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세계관
미국 혁명 / 아메리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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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결과
2.19 봉기
2046년 2월 19일
미국 혁명 개시
시카고 항쟁
2046년 5월 19일 ~ 2046년 7월 22일
미국 연방정부의 중부 지역 영향력 상실
추수감사절 전투
2046년 11월 26일 ~ 2046년 12월 7일
주방위군의 서부군 가담
연방군 지도부내의 분열 초래
크리스마스 봉기
2046년 12월 24일 ~ 2047년 1월 13일
전국 연방 이탈 가속화
워싱턴 봉기
2047년 2월 26일 ~ 2047년 3월 30일
연방정부의 워싱턴 상실
남부정부 결성
2047년 4월 8일
미국의 사실상 해체
애번스턴 회의
2047년 4월 15일
반정부군의 태평양 과도위원회로의 집결, 서부군 결성
대계엄
2047년 12월 1일 ~ 2053년 12월 1일[1]
서부군의 서경 94도선 서부 전역 장악
미시시피 전역
2048년 8월 9일 ~ 2049년 11월 7일
서부군의 남하 및 동진 발판 마련
뉴욕-온타리오 전역
2048년 11월 4일 ~ 2049년 7월 8일
캐나다, 북미 연방의 멸망
엔칠라다 작전
2049년 5월 20일 ~ 2049년 7월 8일
서부군의 중부 대서양 연안 지역 확보
플로리다 상륙작전
2049년 10월 7일 ~ 2049년 10월 30일
서부군의 플로리다 반도 확보, 남부군에 양면전선 강요
로엔그린 작전
2049년 11월 10일 ~ 2049년 11월 29일
서부군의 멕시코만 연안 확보
뉴제너레이션 작전
2050년 1월 20일 ~ 2050년 2월 27일
서부군의 남부에 대한 대대적 침공
남부정부 항복
2050년 3월 10일
내전의 종결, 혁명의 완수
  1. 서부군이 북아메리카 서경 94도선 서부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데 성공한 것은 49년 하순이나 해당 지역의 계엄령은 소련 건국 이후인 53년 12월 1일까지 이어졌다.

틀:엔칠라다 작전

개요

2049년 중순 이루어졌던 서부군의 기동작전이다.

이 작전으로 뉴욕-온타리오 전역이 서부군 측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캐나다가 과도위로 흡수되었으며 북미 연방은 사실상 모든 전투 능력을 상실한채 한달여간 표류하다 항복한다.

과도위 측으로 기울던 북아메리카 전쟁의 전세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며 이 작전을 입안하고 직접 야전지휘관까지 맡은 윤주용이 정치인으로서도 그 입지가 부상하게 되었다.

배경

전개

탐색전: 휴전제의

2050년 1월, 윤주용은 우선 북미 연방 정부에 전략적이라는 명목으로 휴전 제의를 했다. 물론 윤주용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부군 수뇌는 북미 정부가 휴전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저 북부군측이 서부군은 남부를 주로 공략하고 당분간 북부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략적 오판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48년 10월의 오대호 공세 실패로 사실상 공세종말점에 다다랐고 서부군에 대해 능동적 공격 작전을 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북부군은 오대호 사이에 흐르는 강과 펜실베이니아-뉴욕 주 경계 부근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대전차, 대인지뢰를 무수히 설치하는 등 서부군의 침공에 단단히 대비하였다.
그때 시기즈음 북부군의 작전을 대강 파악한 서부군측에서 먼저 휴전 제의를 함으로써 북부 수뇌들을 안심시키려한 것이었다.

게다가 윌리엄 A. M. 스펜서는 50년 2월경 피츠버그에 있던 1만 3천명 가량의 50보병사단을 애팔래치아 전선에서 웨스트버지니아 경계 부근으로 옮겨 남부군을 공략할 것이라는 은근한 신호를 보냈다.
물론 이는 윤주용이 피츠버그와 클리블랜드에 주둔한 4개 사단으로도 작전을 펼치기에 충분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북부측에서는 휴전 제의를 거절하였으나 그들은 당분간 서부군이 자신들에 대해 공세적 작전을 펼 수 없을 것이라는 서부군측에 의해 유도된 오판을 하였다.

전초전: 이리호 기뢰소해 작전

49년 3월 19일, 태평양 과도위원회는 이리호중 자신들의 ‘영해’에 해당하는 구역이 북부측이 부설한 기뢰가 떠다니니 그것을 제거하겠다는 군부 공식 서한을 북부에 보냈다.

북부는 영해 같은건 없다는 답신을 보내왔지만 실제로 윤주용이 노린 것은 답신이 아니었다.
작전 개시후 나이아가라강 부근에서 후방 교란을 펼치기 위한 탐색을 실시하고 신속한 기뢰소해를 연습하는 동시에 북부에 서부군이 무언가 하기전에 통보한다는 신뢰를 주어 그들이 완전히 안심하게 만드려는 것이었다.

3월 23일부터 4월 1일까지 명목상 기뢰소해 작전이 펼쳐졌고 예상대로 북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윤주용은 북부에 또 한번 혼선을 주기 위해 미시시피 전역 세인트루이스에 수백명을 증원배치 하여 북부가 자신들이 아닌 남부를 공략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4월 중순부터 북부측은 서부군이 자신들을 건드리지 않고,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는데 뉴욕 전선에서 물자와 인력이 조금씩 남부로 이동하고 있었고 피츠버그와 클리블랜드에 남은 서부군의 4개 사단도 별다른 이상 동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작전 개시

서부군의 실제 군사력은 북부군을 압도하였지만 인공위성등 정보 자산은 상당히 부족한 편이었다. 따라서 정보 자산을 통한 대비가 불가능할 정도로 신속한 작전 전개가 필수적이었다. 서부군은 상당수의 전차와 공군 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북부군이 사실상 보병과 드론, 대공방어 위주의 방어, 소모전을 펼치는 것을 주력으로 하고 있어 전력을 가능한 소모시키지 않아야 했다.

5월 20일, 차량화가 어느정도 진행된 15보병사단과 제8기갑사단이 피츠버그를 출발하여 9시간만에 베드포드 회랑 초입에 도달했다. 동시에 회랑에 있던 주요 소도시를 기습적으로 폭격하여 작전의 개시를 알리는 동시에 북부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같은 시기 2기갑사단이 이리호 해변을 따라 버펄로로 북상하기 시작했으며 새로 편성된 해군 특수부대가 소형정을 타고 기뢰를 소해하며 버펄로에 도달, 후방 교란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북부군 수뇌부는 순간 패닉에 빠졌으나 이내 태세를 정비했고 안정을 되찾았다. 아무리 기갑사단이 수적으로 많고 뛰어난들 버펄로에는 수많은 대전차화기가 준비되어 있었고 애팔래치아 전선은 산맥이 자연 방벽을 형성하는 동시에 버펄로 전선과 무장 수준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서부군에게 주어진 진격로는 이리호 해안선과 베드포드 회랑 밖에 없다고 여긴 북부군은 이번 침공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것 또한 타당한 예측이었다.

한편 서부군은 제공권을 잃지 않기 위해 대공포를 배치하는 것은 물론 대량의 무인기를 띄웠고 유사시 미사일 타격까지 고려하여 대규모 이동식 발사대를 인근에 준비시켜놓았다. 서부군이 애팔래치아 전선에 도달한지 2시간만에 북부군은 베드포드 회랑에 있던 서부군의 기갑사단이 사라져있는 것을 발견한다. 북부군은 몇분후에 전차사단이 볼드 이글 협곡을 따라 우회기동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급히 공군 타격부대를 보냈으나 이를 예상하여 든든한 야전 방공 체계를 갖추고 있던 과도위측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한채 상당한 수의 전투기를 잃고 만다. 8사단은 아무런 저항 없이 볼드 이글 협곡을 따라 계속 진격했고 대규모의 공병과 보급부대를 동원하여 6시간동안 100km의 엄청난 진격속도를 보여주었다.

한편 12기계화보병사단은 북부측이 결정적으로 예측하지 못한 진격로인 앨리게니와 서스케하녹 국립공원을 가로질러 이타카로 진격해나갔다.

급습

윤주용은 이 작전에서 직접적 타격보다는 ‘심리적 공포감’을 강조했는데 그는 최대한 많은 병력이 최대한 빠른 시간에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했다. 실제로 8기갑사단은 작전중 낙오된 전차도 많았으나 어쨌든 그들의 목표지점인 해리스버그에 도달하는데는 성공하여 전술적 목표를 달성했다. 한마디로, 북부군에게 허를 찔렸다는 공포감을 심어줌으로써 그들의 적은 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베드포드에서 출발하고 15시간 뒤 8기갑사단은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워싱턴에서 150km가량 떨어진 해리스버그에 무혈입성했다. 너무나 빠른 진격에 전차들은 부하에 걸렸으며 병사들도 지쳐있어 북부측의 저항은 없었음에도 8기갑사단은 공세종말점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북부측은 패닉에 빠졌다. 자연방벽이 어쨌거나 뚫렸고 8기갑사단이 재정비하면 워싱턴과 볼티모어라는 대도시들의 함락은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5월 21일 아침, 북부정부 요인들은 워싱턴에서 델마바 반도를 통해 필라델피아로 급히 떠났으며 수스케한나강의 모든 다리를 끊을 것을 지시했다. 메릴랜드 전 지역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8기갑사단은 수스케한나강 상류에서 이 첩보를 입수하고 진격로를 재설정하고 있었다. 22일 오전, 애팔래치아 전선군이 항복했고 15사단은 25일 워싱턴에 입성했다.

12기계화보병사단도 21일 새벽 뉴욕주 소도시인 이타카에 무혈입성했고 곧장 시러큐스로 향했다. 그날 정오도 채 되지않아 12사단은 시러큐스 주둔군 1천여명을 항복시키고 보급선을 장악하여 버펄로 전선군을 강하게 압박했다. 그럼에도 버펄로 전선군은 캐나다의 후방지원 덕분에 다음달 6월 1일까지 버티다가 캐나다로 후퇴한다.

뉴욕 함락

20일부터 22일까지의 작전 성공으로 서부군은 사실상 뉴욕-온타리오 전선에서 완전한 승기를 잡았다. 애팔래치아 전선군이 항복하며 북부군의 절반 가량인 1만여명이 투항하고 무장해제되었으며 나머지 4천명은 버펄로 전선에 남아 정부측과 영토상 분리되어 23일 북부군이 뉴욕주 동부에서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3천명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5월 24일 아침, 재정비를 마친 8기갑사단은 곧장 필라델피아로 진격하였고 북부정부는 25일에는 뉴욕, 27일에는 보스턴으로 옮겨갔다. 26일, 12기계화보병사단은 동진하여 27일 뉴욕주 주도인 올버니를 함락시켰고 28일에는 그대로 남하하여 북상하던 8사단과 뉴어크 부근에서 만났다. 한편 북부군은 맨해튼으로 들어서는 모든 다리를 끊고 후퇴했다. 변변찮은 반격조차 할 수 없었던 500여명의 북부군은 하루동안 허드슨강을 사이에 두고 서부군과 대치하다가 정부를 따라 보스턴으로 후퇴하였고 이에 따라 서부군은 30일 맨해튼에 입성했다.

6월 1일, 2기갑사단은 버펄로에 들어왔고 윤주용과 12사단과 8사단은 맨해튼에서 개선식을 열었다.

이로써 북부군과 서부군의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으며 6월 2일, 퀘벡 주정부가 독립을 선포하고 아메리카 과도위원회와 독자적으로 강화협상에 들어가며 캐나다 정부도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종결

6월 3일, 과도위는 북미연방과 캐나다에 무조건 항복을 요청했다.

6일, 캐나다 정부는 항복했으나 나이아가라 강에 주둔하던 버펄로 전선군은 크게 반발했으며 다음날 도하하던 2기갑사단과 독자적으로 전투하다 20여명의 부상자가 나온뒤에야 항복했다.

8일, 2기갑사단장 로버트 에반즈는 나이아가라 폴즈로 스티브 테리 캐나다 총리를 불러 항복 문서에 서명케 했다.

11일에는 뉴욕에 주둔하던 8사단이 뉴욕에서 코네티컷으로 이어지는 스템포드 회랑으로 진입하였고 북부군은 이곳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으나 300여명의 사상자라는 괴멸적 피해를 입고 패배하였다.

과도위는 북미연방에 항복할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였고 15일 강화협상을 요구, 서부군이 이를 받아들여 코네티컷 하트퍼드에서 3주간의 강화협상을 벌였다.

6월 25일, 캐나다 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모두 과도위의 관할 아래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강화협상은 서부군의 일방적이고 강경한 요구를 서부군이 아주 약간만 완화시켜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7월 8일, 결국 마지막 미합중국 대통령이자 북미연방의 수반이었던 에드워드 모리스는 물론 각료 몇명의 신병이 과도위측으로 넘어오면서 북미연방은 최종적으로 멸망했다.

결과와 영향

이 작전으로 북미연방과 캐나다가 멸망하며 서부군의 북부전선에 대한 압박은 완전히 사라졌다.
오대호 공세 이후 북부군의 공세작전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음에도 서부군은 뉴욕전선에 병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으나 이 전투로 병력 분산에 대한 압박은 해소되었고 총 전력을 남부에 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남부군은 버지니아 방면, 미시시피 전선 두곳과 애팔래치아 산맥을 통한 서부군의 다방면 공세 압박에 시달리며 전력을 꾸준히 소모시키고 만다.
게다가 2049년 8월경 전선의 다방면 압박을 해소하겠다는 이유로 중립을 유지하던 플로리다주를 침공하는 치명적 오판까지 저질렀다.

엔칠라다 작전은 안그래도 서부군측에 유리하게 돌아가던 전세에 쐐기를 박으며 남북연합군에 사실상 종언을 고한 전투였다.

아울러 이 작전의 성공으로 아메리카 과도위원회 내에서 윤주용의 입지는 크게 상승했으며 과도정부내 권력의 추가 점차 윤주용으로 옮아가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