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푸른 오얏꽃2)

한혁성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9월 9일 (목) 15:07 판


아시아 전선
기간 1914년 8월 24일 ~ 1917년 12월 5일
장소 중국 만주, 러시아 연해주, 서해, 동중국해
결과 협상국의 승리
교전국 협상국 동맹국
일본 제국
러시아 제국
대영제국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대한제국
독일 제국
지휘관 협상국 동맹국
다이쇼 덴노
오쿠마 시게노부
가미오 미쓰오미
도요다 데이지로
마사키 진자부로
마쓰다이라 유타카
사토 데쓰다로
스에쓰구 노부마사
시마무라 하야오
아라키 사다오
야마나시 한조
유히 미쓰에
오카다 게이스케
니콜라이 2세
알렉세이 쿠로팟킨
후세인 나히체반스키
로만 콘드라첸코
스테판 마카로프
니콜라이 네보가토프
파벨 미셴코
미하일 자술리치
게오르기 불라첼
표트르 브란겔
빌헬름 비트게프트
파울로 스코로파즈키
아나톨리 스테셀
알렉산드르 포크
오스카르 그리펜베르크
콘스탄틴 스미르노프
표도르 켈레르
조지 5세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나타니엘 발터 베르나디스톤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고종 태황제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흥친왕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김승규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권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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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신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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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한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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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윤웅렬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이봉의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이재윤
파일:대한제국 국기 (푸른 오얏꽃2).svg 이항직
피해 규모 1,500,000명 이상 사망
3,000,000여명 부상
1,700,000명 이상 사망
실종 및 포로: 450,000명
2,940,000명 부상


서막

제1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대한의 역사는 한청전쟁까지 거슬러간다.

한청전쟁에서 승리한 대한제국은 청나라로부터 남만주 일대를 얻는데, 만주로 남하하려는 러시아 제국은 만주에서 대한제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대한제국의 팽창을 경계하는 일본 제국과, 영일동맹을 맞고 있던 영국을 끌어들여 대한제국 외무차관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러시아 제국의 압력에 부담을 느낀 대한제국이 어쩔 수 없이 간도를 제외한 영토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했고, 대한 대중과 대한제국 황립군은 러시아 제국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일본 제국에게 반감과 분노를 지니게 되었다. 특히 1898년에 러시아 제국이 여순, 대련을 점령하여 군항으로 활용하게 되자 분노와 불만은 극에 달했다. 대한제국의 반러·반일 여론은 자국을 지지할 열강의 필요성을 절감케 해, 한독동맹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1904년 일본 제국이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면서 대한제국과 해군력 충돌이 있었다(독도 위기). 이는 한일 해군력 경쟁의 계기가 되었고, 동아시아에 긴장감을 조성했다.

개전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일본 제국은 영일동맹을 근거하여 참전한다. 대한제국의 일부 각료들은 "우리가 전쟁에 뛰어들어 얻는 권익이 없다."라며 대전쟁에서의 중립을 표했다. 그러나 국민의 반러·반일 감정과 더불어 당시 수상이었던 유길준이 전쟁을 주장하며 고종 황제의 승낙을 받았다. 그렇게 1914년 8월 24일, 대한제국한독동맹을 근거하여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대영제국, 프랑스,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한다.

전개

개전을 한 대한제국은 독일 제국과의 지리적 거리 탓에 연계하는 전략을 펼칠 순 없었다. 러시아 제국과 육상으로, 일본 제국과 해상으로 맞닿는 대한제국의 지리적 특성은 개전 초반 대한제국을 고립 상태로 만들었다. 개전 후 2개월간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김승규 육군 참장은 해군과 연계하여 일본의 해상을 봉쇄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에 집중하자는 백두산 계획을 입안했다. 제주도와 대한제국령 대마도에 신예 도급 전함을 배치한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행동반경을 축소할 수 있었고, 남은 해군 전력과 육군 제2군으로 러시아 제국이 점령 중이던 여순에 상륙한다. 여순 상륙은 러시아 제국의 전술적 오판으로 대한제국이 승리하였고, 대한제국 제1군과 제3군은 25식 야전포[1]를 통한 포격과 돌격 전술을 채택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기 시작했다. 유럽보다 동원이 늦는 러시아 제국의 극동군은 빠르게 붕괴했다.

대한제국 육군의 목적은 해군이 일본의 해상 봉쇄를 진행하는 동안 빠르게 만주를 장악해, 유럽에서 전쟁을 진행 중이던 러시아 제국에게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여순에 상륙한 제2군의 목적은 피해를 최소화하며 만주를 깊숙히 진군, 창춘에서 제1야전군(제1군과 제3군의 통합)과 합류해 하얼빈으로 진군하는 계획이 있었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충족시키기 위해, 백두산 계획은 1891~1892년의 한청전쟁과 같이 최대한 빨리 적군의 종심을 돌파해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한 계획으로 짜여졌다.

1915년 2월 5일부터 10일까지 창춘 전투에서 대한제국 육군은 승리를 거뒀다. 4월 12일, 러시아 제국군은 영일 원정군의 도움을 받아 4월 15일부터 23일까지 이루어진 우창 전투에서 대한제국군이 하얼빈 남부로 진격하는 것을 방어했고 다시 대한제국군을 쑹화강 이남으로 후퇴시켰다. 이 전투는 아시아 전선에서 기동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한제국 장교들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은 1915년 6월 3일, 2개 야전군으로 공세를 시작했다(쿠로팟킨 공세). 권중현이 이끄는 대한제국의 제1야전군은 6월 9일부터 6월 12일까지 이어진 일련의 제2차 쑹화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러시아의 공세를 좌절시켰지만, 대한제국이 만주에서 빠른 승리를 거두는 데 실패하므로 연합국이 전술적 승리를 이끌었다.

  1. 크루프 포를 기반으로 대한제국이 자체개발한 야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