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 강황제 이진

TLE팀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6월 1일 (목) 23:27 판

대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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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4대 황제
성조 강황제 | 成祖 康皇帝
본명
이진 (李𡋤)
출생
1899년 6월 4일
대한제국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사망
1967년 1월 4일 (향년 67세)
대한국 한성부 창덕궁 흥복헌
국적
대한제국(이전)
대한국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제
1918년 7월 21일 ~ 1922년 2월 2일
대한 제4대 황제
1922년 2월 2일 ~ 1967년 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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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가족관계
고종 광황제 이천 (부친)
성빈 이씨 (모친)
성명강황후 민씨 (정비)
광종 평황제 이휼 (장남)
의친왕 이율 (차남)
희선공주 (장녀)
희원공주 (차녀)
희진공주 (삼녀)
희예공주 (사녀)
희수공주 (오녀)
연호
강명剛明
묘호
성조成祖
시호
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

개요

성조 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 이진은 대한의 4대 황제이다.

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대공황, 2차 세계대전, 냉전, 64 한성올림픽을 모두 겪은 군주로, 격동의 시기 대한의 군주로 군림하였다.

생애

유년기

성조 강황제는 광무 22년(1899년) 6월 4일 고종과 후궁 성빈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황태자였던 형 순종이 있어 황위와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되어 비교적 자유롭게 성장하였다.

유년기의 성조는 서역에서 들어온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에 흥미를 붙였다고 하며, 이는 친왕, 황제의 위에 올라서까지 즐겼다. 부친 고종이 일찍 훙서하자 순종이 성조의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였고[1] 성조 또한 아들이 없는 순종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복형제 경선공주, 경친왕 등과의 사이도 친형제와 같아 황실의 우애가 좋은 것이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성친왕

융희 원년(1911년) 형 융희제가 칙명으로 어린 황족들에게 군호를 내릴 때, 성친왕으로 책봉되었다. 당시 황제가 만 서른이 다 되었는데도 자식이라곤 딸 둘 뿐이 없자 황실과 정계에서는 성친왕을 황태제로 삼으라는 압박을 하였다. 어린 성조 또한 이를 잘 알고있고 형에게 충분히 거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 행동을 조심하였으나, 순종은 그런 성조의 모습을 안타까이 여겨 황태제로 책봉하라는 이들에게 경고하였고, 성조에게는 지금과 같이 행동하라고 하였다.[2][3]

경종시절에야 있을 법한 일 때문에 성친왕 시절에는 별 다른 행동 없이 조용히 지냈으며, 시간이 지나며 순종에게 아들이 태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융희 8년(1918년) 만 19세의 나이로 황태제에 봉해졌다. 이후 순종이 융희 11년(1921년)에 쓰러지자 대리청정을 하였고, 다음해 2월 융희제가 훙하자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관례에 따라 세 번 거절하는 절차를 밟은 후, 만 22세의 성조는 연호를 강명(剛明)으로 하여 즉위하였다. 당시 불혹을 겨우 넘긴 황제의 죽음으로 전 세계가 충격받았으며, 기존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성친왕에 대하여 한 순간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제국 내부에서는 젊은 황제에 대해 기대와 걱정의 시선을 보냈지만 성조가 진중하고 기존 융희제가 마련해놓은 민주주의라는 토대를 존중하는 것을 보여주니 그 걱정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융희제 시절 야망이 있던 성조는 황제가 되자 청년기에 못하였던 정치에 점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20년대 중반 여러가지 문제점, 예를들어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제국 내부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준동하자 치안유지법을 비롯하여 여러 정치적 문제에 관해 발언을 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문민정부의 약화와 급진파 군 세력의 강화를 불러일으켰다.

강명 8년(1931년)에 대한국 북방군이 예산을 목적으로 한 외몽골 출병을 시작으로 대한제국은 멈출 수 없는 군국주의라는 길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는 강명 14년(1936년)에 일어난 테러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사건의 여파는 근황을 기치로 일어난 황도파의 궐기로 2.26 사건이 발생시켰고, 군국주의 파벌인 통제파가 이를 진압하는 것과 동시에 문민정부를 무너뜨리면서 결국 대한제국에서의 민주주의와 평화는 깨지게 되었다.

통제파의 수장 이강은 근황파와 문민정부를 장악하는 것을 비롯하여 황제의 수족을 잘라내기 시작하였고, 강명황제를 옥새만 찍는 허수아비로 이용하려 하였다. 물론 성조 또한 이를 가만히 두고볼 수는 없어[4] 끊임없이 통제파와 이강을 견제하였다.

물론 이러한 견제 시도는 이강과 통제파가 신한청년당을 통해 명목상으로나마 합법적으로 집권을 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군국주의 세력들에게 어느정도 동조하기 시작하였다. 강명 15년(1937년) 한중전쟁의 승인이 바로 그것 중 하나였으며, 강명 19년(1941년) 일어난 태평양 전쟁의 승인도 마찬가지였다. 이 선택은 최악으로 치달았는데, 그러한 성조의 결정은 지속된 전쟁으로 대한제국이 패전하는 것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묵인과 동조는 의주, 군산에 핵이 투하되기 전까지 유지되었고, 강명 23년(1945년) 8월 14일 저녁에 몰래 성조가 항복선언을 녹음하여 공포한 후에서야 종료되었다.[5] 다음날 8월 15일,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전후

많은 이들이 성조의 대에서 군주국이 끝이 나고 공화정이 들어설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GHQ의 수장인 맥아더 장군은 그 비서가 쓴 한국에 대한 보고서를 받고, 한국에서 군주의 위치는 가히 신과 같은 법 위에 서있는 지고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만약 폐위를 시키면 GHQ의 원활한 개혁활동에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맥아더 사령부는 강명황제가 이강 정권 하에서 행한 모든 전쟁범죄 등에 관한 묵인을 덮어주는 대신에, 그를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 및 국민을 단결시켜주는 존재로만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강명 24년(1946년) GHQ의 지휘 아래 대한국 헌법이 공포되었고, 1년 뒤인 강명 25년(1947년) 이가 시행되었다. 대한국 헌법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다 나열하기에는 너무 길어, 짧게 요약하자면 [민주주의의 온전한 회복], [군주는 명목상으로 두고 실권을 주지 아니한다], [대한국은 군대를 가질 수 없음] 등이 있다.

이러한 헌법의 공포와 더불어 미국은 대한제국을 옛 조선과 비슷하게 농업국가로만 만들려고 하였으나, 1951년 벌어진 중국 내전에서 국민당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자 계획을 틀어 대한제국을 극동아시아의 병참기지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많은 투자가 이뤄졌고, 공장이 들어섰으며 대한은 잿더미만 남은 패전국에서 점차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결국 확장했던 영토를 모조리 뱉어낸 채 한반도만 가진 대한제국, 이제 대한국인 나라는 동아시아에서 또 다시 불사조처럼 날아오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성조가 제국에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불러온 위대한 황제로 칭송받았던 것은 덤이었다.

결정적으로 1964년 한성올림픽은 기존 패전국, 낙후된 동아시아의 국가라는 모습의 대한국을 온전하게 회복시켜주었고 성조가 이를 선포하게 되면서 대한은 완전히 되살아나게 되었다.

훙서

대전을 거치면서 건강이 안좋아지기 시작한 성조는 50년대 들어서 잔병치레를 하게 되었고 60년대에 들어서자 많은 시간을 침상에서 지내게 되었다. 물론 운동을 통하여 건강을 회복하려 노력하였지만 노쇠한 몸은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61년 공식적으로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이 사실은 전 대한과 세계로 퍼져나갔고, 어느 누구는 황제의 쾌차를, 어느 누구는 황제의 죽음을 비는 등의 상황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결국 강명 45년(1967년) 1월 4일, 신년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던 날에 성조는 숨을 거두었다. 많은 국민들이 그들에게 자유를 돌려준 "대황제" 성조를 기렸고, 황태자와 궁내청은 이러한 국민적인 여론을 받아 제국을 완성시켰다 하여 성(成)을, 나라를 다시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조(祖)를 올려 묘호를 성조(成祖)라 지어 올렸고 시호로 경장평문효헌소열강황제(敬章平文孝獻昭烈康皇帝)를 바쳤다.

제위는 황태자 이휼이 연호를 논어에서 따와 헌문(憲問)으로 하여 이어갔다.

가계

  • 정비: 성명강황후 민씨 (1901년 ~ 1997년)
  • 아들: 광종 평황제 이휼 (1922년 ~ 1999년)
  • 딸: 희선공주 (1925년 ~ 1992년)
  • 딸: 희원공주 (1926년 ~ 2007년)
  • 딸: 희진공주 (1930년 ~ 1979년)
  • 아들: 의친왕 이율(1934년 ~ 1996년)
  • 딸: 희예공주 (1937년 ~ )
  • 딸: 희수공주 (1939년 ~ 1983년)

여담

  • 성조는 많은 고정관념과는 달리 내향적이었다고 한다. 황제로서 신민 앞에 섰던 것은 의무감이 받들어주었던 것이 컸고, 평소에는 과묵하고 진중한 편. 그러나 자식들이 찾아오면 외향적으로 뒤집혔다고.
  • 후궁제도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여 폐지하였고, 많은 우려가 있었으나 황후 사이에서 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낳아 우려는 우려일 뿐이라는 답을 해주었다.
  • 장남 광종 평황제 이휼, 차남 의친왕 이율 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고 한다. 성조 본인이 아버지가 어릴 때 훙하여 상처를 입었는데, 자식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 성조 시대부터 실록이 완전 한글로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는 진서(眞書)라고 불리던 한자(漢字)가 사용되었으나, 성조가 즉위한 이후[6] 작성된 실록은 전면적인 개편작업을 완료하여 한글로 기록되었다.[7]

창작물에서

  • 대한의 개화기와 세계대전 직후까지를 다룬 대하드라마 "광야"에서 성친왕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피아노를 즐기는 모습으로 나왔으며, 배우는 전주 이씨 은언군파의 이택주[8].
  • 영화 마지막 제국(2012)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9], 마지막 장면에서 항복조서를 발표하는 모습을 비추었다.
  • 패러독스 인터렉티브가 만든 Hearts of Iron IV에서 대한제국의 군주로 등장. 국민정신으로 존재하는데 안정도를 무려 30%나 올려준다[10]. 중점 루트를 타면서 황도파의 쿠데타가 성공하면 강명유신으로 갈 수 있으며, 공산주의 루트를 타면 한반도를 떠나 만주 쪽에서 내전을 치루는 반군의 지도자가 된다.


  1. 사실 순종이 1881년생, 성조가 1899년생이라 나이차이가 무려 18살이 나서 아버지-아들 뻘이기도 하다.
  2. 순종실록 1권 융희 원년 3월자 발췌.【황제가 말하길. "짐이 겨우 이립을 지났으니 어찌 섣부르게 황태제를 정하겠는가? 영묘께서도 불혹을 넘으신 후에 장조를 봉하셨으니 더 이상 이를 논하지 마라"】
  3. 물론 그리 말하였다고 한들 성조는 정치적으로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질 수 있기에 조심히 행동하였다고 한다.
  4. 성조가 개인적으로 이강을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형 순종이 성조에게 민주주의의 수호를 부탁하였고, 가까운 종친인 이강이 혹여나 황실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 《성조 대제 행장》, 《승정원일기》 및 한성대학 이성준 박사의 논문인 《2차 대전과 대한제국의 정치상황에 관한 연구》에 근거.
  5. 이강을 추종하는 몇몇 항전세력의 눈을 피하여 몰래 항복선언을 녹음하였다.
  6. 사실 순종 중반부터는 실록에서 한문을 빼는 작업이 추진되었고, 후반부 가서는 순한글로 작성되었다.
  7. 참고로 광종 말기부터는 실록 전산화 작업이 추진되어, 광영황제부터는 순한글에 전자실록이 되었다. 물론 책으로 된 실록도 존재는 한다.
  8. 전계군의 3남 덕평군 이변의 후손이다
  9. 이 부분은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이 존재한다.
  10. 물론 옆나라 일본의 쇼와 덴노는 안정도 60%, 정치력 15%, 전쟁지지도 5%나 주는 사기 지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