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민공화국 (민국 38):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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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전쟁북일본군.png|섬네일|왼쪽|일본 전쟁 당시 일본 인민군 (북일본군)]] 1948년 남북일본에 각각 자본주의 정부와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초반에는 양일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으나 냉전체제로의 돌입과 남일본의 반공선언 이후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한국 내전당시 북일본이 조공쪽으로 의용군을 파견하고 무기를 지원하자 제1세계 국가들과의 관계는 최악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편 36선 주위에서는 지속적으로 국지전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1951년 어느 날 그 동안의 국지전과는 다른, 양국간의 전면 충돌이 일어난다. 이 사건의 남북 일본 양국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은 현대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작은 국지전은 전면전으로 번지게 되었고 수십명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북일본은 이 사건과 그간 남일본 정부의 공산당원 탄압을 빌미로 1951년 4월 16일에 남일본을 전면 침공하니, 바로 3년간의 일본전쟁의 시작이였다. 초반에는 북일본이 36선 이남으로 남하하여 도쿄 전체를 장악하고 지속적으로 남하하여 남일본을 주시 라인(中西ライン, 중서 라인)<ref>주코쿠(中国) - 시코쿠(西国) 라인</ref>까지 밀어부쳤으며 주코쿠 일대로 남하하기 시작하자 일본 전역의 공산화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규슈와 시코쿠 일대의 바다지역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고 맥아더 장군의 시즈오카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는 교토, 오사카, '''도쿄'''등의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고 니카타, 후쿠시마, 야마가타 일대를 점령하기 시작하며 도호쿠 일대를 점령하기 시작하자 북일본 정부는 급하게 삿포로로 정부를 옮기고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결국 1952년 9월경부터 소련군이 대규모로 남하하여 다시 남일본군이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36선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접전을 이어나갔다. 결국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되는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전세계에서 나오자, 이탈리아와 멕시코 그리고 핀란드의 중재로 현재의 국경을 확정짓고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파일:북일본전후복구.png|섬네일|오른쪽|전후복구시기 북일본의 공장]]전쟁은 남북 일본 양국에 모두 큰 피해를 입혔으며 특히 도호쿠 - 홋카이도 일대의 주요 계층인 농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북일본 정부는 소련등 공산권의 지원을 받아 빠른 경제복구를 실시하였다. 또한 전후 복구와 함께 집단농장화도 시행되었는데 원래같았으면 반발이 매우 심했어야 했으나 오랜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농민들은 그저 무력하게 정부 시책에 협조할 뿐이였다. 그렇게 북일본은 차츰차츰 전후 복구의 길을 밟아나갔다. 60년대 들어서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권 일부로 편입된 북일본은 경공업 우선주의와 농업을 밀어주며 지속적으로 경제 성장의 길을 밟아갔다. 그러나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소련이 탱크로 무자비하게 깔아뭉게자 북일본은 소련을 비난하였으며 이때부터 소련과의 관계에 금이가게 된다. 노사카 산조 이후 제2대 국가주석에 취임한 미야모토 겐지는 탈소친미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후 구유고 연방과 함께 제3세계에 한축을 담당하게 된다. 70년대 초중반부터는 중공업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 부터 탈냉전 기류가 불기 시작했고 북일본은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1987년 소련에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동구권에도 혁명이 일어나며 공산정권이 연달아 붕괴되었다. 또한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1993년 민주혁명으로 신연방조약이 체결되자 북일본에도 혁명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파일:일본전쟁북일본군.png|섬네일|왼쪽|일본 전쟁 당시 일본 인민군 (북일본군)]] 1948년 남북일본에 각각 자본주의 정부와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초반에는 양일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으나 냉전체제로의 돌입과 남일본의 반공선언 이후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한국 내전당시 북일본이 조공쪽으로 의용군을 파견하고 무기를 지원하자 제1세계 국가들과의 관계는 최악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편 36선 주위에서는 지속적으로 국지전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1951년 어느 날 그 동안의 국지전과는 다른, 양국간의 전면 충돌이 일어난다. 이 사건의 남북 일본 양국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은 현대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작은 국지전은 전면전으로 번지게 되었고 수십명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북일본은 이 사건과 그간 남일본 정부의 공산당원 탄압을 빌미로 1951년 4월 16일에 남일본을 전면 침공하니, 바로 3년간의 일본전쟁의 시작이였다. 초반에는 북일본이 36선 이남으로 남하하여 도쿄 전체를 장악하고 지속적으로 남하하여 남일본을 주시 라인(中西ライン, 중서 라인)<ref>주코쿠(中国) - 시코쿠(西国) 라인</ref>까지 밀어부쳤으며 주코쿠 일대로 남하하기 시작하자 일본 전역의 공산화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규슈와 시코쿠 일대의 바다지역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고 맥아더 장군의 시즈오카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는 교토, 오사카, '''도쿄'''등의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고 니카타, 후쿠시마, 야마가타 일대를 점령하기 시작하며 도호쿠 일대를 점령하기 시작하자 북일본 정부는 급하게 삿포로로 정부를 옮기고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결국 1952년 9월경부터 소련군이 대규모로 남하하여 다시 남일본군이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36선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접전을 이어나갔다. 결국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되는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전세계에서 나오자, 이탈리아와 멕시코 그리고 핀란드의 중재로 현재의 국경을 확정짓고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파일:북일본전후복구.png|섬네일|오른쪽|전후복구시기 북일본의 공장]]전쟁은 남북 일본 양국에 모두 큰 피해를 입혔으며 특히 도호쿠 - 홋카이도 일대의 주요 계층인 농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북일본 정부는 소련등 공산권의 지원을 받아 빠른 경제복구를 실시하였다. 또한 전후 복구와 함께 집단농장화도 시행되었는데 원래같았으면 반발이 매우 심했어야 했으나 오랜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농민들은 그저 무력하게 정부 시책에 협조할 뿐이였다. 그렇게 북일본은 차츰차츰 전후 복구의 길을 밟아나갔다. 60년대 들어서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권 일부로 편입된 북일본은 경공업 우선주의와 농업을 밀어주며 지속적으로 경제 성장의 길을 밟아갔다. 그러나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소련이 탱크로 무자비하게 깔아뭉게자 북일본은 소련을 비난하였으며 이때부터 소련과의 관계에 금이가게 된다. 노사카 산조 이후 제2대 국가주석에 취임한 미야모토 겐지는 탈소친미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후 구유고 연방과 함께 제3세계에 한축을 담당하게 된다. 70년대 초중반부터는 중공업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 부터 탈냉전 기류가 불기 시작했고 북일본은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1987년 소련에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동구권에도 혁명이 일어나며 공산정권이 연달아 붕괴되었다. 또한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1993년 민주혁명으로 신연방조약이 체결되자 북일본에도 혁명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민주화와 신민주주의 선언 그리고 현재===
===민주화와 신민주주의 선언 그리고 현재===
[[파일:북일본혁명.png|섬네일|왼쪽|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북일본 시민들]]1993년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공식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헌법에서 삭제했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일본은 이제 거대한 변혁의 물결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시 제5대 주석으로 부임하고 있던 후와 데쓰조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여러가지 개혁을 진행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일본의 경제상황은 말도 아니였고 현실사회주의를 내새우는 보수파의 세력또한 건제한 상태였다. 한편 이 당시 남북 일본간의 국경 왕래와 관련된 협정이 진행 중이였는데 분단된 도쿄 비무장 지대에서 협상이 진행 중이였다. 당시
[[파일:북일본혁명.png|섬네일|왼쪽|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북일본 시민들]]1993년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공식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헌법에서 삭제했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일본은 이제 거대한 변혁의 물결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시 제5대 주석으로 부임하고 있던 후와 데쓰조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여러가지 개혁을 진행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일본의 경제상황은 말도 아니였고 현실사회주의를 내새우는 보수파의 세력또한 건제한 상태였으며 그런 이유로 개혁 개방등을 주장하는 시위는 번번히 실패하는 상황이였다. 한편 이 당시 남북 일본간의 국경 왕래와 관련된 협정이 진행 중이였는데 분단된 도쿄 비무장 지대에서 협상이 진행 중이였다. 그런 이유로 국내외의 모든 언론사의 시선이 도쿄와 북일본으로 쏠려있었으며 북일본 정권은 외신에 '최후의 공산국가'라는 경직된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어용 노조의 노동자들 동원하여 작은 시위나 집회를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북일본이 독재국가가 아닌 자유로운 국가임을 강조하려 했다. 그렇게 어용 관제시위가 벌어지던 도쿄의 거리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온다. {{인용문1|호헌쟁취! 독제타도!, 자유쟁취! 천멸공산!<ref>원문 : 護憲争取!毒帝打倒!、自由争取! 天滅共産!</ref>|9월 11일 북도쿄 군사특별구 중앙광장에서 어느 노동자의 외침}}
==각주==
==각주==

2021년 7월 26일 (월) 13:08 판

[ 국가 목록 ]
[ 세계관 소개 ]
[ 문서 목록 ]


민국 38(民國三十八)은 가장 대표적인 대체역사 소재 중 하나인 중화민국국공내전 승리를 가정한 세계관 입니다.
민국 38년(1949년) 중화민국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변화한 여러 정치, 사회, 문화,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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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민공화국
日本人民共和国
국기 국장
万国の労働者よ、団結せよ!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상징
국가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 [1]
국화
동백꽃
위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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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군의 점령 1945년 9월 2일
  • 북일본 인민위원회 수립 1946년 7월 11일
  • 일본인민공화국 헌법 공포 1948년 5월 1일
  • 일본인민공화국 헌법 시행 1948년 11월 1일
  • 국권회복 1952년 4월 28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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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센다이시
최대 도시
삿포로시
면적
199,849㎢
내수면 비율
0.8%
접경국
남일본[1], 유라시아 연합 (해상 국경)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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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61,896,655명
밀도
309명/km2
민족 구성
일본인 (야마토 민족) 98%, , 기타 2%
출산율
1.47명
평균 수명
71.34세
기대 수명
71.34세
공용어
일본어
공용 문자
한자, 가나문자
종교
국교
없음
분포
불교 4%, 개신교 1%, 무종교 95%
군대
일본 인민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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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 현, 1개 특별구 (북도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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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민주집중제, 단원제, 단일국가, 공화제, 대륙법계
민주주의 지수
167개국 중 113위 (권위주의 체제)
국가 원수 (국가주석)
시이 가즈오
정부
요인
국무원 총리
고이케 아키라
최고인민회의 의장
아카미네 세이켄
여당
일본 사회주의 연합 노동자당
원내 야당
신사회당, 민주국민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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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부분적 시장경제 도입)
GDP
(PPP)
전체 GDP
$1,419억
1인당 GDP
$20,545
GDP
(명목)
전체 GDP
$604억
1인당 GDP
$8,748
신용 등급
무디스 Caa1
S&P B
Fitch B
화폐
공식 화폐
일본인민공화국 엔
ISO 4217
PJY, ¥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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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9 (일본 표준시)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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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미수교국
UN 가입
1956년
주한대사관
공식 대사관 없음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49 광화문 빌딩 6층
(대표부)
ccTLD
.rj
국가 코드
396, PRJ, RJ
전화 코드
+84

개요

일본인민공화국(日本人民共和国) 혹은 줄여서 북일본(北日本)은 동아시아에 일본 열도 북부에 위치해 있는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1945년 9월 2일 소련군의 점령 이후 분단된 이후 일본인민공화국 헌법이 1947년 1월 1일 공포되었으며 1951년 일본전쟁을 일으켜 일본 통일을 도모했으나 실패하였다. 89년 동구권 혁명 이후 개혁 개방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도입하였으며 2018년 개헌으로 민주주의에 한발자국 더 다가갔다고 평가받고 있다. 현임 국가원수는 국가주석인 시이 가즈오이며 국무원 총리는 고이케 아키라이다.

북일본의 수도인 센다이시
북일본 홋카이도의 삿포로시

국가상징

국명

공식적인 국호는 일본인민공화국 (日本人民共和国, にほんじんみんきょうわこく)이며 주로 북일본 (北日本, きたにほん)으로 불린다. 현재 북일본은 구 동독처럼 공식적으로 자국을 남일본 (일본국)과 분리된 별도의 사회주의 국가로 보는 시선이 강하기 때문에 자국을 정식명칭인 일본인민공화국이나 영어 약칭인 PRJ로 부르지 '일본의 일부'라는 뉘앙스가 담긴 북일본이라는 용어는 일상에서 조차도 잘쓰이지 않는다. 한편 남일본에서는 공식적으로 북일본을 자국의 일부로 취급하므로 공식적으로는 '북부 미수복지구', 북일본 정부를 '미수복 지구 점령 단체'라고 지칭하나 민간에서는 보통 북일본이라고 부른다.

국기


인민공화기
人民共和旗
지위 공식 국기
채택일 1948년 7월 10일
근거 법령 일본인민공화국 헌법 제171조
비율 3:2

북일본의 국기는 인민공화기이며 소련 점령기인 48년에 제정되었다. 이전까지는 소련의 낫과 망치나 상선기인 E 신호기를 사용하였으며 일장기는 점령과 동시에 제국주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고 군정당국이 폐지되었다. 주로 기존의 국기에 국장을 더한 깃발을 사용하던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나[2] 일장기와 E 신호기를 더한 깃발을 사용하는 남일본과 달리 아예 새로운 국기를 만들었다. 붉은색은 사회주의, 혁명을 상징하며 노란색은 북일본이라는 국가와 북일본 인민을 의미한다. 중앙에 위치한 오각별의 오각은 각각 공산당[3], 농민, 노동자, 군인, 지식인을 상징하며 톱니바퀴는 공업을 상징한다.

국장


일본인민공화국의 국장
日本人民共和国の国章
지위 공식 국기
채택일 2021년 7월 3일
근거 법령 일본인민공화국 헌법 제171조
사용처
  • 국가기관
  • 국가문서
  • 여권
  • 훈장
  • 해외공관

북일본의 국장은 2021년 7월 3일에 제정되었으며 사회주의 국장 형식을 하고있는 대표적인 국장이다. 양옆의 벼는 농업을 상징하고, 낫과 망치는 사회주의를, 별은 혁명을 상징하며 하단의 태양은 인민과 당을 상징한다. 2021년 국장 변경이전 국장은붉은 바탕에 후지산이 있고 뒤에 노란 태양이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후지산이 국장에 들어간 이유는 93년 헌법 변경 이전 일본통일, 하나의 일본 원칙을 명기했던 시기에 제정되었고 후지산은 남일본에 위치하기 때문에 국장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북일본에서 높아졌으며 2021년 5월 2일에는 시이 가즈오 국가주석은 이 문제를 인민투표에 붙이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결국 5월 13일 인민투표가 진행되어 찬성 91%, 반대 7%, 기권/무효 2%로 통과되었고, 공모전이 진행되어 가장 높은 지지를 보인 현행 국장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국가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
聞け、万国の労働者

지위 공식 국가
채택일 1948년 7월 10일

북일본의 국가는 들어라 만국의 노동자라는 곡으로 보통은 별칭인 메이데이가 (メーデー歌)로 더 자주 불린다. 원곡은 구 일본의 군가였던 보병의 본령이란 곡으로 남일본 국방군에서도 군가로 사용되지만 현재에는 북일본의 영향으로 잘 불리지 않는다.

역사

일본 패망 직후

북일본 정권수립 당시 기념사진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하고 남하를 시작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사할린 일대와 훗카이도를 점령했고 이후 도호쿠 일대의 통제권을 쥐게 되었다. 일본의 항복선언 직후 북부를 점령한 소련군과 남부를 점령한 미군은 합의끝에 북위 36도선을 기준으로 하는 일본 분할을 결의했다.[4]북부를 점령한 소련은 원래 남사할린과 홋카이도 일대를 그대로 병합하려 했으나 일본인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결국 남사할린을 제외한 자신들의 점령지 일대에 괴뢰국 건설을 계획했다. 한편 당시 일본 공산당은 연합군, 특히 소련군이 일본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에 대환영을 하였고 즉시 일본인민공화국 헌법 초안과 통일민주정부 수립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남일본에서의 공산당 활동에 재재를 가하고 급기야 천황제 존치를 결정하자 공산당은 반발하여 도쿄 일대에서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빌미로 행정명령 제134호를 통해 남일본에서의 공산당 활동을 금지시켰다. 결국 남일본에서의 공산당 활동이 대대적인 탄압을 받에 괴멸 위기에 몰리자 공산당 인원들은 대규모로 월북해버렸다. 그리고 소련과 합의하에 기존 일본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수정하여 독자 헌법을 제정하고 국기, 국장등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국제연합은 일본에 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하였으나 소련과 공산당내 상당수 인원이 통일에 반대하여 결국 남일본에서만 총선거가 진행되고 정부가 수립되자 북일본에서도 1948년 11월 1일에 북일본 정권이 수립되기에 이른다.

일본 전쟁과 냉전시기

일본 전쟁 당시 일본 인민군 (북일본군)

1948년 남북일본에 각각 자본주의 정부와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초반에는 양일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으나 냉전체제로의 돌입과 남일본의 반공선언 이후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한국 내전당시 북일본이 조공쪽으로 의용군을 파견하고 무기를 지원하자 제1세계 국가들과의 관계는 최악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편 36선 주위에서는 지속적으로 국지전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1951년 어느 날 그 동안의 국지전과는 다른, 양국간의 전면 충돌이 일어난다. 이 사건의 남북 일본 양국의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은 현대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작은 국지전은 전면전으로 번지게 되었고 수십명 단위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북일본은 이 사건과 그간 남일본 정부의 공산당원 탄압을 빌미로 1951년 4월 16일에 남일본을 전면 침공하니, 바로 3년간의 일본전쟁의 시작이였다. 초반에는 북일본이 36선 이남으로 남하하여 도쿄 전체를 장악하고 지속적으로 남하하여 남일본을 주시 라인(中西ライン, 중서 라인)[5]까지 밀어부쳤으며 주코쿠 일대로 남하하기 시작하자 일본 전역의 공산화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규슈와 시코쿠 일대의 바다지역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고 맥아더 장군의 시즈오카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는 교토, 오사카, 도쿄등의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고 니카타, 후쿠시마, 야마가타 일대를 점령하기 시작하며 도호쿠 일대를 점령하기 시작하자 북일본 정부는 급하게 삿포로로 정부를 옮기고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결국 1952년 9월경부터 소련군이 대규모로 남하하여 다시 남일본군이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36선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접전을 이어나갔다. 결국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되는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전세계에서 나오자, 이탈리아와 멕시코 그리고 핀란드의 중재로 현재의 국경을 확정짓고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전후복구시기 북일본의 공장

전쟁은 남북 일본 양국에 모두 큰 피해를 입혔으며 특히 도호쿠 - 홋카이도 일대의 주요 계층인 농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북일본 정부는 소련등 공산권의 지원을 받아 빠른 경제복구를 실시하였다. 또한 전후 복구와 함께 집단농장화도 시행되었는데 원래같았으면 반발이 매우 심했어야 했으나 오랜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농민들은 그저 무력하게 정부 시책에 협조할 뿐이였다. 그렇게 북일본은 차츰차츰 전후 복구의 길을 밟아나갔다. 60년대 들어서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권 일부로 편입된 북일본은 경공업 우선주의와 농업을 밀어주며 지속적으로 경제 성장의 길을 밟아갔다. 그러나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소련이 탱크로 무자비하게 깔아뭉게자 북일본은 소련을 비난하였으며 이때부터 소련과의 관계에 금이가게 된다. 노사카 산조 이후 제2대 국가주석에 취임한 미야모토 겐지는 탈소친미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후 구유고 연방과 함께 제3세계에 한축을 담당하게 된다. 70년대 초중반부터는 중공업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 부터 탈냉전 기류가 불기 시작했고 북일본은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1987년 소련에 고르바초프가 집권하고 동구권에도 혁명이 일어나며 공산정권이 연달아 붕괴되었다. 또한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1993년 민주혁명으로 신연방조약이 체결되자 북일본에도 혁명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민주화와 신민주주의 선언 그리고 현재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북일본 시민들

1993년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공식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헌법에서 삭제했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공산주의 국가인 북일본은 이제 거대한 변혁의 물결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시 제5대 주석으로 부임하고 있던 후와 데쓰조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여러가지 개혁을 진행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일본의 경제상황은 말도 아니였고 현실사회주의를 내새우는 보수파의 세력또한 건제한 상태였으며 그런 이유로 개혁 개방등을 주장하는 시위는 번번히 실패하는 상황이였다. 한편 이 당시 남북 일본간의 국경 왕래와 관련된 협정이 진행 중이였는데 분단된 도쿄 비무장 지대에서 협상이 진행 중이였다. 그런 이유로 국내외의 모든 언론사의 시선이 도쿄와 북일본으로 쏠려있었으며 북일본 정권은 외신에 '최후의 공산국가'라는 경직된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어용 노조의 노동자들 동원하여 작은 시위나 집회를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북일본이 독재국가가 아닌 자유로운 국가임을 강조하려 했다. 그렇게 어용 관제시위가 벌어지던 도쿄의 거리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온다.

호헌쟁취! 독제타도!, 자유쟁취! 천멸공산![6]
9월 11일 북도쿄 군사특별구 중앙광장에서 어느 노동자의 외침

각주

  1. 남일본은 북일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나 북일본은 남일본을 국가로 인정한다
  2. 동독, 불가리아, 루마니아등
  3. 일본 사회주의 연합 노동자당
  4. 도쿄역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5. 주코쿠(中国) - 시코쿠(西国) 라인
  6. 원문 : 護憲争取!毒帝打倒!、自由争取! 天滅共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