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 (구국)

개요

민주화 운동(democratization movement)은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부터, 김영삼의 대통령 취임과 1987년 2월 25일 신헌법 완전 시행까지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있었던 정치 운동을 의미한다.

역사

19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면서 정치적 돌파구로 국회 해산을 자주 이용했다. 1978년 선거 이후 1979년 1년도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회를 해산하자 국회해산 반대하는 시민들이 해산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8월에는 YH 사건이 벌어져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직무가 정지되었고,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이 제명되자 부마 민주항쟁으로 격렬해졌다. 특히 부마항쟁 과정에서 가택 연금중이던 김대중이 부마 항쟁을 북한의 지원을 받아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김대중을 다시 긴급 체포해 교도소로 이송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11월 18일 광주에서 김대중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민주항쟁이 일어날 때마다 국지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인을 동원해 무참히 시위를 진압했는데, 시위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주요 도시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자 12월 12일 비상계엄 조치를 전부 거두어들이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선제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12월 다른 부분을 건드리지 않은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12월 27일 국민투표로 확정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1980년 10월 1일 국군의 날에 하야를 발표할 것이니 국회에 개헌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며 제헌 국회를 소집한다는 명분으로 80년 3월 한 번 더 국회를 해산했다. 유신회 의원들은 사라졌지만, 비례대표 92석 중 절반을 통제의석으로 지정하여 지역구 1위 정당에 주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사실상 유신회처럼 작용하여 국회는 번번히 개헌안 마련에 실패했다.

결국 박정희가 10.1 하야를 선언했으나 개헌안은 마련되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대선정국이 시작되었다. 민주공화당은 당연히 김종필이 대선후보로 선출되나 하였으나, 박정희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하여 JP가 아닌 전두환이 후보로 선출되었다. JP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신과 국회에서 함께하던 의원들을 데리고 신민주공화당을 차려 나갔으며, 전두환은 민주공화당을 민주정의당으로 변경하며 대선 레이스가 시작된다.

80년 제헌국회는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제정구의 한겨레민주당 외에도 선진민주당 등 야권이 하나로 합쳐지지 못했는데, 이는 1979년 직선제 개헌 당시 김대중과 김영삼이 함께 몸담았던 신민당이 후보를 누구로 확정하느냐 하는 과정에서 DJ와 YS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특히 김대중은 당시 군부 정권에 의해 구속되어 피선거권이 없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중정의 보고를 받고 야권 분열을 획책하기 위해 김대중을 사면 복권시켜준 것이다. 이 전략은 그대로 먹혀들어 80년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은 각자의 셈법이 달라 하나의 통일된 안을 만들어내는 것에 실패했다. 또한 제헌국회의 구성이 민주공화당과 재건회의를[1] 합쳐 과반수였기 때문에 개헌을 진행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80년 대선에서 전두환이 겨우 29.96%만 받고 당선되고, 그 와중에도 앙금이 가지 않은 YS와 DJ는 81년 총선에서도 합의를 하지 못해 민정당의 1당 자리를 유지시켜야 했다. 물론 민정당의 의석 점유율은 많이 줄었으나, JP의 신민주공화당을 합치더라도 개헌을 시도하기에는 모자란 의석이었다. 결국 YS와 DJ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현 상태에서는 군부정권을 종식시킬 수 없음을 선언하고, 이회창의 선진민주당[2]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평화민주-통일민주-선진민주의 3당 합당으로 81년 5월 민주연합이 탄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권 민정당이 99석을 보유해 개헌안이 번번히 부결되었다. 무려 8월까지 3개월간 이런 부결정국이 이어졌는데, 부결정국을 끝낸 사건은 학생운동권의 8.28 건국대학교 항쟁이었다. 건국대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으로 잠시 억누른 국민적 불만이 폭발할 것 같은 조짐이 보이자 민정당 총재였던 노태우는 8.29 선언으로 민정당도 적극적으로 헌법개정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3] 결국 9월 권력분립을 바탕으로하는 새 헌법안이 확정되었다. 10월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되었는데, 전두환은 돌연 11월 3일 신헌법 시행을 임기에 걸쳐서 순차적으로 하겠다고 통보했다. 11.3 호헌조치가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새헌법 이행 시위가 시작되었다.

전두환이 새헌법 시행을 순차적으로 하자고 한 목적은 당연하게도 민주화의 저지 또는 지연에 있었지만, 명분은 미약하긴 했지만 존재했다. 새 헌법은 권력기관 간의 견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여러 헌법기관이 추가되고, 여러가지 권한이 조정되는데 아직 이것을 시행하기에 마땅한 인프라가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주장은 야권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야권이 무언가를 따로 조치할 수도 없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전두환의 새헌법 시행계획에 따르면 1982년 상원 선거, 84년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와 상원 개선, 새헌법 기반 85년 국회의원 선거, 새헌법 기반 86년 대통령 선거와 상원 개선 이후 헌법재판소, 감사원, 대법원 등 기관들도 새헌법에 맞춰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민주연합은 헌법시행 지연에 분개했지만, 전두환이 역사상 최저 득표율이었다고는 하나 직선제 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도 어려웠다. 당시에도 탄핵이라는 수단은 존재했지만 일단 의석수가 부족하고, 헌법위원회라는 기구에서 대통령 탄핵을 결정하는데 사실상 탄핵이 인정되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도권 야당이 행동을 밍기적대기 시작하자 불만은 운동권에서 폭발했다. 1982년 5.3 인천민주항쟁이 발생해 국회의원들에게 전두환 대통령의 탄핵과 새헌법 즉각 시행을 요구했다. 이러한 시위는 6월부터 전국적으로 벌어져 6월 민주항쟁이라는 파도로 뒤덮였고, 11월 새헌법에 따른 첫 선거인 상원의원 선거까지 이어졌다. 6월 민주항쟁 당시 제도권 야당과 운동권의 논쟁은 격렬했는데, 가장 중요한 토론이 YS와 DJ가 참여한 양김 대담이었다.

YS는 탄핵은 가결된 신헌법에선 아직 구성되지 않은 헌법재판소가, 불법적이지만 이미 시행 중인 구헌법에선 헌법위원회에서 담당하는데 정치체제가 바뀌는 과도기에 있어 직선제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같은 정치적 결정을 섣부르게 내린다면 정치적 무질서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DJ는 새헌법 시행은 당연하지만 일반 대중의 힘으로 압박했다가는 생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군사정권이 혼란과 무질서를 핑계로 언제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해 헌법을 정지시키고 군정을 복귀시킬 수 있음을 우려했다. 제도야당은 모두 공통적으로 군이 절대로 다시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최소한의 명분조차 주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운동권에서는 납득하지 못했다. 당연한 것이 사실 신헌법 통과라는 것 자체도 건국대 항쟁으로 운동권이 압박을 통해 얻어낸 성과인데, 시행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믿으라니 그대로 믿을 수 없던 것이다. 9월 직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출범하고 10월 전대협 산하에 사회당을 두어 상원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사회당 결성 과정에서 구국의 강철대오라는 표어와는 다르게 내부적으로 논쟁이 끊이질 않았는데, 일단 사회당이라는 이름이 문제라는 주장부터 사회당이 전대협의 상위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 당과 전대협을 분리해야한다는 주장이 모두 쏟아져 나왔었다. 그러나 상원선에서 사회당이 제도권에 진출하지 못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은 흐지부지 되었다.

또 첫 상원선에서 민정당의 관권선거에도 민주연합이 역사적인 압승을 거둔 후 정국은 안정되기 시작했다. 특히 11.3 호헌조치로 알려진 내용이 당시 퍼질 때에는 신헌법을 부정한다는 말이 많아 전국적 시위까지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 신헌법에 따른 상원 선거가 관권선거긴 했지만 정상적으로 개최되자 헌법 시행에 대한 의구심이 어느정도 해소된 것이다. 민주연합은 어느정도 안정된 정국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대선 준비를 시작했다. 경선에서 이긴 쪽이 대권을, 진쪽이 공천권을 포함하는 당권을 가지기로 양김이 합의한 역사적 경선이 이루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영삼이 대선후보로 선출되면서, 김대중이 총재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후 질서가 확고해진 민주연합은 1985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전두환은 총선에서 참패한 것을 두고 국제그룹을 콕찝어 제재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12월 3일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민정당 혼자서는 국회의 4분의 1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두환은 탄핵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민주연합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군사정권이 지은 죄는 반드시 정권교체 이후 처벌받을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결국 12월 2일 군사정권국정조사위원회가 출범하자 다음날 저녁 사회악 일소와 공산주의 세력 격멸을 이유로 비상게엄을 선포한 것이다.

계엄사령부는 즉각 포고령을 발표하고 삼청교육대를 설치하고 야간통행을 금지시켰으며, 야당 국회의원들을 체포했다. 사실 신헌법에서 계엄의 선포에는 상원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했는데, 이미 상원이 구성된 상황이었으므로 계엄에 대한 사전 동의권도 있다고 보아야 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은 구 헌법 규정을 들먹이며 계엄의 선포를 정당화했다. 많은 정치인들이 삼청교육대로 연행되어 구타와 폭행을 당하고, 전향을 요구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1986년 1월 13일 운동권은 삼청동의 구금시설을 습격해 정치인들을 풀어줬다. 이 때문에 계엄 하의 경찰의 수사는 더욱 강도가 높아졌으며,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1월 19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며 군사정권의 탄압의 강도는 높아져만 갔다.

숨어다니며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국회의원들은 5월 20일 여의도 아스팔트 한복판에 집결해 국회의원들이 있는 곳이 곧 국회임을 선언하고,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새헌법을 시행하고 반드시 군사정권을 단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후 운동권뿐만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함께 천막국회에서의 농성이 시작된다. 이를 천막국회의 맹세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천막으로 이루어진 허접한 공간은 아니었고 차량과 바리케이트를 통해 방어력을 갖추었다. 계엄군이 천막국회의를 에워싸고 진압하려고 했지만, 여의도에 주재하는 외신이 너무 많은데다가 미국도 한국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주한미국대사가 전두환 대통령을 예방하는 등 일방적으로 진압하는 것은 어려웠다.

천막국회가 언론에 생중계되면서 6월 초 전국적인 계엄철폐 요구 및 반독재 시위가 발생, 9일 이한열 열사가 계엄군의 최루탄에 피격돼 중태에 빠진다. 시위는 격화되었으며, 결국 진압을 위해선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날 위기에 처하자 1986년 6월 29일 전두환 대통령이 계엄 해제를 선언하고 시위의 중단 및 일상으로의 복귀를 천명했다. 계엄 해제를 기점으로 정부에 대한 지지는 사실상 붕괴해, 1986년 상원선과 대선을 민주연합이 압승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7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신헌법 완전 시행을 공포하며, 군사정권은 막을 내린다.

이후 김영삼은 5월 15일 하나회 해체하고 군내 사조직을 철폐했으며, 군사독재청산특별법 제정해 군사독재 부역 및 가담자에 대한 공소시효를 철폐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재판에 불려나갔으며, 여기에는 박정희와 전두환, 김종필과 노태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법원은 1990년 말 크게 5.16, 유신, 12.3 비상계엄에 대해 판단했다. 박정희는 5.16, 유신 모두 유죄가 인정되었으나 5.16은 경제적 빈곤 탈피에 성공시켰다는 이유로 집행유예가 나왔다. 유신은 내란으로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1991년 초 김영삼에 의해 사면되었다. 김종필은 5.16 유죄, 유신 무죄, 노태우는 전부 무죄, 전두환은 계엄이 내란으로 인정되어 유죄, 게다가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국민통합을 이유로 김영삼 대통령이 1992년 8월 사면했다.[4]

각주

  1. 5.16 군사정변 당시 주역들이나 박정희에게 내쳐진 사람들이 주축이 된 정당이다.
  2. 80년 대선에서 DJ와 YS가 반목하여 전두환이 어부지리로 당선되는 것을 보고 이회창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한 정당이다. 황해도 지역 정당인데, 당세는 어느정도 있는 편이었으나 이회창 입당 후 당을 주도하여 확실한 텃밭을 만들어냈다.
  3. 특히 전두환 정부는 1987년 2월까지 임기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 5년이나 정국을 주도했어야 했기 때문에, 이른 시점에 정부가 붕괴되거나 군을 동원하는 총제적 무질서 상태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했다. 전두환 자신의 의사는 차치하고, 노태우는 전두환 다음 순번이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두환의 진압 계획을 만류했다.
  4. 당시 민주자유당으로 민정당과 합쳐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군사독재 시절 지지자들을 얻기 위한 조치로 크게 비판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