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크 내전 Rànké Teforèns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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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8월 3일 ~ 1925년 12월 11일 | ||||
장소 | ||||
랑크, 콰링튼, 데모 전역, 시레스 일부 지역 | ||||
원인 | ||||
구제국과 신제국 세력 사이 갈등과 식민 세력 봉기, 좌우 이념 갈등 극대화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신제국파 | 범인민전선 | 식민 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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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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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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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 ||||
19만 8천 명 | 21만 6천 명 | 9만 4천 명 | ||
피해규모 | ||||
사상자 | 사상자 | 사상자 | ||
결과 | ||||
신제국 세력 승리, 랑크 제3제국 건국 | ||||
영향 | ||||
공화파 몰락 촉발 제2제국 붕괴 식민지 독립 일부 성공 |
개요
수도 비넨트 점령 직후 신제국군 장교 미프링 아파렌게시스 연설문 中
랑크 내전은 대식민지 독립 전쟁이라고도 불리며, 최근 랑크 현대사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이기도 하다. 당시 부패한 제2제국애서 공화파, 왕정파, 사회주의 계열의 각 세력이 판을 치며 득세해 왔는데, 이때 몰락했던 랑넴 황가를 주축으로 한 신제국파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반대한 좌익 계열의 인민 전선이 만들어져 여러 세력 간 각축전으로 퍼진 전쟁이다.
내전 발생 전
제2제국 정부의 파인츠 2세는 식민지들에게 높은 자치를 허용해주고 랑크 영토 내의 소수민족에게도 자치권을 주어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반면, 본토에서는 국고가 소진된 상황에서 황실은 기존의 복잡한 세율 구조를 정비하고, 본토와 식민지 간의 세제 격차를 조정하여 균형 재정을 도모하고자 세취법(Sétür Act)을 도입하였다. 이로 인해 본토 시민들에게 세금 부담이 가중되고, 병역세 부담 증가와 더불어 기존 군인들의 대우는 더욱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 이는 국민들과 군인들의 황실의 지지도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적 상황으로 보면 행튼-이스너의 난 이후 정권을 잡은 행튼 가문이 계속 황위를 이어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티즈 왕작위를 받은 랑넴 가문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파인츠 2세 당시 관료 중 신랑넴파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었다. 더불어 제2제국 황실에 대한 여론은 저점 하락세였다. 또 군부 내에서의 갈등과 더불어 1920년 친랑넴파 장교 라이진은 파인츠 2세의 아들인 람넌 5세를 폐위하고 세러 10세 이후 끊긴 랑넴가의 황위를 되찾고자 한다며 세러의 3세의 후손인 카르신 랑넴을 모시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이 과정에서 라이진과 카르신이 처형당하자, 친랑넴파 인사들은 급히 신제국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를 기회로 삼아 람넌 5세는 신제국파를 숙청하려고 시도했으나, 먼저 움직인 것은 신제국파였다. 신제국 준비 위원회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군사를 먼저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대표적인 신제국파 장교였던 노블랑의 주도로 신제국파 장교들이 잇따라 봉기에 참여하였고, 군사를 모아 헤른에서 8월 2일 봉기를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여러 장교들은 주점에서 모여 카르신의 동생이었던 티렌테 9세를 추대하기로 합의하고, 군단을 배치하여 봉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왜인지 봉기 날짜는 하루 미뤄졌고, 각 진영에 이 명령이 전달되며 다음날인 3일, 일제히 헤른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곧바로 신제국파는 황실에 선전포고하고, 당시 헤른의 모든 관청과 관공서를 장악함과 동시에 케스프 공을 사로잡아 점령했다. 뒤이어 케스프 주의 우익 자치 연합이 군대를 조직해 지지를 선언하였다.
내전의 발발
지금 이 순간, 우리 조국은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황실은 타락했고, 군대는 찢기고, 백성은 잊혀졌습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강한 랑크를, 자랑스러운 랑넴 황가, 그리고 온 세계를 향해 찬란히 빛났던 제국의 깃발을.
그러나 오늘, 그 모든 영광은 먼지가 되어 짓밟히고 있습니다.
세금을 늘리고, 병사들을 버리고, 식민지에 우리 국민을 팔아넘긴 파인츠 2세와 그 졸개들.
그들은 권력을 위해 조국을 팔았고, 조국의 이름으로 황위를 욕보였습니다.
우리는 더는 참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랑넴 황가의 정통 후손, 티렌테 폐하의 이름으로 랑크 제국의 재건을 선포합니다.
케스프의 용감한 시민들과 함께, 우리는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제 선택해야 할 시간입니다. 썩어 빠진 구제국과 함께 가라앉을 것인지,
아니면 신제국의 깃발 아래 다시 일어설 것인지.
우리는 약속합니다.
질서와 명예, 정의와 강함, 황실의 복권과 국민의 자존.
피를 흘릴지언정, 다시는 우리의 조국이 조롱당하게 하지 않겠다고.
황제 폐하 만세!
국민이여, 깨어나라!”
1922년 8월 3일, 케스프 주 헤른. 미프링 아파렌게시스 장군 낭독.
제2제국의 람넌 5세는 보고를 듣고 신속히 반란 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헤른의 정부군이 줄줄이 패하면서 정규군을 내려보내 반란을 진압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에 따라 공화파가 본거지인 랄론(Ralron)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크네발(Kénebal) 지역에서 동시에 봉기을 동시에 일으켰다, 이에 크게 놀란 람넌 5세는 급히 협상단을 보내 공화파와 사회주의 세력의 대표와 3자 회담을 통해 투표권 확대, 부분적 민주화 약속, 사회주의 요소 투입 등을 약속하고 케스프의 반군을 함께 물리치자는 동맹을 맺었다. 여기서 이 전선이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건 우선 신제국파가 민주세력을 지속적으로 탄압해오던 점, 또 반공주의 세력이 신제국파를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한편, 당시 랑크의 해외 식민지들은 랑크 식민 왕국으로 거의 별개의 나라처럼 묶여서 통치 받아왔다. 지금과 다르게 당시엔 데모 지역도 왕국 구성원 중 하나였는데, 특히 데모 공국이 왕국의 리더로서 독립을 주장해왔다. 제2제국은 해외 병력을 끌어들일 심정으로, 식민 왕국에 고도의 자치권을 약속한 뒤 전쟁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데모 공국은 이를 거부했고, 이에 반발한 나머지 구성국들이 데모 공국을 왕국에서 제외시킴으로서 나머지 국가들은 인민전선에 참여했고, 데모는 신제국파에 따로 협력하였다. 반면 제2제국 황실은 이미 <사회기본법>을 제정하는 등 사회주의에 온건한 태도를 펼쳐 왔다. 여기에 조건부로 허락 받은 아나키 세력들과 케스프주의 좌익들이 우익 연합에 대항하여 만든 좌익 연합이 가세하여 범 사회주의 연합, 제2제국 황실을 주도로 하는 아이러니한 범인민전선이 창설되었다.
범인민전선은 여러 군대를 규합해 막강한 정부군을 포함한 여러 세력 중 가장 강한 세력의 군대가 만들어졌다. 인민전선은 우선 수도 비넨트 직역을 점수하고, 주변 지역을 장악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신제국파의 장악 속도를 사상을 초월했고, 기존 케스프를 비롯하여 황실에 대한 비토 성향이 강한 머스턴, 루이네선, 콜렛 지역 등이 이미 신제국파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내전은 각자 장악한 지역을 바탕으로 한 장기전 양상으로 흘러갔고, 양 군대는 콜렛의 도시 호스터네츠에서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었다.
내전의 전개
호스터네츠 전투
호스터네츠에서 조우한 양 군은 처음으로 라모중 강을 끼고 전투를 벌였지만, 신제국파의 싱거운 승리로 끝났다.
비넨트 공방전
궁지에 몰린 구제국파는 수도 비넨트에 모여들었고, 신제국파는 제5기갑여단을 필두로 제7기계화보병사단, 제1공수부대, 제3공수부대 등 최정예 요원들로 하여금 비넨트를 포위하며 압박하였다. 구제국파 총사령관 위쳐는 비넨트에서의 결사항전을 예고하였고, 비넨트를 탈출하지 못한 공화파 일부 군단과 연합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1925년 9월에 선두 프라친켄스가 비넨트를 본격적으로 공세를 시작하였다. 제2비행여단이 비넨트의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이어 하루에 두 차례씩 공습을 진행하였다. 티렌테 9세는 결국 나라의 수도인 비넨트에 공습하는 것을 망설였지만, 위쳥 항전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신제국파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공습을 선택했다고 한다.
제5기갑여단이 전차를 앞에서 짓쳐들어왔지만, 구제국파는 구축해놓은 대공포와 지뢰, 로켓포를 사용하여 비넨트 진입을 막았다. 비넨트 교외에서의 항전은 계속되어, 신제국파가 비넨트 3km까지 다가왔을 땐 날짜가 10월이었다. 당시 구제국파 사령관 콜트담의 암청난 지연전 전술로 신제국파를 막았지만 후속 부대와 합류한 신제국파가 시내로 진입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제7기계화보병사단과 공수부대를 만난 프라친켄스가 총공세를 명하며 군이 시내로 진입에 성공하였다. 이때 람넌 5세와 측근들은 탈출하여 콰링튼으로 망명을 떠났다.
비넨트에는 위쳐 혼자 남아 남아있는 정규군과 시민방어대를 지휘하였다. 위쳐는 콜트담 등 장군들에게 전원 후퇴를 명령하고, 각 건물에 숨어들어 시가전을 대비하였다. 구제국파는 시내에서 게릴라전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시내 곳곳에 연막탄을 뿌렸으며 방송국을 통해 여론전을 지속해나갔다. 이 비넨트 공방전에서의 신제국파의 피해가 가장 막대했다. 비넨트 북쪽에서는 구제국파 제4연합기갑연대가 병사들이 항복하거나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제3기갑여단 등 점점 더 많은 신제국파 병력이 비넨트에 몰려들어오자 신제국파 군이 사이릉궁과 욱군본부 등을 정복, 위쳐의 항복을 받아내어 1925년 11월 1일 완전히 비넨트를 정복하며 구제국파가 몰락하고 신제국파가 수도에 입성했다. 위쳐 등 당시 구제국파 장군들과 관료들은 모두 체포 되었지만 그 총사령관 위쳐가 겨우 징역 10년을 받고 그마저도 5년 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끝까지 나라를 버리지 않고 항전한 공을 티렌테 9세 역시 높이 사고 그를 군에 다시 들이고 싶어서라고 한다. 위쳐 역시 사면 후 군에 돌아와 중장까지 찍고 명예 전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