붕괴시켜 동부 괴뢰국들이 ''{{카라링크|미텔오이로파}}'' 경제권으로 편입되는 것을 방해했다. 제국의회가 여전히 무기한 중단된 상황이 지속되자, 언론을 통한 선동이 야당의 운영 방식이 되었고 정부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의 사이는 점점 더 분열되었다. 모든 사회주의 정당의 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유일하게 활동을 허가받은 사회민주당은 합법과 불법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며 공격적 확장 정책을 펼쳐 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야당으로서의 가치를 브랜드화 하는데 성공했다. 카이저는 점점 더 국내정치에서의 지분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의 가장 강력한 부하가 점차 카이저마저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독일 전체에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1923년 무소불위의 루덴도르프에게 재앙이 닥쳤다. ''{{카라링크|동부 원조 스캔들}}''이 터지자 사회민주당, 자유당의 비난이 빗발쳤으며, 카이저 또한 그를 비판했다. 심지어 제국수상 {{카라링크|파울 폰 힌덴부르크}}까지 합심하여 그를 공격하자, 루덴도르프는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추방당했고 독일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선거가 소집되었다. === 티르피츠의 황금시대 === 1923년 7월 24일, 스퀄러의 날(Days of the Squallers)이라고 알려진 일주일간의 열정적이고 복작거린 선거운동 후 마침내 카이저는 자신의 목적과 개혁의 요구를 적절히 실행해낼 수 있음을 증명한 {{카라링크|알프레드 폰 티르피츠|대제독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를 제국 수상으로 선택했다. {{카라사진|left|Alfred von Tirpitz.webp|160|1923년부터 1930년까지 독일 제국수상을 지내며 1920년대 내내 독일의 세계 패권을 상징한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 티르피츠는 DVLP, Zentrum, NLP, DkP, DRP로 구성된 대연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NLP와 중앙당을 포함하는 정책은 DVLP의 많은 구성원을 실망시켰다. 제국의회의 보다 급진적인 의원들은 언론 거물 {{카라링크|알프레드 위겐베르크}}가 이끄는 내부 모임을 형성하여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싸웠다. 티르피츠는 경제 분권 정책을 시행했다. 경제 침체 시기가 지나고 나서야 그의 정책은 마침내 미텔오이로파에 대해 행한 지속적인 투자금액을 모두 회수하고 남는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성과는 제국수상 폰 티르피츠의 재임기간 동안 계속된 경제 기적이었고, 그에게 엄청난 인기와 "제2의 비스마르크"라는 영예로운 별명 또한 안겨주었다. 티르피츠는 1925년 {{카라링크|영국 혁명}} 이후 {{카라링크|대영 제국의 붕괴|영국령 식민지의 점령}}을 지시했으며, 이듬해 중국 {{카라링크|청나라|직예군벌}}과의 동맹으로 독일군의 해외 철수 계획에 마침표를 찍었다. {{카라링크|미텔아프리카}}가 영국 식민회사(British Colonial Holdings)와 {{카라링크|동아시아 총행정기구 감사위원회}}(Aufsichtsrat der Ostasiatischen Generalverwaltung)를 장악하면서 독일의 열망인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한편 유럽에서 티르피츠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카라링크|브리튼 연방}}과 {{카라링크|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카라링크|프랑스 코뮌}}의 확고한 동맹으로 자리잡으면서, 새로운 반독일 세력이 형성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실패는 독일 제국과 미텔에우로파의 소속 국가에서 생디칼리스트 테러가 증가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 부재기간 === 1930년 6월 6일, 제국수상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는 함부르크 방문 중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떤 다른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없는 DVLP를 멈추게 만들었다. 베를린을 통과하는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의 장례 행렬이 독일에서 벌어진 가장 큰 대중 집회가 된 후, 언론 거물 {{카라링크|알프레드 위겐베르크}}는 {{카라링크|울리히 폰 하셀}}을 상대로 DVLP 의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위겐베르크가 선출 직후 공석인 독일의 제국수상이 되기 위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저는 위겐베르크를 새 제국수상으로 지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례적으로 긴 부재기간이 계속된 후에 카이저는 DVLP의 정책과 가장 비슷한 독일보수당(DKP)의 {{카라링크|쿠노 그라프 폰 베스타르프}} 총재를 8월 3일 제국수상으로 지명했다. 카이저의 결정에 분노한 위겐베르크는 즉각 반정부 선전과 함께 DVLP 당내에 광적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권위주의, 대독일주의, 융커우선주의를 포함하는 범독일 이데올로기를 주입해 고착화 시켰다. 이런 당의 체제 정비는 1932년 7월 16일, 총선을 통해 보수당이 28%를 획득하고, 위겐베르크의 "새로운 DVLP"는 역사상 최저인 5% 수준의 득표로 결과가 발표되자 헛된 일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이 선거에서 지난 20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34%를 득표해 원내 1당을 유지했다. 독일인들은 모험적 정책에 대한 욕망을 모두 잃었다. 독일인과 독일의 정치인들이 원하는 것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독일의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카이저는 늙어가고 있고, 벨트크리그의 유산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려 하고 있다. 독일은 독일이 지금같이 강했던 적도 없었지만, 독일이 지금같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던 적 또한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 정치 == === 정부 구성 === 독일 정부는 프로이센 보수주의인 독일보수당(DkP), 기독교 보수주의인 중앙당(Zentrum), 국가자유주의인 국가자유당(NLP), 자유보수주의인 독일제국당(DRP)의 연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라 독일 제국 정부}} === 정치 제도 === : ''본문: {{다크링크|독일 제국(카이저라이히)/정당}}'' 독일은 카이저에 의해 통치되는 준연방, 준입헌군주국이다. 1871년 제국 헌법에 따르면, 총리와 정부는 카이저에 의해 임명되고 오직 카이저에게만 책임을 지지만, 입법권은 남성 보통선거에 의해 득표율에 비례해 선출된 제국의회(Reichstag)와 연방 상원(Bundesrat)에 있다. 다소 권위주의적인 독일 민주주의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정치 체제는 다당제를 유지중이며, 다수당이 출현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다수당이 없을시 수상을 임명하는 권한을 가진 카이저가 정치에 굉장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연립여당은 독일보수당(DkP)와 중앙당(Zentrum), 독일제국당(DRP)이다. === 1867년 이후 제국수상 목록 === {{카라 역대 독일 제국수상}} == 군사 == === 육군 === {{카라사진|right|War Ensign of Germany (1903–1919).webp|200|제국 전쟁기(Reichskriegsflagge)는 전세계적 독일 패권을 상징한다.}} 독일 육군(''Deutsches Heer'')은 {{카라링크|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군대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 간 끊임없는 추문에 시달렸으며, 이는 교리와 훈련 시스템이 늘어난 국방 예산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현 독일군 총사령관인 {{카라링크|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원수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지만, 그는 늙었고 언제든지 상황은 바뀔 수 있다. 대부분의 독일 육군은 1920년대 후반 독일 제국수상 {{카라링크|알프레드 폰 티르피츠}}가 고안한 방어 계획에 따라 유럽에 집중되어 있다. {{카라링크|플란데런-왈로니}}에서 엘자스-로트링겐까지 이어져 있는 루덴도르프 선이 서쪽 방어의 기초를 형성하는 반면, 동유럽은 괴뢰국을 통해 {{카라링크|러시아}}와의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카라링크|모로코}}, 싱가포르, 태평양 제도 및 서아프리카의 전략수비대를 제외한 식민지의 방위는 {{카라링크|미텔아프리카}}와 {{카라링크|독일령 동아시아}} 식민정부에서 조직한 민병대에 맡겨져 있다. === 해군 === 제국 해군(''Kaiserliche Marine'')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해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가의 해상 전력에 빗대어 보면, {{카라링크|대전쟁}} 이전의 영국 해군이 가지는 수준의 위상은 아니다. 구식 군함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 함대를 자랑하는 제국 해군은 항공모함을 보유한 세계에서 몇 되지 않는 해군이기도 하다. 전 세계에 기지를 두고 있는 해군 해병대는 독일 제국의 식민지 무역을 보호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카라링크|루트비히 폰 로이터}} 제독이 제국 해군을 지휘하고 있다. === 공군 === 독일 공군(''Luftstreitkräfte'')은 대전쟁의 에이스 헬무트 웰베르크가 이끌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공군 규모를 자랑하는 독일 공군은 대량의 전술폭격기를 통해 육상작전을 지원하는데 운용의 방점이 찍혀있다. 독일 공군은 해외에도 주둔하고 있으며, 특히 칭타오에는 대규모 공군 파견대가 위치해 있다. == 외교 == == 구성국 == == 식민지와 위성국 == == 경제 == == 문화 == === 독일 여성 === === 문학 === === 음악 === === 극장 === === 기타 예술 === }}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Container (원본 보기) 틀:Container/style.css (원본 보기) 틀:Tabber (원본 보기) 틀:Tabber/style.css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꽉찬사진 (원본 보기) 틀:다크링크 (원본 보기) 틀:리워크 (원본 보기) 틀:카라 독일 제국 (원본 보기) 틀:카라 독일 제국 정부 (원본 보기) 틀:카라 역대 독일 제국수상 (원본 보기) 틀:카라링크 (원본 보기) 틀:카라사진 (원본 보기) 틀:카라아래선 (원본 보기) 틀:카라컨테이너 (원본 보기) 틀:카이저라이히 (원본 보기) 독일 제국 (카이저라이히)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