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한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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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제25, 26, 28대 내각총리대신
여운형
呂運亨 | Yeo Un-Hyeong
출생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現 대한성 양평군)
사망 1982년 2월 19일 (향년 95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대학병원
본관 함양 여씨
재임기간 제25대 내각총리대신
1945년 10월 11일 ~ 1949년 10월 7일
제26대 내각총리대신
1949년 10월 7일 ~ 1952년 4월 3일
제28대 내각총리대신
1956년 4월 2일 ~ 1960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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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장상이민헌문공 (莊商彛敏獻文公)
회숙(會叔)
몽양(夢陽)
부모 아버지 여정현, 어머니 경주 이씨
배우자 강릉 유씨(사별)
진상하
학력 양근고등보통학교
배재대학교(제적)
숭실대학교 법학(학사)
종교 개신교(장로회)
소속정당
약력

개요

대한국의 15대, 17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정치인, 사민주의자. 일본과의 전쟁 도중 김창암과 거국적인 대연정을 결성했으며 김창암을 충실히 보좌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집권 이후에는 사회 제도등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현대 한국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생애

어린 시절

젊은 공산주의자

엄격한 보수주의 양반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에 대한 반동이었던 것인지 여운형은 급진적인 사상에 점차 빠져들게 된다.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 접한 것은 1905년으로 당시 배재대학에는 ‘코뮤니즘 그룹’이라 하여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에 대해 토의하는 곳이 있었는데 친구의 권유로 그는 이곳에 가입하게 되었고 한성의 다른 공산주의 단체와 협력하여 계급 투쟁이나 구습 타파 같은 신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세상을 한번 바꿔보자고 결심한 그는 1907년 12월 7일 대한사회주의청년단을 조직해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매진하는데 여러 공산주의 단체가 규합되면서 그 세력이 점점 커졌고 극좌 계열 자유민권 단체도 참여하면서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좌파 단체로 거듭났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으로 1908년 청년단은 해산되었고 여운형도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두달동안 한성형무소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다 풀려난다. 배재대학에서도 제적당한 여운형은 만주로 건너가 그곳에서 반제국주의범민족동맹을 결성, 열정적인 공산주의 투쟁을 벌인다. 또한 일본제국의 고토쿠 슈스이등 외국의 여러 사회주의 활동가와 교류하기도 했다. 1909년 에는 할빈에서 아예 대한공산당을 조직해 스스로 당수에 취임, 반제국주의/반황(反皇) 구호를 내걸고 공산 혁명을 모의하다 1년도 안되어 또다시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1910년 4월에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3차 김홍집 내각때 법무부대신을 지냈고 당시 압도적인 여당 지위에 있었던 국민당의 전신 입헌당에서 부총재를 지내고 있었던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같이 사형선고를 받은 동지들과 함께 사형을 면해 모두 10년형으로 감형되어 충청도 회덕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중에서도 여운형은 1년 10개월만에 가석방된다.

가석방된 그는 아버지의 지독한 설득에 평양 숭실대학 법학과에 중도입학하였고 1915년 졸업한다. 이후에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 평양에서 지냈지만 아내인 진상하를 내팽개쳐두고 기생집에 드나들거나 도박을 하는등 1년이라는 세월을 난봉꾼으로 보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만주로 가서 이전의 탄압으로인해 지하 점조직으로 활동하던 각 공산주의 단체를 다시 규합한다. 그리고 혁명의 상황을 시시각각 보고받아 지하 신문으로 발간하는 발행인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를 전향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처형이었다. 당시 러시아에 파견되어있던 특파원은 니콜라이 2세 처형 당시의 온갖 소식과 소문을 전달하였고 이는 여운형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무능하고 악독했던 임금이라지만 일국의 황제였던 사람을 재판도 없이, 그것도 황제 본인만이 아니라 일가족 심지어 하인들까지 모조리 총살했다는 것에 대해 여운형은 큰 충격을 받았고 혁명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된다. 결국 1919년 8월 여운형은 공산주의 지하단체를 탈퇴하였고 평양으로 돌아와 제대로된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저소득 평민, 노동자 계층이나 옛 천민이 겪은 부조리한 사건들에 대해 주로 변론을 맡았고 이로인해 평양에서 큰 인기를 얻게되었으며 이 덕분에 1924년 사회민주당의 전신인 신사회동맹의 법무 책임자로 영입된다.

정계 입문, 사민당 당수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927년 국민원 총선거에서 평양 4구 의원으로 당선된다. 그는 뛰어난 연설 실력, 잘생긴 외모로 덕분에 빠르게 당권을 장악해나갔다.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이 바뀌고 난 후 치러진 1931년 전당대회에서는 자신을 영입한 김익용까지 밀어내고 당수 자리를 차지한다.

전시내각의 부총리

집권 1기

1945년 8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사민당 단독과반을 이뤄낸 그는 김창암의 뒤를 이어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는 집권 초기 서울 환도를 강력히 주장했는데 무종이 장춘을 새로운 수도로 삼으려 하자 단념하고 본격적인 장춘 개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 서울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1기 임기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다. 서울 재건 작업을 진두 지휘했고 각종 구휼정책을 펼쳤으며 국민건강보험공사의 전신인 ‘국가재건공사’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건강보험료뿐만이 아니라 파괴된 건축물이나 전쟁으로 인한 사업상 손해까지 지원해주었다. 싼값에 치료받을 수 있게된 시민들과 부상병들은 여운형의 정책에 대해 큰 지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