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제36대 대통령
린든 베인즈 존슨
Lyndon Baines Johnson
출생 1908년 8월 27일
미국 텍사스 주 스톤웰
사망 1973년 01월 22일 (64세)
미국 텍사스 주 스톤웰
재임기간 제36대 미합중국 대통령
1963년 11월 22일 - 1969년 1월 20일
제37대 미합중국 부통령
1961년 1월 20일 -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주 연방상원의원
1949년 1월 3일 - 1961년 1월 3일
텍사스 주 10구 연방하원의원
1937년 4월 10일 - 1949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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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 사무엘 엘리 존슨 주니어
리브가 베인즈
배우자 클라우디아 "레이디버드" 테일러 (1934년 결혼)
자녀 딸 린다, 루시
학력 사우스웨스트 텍사스 주립대학교
조지타운 대학교
종교 개신교
정당 민주당

린든 베인즈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 8월 27일 - 1973년 1월 22일) 또는 LBJ는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미국의 제36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하에서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제37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며, 케네디의 암살 직후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텍사스 출신의 민주당원인 존슨은 미국 연방하원의원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상원에서 다수대표를 맡았다. 그는 연방에 종사하는 선출직에서 모두 봉사해본 경험이 있는 몇 안되는 대통령 중 한 명이다.

텍사스 스톤월의 한 농가의 지역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난 존슨은 1937년 연방하원 선거에 도전하기 전에 고등학교 교사와 의회 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는 1948년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53년에 상원 민주당 지도자가 되었고, 1954년에는 상원 다수대표가 되었다. 1960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케네디 상원의원에 이어 2등으로 경선을 마쳤고 곧바로 케네디의 제안에 응해 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케네디-존슨 캠페인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직후 1963년 11월 22일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듬해 존슨은 애리조나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와의 대결에서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되었고, 대통령 선거에서 무려 63.3%의 득표율을 보였다. 이는 1820년 선거 이후 대통령 후보가 얻은 가장 큰 비율이었다.

존슨의 국내 정책은, 민권, 공공방송,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개선, 교육 및 예술에 대한 지원, 도시 및 농촌 개발과 공공서비스의 확대에 중점이 찍혀있었다. 1964년 존슨은 이런 자신의 정책들을 뭉뚱그려 "위대한 사회"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빈곤과의 전쟁" 정책을 주도해 저소득층 미국인을 위한 더 나은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1965년 사회보장법 개정안에 서명했고, 그 결과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가 탄생했다. 존슨은 NASA를 강화하기 위해 아폴로 프로그램을 최우선 순위로 삼았다. 또한 1965년 고등교육법을 제정해 연방 학자금 대출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1965년 이민 및 국적법에 서명하여 오늘날 미국 이민정책의 토대를 마련했다. 민권에 대한 존슨의 의견은 백인 남부 민주당 지지자들과 충돌했다. 그의 민권 유산은 1964년 민권법과 1965년 투표권법, 1968년 민권법에 서명함으로써 완성되었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의 정치 지형은 크게 변화했다. 한때 굳건했던 민주당 지지기반이었던 남부 백인들이 공화당으로 지지를 옮겼으며, 흑인 유권자들이 민주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국내 의제 때문에, 존슨의 대통령 재임기는 미국 리버럴의 절정기였다.

존슨의 대통령 재임기간은 냉전 기간 내에 있었고, 따라서 그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을 우선시했다. 1964년 이전 미국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이미 베트남 전쟁에 연관되어 있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미국은 사우스코리아를 연방에 가입 시킨 이후 소련과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사우스코리아 주에 정찰자산과 전략자산을 대거 배치했다. 이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프랑스와 남베트남에 제공했으며, 사우스코리아에 군수 산업단지를 조성하여 사우스코리아-남베트남 사이에 직접적인 무기 지원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존슨은 재임 중 주요 도시에서 일어나는 흑인 폭동과 범죄율 증가로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법과 질서"에 관한 강력한 정책을 펼칠 것을 요구했다. 존슨은 가장 인기가 높은 대통령으로 임기를 시작했지만, 베트남 전쟁과 국내 불안으로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존슨은 처음에 다시 한 번 선거에 출마하려 하였지만,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은 후 입후보 결정을 철회했다. 베트남 전쟁은 1968년 선거에서 주요 선거 쟁점이었고, 결국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이 존슨의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를 물리치며 정권을 탈환했다. 1969년 대통령 임기가 끝난 존슨은 텍사스 목장으로 돌아가 회고록을 출판했으며, 1973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 까지 조용히 살았다.

존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업적에 대한 논쟁이 활발한 대통령 중 하나이다. 그의 유산에 대한 여론과 평가는 그의 죽음 이후 계속해서 변해왔다. 역사가들과 학자들은 존슨의 선진적인 국내정책 때문에 그의 업적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한편 존슨의 외교정책의 핵심,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 책임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한 비판을 받는다.

초기 생애

정계 입문

리처드 M. 클레버그가 1931년 특별선거로 미국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자, 그는 존슨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이것이 존슨이 정계에 공식적으로 발을 담근 계기였다. 존슨은 아버지와 자신이 1930년 선거운동을 도왔던 웰리 홉킨스 주 상원의원의 추천으로 보좌관이 되었다. 클레버그는 하원 의원이 행하는 일상적인 업무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업무의 대부분을 존슨에게 위임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존슨은 루즈벨트가 주장한 뉴딜 정책의 평생의 지지자가 되었다. 존슨은 의회 보좌관 모임인 "작은 의회"의 연사로 선출되어 하원의원, 신문사, 로비스트를 양성했다. 존슨은 곧 루즈벨트 대통령의 보좌관과 존 낸스 가너 부통령, 샘 레이번 하원의원 등 텍사스 사람들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존슨은 1934년 11월 17일 텍사스 카낙의 클라우디아 알타 테일러와 결혼했다. 그는 몇 달 동안 조지타운대학 법학대학을 다니면서 그녀를 만났다. 존슨은 1934년 1학기 이후 조지타운에서의 공부를 그만뒀다. 그는 첫 데이트 중에 그녀에게 청혼했다. 며칠 후 그녀는 마침내 청혼을 수락했다. 결혼식은 샌안토니오에 있는 세인트 마크 성공회 교회에서 아서 알 맥킨스트리에 의해 거행되었다. 둘 사이에는 1944년에 태어난 린다 버드와 1947년에 태어난 루시 베인즈라는 두 딸이 있었다. 존슨은 LBJ라는 자신의 이니셜에서 착안하여 강아지의 이름을 지었다. 그의 강아지 이름은 리틀 비글 존슨이었다. 한편 그는 결혼 생활 중에 수많은 여성들과 불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그는 텍사스 국립청년 행정부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정부의 권한을 이용하여 청년을 위한 교육과 취업 기회를 창출할 수 있었다. 그는 의회에 출마하기 위해 2년 후 그 자리를 그만두었다. 그는 생애 전반에 걸쳐서 악명 높은 상사였는데, 주말에도 긴 시간 일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연방하원의원

연방상원의원

1960년 대통령 선거

부통령

대통령

퇴임 이후

사망

성격과 이미지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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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