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이소로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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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소로쿠
山本 五十六 (やまもと いそろく)
파일:Isoroku Yamamoto.jpg
생애 1884년 4월 4일 - 1965년 3월 8일
출생지 일본 제국 일본 제국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사망지 일본 일본 니가타현 나가오카시
복무 일본 제국 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 1901년 ~ 1957년[1]
최종 계급 대장 대장(大将)
근무 순양함 닛신
주미 일본대사관 주재 해군무관
연합함대 사령장관
지휘 항공모함 아카기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주요 참전 일러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내역 틀:일본 원수휘장
파일:JPN Daikun'i kikkasho BAR.png 파일:JPN Kyokujitsu-sho Paulownia BAR.png 파일:JPN Zuiho-sho (WW2) 1Class BAR.png 틀:금치훈장 틀:금치훈장 파일:DEU EK Ritter oak-sword BAR.png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やまもと いそろく), 1884년 4월 4일 ~ 1965년 3월 8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다.

생애와 경력

일본 해군항공대 육성

야마모토는 거함거포주의가 주류였던 당시 분위기에서 일찌감치 항공기 분야에 힘을 쏟은 기술에 밝은 테크노크라트이기도 했다. 육군과는 서로 적군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적대적이었던 일본 해군은 육군과는 전혀 다른 보급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전투용 항공기 또한 별개의 생산 체계를 갖추었다. 야마모토는 일찌감치 해군 항공대 육성과 전술 능력 배양에 전력을 쏟았고, 그의 노력은 태평양 전선을 특징짓는 항공모함 간 항공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착시키고, 거함거포주의를 침몰시키는 데 일조하게 되었다.

전쟁을 반대한 군인

야마모토는 미국 유학 및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 해군무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미국의 산업 생산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직접 확인한 인물이었다. 미국의 경제력과 잠재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문에 야마모토는 미국과 전쟁을 주장하는 청년파를 필두로 한 육군 강경파에 맞서 전쟁을 반대하였다. 당시 고노에 총리이 승리 가능성을 물어오자 "처음에는 이길 지 모르나 5년 이상 할 경우 100% 진다"고 딱 잘라 말하였다. 해군사관학교 동기생인 해군 대신에게도 대본영에서 회의때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육군의 청년파로부터 암살 위협에 시달렸으며, 해군 장관이 되어야 할 시점에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취임한 것도 연합함대 사령관직에 있으면서 육군 강경파들의 암살 시도로부터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전쟁에 앞장서다

파일:Yamamoto-Isoroku.jpg
파일:Yamamoto h63430.jpg

그러나, 전쟁이 결정되고, 천황까지 승인하자 야마모토는 이왕 전쟁을 할 것이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선제 기습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목표물은 미 해군의 항공모함이었다. 그 자신이 항공모함의 잠재력을 높이 샀고, 또 공격 자체도 항공모함의 함재기들로만 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미국의 항공모함들부터 때려부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1940년 말부터 8월까지 야마모토는 작전 계획 수립과 부대 훈련에 매달렸다. 특히 진주만의 수심이 얕은 것을 고려하여 뇌격기에서 사용할 어뢰의 개량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99식 산소 어뢰는 당시 어뢰들 중에서는 최고 성능이었지만, 진주만의 수심이 매우 얕아 사용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프로펠러 추진부에 간단한 목제 부품을 달아 사용이 가능하도록 개량했고, 이 어뢰로 진주만과 비슷한 지형의 가고시마에서 수행한 모의 훈련에서 조종사들과 폭격수들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기동중인 표적에 명중률이 70%에 육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야마모토는 11월 26일 연합함대를 이끌고 진주만으로 출발했다. 함대는 함재기 414대를 적재한 6척의 항공모함전함 2척, 순양함 4척, 구축함 9척, 잠수함 3척, 유조선 8척으로 편성되었다. 12월 7일 그의 함재기들은 진주만을 성공적으로 기습하여 공격을 성공리에 마무리했으나 한가지 실수를 범하였다. 미국의 항공모함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다(새러토가는 샌디에이고에, 엔터프라이즈는 미드웨이 섬으로 함재기를 운송 중이었고, 렉싱턴은 웨이크 섬으로 함재기를 운송 중이었다.).

1942년, 미군이 둘리틀 공습작전을 벌여 도쿄를 폭격할 것이라는 전보가 들어오자 마자 미 해군이 일본 본토에 접근할 수 없는 지점으로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전초기지가 미드웨이 섬이었다. 미드웨이는 본래 무인도였으나, 섬에 활주로를 닦아 비행기지를 건설하여 섬 전체가 불침 항공모함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이 작전을 대승으로 마무리한다. 불침함을 점령해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꺾어버린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 종료 후 미군은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솔로몬 군도의 작은 섬인 과달카날 섬해병대를 기습 상륙시켰다. 일본군의 전략은 한편으로는 야마모토를 중심으로 1번째는 중부 태평양에서 미군을 몰아내고, 2번째는 남태평양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의 병참선을 끊는 것이었다. 2번째 전략을 위해 일본은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비행장이 완공되면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간 병참선이 끊어지고 사실상 태평양에서 일본에 반격하기가 쉽지 않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유럽 전선에서 영국처럼 반격을 위한 병참 기지 겸 교두보였기 때문이다.

미군의 과달카날 작전은 1년여간에 걸쳐 이루어졌고, 수회의 해전과 육상전투를 벌였음에도 과달카날 전투에서 패배해버린다. 미드웨이 해전이 단순한 전술적 실패였다면, 과달카날 전투는 전략적 실패인 셈이다.

제2일본제국을 주도하다

조선전쟁에 앞장서다

1951년 도쿄 선언 이후

전임
요시다 젠고
제26·27대 연합함대 사령장관
1939년 8월 30일 ~ 1945년 8월 14일
후임
스즈키 간타로
  1. 1901~1945 일본 제국 해군, 1945~1951 제2일본 제국 해군, 1951~1957 일본 해상방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