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정치국민회의 (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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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국민회의
영문 명칭 National Congress for New Politics
등록약칭 국민회의
슬로건 다시, 김대중 정신으로
창당일 1982년 5월 6일 (민주연합)
당명변경 1992년 9월 30일 (새정치국민회의)
2008년 10월 26일 (민주당)
2013년 2월 23일 (국민의당)
이념 자유주의
보수자유주의
제3의 길
경제적 자유주의
자유보수주의
중도개혁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진보주의
스펙트럼 중도우파 ~ 중도좌파
출신 대통령 김대중 / 제12·13대(1993.02.25 ~ 2005.02.25)
의석 수 88석 / 300석 (29.3%)
상징색 청록(#00AA7B)

새정치국민회의(-政治國民會議)1992년 9월 30일, 민주연합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한 상도동계가 탈당한 이후 당명을 교체하여 새로 출범한 정당으로, 보통 국민회의로 불린다. 다만 2007년과 2008년의 참패 이후 정당 이미지 쇄신을 위해 이름을 민주당으로 바꿨었다.

한국의 정당 중 가장 오래된 정당이다. 두 번째는 1991년 창당된 민주자유당의 후신이자 현재 집권당인 새한국당이다. 한국 역사상 ~당으로 끝나지 않고 대통령 당선자를 배출한 유일한 정당이다.

이 문서는 1992년부터 2008년 사이, 즉 당명이 새정치국민회의였던 시절의 내용을 기록한다. 그 이전은 민주연합, 이후는 민주당 참조.

역사

당명 변경과 12대 대선

1992년 4월의 14대 총선 이후 6월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재선 도전 선언은 민주연합 내에서 굉장한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김대중이 경선에서 승리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상도동계를 이끌고 탈당해 민주정의당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차려 대선에 출마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연합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출마하기에는 연합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김대중은 당명을 새정치국민회의로 변경하고 대선에 임했다.[1]

당명 변경 당시 민주연합의 적지 않은 PK 의원들이 김대중 대통령에 대의가 있다고 보고 민주연합에 남았다. 1992년 9월 30일 당 대변인은 민주연합의 새 당명을 「새정치국민회의」로 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약칭으로는 새정치가 아닌 국민회의를 고집했는데, 대변인은 국민회의에 여러 의견을 포용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겠다는 의지라고 설명했었다.

광복절 행사에서 함께 의례 중인 불편한 표정의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

국민회의는 대선을 앞두고 중소기업의 육성, 국가보안법의 국가안전보장법으로의 대체, 첨단 산업의 지원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사실 김영삼 대통령이 재선 출마 선언을 하기 전 상황은 말 그대로 DJ 1강 체제였다. 정주영과 김종필의 통일국민당은 20%에 가까운 지지를 보여줬지만, 야당인 민주정의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인 노태우 총재는 10%대 초반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김대중은 혼자서 40%가 넘는 지지를 받았다.

김영삼 대통령의 출마 선언 이후에는 YS, DJ, 정주영의 3중, 노태우의 1약으로 굳어졌다. 그러다 경선 직후 DJ로 표가 몰렸지만 YS가 탈당하고 민주정의당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차리고 대선후보로 확정되면서 YS, DJ의 2강으로 선거 구도가 굳어졌다. 정주영도 나름 선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민주화 시대의 별 앞에서는 무력했다. 결국 본선에서 김대중이 46.2%를 득표하며 새정치국민회의는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이후 1993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공식 취임하면서 여당이 되었다.

DJP 연합

12대 대선 과정에서 정주영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대선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후 통일국민당은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종필은 통일국민당 의원들을 잡아두기에 큰 메리트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당내 지도력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미지 쇄신을 위해 진행한 신정치개혁당과의 합당은 오히려 의원들의 없던 단결력 마저 와해시켜버렸다. 이 합당으로 창설된 자유민주연합의 시작은 미약했다. 이후 민주자유당이 이름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2] 외연확장을 시도하자 속절없이 의원들을 잃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종필 총재를 만나 DJP연합을 제안했다. 요지는 국무총리에 김종필을 지명할테니, 자민련이 국민회의의 연립여당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김대중은 연립여당이 되면, 자민련이 국민회의보다 우위가 되는 지역구에는 총선이나 지선을 가리지 않고 공천하지 않겠다며 JP의 당내 장악력 또한 확보해 주었다. 이런 조치는 국민회의 내에서 불만을 낳긴 했지만, 많은 의원들이 김대중 대통령의 뜻에 묵묵히 따랐다.

1994년 6월의 4회 지방선거는 DJP 연합이 결성된 직후, 즉 집권 1년만에 치러진 선거이다. DJP 연합은 굉장했다. JP의 힘은 충청권과 TK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신한국당은 찍고 싶지 않은데, 국민회의를 찍기에는 꺼려지는 유권자들의 표를 굉장히 많이 받아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지선의 2년 후인 1996년의 15대 총선에서 이러한 경향을 확실히 볼 수 있는데, 자민련이 무려 72석을 확보하며 국민회의의 99석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수준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 경쟁우위공천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면 자민련은 40석도 되지 않는 의석만을 확보했을 것이다.

DJP 연합의 끝, 13대 대선

1990년대의 경제적 호황은 98년 대선까지의 여정을 순탄하게 만들었다. 김대중은 집권 내내 높은 인기 때문에 기자들에게 차기 대선에 출마할거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지금은 국정에 집중하고 싶다거나 차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대답하며 번번히 직접 언급을 피했다. 특히 98년 초에 들어서면서는 대선에 출마할 의지가 없는 것을 보여줬다. 겉으로는 이렇게 연막을 친 김대중 대통령이었지만, 물밑에서는 누구보다 차기 대선에 출마하기 위한 명분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김대중은 7월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김종필은 격분했고, 국무총리 자리에서 즉시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3]

광복절 축하연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어색한 표정으로 잔을 나누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종필은 연일 김대중을 비난했으며, 자민련에서는 김종필을 대권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종필이 대권후보로 공식적으로 출마하기 전에 그를 막아야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8월 15일, 광복절 행사에서 그를 독대했다. 독대 직후 김종필은 기자회견을 열고 자민련 대선후보로 출마할 생각이 없음을 밝히며 자신은 계속해서 김대중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4] JP의 영향력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자민련 인사들은 JP를 찾아가 이유를 물으려고 했지만, 김종필은 사저에서 그들을 맞이하지 않았다. 자민련 소속 의원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버려졌음을 직감했고, 살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8월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가 자민련으로 이동해 자신이 대선후보로 나가겠다고 하자 즉시 이인제를 대선후보로 추대했다. 이인제는 당시 신한국당 경선 후보자들 중에서 가장 신선한 이미지가 강했고, 당시 신한국당 경선 진행 당시 터져나온 이회창 후보의 일명 "병풍 사건"이 있었음에도 이회창 후보가 경선 후보자로 선택되자 김대중에 대항할 후보로 이회창이 부적합하다는 여론이 많았었는데, 이인제는 이런 표심을 노리고 자민련으로 이동한 것이다. 실제로 98년 10월 여론조사에 국민회의 김대중 40%, 자민련 이인제 30%, 신한국 이회창 20%였다. 게다가 15대 국회는 유례없이 권력이 균등하게 분배된 형태였기 때문에 자민련이 여당이 되더라도 국정수행에 전혀 문제가 없을 수준이었으므로, 김대중 정부의 유일한 대항마라는 컨셉으로 선거운동을 진행중이던 이회창 후보의 경쟁력은 더욱 떨어졌다.

이인제는 후보 선출 이후 직접 JP를 찾아갔지만 5분 정도의 짧은 만남밖에 가질 수 없었고, 자민련 지지층은 이인제를 지지해야할지 정권교체를 위해 이회창을 지지해야할지, 그도 아니면 JP와 TJ를 따라 김대중 대통령을 지지해야할지로 분열되었다. 게다가 이 시기 신한국당의 정신적 지주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회창이 아닌 이인제를 지지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PK에서 이회창의 지지는 더욱 낮아졌다. 이는 96년 총선 당시의 지지 경향과 정반대의 현상이었는데, 총선 당시에는 JP의 영향력으로 TK에서 자민련이 우세했고 PK에서는 힘을 아예 쓰지 못했던 반면, 98년 대선을 앞두고는 YS의 영향력으로 PK에서 자민련이 우세하고 TK에서는 자민련의 선명성이 문제로 거론되며 지지가 부실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1998년 대선은 김대중의 재선으로 마감됐다. 이회창은 본선이 가까워지며 지지율이 다시 상승해 최종 2위의 성적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12대 대선은 JP의 잠정적인 정계은퇴와 자민련 쇠퇴의 시작이었다.

개헌 파동

1998년의 대선은 김대중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직 문제가 남아있었다. 바로 299명의 국회의원 중 200명, 즉 3분의 2가 야당 의원이었다는 것이다. 야권의 힘은 굉장히 강해서, 대통령의 법률안거부권을 무시하고 각종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이런 입법 사례 중 하나가 1999년 후반기 정국을 지배한 개헌 파동이다. 당시 자민련 의원들은 대선 패배 직후부터 김대중 정부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신한국당 의원들도 별로 문제삼지 않는 수준의 내용도 물고늘어지며 사사건건 행정부 각료들을 의회로 불러들였다.

이런 활동의 일환으로 신한국당과 자민련은 국정조사 위원회를 설치해 김대중 정부를 점검했다. 특히 주요 증인으로 JP를 소환해 국회에서 증언하도록 하는 등 강도 높은 압박을 이어갔다. 그러다 98년 대선에서 갑작스럽게 사퇴한 이유가 뭐냐, 김대중 대통령에게 압박을 받은 것이냐는 질문에 JP가 입을 열지 않고 발언대에서 이탈하는 일도 있었다. 국정조사 위원회는 약 6개월 간의 활동 이후 대통령 중심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결론으로 내렸다.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김대중 대통령

자민련은 이런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99년 8월 국회에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상정했고, 신한국당의 동의를 통해 개헌안이 국민투표에 회부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개헌안 통과 직후 오전 11시 대국민담화를 통해 "제도적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했다. 동시에 현행 헌법 하에서도 충분히 의회의 우려를 불식할 수 있는 개혁 방안을 내놓고, 당의 총재직을 내려놓으며 정치 혁신을 이뤄내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대국민 담화 직후 현행 헌법을 지지한다는 여론은 75%로 직전 조사의 56%를 갈아치웠다.

PK 리버럴과의 연대

이해찬 리스트와 당명 변경

출신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이름 임기 선출 방식 정당
취임일 퇴임일
6
김대중
(1924 ~ 2021)
12 1993년 2월 25일 2005년 2월 24일 1992년 대선
직선
새정치국민회의 (1993 ~ 05)
13 1998년 대선
직선

역대 선거 결과

대통령 선거

연도 선거명 후보자 득표율 (득표수) 결과
1992년 제12대 김대중
 46.25%  (17,760,240표)
당선
1998년 제13대 김대중
 46.55%  (17,919,929표)
당선

국회의원 선거

연도 선거명 지역구 (비율) 비례대표 (득표율) 총 의석 (비율) 결과
1996년 15대 68 / 219 (31.0%) 31 / 90 (34.4%) 99 / 299 (33.1%) 원내 2당
2000년 16대 112 / 225 (49.8%) 38 / 74 (51.3%) 150 / 299 (50.2%) 단독과반
2004년 17대 110 / 231 (47.6%) 28 / 68 (41.2%) 138 / 299 (46.1%) 원내 1당
2008년 18대 69 / 237 (29.1%) 18 / 62 (29.9%) 88 / 299 (29.4%) 원내 2당

지방선거

연도 선거명 광역단체장 (비율) 기초단체장 (비율) 광역의원 (비율) 기초의원 (비율) 결과
1994년 4회 10 / 23 (43.5%) / 424 (%) / 753 (%) 제1당
1998년 5회 10 / 25 (40.0%) / 434 (%) / 794 (%) 제1당
2002년 6회 8 / 25 (32.0%) / 434 (%) / 811 (%) 제2당
2006년 7회 5 / 25 (20.0%) / 432 (%) / 832 (%) 제2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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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그도 그럴게, 민주연합의 뜻은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연합했다는 것이다. 한쪽이 탈당했으니 연합으로 불릴 이유도 없는 셈.
  2. 민주자유당의 약칭인 "민자"가 배신이나 남을 속인다는 뜻으로 퍼지자 관리를 위해 당명을 변경한 것이다.
  3. 이후 그의 사직서는 수리되지 않고 유보되다가, 다음 총선이 끝나 후임이 정해지자 받아들여졌다. 즉 그는 사임 발표 이후 거의 2년 가까이 국무총리 자리에 앉아있던 것이다.
  4. JP는 자신과 김대중 대통령과의 관계에 흔들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박태준 의원과 함께 DJ 대선 광고에 출연했다. TJ는 울산광역시 승격을 주도한 DJ가 울산에서 다른 PK지역보다 높은 지지를 받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JP와 운신을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