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시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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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47·49대 내각총리대신
요시다 시게루
吉田 茂 | Yoshida Shigeru
출생
1878년 9월 22일(1878-09-22)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사망
1967년 10월 20일 (89세)
일본 가나가와현 나카군 오이소마치
재임기간
제47대 내각총리대신
1948년 6월 3일 ~ 1949년 8월 21일
제49대 내각총리대신
1950년 6월 25일 ~ 1956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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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내 요시다 키요코
학력
도쿄제국대학 (정치학 / 학사)
지역구
고치 전현구
의원 선수
7 (중의원)
의원 대수
23, 24, 25, 26, 27, 28, 29
소속 정당
자유민주당
약력
외무성 관료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는 일본의 정치인이자 일본의 제47·49대 내각총리대신이다. 2003년까지 존재했던 전후 자유민주당 주류의 아버지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재건과 국가발전방향을 제시한 총리이다. 1948년 집권해 1949년 잠시 물러났다가[1] 1950년 새벽진군으로 수상직에 복귀, 1956년 실각할 때까지 자민당을 쥐고 흔든 원맨[2]이었다.

상세

1948년 6월까지 총리를 지낸 시데하라 기주로는 미국의 압력에 의해 수상직을 사임해야 했다. 요시다의 자민당은 집권에 필요한 의석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토야마 이치로[3]민주당이 재무장에 대한 요시다의 입장을 찬성으로 분명히하면 자민당에 흡수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요시다는 재무장에 은연중에 찬성 입장을 내비치던 시데하라 총리를 외무상으로 보임하는 선에서 합의를 요구했고, 이를 하토야마가 받아 자민당은 원내 1당이 되었다. 아직 전후 총리를 정확히 어떻게 선출한다는 개념이 잡혀있지 않던 당시였던지라, 1당의 총재가 총리가 되어야한다는 요시다의 논리는 먹혀들어, 진보당의 아시다 히토시는 내키지 않았지만 요시다를 총리로 하는 것에 동의했다.[4][5]

1949년 1월 요시다는 자민당의 의석 수를 불리기 위해 의회를 해산, 진보당과 사회당을 격파하고 225석을 확보하는 대승을 거두며 2차 내각을 시작한다. 하지만 요시다의 첫 집권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바로 하토야마 이치로가 자신을 따라 합당한 의원들과 외부세력인 진보당을 끌어들여 요시다 총리에게 사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요시다는 이 때 의원수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길게 유지하지 못할 내각임을 직감해 하토야마에게 총리자리를 물려주고 체제를 계속 유지시켰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정권탈환을 목표로 수면 아래서 움직이던 요시다는 한국전쟁 개전 소식이 급보로 전해지자마자 하토야마가 1년 전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의원들을 데리고 관저로 찾아가 국민협동당과 무소속 의원들을 동원해 내각 하토야마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이것이 요시다의 새벽진군이다.

새벽진군 이후 자민당 내의 하토야마파는 자민당을 나와 시게미츠 마모루의 진보당과 합당, 이후 당명을 개진당으로 변경해 자민당을 견제했다. 자민당 역시 미키 타케오국민협동당을 합당해 1당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하지만 자민당 내에서 협동당과의 합당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시바시 단잔이었다.

이시바시파는 1952년 총선까지만 해도 반대만 표했다 뿐이지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52년 총선에서 사회당 좌우파가 분열되었는데 49년 총선보다 더 높은 득표율을 보인 것을 보고 분당을 직감, 이시바시파로 구성된 자민당을 차려 요시다 자민당을 압박했다. 이시바시 자민당은 재무장을 들고나왔다. 요시다는 시데하라의 외교원칙에 따라 비군을 주장했기 때문에 이시바시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그러던 와중 중의원 질의에서 우파사회당의 니시무라 에이이치 의원의 질문에 대해 "바카야로(バカヤロー)"라고 중얼거린 것이 마이크에 잡혀 징계안이 중의원에 회부되었다. 현직 총리에 대한 징계는 전례가 없었지만 이시바시 자민당 의원들이 불출석하면서 징계안이 통과, 내각이 총사직해야하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요시다는 어쩔 수 없이 의회를 해산, 이 때문에 실시된 총선은 바카야로 총선이 되었다.

하지만 1년만의 총선거에서 요시다는 이미 경제회복이라는 명분을 쥐고 있었고, 선거는 싱겁게 요시다 자민당과 이시바시 자민당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도 야권에 위안인 점은 여당 내 야당 같은 이시바시 자민당 없이는 요시다가 다시 내각을 구성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각주

  1. 잠시 물러나게된 이유도 1948년 집권 당시 요시다의 영원한 라이벌 하토야마가 요시다의 실각을 노렸기 때문이다.
  2. 일본어에서 원맨(ワンマン)은 고집불통에 독선적, 오만함 등 독재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3. 후술하겠지만 요시다의 영원한 정적이었다.
  4. 진보당이 국회해산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만, 전후 의회 해산이 이루어진 전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시다는 괜한 리스크를 지고싶지 않아 했다.
  5. 당장 요시다의 49년 해산도 GHQ에서 총리에 그런 권한은 없다는 공문이 날아올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한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요시다가 맥아더와 담판해 해산에 성공했지만, 그정도로 리스크가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