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르 제2왕국
Druhé království
에세르 왕국
Esserijské království
국가 게를로프스의 연맹가
국화 덴드로비움
국조 수탉
표어 Drahý nejmilovanější Bože,
Chraňte suverenitu a nezávislost
(지극히 사랑하는 하느님, 주권과 독립을 수호하소서)
100%
수도 마가드 시
최대 도시
면적 343,450 km²
에세르 공국 건국 569년
칭왕(稱王) 선언 615년
그란치프에게 멸망 966년
마가드 시위 1658년
제2왕국 건국 1664년
7월 사건으로 인한 일시멸망 1670년 7월 14일
멸망 번복 1671년 1월 16일
인문 환경
인구 전체 인구 76,384,310명
민족 구성 에세르인 92.7%, 기타 7.3%
인구 밀도 222
공용어 키르수스어 에세르어
국민어 게파르토어 에세르어
공용 문자 라틴 문자
종교 세멘교(씨앗교)
세부 군대 육군 에세르 국가 육상 방위군
공군 에세르 항공대
기타군 에세르 왕립 헌병대
행정구역
행정
구역
국가관구 9개
25개
왕국특급시 3개
지방중앙시 16개
정치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단일 국가[1]
국가
원수
국왕 국왕
정부
요인
국가재상 빅토르 도치칼 (Viktor Dočkal)
국회의장 라도미르 포트코니츠키(Radomír Podkonický)
육상방위군 부원수 후고 스토돌라 (Hugo Stodola)
법무위원회 위원장 이보 멜리하르 (Ivo Melichar)
국가 내무위원회 위원장 미로슬라프 파울 (Miroslav Paul)
국가 외무위원회 위원장 파벨 노바체크 (Pavel Nováček)
국가 재무위원회 위원장 로베르트 칼라프 (Robert Kaláb)
국가 노동공 위원회 위원장 루데크 코호우테크 (Luděk Kohoutek)
국가 문화위원회 위원장 슈테판 발로운 (Štěpán Baloun)
궁무부 장관 루돌프 코호우테크 (Rudolf Kohoutek)
여당 에세르 사회당
경제
경제 체제 국가통제경제
화폐 공식 화폐 에세르 ߍ(스티)
코드와 단위
단위 법정연호 건국력

에세르 왕국(Esserijské království), 에세르(Esser)는 대륙 서중부에 있는 왕정 국가로 수도와 최대 도시는 마가드이며 국가의 면적은 213,850km², 전체 인구는 1672년 기준 76,384,310명이었다. 국가의 대표적 공용어는 키르수스어와 에세르어이고 국민어로는 에세르어를 제했을 때 그란치프어와 게파르토어가 있다. 멸망 당시 행정구역으로 6개의 주와 3개의 특별시 그리고 60개의 군이 있다. 에세르는 입헌군주정 단일국가인데, 국왕은 국가의 원수이자 전체 방위군의 명목상 사령관이며, 의회에서 선출된 국가 수상은 정부의 수반으로써 왕국을 지휘한다. 그외 국가의 주요 신료로는 육상 방위군 부사령관과 수상 휘하의 국무 대신으로 보하는 국가의 각 국가 위원회 위원장과 각 장관이 정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외국의 간섭, 이에 대한 반발로 인한 내부의 정치적 갈등, 집권세력의 무능력한 태도로 일관된 통치가 계속되면서 국민들의 삶이 굉장히 악화되었고 1670년 7월에 혁명이 발발하자 왕가를 비롯한 집권층이 키르수스로 망명하면서 체제는 임시 멸망하였으나, 키르수스 제국의 개입으로 약 2개월간의 자치령 시기를 거치면서 키르수스로 몽진했던 국왕 일가가 돌아와 복위를 선포하여 현재에 이른다.

개요

건국 전반기에 12개의 중앙구와, 60개의 시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1669년 경 행정법 개정으로 6개의 주, 3개의 특별시, 60개의 군으로 개정되었다. 이는 임시 멸망으로 당시 왕국에서는 사용되지 못하였으나 개정된 구획에 따른 행정을 임시 공화국ㆍ자치령이 이어받았고 현재 복고된 왕국에서 이를 최종적으로 이어받아 사용하고 있다.

상징

에세르 왕국의 3상징
국가 국화 국조
게를로프스의 연맹가 덴드로비움 수탉

국기

게를로프스의 연맹기
100%
상단은 위기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며, 중앙의 하얀색은 순결, 하단의 주황색은 국왕의 가문을 의미하는 짙은 주황색에, 왼쪽의 줄기는 민족의 화합과 단결을 의미한다.

국기명은 게를로프스의 연맹기(키르수스어: Vlajka Federace Gerlofs)라고 칭한다.

정치

에세르의 옛 왕정이었던 제1왕정은 전제군주국으로써 왕이 국가의 중대사를 이끌었다. 주로 이 시대 국왕들의 모습은 신권과 민권을 존중하는 어진 정치를 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1왕국이 멸망한 이후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 건국된 2왕국은 1왕국 시절의 전통이 거의 사라졌고, 복원된 전통 역시 조악한 수준이다. 1왕국 왕실의 후손들은 현 왕국에서 대부분 공화주의자들이라고 몰려 다소 위기에 처했으나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세를 보전하였다. 현왕실은 1왕국의 구 왕실 후손들에 대해 명목상으로 높이 대우하고 있으나 이들은 정통성이 없는 관계로 구 왕실에 대한 물밑 견제가 매우 심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제2왕정이 건국되었을 당시, 자치정부 시절 에세르인들의 민의를 대표하던 민족의회가 새 국왕을 옹립함을 결의하는 방식으로 군주제가 채택되었다. 에세르인의 나라가 없던 시절부터 민족 공동체의 결사를 이끌고 자치정부를 운영하며 중대사를 논했던 민족의회는 직후 민족의회로 유지되었고 키르수스 제국의 이권과 국내에서의 정치적 의중을 대표친키르수스파하는 기관이자 상원으로는 왕국의회가 창설되었다. 곧이어 양 의회의 협의로 헌법이 제정되면서 에세르는 현재의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2왕정現 왕국스크르지바네크 왕가는 1왕국이 멸망한 지 한참된 13세기에 출현한 상인 가문으로, 비록 왕가 자체는 극히 부정하고 있지만 건국 당시부터 국민들 사이에는 키르수스와 게파르토의 유력 귀족 가문의 혈통이라거나 이민족들의 귀족가문과 결혼동맹을 다수 맺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또한 에세르 왕가는 에세르 지역의 유력한 상인가문으로써 에세르와 키르수스ㆍ그란치프ㆍ게파르토 간의 모든 교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들의 인지도가 에세르의 가문 중에서 외국에 가장 잘 알려졌기 때문에 이들이 에세르의 왕가로 낙점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민족과의 혼인을 대죄로 보는 씨앗교와 국민들은 왕가를 자신들의 주인으로 보지 않으며 왕가의 지지율은 매우 낮았다. 국민들이 왕가를 신뢰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왕가 역시 국민들과의 험악한 관계에서 국민을 신뢰하지 못했고, 키르수스 정부에 의지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형국인 듯 했지만 1670년 7월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자 왕실은 키르수스로 급히 도망쳤고 왕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정부

에세르의 정부, 공식 명칭 에세르 왕국 정부는 에세르 왕국의 존속 당시 왕이 재상과 재신의 보좌를 통해 통치하였던 국가 행정부를 의미한다. 에세르의 행정부는 부처나 성과 같은 행정기관은 없었지만, 각 분야에 걸쳐 위원회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아래는 정부 위원회를 정리한 것이며, 당연하지만 모두 내각 직할이다.

  • 에세르 국왕
  • 에세르 국가 내각

에세르 국가수상이 통솔하는 행정부.

  • 법무위원회

에세르의 법률에 대한 사무를 담당하는 정부기관.

    • 국가 내무위원회

에세르의 내무 행정과 교육에 대한 사무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으로 국가수상은 국가내무위원회 위원장을 겸한다. 국가수상 겸 내무위원장 휘하에는 수상을 보좌하여 대부분의 직무를 수행하는 내무장관이라는 직책이 있다. 이는 민족의회의 동의를 받아 임명해야 했기에 역사적으로 수상이 이끄는 행정부에서 임명된 내무장관은 2명 뿐이다.

    • 국가 외무위원회

에세르의 대외관계 조정과 관련 외교사무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으로 국가수상은 국가외무위원회 위원장을 겸한다. 국가수상 겸 외무위원장 휘하에는 수상을 보좌하여 대부분의 직무를 수행하는 외무장관이라는 직책이 있다. 이는 내무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민족의회의 동의를 받아 임명해야 했기에 역사적으로 수상이 이끄는 행정부에서 임명된 외무장관은 없다.

    • 국가 재무위원회

에세르의 국가재정 사용관리와 대내외 경제사무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으로 국가재무위원장은 재무행정 전문가 중 한명으로 왕국의회의 추천을 받아 국가수상이 임명한다.

    • 국가 노동공위원회

에세르의 근로사무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으로 위원장은 왕국의회의 추천을 받아 국가수상이 임명했고, 위원장과 동일 석상의 의전을 받는 노동장관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민족의회의 동의를 받아 국가수상이 임명한다. 노동공위원장과 노동장관은 추천 주체가 왕국의회와 민족의회로 상이했기 때문에, 이들 간에 정치적 갈등이 왕국의회와 민족의회의 대리전으로 자주 발생하여 제대로 된 정책이 추진되기 어려웠다.

    • 국가 문화위원회

에세르의 문화체육 사무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으로 위원장은 왕국의회의 동의를 받아 국가수상이 임명한다.

역대 에세르 총리

국가재상 내각 재직 기간 재직 일수
1 파일:-.png 비트 바츨라베크
Vít Václavek
(1664 ~ 1665)
비트 바츨라베크 내각에세르당 1664년 6월 9일
~ 1665년 1월 2일
207일(6개월 24일)
2 파일:-.png 블라스티밀 페이파르
Vlastimil Fejfar
(1665)
블라스티밀 페이파르 내각에세르당 1665년 1월 2일
~ 1665년 12월 20일
352일(11개월 18일)
3 파일:-.png 스타니슬라프 얀스키
Stanislav Jánský
(1665 ~ 1667)
스태슬라프 얀스키 내각무소속 1665년 12월 20일
~ 1667년 4월 3일
469일(1년 3개월 14일)
4 파일:-.png 리하르트 라크
Richard Rak
(1667 ~ 1670)
리하르트 라크 내각왕정당 1667년 4월 3일
~ 1670년 1월 13일
1,016일(2년 9개월 10일)
5 파일:-.png 라도미르 포트코니츠키
Radomír Podkonický


(1670)

라도미르 포트코니츠키 내각무소속 1670년 1월 13일
~ 1670년 7월 14일(헌정중단)
182일(6개월 1일)
6 파일:-.png 빅토르 도치칼
Viktor Dočkal


(1671~현재)

빅토르 도치칼 임시 내각무소속 1671년 1월 16일
~ 1671년 9월 24일
251일(8개월 8일)
7 파일:-.png 빅토르 도치칼
Viktor Dočkal


(1671~현재)

빅토르 도치칼 내각사회당 1671년 9월 24일
~ 현재
-일(-개월 -일)

입법

에세르 헌법 상으로 인정되는 입법에 대한 권한과 권위를 가지는 헌법기관은 왕국의회민족의회뿐이었다.

에세르 왕국의 존속기간 동안 양원의 정치적 분쟁은 매 사건마다 대리전으로 격화되어, 제대로 된 입법이 아예 안되거나 왕국의회의 의지 대로 졸속 통과되는 경우가 많았다. 원인은 민족의회와 왕국의회의 시작이 다르다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는데, 왕국의회는 왕국 출범 후 친 키르수스파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고, 민족의회는 그란치프 자치령 시절 세워져 자치 입법부로써 존속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민족의회는 에세르 1왕정 멸망직후 세워져 에세르인들에게 있어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이었고, 왕국의회는 제2왕정 이후 세워졌으며 키르수스의 입김이 상당히 불었기 때문이다.

경제

에세르 제2왕정이 건국되면서 국민들의 실물경제는 초반부터 흔들렸다. 안그래도 10여년전 그란치프가 키르수스에 패전하면서 그란치프령이자 그란치프에 물품을 공급하고 또한 부족한 것을 들이며, 결론적으로 그란치프에 완전히 의존했던 에세르 경제는 아사율과 생계형 범죄율의 증가라는 충격적인 문장을 통해 파국으로 치달았음이 증명되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쇼크를 받은 경제는 그란치프의 패배 이후 에세르를 다스린 여러 나라들의 통치 하 불안정 속에 10년 전 수치를 회복하지 못했다. 왕가가 부리는 극도의 사치와 대내외의 연속적인 정치적 사건으로 인한 불안에서 비롯된 불황은 건국 초부터 국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말았다. 불황은 1664년 중반부터 1668년 말까지 4년간 지속되었고, 국민들은 주식인 빵을 만드는 데 필수 재료인 밀조차도 원가보다 3배 비싸게 사먹어야 했다. 정부는 가라앉은 내수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자치령 시절부터 모아왔던 정부 소유의 밀을 싸게 풀어 국민들을 지원하여 적어도 굶어 죽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1666년부터 상황이 개선되었으나 왕가의 사치로 인한 국가재산 지출이 최고점을 찍으며 경제상황은 건국 이전보다 나빠졌다. 이런 가운데 1666년 4월 경부터는 자치령 시절부터 쓰이던 금화 ߍ(스티)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경제는 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금화 가치가 폭락하자 모든 품목의 가격 상승은 예고된 바였다. 에세르인들의 임금이 당년 기준 15% 상승된 것에 비해, 각 품목의 가격은 40% 넘게 올랐다. 결국 수요가 다시 하락하였고, 팔리지 않는 재고에 떠밀려 파산하는 공장이 늘어났다. 일부 살아남은 공장으로 인해 공급이 올랐어도 떨어진 금화 가치로 공급된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역사상 최악의 불황에 대해 왕가를 풍자하며 조롱하였고, 점차 왕가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접으며 왕가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국민을 통합하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으면서 사치품들을 궁전에 장식하는 왕가의 행태는 건국 이전보다 더 먹고 살기 힘들어진 국민들에게는 분노를 일으켰다.

1664년부터 1667년까지는 그래도 정부지원으로 먹고살 만 했으나, 1667년 말에서 1668년으로 갈 즈음에는 수도에서도 집조차 구할 수 없어 동냥하는 사람들이 대규모 증가하고, 종사하던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 미궁의 불황 속에 그나마 덜 흔들렸던 곳은 농지의 농민들과 강에서 물고기나 잡고 산을 오르던 수렵꾼들 뿐이었다. 이들은 불황이 지속되면서 판매 자체를 줄이고 자신들의 생존에 집중해갔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키르수스인이 운영하던 공장에서 노동자가이 대규모 정리해고되어 발생한 시위로 다수의 사상자들이 발생하는 등 혼란은 가속화됐고, 1670년 7월 발생한 7월 사건으로 에세르 왕국이 1차로 무너지기까지, 경제적 빈곤의 폭증과 건국 직후 사그라든 적이 없었던 불황은 에세르인들의 분노가 왕가를 향하게 만들었다.

1671년 왕가가 복위되면서 국왕은 전면적으로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국왕 일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궁무부가 신설되었고 내각 역시 부정부패를 일소하며 범죄행위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음, 복지의 증진으로 국민생활에 큰 보탬이 되게 하겠다는 시국선언을 발표하여 1671년 후반기에 들어서 여론이 그나마 나아지기 시작했다.

에세르 중앙은행

왕실-국민 관계, 그리고 민족의회

에세르는 왕실이 1664년 건국 당시부터 국민들과 위태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였다. 에세르 2왕실은 키르수스나 게파르토, 그란치프 등의 나라 등과 협력하고 있으며 키르수스 제국에 굉장히 협조적이고 사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에세르인들은 그란치프의 지배가 시작됐을 때부터 독립될 때까지도 이민족들의 국가를 굉장히 경계하고 일종의 식민 통지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웅이 은연중에 있었는데 독립 이후 옹립된 왕가가 키르수스의 군대에 의해 세워지자 그 경계심이 극에 달하였다.

제2 왕가는 국민들을 철과 피로 통치하였다. 왕가는 외세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에세르 자체에 대한 주권 의식보다는 키르수스와 같이 자신들의 위세의 기반인 이웃의 강대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관점을 우선하여 정책을 추진하고 통치에 반발하는 자국민들을 탄압하도록 하였다. 에세르는 입헌군주제이지만 국왕의 의향이 대단히 중요하게 정계에 작용한다. 이상의 서술이 국민들이 왕실을 싫어하는 주요 이유였던 것이다.

에세르 국민들이 국왕과 왕족들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자 하는 이유는 더 있다. 에세르의 민족공동체는 "원로"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의회(Lidová-rada Esser)가 중대한 사항들을 결의하고, 논하였다. 민족의회는 자신들의 국가가 없다고 느끼는 다수의 에세르인들에게 독립민족국가에 대한 희망과 삶의 즐거움을 심어 주었다. 민족의회의 원로들은 연로하고 지혜로운 지식인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대의 민주정을 지향하여 그란치프의 통치로부터 민족 정체성을 보호하고 단합된 투쟁에 함께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유지하는 데 주력하였다.

민족의회는 에세르 1왕정 멸망 이후 지하에 잔존하였던 독립 투쟁주의자들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에 그란치프 제국의 탄압을 받았지만, 초기에 에세르 1왕정의 왕족이나 존경받는 국가 노신들, 젊은이들까지도 목숨바쳐 유지하고자 노력하여 그란치프 정부는 결국 이들과 접촉하여 인증 단체로 인정하고 에세르의 자치를 보장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내부의 투쟁을 통해 독립투쟁주의자들이 노선을 포기하면서 민족의회는 에세르 자치의 구심점이 됐고, 그란치프의 통치를 온전히 수용하면서도 민족성을 보전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에세르의 독립까지도 민족의회는 그란치프령 에세르의 대의민주제를 보호하고 그란치프 내 민족지방자치와 장기적 관점에서의 민주적 독립노선의 구심점이 되었다. 독립 이후 에세르 왕실은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의 영향으로 친그란치프 인사들이 많이 유입되었고, 동시에 그란치프에 협조적인 성향으로 운영되었던 민족의회가 키르수스의 영향력에 반대하는 결의를 한다던지, 혹은 그들이 별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키르수스의 지원을 받는 데에 있어 혹여 걸림돌이 될까 에세르 주재 키르수스 공사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아 건국 6년뒤인 1670년 7월 5일에 왕국의회에서 독단으로 헌법기관인 민족의회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헌법을 개정하면서, 정부는 7월 15일을 기해 민족의회를 강제로 해산한다고 통보하였다.

1670년 7월 사건

역사

569년에 고대 에세르인들에 의해 건국된 에세르 공국은 에세르 역사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당시 세계는 중세 초기로 위저드와 인간 두 종족의 대립이 커져가던 시대였다. 현재 에세르의 마가드 강 유역에서 세워진 에세르 공국은 강역을 점점 넓혀갔고 국토 북부에 펼쳐진 강을 따라 주변과 전격적으로 교역하면서 5세기 중반에 이르러 지역에서 상당히 부강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렇게 에세르인들은 615년에 칭왕(稱王)을 선포하였고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1차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7세기 중반인 748년에 수도에 폭우가 내리고 천둥이 쳐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전국에서 땅이 갈라지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어딘가에서는 보지 못했던 용이 나타나 불을 뿜으며 도시를 파괴해 그 도시는 사라졌다. 이렇게 연속적인 재앙이 나타나자 에세르의 강역은 수도 인근의 강 유역으로 폭삭 줄었다. 남은 에세르인들은 이 시기부터 나라와 민족에 대한 수호 의지와 고집을 갖게 되었으며 힘을 합쳐 마침내 파괴된 국토를 재건하였다. 한 세기 가량이 더 흘러서야 옛 상처가 치유되었다.

850년경에 에세르인들의 왕국은 2차 전성기를 맞았다. 그들의 공식적인 왕실 사료인 "에세르 역사기"에 따르면, 기적적인 치유는 상처가 남은 곳에 죽음 대신 생명을, 황무지에는 기름진 땅을 내려주었다. 에세르는 이 시기에 첫 전성기 당시 영역의 2배의 땅을 지배했다. 이 때 에세르에서는 전국적으로 엄청난 양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광과 은광이 발견되었다. 조사된 수십여곳의 금은광은 왕실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었고 허락받지 않은 외부인은 주변 2km에 접근조차 불허될 정도였다.

희귀하고 놀라운 자원을 발견한 에세르 왕실은 이 금은광을 관리함으로써 어마무시한 경제력을 구축했다. 교역으로 금과 은의 원료와 광석, 사치품들을 비싸게 팔았으며, 금화와 은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수도에는 황금으로 치장된 시계탑과 기둥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고 심지어는 황금으로 내부와 외부를 전부 도배한 "황금 궁전"까지 지어질 정도였다. 이 시기는 에세르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유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부린 시대이자 주변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패권을 소유한 시대의 종막이었다.

에세르인들은 반 세기만에 경험해본 적 없는 사치를 누렸다. 전성기는 이후로 한 세기 가량을 더 갔지만, 먹음직한 고기를 한꺼번에 폭식한 결과일까? 왕국은 부패한 관료들로 인해 내부로부터 점점 썩어들어갔으나 외형은 어찌저찌 유지되었다. 그런데 966년 7월 29일, 그 어느 여름날, 수도를 감싼 성벽 바깥으로 잘 보이진 않지만 수많은 군인들이 대거로 몰려 오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에세르의 수도였다. 그들은 그란치프였고, 에세르군은 최선을 다해 발악했지만 멸망의 순간은 피할 수 없었다. 성을 무너트리고 들어온 그란치프 군인들에 의해 그날 밤 도성은 그들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자들의 피눈물로 멈출 기미 없었다. 그란치프에 의해 점령된 지 약 10년만에 갓 1,400만명을 넘었던 에세르인 중 57%가 의문의 이유로 떼죽음을 당했다. 그들이 단체로 떼죽음을 당한 이유를 학계는 아직 밝히지 못했다. 단, 설은 2개가 현존하여 현재 대립하고 있다. 원래부터 폐쇄적이었던 에세르인들에게 그란치프의 전염병이 전 지방에 퍼지면서 57%의 에세르인이 모두 죽었다는 첫번째 설, 그리고 그란치프 제국이 자국의 통치에 반항하는 애국적 성향을 가진 에세르인들을 비밀리에 학살하여 결국 10년만에 전체 인구의 과반 가량의 급진적인 사람들은 통치에 협조하지 않아 그란치프 제국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결국 이민족을 극도로 경계하게 된 에세르의 종교에서 이민족과의 결합을 큰 대죄로 규정하였다는 설이다.

남은 에세르인은 제1왕정이 멸망당한 후 이 세상의 그 어떤 민족보다도 비참하게 살았다. 700년에 가깝도록 나라없는 민족으로 살았던 에세르인들은 이 시대를 공허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만큼 이 시대 에세르인들의 삶은 연속적인 생존의 투쟁이었다. 에세르인들은 966년 그란치프군에게 수도가 함락된 이후로부터 그란치프 신민으로 살아왔다. 살아남은 에세르인들은 생각보다 그란치프 제국의 통치에 순응했다. 세계는 이들이 그란치프인에 완전히 동화되었다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에세르의 민족 공동체는 보수적인 원로들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그란치프에 동화되지 않고자 했다. 이것이 에세르인의 정체성이 현재까지 살아남은 이유이다. 에세르인들은 여전히 그란치프 내에서 상업적인 일을 많이 했지만, 조상의 사료를 차곡차곡 모은 뒤 종교 교리를 수호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이 시대의 에세르 씨앗교가 완성되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나라 없는 민족이었던 에세르인들은 자체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에세르인들은 그들의 8계명 중 마지막 계명을 철저하게 지켰다. 혹시나 이민족과 피가 섞인 사람들이 있었다면 돌을 맞기 전에 죽였거나 그 부모와 함께 에세르인의 땅에서 추방시켰고, 이민족과 사랑을 나눈 모든 남자와 여자는 에세르 자치 공동체의 법 집행에 의해 처형됐거나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어 살아가게 했다.

그렇게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지난 1664년 6월 9일, 키르수스 제국에 의해 에세르는 제2왕정으로 부활하였다. 새 왕으로 낙점된 자는 스크르지바네크 가문의 이었다. (Ján VII Skřivánek) 그의 치세는 1왕정 시절의 선례를 따라 얀 7세로 즉위가 선포됨으로써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라가 없었어도 적극적으로 교역하여 경제활동을 수행하는 등 외세의 사회를 수용했지만 동시에 고립을 고수하여 민족성을 보전했던 에세르인들에게 건국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외세에 의해 세워진 왕국과 왕은, 부끄러운 민족의 통한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1664년, 수백년 간 국가가 없었지만 그란치프 하에서의 사실상의 오랜 자치로 민족성이 보전되어 왔던 에세르인들은 독립이 되었을 때 기존의 생활을 유지하고자 했고 이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져, 집권층의 현상유지로 이어졌다. 1664년 새로 구성된 에세르 왕국 귀족원과 민족의회 모두에서 구성된 과반 이상의 의석은 여전히 그란치프에 동정적인 여론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국내의 그란치프인들은 차별받지 않았다. 에세르 민족은 이를 토대로 미루어 보아 수백년의 지배 끝에 민족문화나 언어는 유지되었지만 그란치프에 대한 사대주의적 관점의 태도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1660년대 중후반 이후 이런 분위기는 강화되었다. 경제적 위기에 잘 대처하지 못하고 키르수스 제국에 휘둘리는 내각과 반국왕 일가 여론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이들을 조종한다고 의심받고 있는 배후의 키르수스에 대한 저항심이 고조되어, 키르수스와의 전쟁에서 패전했던 그란치프에 대한 동정적인 의견을 표하는 열풍이 불었다.

제2왕정의 혼란상, 무능했던 제2왕정 세력

군사

에세르 왕국 군대는 7월 사건으로 왕국군이 해체되기 전까지 육군 역할을 하는 국가 육상 방위군과 공군 역할을 하는 항공대가 존재하였다.

  • 에세르 국왕(명목상의 군 통수권자)
  • 에세르 국가수상(사실상의 군 통수권자)
    • 에세르 국가 방위군(국방군, Národní obranné-síly)
    • 에세르 국방군 총참모본부
      • 국가 육상 방위군
        • 육군 방어사령부
        • 육상 방위군 휘하 항공대
    • 세멘교 기사군

육군

제1계급

  • 신입병
  • 초급병사
  • 보통병사
  • 상급병사

제2계급

  • 병장
  • 소령
  • 중령
  • 대령

제3계급

  • 초급 사령관
  • 보통 사령관
  • 상급 사령관

국가 계급

  • 원수 (보병/기병/포병)
  • 상원수 (보병/기병/포병)

육군 항공대

  • 보편 항공병
  • 병장
  • 소령
  • 중령
  • 대령

세멘교 기사군

  • 왕국기사 (육군의 대령에 해당)
  • 대기사 (육군의 보통 사령관에 해당)
  • 세멘 감찰관 (육군의 원수에 해당)
  • 세멘 대감찰관 (육군의 상원수에 해당)

군사/계급

에세르 인민연맹

1664년 에세르가 건국된 이전부터 에세르의 부활을 꿈꾸는 조직이 있었다. 에세르의 자립 조직인 "인민연맹"은 제1왕정이 그란치프에 멸망당한 이후 설립되어 민족의회의 소속 다수 정당으로 현재까지 이어 오는데 제2왕정은 이들을 공식적으로는 합법 정당으로 보았지만, 물밑에서 은근히 탄압하였다. 이들의 역사가 점점 오래되면서 인민연맹은 제2왕정이 국민들에게 있어 지지받지 못하는 등의 근거로 보아 왕정 회복의 가능성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수백 년의 그란치프 지배기와 제2왕정의 근 10년 이래 "공화정 수립"의 목표로 이동했기 때문에, 2왕정 입장에선 아무리 그들의 목표가 비공식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670년 7월 사건 직후 인민연맹은 에세르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노력하였고 신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으나 에세르가 키르수스에 병탄되면서 인민연맹은 공련으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세운 상태다. 자세한 사항은 인민연맹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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