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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대 수상
박헌영
朴憲永 | Park Hôn-yông
출생 1900년 6월 28일
충남 예산
국적 대한제국 → 중화민국 → 소련 → 북한 → 프랑스
사망 1993년 6월 29일 (향년 93세)
프랑스 파리
직업 정치인
임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1948년 9월 ~ 1951년 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대 수상
1951년 2월 ~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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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국제레닌학교
종교 무종교 (국가무신론) → ???[1]
신체 161cm
소속 정당 무소속[2]
성향 극좌[3] → 중도 좌파 ~ 좌익[4]


개요

박헌영, 뭔가 잘못 배운 새끼다. [1]

공산주의 사상가,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연변 정권의 정치인, 독재자.

생애

(광복 이전 행적 생략)

북한에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주로 38선 이남에서 활동하며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행동을 함께했다.  박헌영은 여운형의 요청으로 건준에 합류하였으며 초기 중도 성향을 띄던 건준을 좌경화시킨다.  이 일로 인해 박헌영은 여운형과 절교하게되고 미군정이 좌익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서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세력은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다.

북한 정권에서 수상 김일성에 이어 2인자인 부수상이 된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공하자고 부추긴다.  솔깃해진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도움을 받아 남한을 침공했지만 오히려 역공을 받아 평양까지 함락된다.  강계로 피난을 간 박헌영 등의 북한 지도부는 중공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뒤집히자 권력투쟁을 개시한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고 했으나 박헌영은 이미 연안파 등 다른 계파들과 교섭을 끝내놓은 상태였고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역공을 가하였다.  게다가 소련 군사고문단이 본국에 김일성이 군사적으로 매우 무능하다고 보고하여 소련 당국도 김일성을 고깝게 보고있었고 최용건 등 일부 만주파마저 김일성을 떠나면서 김일성은 실각한다.[5]

김일성의 실각 후 박헌영이 북한의 2대 수상에 취임했지만 중공군의 수뇌부가 연합군의 폭격에 전멸 각개격파 당하면서, 중공 인민지원군 신임 총사령원 예진잉이 박헌영의 취임 이틀 만에 북한 측에 압록강 이북 철수를 통보했다.  박헌영은 노발대발하였으나 이미 중공 당국은 인민지원군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유엔군 사령부와 밀약까지 맺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중공 측도 북한을 완전히 버리기는 싫었기에 박헌영과 북한 수뇌부가 일부 주민들과 함께 중공령으로 망명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고 박헌영은 50만 명의 주민들을 이끌고 연변으로 이동한다.

연변에서

수상집무실에서의 박헌영 (1962)

연변으로 온 북한 정부는 자치권을 부여받았고 그 덕에 박헌영은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1952년, 박헌영은 신년사를 통해 정권의 목표를 본토 수복 및 해방으로 정하고 그를 위한 국력 배양에 집중할 것을 천명한다.  박헌영은 한국에 계속해서 무장공비를 파견해 테러를 벌이는 한편, 교과서적인 사회주의 경제 개발 정책을 수행한다.  하지만 한국과의 국력 차이는 계속해서 벌어졌고 한국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서서히 개선되는 것을 본 박헌영은 노선을 변경한다.  농민들에게 수확물을 일정 비율로 가지는 것을 허락하거나 기업소에 일부 자율성을 부과하는 등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정책을 시행한 것.  1966년에는 이러한 종류의 개혁을 헌법에 명시한 일명 '박헌영 헌법'을 제정한다.

하지만 1968년, 이러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실각했고 연변에서 추방당한다.[6]  소련의 도움으로 박헌영은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건너왔으나 소련에서 살라는 소련 정부의 제안을 거부하고 프랑스로 망명한다.

프랑스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박헌영과 그 가족은 프랑스 공산당의 도움으로 프랑스에 정착한다.  박헌영은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공산당 기관지에 여러 칼럼을 썼다.  하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어 프랑스 공산당이 온건화되자 박헌영은 공산당 좌파와 함께 탈당, 노동자투쟁당을 창당하여 지도부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지나면서 박헌영은 당 지도부와 점점 거리를 두었고 급기야 1980년 노동자투쟁당을 탈당한다.  이후 프랑스 공산당이나 프랑스 사회당 후보의 유세 현장에서 목격되었었다는 증언을 보면 중도좌파로 전향한듯 하다.  1982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전쟁을 일으킨 것을 후회하며 그 희생자들에게 참회하며 살고있다고 밝혔다. 운명의 장난인지 박헌영은 엄청난 장수를 누려 자신이 한때 그토록 좋아하던 소련이 붕괴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소련이 붕괴하자 프랑스 유명 주간지에 《민주집중제적 사회주의의 종말》이라는 칼럼을 써 의회민주주의를 강력히 긍정했다.  1993년 지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묘지는 프랑스 모처에 있다고 한다.

어록

쾌변전사가 되시오. 자랑스런 쾌변전사 말이오. [2]
니체 선생께서 말씀하셨소. "심영을 오랫동안 들여다 본다면 심영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 것이다." 알겠소? 흠흠흠... [3]

소속 정당

선거 이력

각주

  1. 프랑스 망명 이후 말년에 종종 성당의 새벽 미사에 참석한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몇 있지만 불확실.
  2. 프랑스 망명 이후 프랑스 공산당, 프랑스 노동자투쟁당 등에 몸담았으나 1980년에 당적을 모두 정리했다.
  3. 공산주의, 맑스-레닌주의, 인민민주주의
  4. 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유럽공산주의, 세속주의, 의회민주주의
  5. 이 이후 김일성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것을 보아 김일성은 실각 직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6. 오히려 이것이 그에게는 행운이 됐다.  2년 후 동아시아 전쟁이 일어나면서 박헌영을 몰아낸 연변의 권력자들은 대부분 형장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