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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1일 (토) 20:44 기준 최신판

레올로위오스 3세
Reollowios III
임기 1655년 1월 14일 ~ 현재
전임 레올로위오스 2세
후임 현직
이름 페드루 드 레올로위오스
출생일 1590년 8월 24일
출생지 헬레그라포
가문 레올로위오스가
부친 레올로위오스 2세
모친 리카드리나 황비
배우자 마르가리다 황후
자녀 엘리자벨라 레올로위오스 황녀

레오폴지나 레올로위오스 황자

종교 영지교


개요

레올로위오스 3세는 이드볼라디쉬 제국의 황제이자 레올로위오스 영주, 클리카,그노스,미우로그,프넴,마르 아오 술,헬람파코스트,아이곤스,아나스크,괼레나,모니아,헤파두두,아자만,살리아,네카,마푸켄,추트팍,페카투,코스코,카이야,피나모,헤도나,사르젠토,알베란의 대영주이기도 하다.

산업화와 근대화를 주도한 레올로위오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선황의 산업화/근대화를 이어 진행했다. 그리고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이드볼라디쉬의 양극화 해결을 위해 황금칙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생애

레올로위오스 3세는 1590년 8월 24일, 헬레그라포 황궁에서 레올로위오스 2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랫동안 자녀가 없었던 레올로위오스 2세가 얻은 유일한 자녀이자 장남이었기에 즉시 황태자로 지정되었다.

황태자 시절에는 주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선황 레올로위오스 2세도 국가의 근대화, 산업화를 위해선 뛰어난 과학기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그런 레올로위오스 3세의 취향을 후원했다.

1615년에 이드볼라디쉬 제국의 기술 발전과 인재 영입, 해외 기술자 섭외 등을 위한 황립 근대 재단을 수립하고, 이드볼라디쉬의 과학기술 분야에서 황태자의 직책을 활용해 경제적/사회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 분야를 비롯한 이공계 전문직 인사들을 후원했으며 정계 역시 신세대 소장파들을 후원했다.

1620년, 선황 레올로위오스 2세가 승하하면서 황위를 물려받았다. 황위를 물려받은 레올로위오스 3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선황의 정책을 물려받아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이드볼라디쉬 전역을 연결하는 인프라 구축이 있었다. 레올로위오스 2세는 죽기 직전까지 이드볼라디쉬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고자 했고, 레올로위오스 3세는 자신의 대에 이를 완성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도로/철도 건설을 주도했다.

사반세기 가까이 진행된 인프라 구축 사업은 레올로위오스 3세가 중년에 들어선 1641년에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레올로위오스 3세의 산업화/현대화 정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젊은 시절부터 눈여겨본 과학기술과 인프라의 허브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 헬레그라포를 대체할 신도시 '이드볼라디쉬-두'의 건설을 기획했다.

이드볼라디쉬-두는 당시로써 최신의 기술과 새로운 트렌드의 건축 디자인이 적용된 미래도시 컨셉의 신도시였다. 동시에 이드볼라디쉬 각지역의 도로, 철도망을 포괄하고, 항만 역시 강의 폯을 확장해 운하를 건설함으로써 충당하며, 항공시대를 대비해 대규모 공항도 조성되었다. 또한 과학기술의 연구를 위해 연구단지 역시 조성되었으며, 도심을 중심으로 항만, 공항, 연구단지, 산업단지, 상업단지, 거주단지로 이루어진 메트로폴리스였다.

레올로위오스 3세는 이러한 정책을 주도하면서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이후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당시, 무기/물자 판매와 채권 구매에 뛰어든 이드볼라디쉬 기업과 지주들 중 키르수스의 편에 선 자들은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의 승전으로 막대한 부를 얻었다. 이들은 그란치프 편에 선 기업과 지주들이 파산하면서 매각한 자산을 흡수했고, 이드볼라디쉬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지주제와 봉건제로 인한 양극화를 악화시켰다.

자신의 산업화, 근대화 정책이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간다고 판단한 레올로위오스 3세는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황실 차원에서 나섰다.

그러나 봉건제의 역사가 길었고, 이것이 근대이후 연방제 형태로 자리잡으면서 지방분권적 성향이 큰 이드볼라디쉬의 특성과 1630년대 이후 늘어난 식자층과 지식인들이 황실과 군주정의 존재에 의문을 가지면서 난관에 부딛혔다. 특히 1620년대 이후 태어난 신세대들은 군주정을 고리타분한 존재로 간주하면서 황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레올로위오스 3세 본인 역시 노년기인 1650년대에 들어서면서 육체적 피로와 함께 권위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애초에 키르수스나 게파르토식 권위주의는 입헌군주제 제도상 맞지 않았으며, 그 스스로도 그런 권위주의는 근대화/산업화에 역행하는 반동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도 자녀가 적었고, 신세대의 반발에 지쳐 자신의 대에서 군주정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사회적으로 권위를 배제한 그의 성향탓에 대중과 친밀하게 접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드볼라디쉬의 빈부격차와 사회문제를 더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비록 군주정이 자신의 대에서 끝날지언정, 최소한 자신이 경험한 사회문제만큼은 해결하겠다고 결정한 레올로위오스 3세는 의회에서 개혁, 변화를 지지하는 세력들을 규합해 그들을 통해 사회개혁을 주도하고자 했다.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이후 키르수스식 권위주의를 지지하는 기득권층과 공련식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노동자, 농민층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레올로위오스 3세는 중도파를 자신이 규합한 개혁 세력에 흡수했다.

동시에 자신의 사후 이드볼라디쉬를 공화정으로 바꾸고, 봉건제가 형태를 바꾼 것과 다름 없었던 기존의 연방제를 개선해 지역민들의 지방자치를 통한 토호 견제와 풀뿌리 민주주의를 구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프리슬란드를 참고해 헌법과 연방제 개편을 시도했고, 사회개혁의 일환으로써 1660년대에 황금칙령을 발표했다.

황금칙령은 기득권의 반발을 낳아 1664년에 게파르토의 신년정변을 참고한 쿠데타로 이어졌다. 쿠데타에 주축이 육군이라는 사실을 안 레올로위오스 3세는 신세대로부터 무시당한 설움, 자신의 개혁에 초를 치는 자들에 대한 분노, 자신의 군대라고 주장한 육군에 대한 배신감에 휩싸였다. 그 결과, 내전 종전 후 레올로위오스 3세는 육군을 대상으로 명예숙청을 단행했다.

성격

레올로위오스 3세는 젊었을 적에는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은 진취적인 성격이었다. 그러나 1672년 기준으로는 수동적이고 탈권위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군주정을 구질서로 취급한 신세대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다양한 반발을 목도하고, 육체적으로도 노년기에 접어들어 만성 피로에 직면한 탓에 권위라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 마다 황제로써의 지위나 황실의 권위를 내려놓은 채 사복차림으로 헬레그라포 시 일대 산책을 나서기도 한다. 이때 평범하게 거리를 돌아다니거나 앵무새(이드볼라디쉬에서는 앵무새가 비둘기와 같다.)에게 모이를 주는 등, 평범한 노인처럼 활동한다. 따라서 이드볼라디쉬인들조차 그가 이런 차림으로 나설 때면 황제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렵다.

그러나 장년기와 중년기동안 신세대와의 갈등과 반발, 무시에 대한 분노 역시 내장되었다. 보통 화를 잘 내지는 않으나, 내전에 육군이 가담했다는 사실을 듣고 그동안 쌓인 분노를 육군에 푸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