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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상태
동아시아 전쟁
East Asi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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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70년 11월 17일 ~ 1971년 5월 23일
장소
동아시아
배경과 원인
중공의 정치적 대혼란
중소 분쟁
중인 분쟁
이승만의 중국에 대한 위협감
미국 대통령에 이승만의 추종자 닉슨 당선
목표
연합군 측
중공 패퇴
중공 측
방어
결과
중공의 패배
뉴어크 평화조약
영향
아프간 전쟁 발발
덩샤오핑의 집권과 서중국(중공)의 친미화
영토 변화
티베트, 아무르, 신장, 오르도스, 하이난 독립
홍콩, 마카오 잠정적 독립
중화민국의 중국 동부 장악, 난징 환도
한국, 몽골 영토 확장
참전국
연합군
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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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중화민국
소비에트 연방
인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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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지휘관
연합군
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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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1]
한신[2]
박정희[3]
김종필[4]
김영관[5]
김두만[6]
채명신
이병형
류병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7]
안드레이 그레츠코[8]
이반 파블롭스키[9]
파벨 쿠타코프[10]
세르게이 고르시코프[11]
장제스[12]
황체[13]
가오구이위안[14]
인디라 간디[15]
자그지반 람[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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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17]
덩샤오핑[18]
저우언라이[19]
쉬샹첸[20]
예젠잉[21]
친지웨이[22]
왕첸한[23]
유지콴
박성철[24]
남일[25]
방호산[26]
참전 병력
연합군
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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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만 명
[ 펼치기 · 접기 ]
330만 명
피해 규모
연합군
중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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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23만 명 전사
[ 펼치기 · 접기 ]
군인 90만 명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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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1300만 명 이상 사망
1억 7천만 명의 이재민 발생
각주
  1. 대한민국 총통
  2.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3. 한국군 합동참모의장
  4. 한국군 육군참모총장
  5. 한국군 해군참모총장
  6. 한국군 공군참모총장
  7.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8. 소비에트 연방 국방부장관
  9. 소련군 육군총사령관
  10. 소련군 공군총사령관
  11. 소련군 해군총사령관
  12. 중화민국 총통
  13. 중화민국 국방부장
  14. 중국군 참모총장
  15. 인도 공화국 총리
  16. 인도 공화국 국방부장관
  17. 중화인공 초대 주석
  18. 중화인공 2대 주석
  19. 중화인공 부주석
  20. 중화인공 국방부 부장
  21. 중공군 란저우군구 사령원
  22. 중공군 난징군구 사령원
  23. 중공군 선양군구 사령원
  24. 연변 정권 내각수상
  25. 연변 정권 민족보위상 (국방부장관)
  26. 연변군 총참모장

개요

1970년 11월부터 1971년 5월까지 반년 동안 동아시아의 중국에서 진행된 전쟁.

배경

대한민국

한국의 총통이었던 이승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중공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 중국 영토인 연변에 있는 연변 정권에서의 정치 격변[1] 이후 새 정권이 한국을 상대로 도발을 이어나가면서 이승만은 개전의 의지를 굳혔다.  이승만은 각료들에게 중국 침공 의사를 밝힌 후 중화민국, 인도, 소련과 교섭하여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합의한다.  마침 막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리처드 닉슨은 과거 야인 시절 이승만한테서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아 이승만에 매우 우호적이었기 때문에[2] 이승만은 닉슨을 설득하여 전쟁의 승인을 얻어내고 무기를 지원받는다.[3]

소비에트 연방

소련은 중국과 1950년대부터 국경 분쟁을 겪어왔다.  통일전쟁 때부터 악화되어온 양국 관계는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졌다.  하여 소련은 한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인도

인도는 아루나찰프라데시와 악사이친을 두고 중공과 오랜 시간 대립하였다.

중화민국

미국

미국의 새 대통령에 선출된 리처드 닉슨은 이승만을 은사로 여겼다.  이승만이 전쟁을 제안하자 중공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던 닉슨은 잠시 고민하였으나 전쟁으로 중공이 위기에 빠지면 중공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중공과의 관계 개선에 더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닉슨은 이 전쟁에 미국이 연관되었음을 비밀에 붙이는 조건으로 전쟁을 승인하고 한국에 막대한 양의 군수품을 지원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연변 정권

전개

마오쩌둥 속이기

중공의 마오쩌둥을 속이기 위해 한국, 소련, 자유중국은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한국 정부는 "소련의 제국주의적인 행보"를 비판하였으며 중공에는 양국 수도에 대표부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중공 지도부이었지만 곧 한국의 친중공적 행보를 연변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연변 정권의 박헌영 내각은 중공 영토에 얹혀 살며 중공의 지원을 받는 주제에 중공 정부와는 상의도 않고 한국에 무장 공비들을 침투시키며 부정적인 어그로를 끌어왔었는데 한동안 잠잠하더니, 쿠데타로 새로 성립된 내각은 이전 내각보다도 더 큰 어그로를 끌었다.

마침 한국의 최규하 외무부 장관이 중공에 "만약 중공이 연변 놈들이 우리한테 도발 못 하도록 잘 관리해주면 우리는 대만과 단교하고 귀국과 수교하겠다"라는 입장을 타전하였다.  이를 알게된 대만은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오쩌둥은 한국 측의 제안에 크게 기뻐했으며 양국 외상 간의 회담까지 이루어졌다.

하지만 홍위병 관리에 혈안이 되어있던 마오쩌둥은 이 모든 것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한국군, 소련군, 중국 국부군, 인도군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전역별 전개

동북부 전역

한국군과 소련군은 새벽에 기습적으로 만주를 침공했다.  그나마 대규모 병력이 배치되어있던 소련 국경에서는 중공군이 선전했지만 한만 국경에서 전투 준비가 완료된 군대는 연변 정권 소속 조선인민군 외에는 없었다.  한 줌 밖에 안 되는 연변군은 하루만에 격파당하였고 한국군의 기갑군단은 요령 반도를 넘어 몽골 국경을 향해 진격했다.  아무르강 부군에서 중공군과 교전을 벌이던 소련군도 압도적인 제공권과 기갑부대를 앞세워 중공군을 포위ㆍ격멸했다.  만성적인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싸울 의지가 부족했던 중공군의 대부분은 스스로 항복했다.  중국인민해방군 심양 전군구는 그렇게 소멸했다.

다급해진 마오쩌둥은 자신이 숙청했던 장군들을 중난하이로 불러 정중하게 사과하고 북경 군구의 지휘권을 넘긴다.  난주(란저우) 군구는 서부 전선의 소련군과, 제남(지난) 군구는 상해에 상륙한 중화민국 국군과 전투중인 남경 군구를 지원하고있었기에 북경 군구를 지원할수 있는 다른 군구는 없었다.

비록 지휘관들은 마오쩌둥에게 앙금이 쌓여있었지만 부대를 재조직하여 발해만에서 몽골 국경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방어선에서 한ㆍ소 연합군 공세까지 저지하면서 자신감이 생긴 수뇌부는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진격로가 막힌 한ㆍ소 연합군은 중립국인 몽골 영토를 통해 중공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후방을 공격했다.  중국 정부는 부랴부랴 무한(우한)으로 천도했고 북경은 함락됐다. 

동부 전역

중국 국부군은 한ㆍ소 연합군이 만주 침공을 개시한 그 시간, 상하이에 50만 병력을 상륙시켰다.  중공군은 국부군이 깡촌 지역에 상륙하리라 여겼기 때문에 대도시들은 비교적 방어가 취약하였다.  상해를 점령한 국부군은 남경, 항주로 진격하였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중공군 상해 군구는 이웃한 제남 군구와 광주 군구에까지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남경, 항주까지 점령한 국부군은 중공군의 방어선에 막혔다.  중공군 또한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저지되면서 동부 전선은 종전 때까지 참호전 양상을 보이게 된다.

서부 전역

개전과 동시에 서부전선에서 소련군은 신장 지역에서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신장 북부를 곧장 공격했고 인도군은 국경 지대의 중공군 초소를 일제히 공격했다.  소련군은 우루무치를 점령했고 위구르인들로부터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위구르 민병대는 중공군 후방을 휘저으며 중공군의 보급선을 타격했고, 안 그래도 위태롭던 중공군의 보급이 박살났다. 소련군은 우루무치로부터 동남쪽을 향해 전격전을 펼치며 간쑤 성 서북부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예젠잉이 지휘하는 방어선에 가로막혔다.  그러자 소련군은 몽골 영토로 우회하여 방어선 후방을 공격했고 중공군의 방어선은 붕괴했다. 이후 우세한 화력을 가진 소련군이 중공군을 서서히 밀어냈고 종전 당시에는 난주(란저우) 전역에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뉴어크 평화조약

이 상황에서 우한의 중공 지도부가 분열됐다.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 펑더화이는 강화를, 마오쩌둥은 항전을 주장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일본군과 국민당군을 불리한 환경을 무릅쓰고 패퇴시켰으므로 4개국 연합군도 무찌를 수 있다고 주장했고 덩샤오핑은 4면에서 공격받는 상황에서 미국의 개입없이는 소련군을 막아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덩샤오핑이 불만에 가득 차있던 장성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마오쩌둥을 끌어내리고 스스로 중공의 지도자로 등극하면서 연합국에 강화를 요청한다.

그리하여 미국 뉴어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참가국은 당사국인 한국, 소련, 중화민국, 인도, 중공 그리고 양측을 중재하는 미국이었다.  강화회담의 한국 대표로는 당시 외무부장관이자 이승만, 김영삼 정부에 걸쳐 총리를 맡은 최규하가 파견되었다.  회담 결과, 중국은 다음과 같이 분할되었다.

하이난은 한ㆍ중ㆍ소 3개국이 군정을 실시하다가 독립했다.

각주

  1. 연변 정권 항목 참조
  2. 미국 항목 참조
  3. 물론 닉슨이라고 해서 이승만이 자신의 은사인 것만으로 전쟁에 협조해준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