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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황제 이척
隆熙皇帝 李拓

본명
이척(李拓)

타쿠히토(拓仁)

종족
인류 사피엔스 계열
국적
대한제국
일본국
성별
남성
가족관계
광무황제 이환 (증조부)
대친왕 이휴 (조부)
개성공 이왕 (부친)
메이지 덴노 (외조부)
시게코 황녀
황태자 이강 (장남)
영친왕 이영 (차남)
금친왕 이휼 (삼남)
계양왕 이균(서장남)
생년월일
1894년 1월 4일
출생지
한성부 창덕궁 관물헌
직위
대한-일본 이중제국 황제
소속
대한-일본 이중제국 황실
특이사항
1948년 중성자탄 피격 이후 동면관에서 치료 중.
상태
생존


개요

동방의 등대인 대한제국의 유일무이한 태황이시자 만세일계 대일본제국의 123대 천황이신 이척-타쿠히토 폐하

(東方燈臺大韓帝國太皇 兼 萬世一係大日本帝國天皇 李拓-拓仁 陛下)

1902년 대한제국 태황과 일본제국 천황자리에 즉위하여 대한-일본 이중제국을 결성하였다. 양차 세계대전기 동안 훌륭하게 제국을 통치하였으며 50여년동안 제국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으나 1948년 테러범에게 중성자탄을 피격받아 동면관에서 치유중이다.

생애

유년기

1894년 1월 4일 대한제국 개성공 이왕과 일본제국 시게코 내친왕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한일 혼혈 황족이라서 큰 관심을 받았다.

1902년 한국 외무대신 김인택의 제안으로 두 제국이 그를 중심으로 통합한다는 것을 결정하자 만 8세의 나이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식 때 의젓한 모습으로 또래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줘 놀라움을 보여주었다. 이후 이중제국의 황제이지만 어린 나이인 나머지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보통은 두 제국의 상황인 메이지 덴노와 순효제 이철이 맡았다.

성인

1913년 만 19세의 나이로 첫번째 대외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1년 뒤인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암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때 황제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표명하자 제시하였고 이는 1915년 중화제국과의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이때 1년간 축적된 자원으로 유럽전선에서 미국과 함께 랜드리스를 통해 협상국을 도와주었다.

1915년 중화제국의 위안스카이가 대한-일본 이중제국에게 선전포고 없이 기습하였다. 이때 영국이 영일동맹의 내용을 가지고 대대적으로 협상국에 가입하라는 압박을 넣어서 결국에는 협상국 편에 서서 전쟁을 시작하였다. 전쟁기 동안 유럽전선에는 개성공 이왕이, 아시아 전선에서는 순효황제 이철이 주도하는 한국군은 동맹국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어 내었다.

그러나 1918년 8월 29일 벌어진 사건으로 아버지 개성공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크게 상심하였으나 제국의 황제인 그는 곧 이어서 피해를 복구하는데 최전선에 섰다. 직접 피해도시 복구에 참여하였으며 방사능 보호구를 내탕금을 털어서 국민들에게 지원하는 등 여러 일을 하였다. 이에 처음에는 그를 의심하고 싫어하던 국민들 또한 그를 인정하고 존경하기 시작하였다.

허나 자신의 가정은 온전치 않았는데, 어머니 시게코 내친왕이 남편을 잃은 충격에 광증에 시달리기 시작하였으며 동생 이운은 독일과 구 동맹국에 대한 막대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이는 2차 세계대전기에서 양원공 이운이 참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22년 어머니 시게코 내친왕이 실종되었다. 그는 제국익문사에 의뢰하여 내친왕을 수색하라는 명을 내리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중제국 내부에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수색만 맡겨놓고 내치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내치에 집중을 하였으나 1929년, 미국에서 발생한 주식시장의 붕괴와 이중제국에서 발생한 부동산 버블과 주식 거품이 한꺼번에 터짐으로 전 세계에 초대공황(Hyper Depression)이 발생하였다.

전간기

대공황 일어난 직후 그는 내각을 불러 수습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상공부대신 강번과 고이즈미 마타지로 국토교통대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외화 보유고 또한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내탕금에서 최대한 달러를 충원하였으나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실업률은 한국과 일본 포함해서 30%에 육박하게 되었으며 아라카와 강과 한강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자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야흐로 난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난세에는 영웅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는 전 상공부대신의 참모였던 이회영이었다.

이회영은 사업가 출신으로 경제에 빠싹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12월 24일 성탄절 하루 전날에 황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상소문을 들고왔다 하였으니 황제는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가 올린 상소문을 본 황제는 그의 비책이 현 제국에 필요하다 판단, 특권을 사용하여 현 내각을 해산시키고 이회영을 중심으로 한 내각을 새로 구성하였다. 이 사건은 초반에는 "황제가 미쳤다" "전제 제국주의로 돌아가려는 것인가" 라는 비판에 직면하였으나 계속되는 실업과 주식 폭락에 지친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황제를 지지해보았다. 그리고, 제국은 경제적인 위기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이회영이 주도하는 질서 - 즉 대규모 토목사업과 공공시설 건립정책은 당시 낙후되어 있던 많은 지역을 다시 재건하자는 것이였다. 이는 이중제국이 통합되었을 때 부터 나왔던 말이었는데, 그동안에는 모든 정권이 이 정책에 필요성은 통감하고 있었으나 정작 실행하기에는 정치적 반대파가 꽤나 심해서 진행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뉴-딜이라고 하는 정책을 본받아 시설도 개편하고 실업률도 낮추는 이 정책은 당장 제국의 숨통을 띄우게 하는데 적격이었다.

이회영은 착실히 제국을 개편해 나아갔으며 황제는 예산이 부족한 만큼 내탕금에서 타가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이에 제국의 경제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공공시설 건립 정책 뿐만 아니라 중공업, 우주산업, 소비재 산업 등에도 투자를 하였다. 그러나 정책의 효과와 내탕금의 돈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경제 성장률도 낮아지고 실업률이 늘고 있었던 그때, 월면전쟁이 발발하였다

2차 세계대전

월면전쟁으로 한껏 키워놨던 중공업과 우주산업이 큰 호황기를 맞이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업가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으며 제국은 유래없는 전성기를 다시 맞이하기 시작하였다.

만 39세의 나이로 그는 제국 곳곳을 다니며 달과 전쟁을 시작하는 국민들을 다독였다. 이는 경제를 부흥시킨 황제와 총리의 인기를 한껏 끌어올렸으며 훗날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대가 이때 나왔다. 이후 월면전쟁에서 연합군이 승기를 거두자 그는 안심하고 내치에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럽에서 나치가 전쟁을 시작하였다.

독일이 또 다시 전쟁을 시작한 것에 충격을 받은 많은 이들은 분개하였고 이는 한일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영웅인 개성공을 전쟁에서 잃은 제국이 독일에게 품은 악감정은 상당하였으니 이는 양원공 이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유럽전선에 직접 파견해달라 요청하였으나 황제는 번번히 거절, 그러나 보내지 않겠다면 망명을 해서라도 참전하겠다는 그의 협박에 결국에는 그를 "파 구주 대한-일본 총사령관" 직에 임명한 후 유럽전선으로 보냈다.

양원공은 전선에서 꽤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직접 파워아머를 입은 체 독일군 장병들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양원공이 잔혹하다고 하였으나 부친을 잃은 그의 사정을 아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 독일 전선에서 활약하는 그를 칭송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1944년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아군 병력 2만이 퇴각하는 시간을 후미에서 벌다가 적군 중력탄에 피격당하여 전사하였다.

양원공까지 사망한 소식을 들은 황제는 이번에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전쟁은 그를 가만히 둘 수 없었으니 그는 찢어지는 심정에도 끝까지 제국을 위해서 굳건한 모습을 신민들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심상은 점점 곪아가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가던 1948년 8월 15일, 그는 조부 대친왕의 탄신일 겸 대한-일본 이중제국 탄생 46주년 행사를 위해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12시 즈음 다 되어가던 그때, 단상에 앉아있던 그를 어느 중년 남성이 중성자 탄으로 저격하였다. 초발을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피했으나 곧 이어 발사된 차발에 어깨와 폐, 간과 신장이 피격당해 큰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으며 제국 최고의 병원인 백병원에 입원하여 백인제 교수가 27시간에 가까운 집도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내부 장기 파손으로 수년간의 동면관 치유가 필요하다 판단, 결국 황태자가 임시 섭정이 된 체 동면관에서 4년이 넘는 시간동안 현재까지도 잠들고 있다.

현재

1948년 습격사건 이후 현재까지 동면관에서 있는 그를 대신하여 황태자가 섭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황제와는 달리 젊은 황태자는 독선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대한제국에만 우선권을 주는 제국 내부에서 큰 반발을 받고 있다. 이에 융희황제를 그리워하는 신민들이 늘고 있으나 그는 여전히 동면관에서 치유중이다. 최근에는 74%까지 치유가 되었다고 하는데 의식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