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155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분류:네이션즈]][[분류:설정]]
[[분류:설정]][[분류:이집트]][[분류:로마와 동지들]]{{로마와 동지들 배너}}{{틀:파벨 설정}}<br>{{블파 제작}}
{{틀:파벨 설정}}
-------
 
[[파일:콥트 십자가.png|60px|left]][[파일:콥트 십자가.png|60px|right]]<small>  • 본 문서는 [[블파]]에게 소유권이 있습니다. '''문서 제작자''': [[블파]] | '''분류''': 국가/설정 </small>
-------


{{나무위키 국가 정보
{{나무위키 국가 정보
| 너비 = 400px
| 너비 = 450px
| 테두리 색 = #ffd600
| 테두리 색 = #ffd600
| 틀 색 = #000000
| 틀 색 = #000000
| 글씨 색 = #Ffd600
| 글씨 색 = #Ffd600
| 국명 = 위대한 애긥토스-가장 거룩한 이집트<br/>가장 고귀한 파라오-바실레우스 제국
| 국명 = 위대한 애긥토스-가장 거룩한 이집트 제국
| 특수 국명 = 위대한 애긥토스-가장 거룩한 이집트 및 가장 고귀한 파라오-바실레우스 제국
| 특수 국명 = 이집트
| 원어명 = Μεγάλη Αίγυπτος
| 원어명 = Πιο Ιερά Βασιλεία Αιγύπτιος<br>Πιο Ιερά Αυτοκρατορίας της Αιγύπτιος
| 국기 = CopticEgypt.png
| 국기 = CopticEgypt.png
| 국기 크기 = 160px
| 국기 크기 = 160px
18번째 줄: 19번째 줄:
| 범례 배경 색 = #000000
| 범례 배경 색 = #000000
| 범례 글씨 색 = #ffd600
| 범례 글씨 색 = #ffd600
| 모토 = 복음사가 마르코로부터 전해지는 거룩한 교회와 땅
| 모토 = <center>[[파일:콥트 십자가.png|30px]]</center> <big>Ⲓⲏ̅ⲥ̅ Ⲡⲭ̅ⲥ̅ ⳿ⲡϣⲏⲣⲓ ⳿ⲙ⳿ⲫϯ</big><br>Ⲓⲏⲥⲟⲩⲥ Ⲡⲓⲭⲣⲓⲥⲧⲟⲥ ⲉⲡϣⲏⲣⲓ ⲉⲙⲉⲫⲛⲟⲩϯ<br>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국가 =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았다]]<br>[[이집트, 만세!]]
| 국가 =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았다]]<br>[[이집트, 만세!]]
| 국화 =
| 국화 =
25번째 줄: 26번째 줄:
| 국수 = [[마르코의 사자|성 마르코의 사자]]
| 국수 = [[마르코의 사자|성 마르코의 사자]]
| 수호성인 = [[복음사가 마르코|聖 복음사가 마르코]]
| 수호성인 = [[복음사가 마르코|聖 복음사가 마르코]]
| 지도 = Egyptpixel s.png
| 지도 = 이집트지도2.png
| 역사 =
| 역사 =
* 이집트 문명 B.C. 32C ~ 4C
* 이집트 문명 B.C. 32C ~ 4C
* 프톨레마이오스조 B.C. 305 ~ B.C. 30
* 프톨레마이오스조 B.C. 305 ~ B.C. 30
* 파벨라노스조 B.C. 150? ~ 현재
* 파벨라노스조 B.C. 154 ~ 현재
* 로마 제정 하의 이집트(동부) B.C. 30? ~ A.D. 400?
* 유다이아 지방 상실 A.D. 1세기 초
* 파벨라노스조의 이집트 유일군주 선언 A.D. 450?
* 로마 제정 하의 이집트(동부) B.C. 30? ~ A.D. 405
* 알렉산드리아 기독교 공인 및 국교 천명 A.D. 500?
* 기독교 공인 A.D. 313
* 유대 지방 복속 A.D. 500?
* 기독교 국교 천명 A.D. 395
* 이슬람 방어 전쟁 A.D. 639 ~ 648?
* 파벨라노스조의 이집트 유일군주 선언 A.D. 451
* 유대 지방장관령 설치 A.D. 650
*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의 국교화 A.D. 505
* 유다이아 지방 재복속 A.D. 532
* 골고다 언덕 위에 그리스도 대성당 준공 및 건물 축성 A.D. 582
* [[對이슬람 방어 전쟁]] A.D. 629 ~ 634
* 유다이아 지방장관령 설치 A.D. 650
* 그리스어를 "유일"의 국어로 지정 A.D. 654
* 콥트 성모 대성당 시공 A.D. 662
* 콥트 성모 대성당 완공, 축성 A.D. 1066
* 초대 최고재상(총리) 임명 A.D. 1654
* 제국 헌법 제정 A.D. 1742.01.13
* 현재의 국기ㆍ국장 제정 A.D. 1806
* 콥트 성모 대성당 붕괴 A.D. 1814
* 2차 헌법 A.D. 1828
* 콥트 성모 대성당 재건 및 증축 A.D. 1869
* 알렉산드리아-카이로 지방지하철 개통 A.D. 1908
* 전국 도로 정비 사업 A.D. 1918 ~ 1937
* 현행 헌법 A.D. 1945
| 수도 = [[알렉산드리아|가장 위대한 도시 알렉산드리아]]
| 수도 = [[알렉산드리아|가장 위대한 도시 알렉산드리아]]
| 최대 도시 = [[카이로 광역도시]]
| 최대 도시 = [[카이로 광역도시]]
| 면적 = 840,843.03km²
| 면적 = 미조사
| 내수면 비율 =  
| 내수면 비율 =  
| 구성국 = [[이집트 파라오-바실레우스령]], [[콥트 교황령]], [[유대 지방장관령]]
| 구성국 =
| 접경국 =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에리트레아]]
| 접경국 =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에리트레아]]
| 총 인구 = 90,436,688명
| 총 인구 = 155,010,381명
| 인구 밀도 = 107.5
| 인구 밀도 = 자료없음
| 인종 구성 = 이집트인 85.4%, 유대인 14.6%, 기타 1%
| 인종 구성 = 이집트인 85.4%, 유다이아인 14.6%, 기타 1%
| 출산율 =  
| 출산율 =  
| 평균 수명 =
| 평균 수명 =
| 기대 수명 =  
| 기대 수명 =  
| 공용어 = 그리스어
| 공용어 = 에굽 그리스어
| 지역어 = 콥트어, 히브리어, 암하라어
| 지역어 = 콥트어, 히브리어, 암하라어
| 공용 문자 = 그리스 문자
| 공용 문자 = 그리스 문자
| 국교 = 기독교(콥트 정교회 다수)
| 국교 = 비칼게돈파 기독교-'''[[콥트 정교회]]'''
| 종교 분포 = 기독교 92%, 기타 8%
| 종교 분포 = 기독교 92%, 기타 8%
| 군대 = 이집트의 군대
| 군대 = 이집트의 군대
|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정<ref>명목상</ref>, 전제군주정<ref>사실상</ref>, 정교일치, 의원내각제
|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정<ref>명목상</ref>, 전제군주정<ref>사실상</ref>, 정교일치, 의원내각제
| 민주주의 지수 =  
| 민주주의 지수 =  
| 행정구역1 명칭 =  
| 행정구역1 명칭 = 황제령
| 행정구역1 =  
| 행정구역1 = 3개 (바실레우스령, 산하 지방장관령)
| 행정구역2 명칭 =  
| 행정구역2 명칭 = 왕령
| 행정구역2 =  
| 행정구역2 = 1개 (누비아-블레미야 연합왕국)
| 행정구역3 명칭 =  
| 행정구역3 명칭 =
| 행정구역3 =  
| 행정구역3 = 16개
| 행정구역4 명칭 =  
| 행정구역4 명칭 =
| 행정구역4 =  
| 행정구역4 = 28개
| 행정구역5 명칭 =  
| 행정구역5 명칭 =
| 행정구역5 =  
| 행정구역5 = 63개
| 국가 원수 명칭 = 전 이집트의 파라오이자 바실레우스
| 국가 원수 명칭 = 전 이집트의 황제
| 국가 원수 = 아우구스토스 트라야노스 3세 '''파라오-바실레우스 폐하'''
| 국가 원수 = [[아우구스토스 트라야노스 3세 (로마와 동지들)|아우구스토스 트라야노스 3세]] '''바실레우스 폐하'''
| 행정 각료1 명칭 = 교황
| 행정 각료1 명칭 = 교황
| 행정 각료1 =  요안네스 20세 '''교황 성하'''
| 행정 각료1 =  타와드로스 2세 '''교황 성하'''
| 행정 각료2 명칭 = 최고 재상
| 행정 각료2 명칭 = 최고 재상
| 행정 각료2 = 아야디르 요한 말레야암(Αγιαδίρ Τζον Μαλένιαμ)<br>'''각료수반 각하'''
| 행정 각료2 = [[요안니스 말레니암 (로마와 동지들)|요안니스 말레니암(Γιάννης Μαλένιαμ)]]<br>'''각료수반 각하'''
| 행정 각료3 명칭 = 유대 지방장관
| 행정 각료3 명칭 = 유다이아 지방장관
| 행정 각료3 = 베냐민 네타냐후(Μπενιαμίν Νετανιάχου)
| 행정 각료3 = 글라우코스 넬로카스(Γλαῦκος Νελόκας)
| 행정 각료4 명칭 = 환관성 장관
| 행정 각료4 명칭 = 아라비아 지방장관
| 행정 각료4 = *
| 행정 각료4 = 가브리엘 스테노스(Γαβριήλ Στενός)
| 행정 각료5 명칭 = 외무성 장관
| 행정 각료5 명칭 = 환관성 장관
| 행정 각료5 = *
| 행정 각료5 = 루카트 막시밀리트(Λουκάρτ Μαξιμίλιτ)
| 행정 각료6 명칭 = 내무성 장관
| 행정 각료6 명칭 = 외무성 장관
| 행정 각료6 = *
| 행정 각료6 = 아우구스토스 카를리니(Αύγουστος Καρλινική)
| 행정 각료7 명칭 = 재무성 장관
| 행정 각료7 명칭 = 내무성 장관
| 행정 각료7 = *
| 행정 각료7 = 카티코스 멜리자크(Κάτικος Μελιζάκ)
| 행정 각료8 명칭 = 국군성 장관
| 행정 각료8 명칭 = 재무성 장관
| 행정 각료8 = *
| 행정 각료8 = 마르코스 앙겔로스 디마리(Μάρκος Άγγελος Δημάρι)
| 행정 각료9 명칭 = 민족성 장관
| 행정 각료9 명칭 = 국군성 장관
| 행정 각료9 = *
| 행정 각료9 = 메이로스 알렉산드로스(Μάινος Αλέξανδρος)
| 행정 각료10 명칭 = 문교성 장관
| 행정 각료10 명칭 = 민족성 장관
| 행정 각료10 = *
| 행정 각료10 = 베네토스 크레토니(Μπενέκος Κρητώνη)
| 행정 각료11 명칭 = 문예성 장관
| 행정 각료11 명칭 = 문교성 장관
| 행정 각료11 = 그레고리오스 루 그레이오(Γρηγόριος Λου Γκρίο)
| 여당 = 전진하라 이집트여!(Προχώρα Αίγυπτος!)
| 여당 = 전진하라 이집트여!(Προχώρα Αίγυπτος!)
| 연립 여당 = 이집트당(Αιγυπτιακό κόμμα)
| 연립 여당 = 이집트당(Αιγυπτιακό κόμμα)
| 신임과 보완 = 이집트 민주당(Δημοκρατικό κόμμα της Αιγύπτου)
| 신임과 보완 = 이집트 민주당(Δημοκρατικό κόμμα της Αιγύπτου)
| 원내 야당 = 환경당(Περιβάλλον πάρτι)
| 원내 야당 = 환경당(Περιβάλλον πάρτι)
| 경제 체제 = 수정자본주의
| 경제 체제 = 수정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 총 GDP PPP =  
| 총 GDP PPP =  
| 1인당 GDP PPP =  
| 1인당 GDP PPP =  
| 총 GDP 명목 = $2,944,075,941,152
| 총 GDP 명목 = $4,170,788,578,322
| 1인당 GDP 명목 = $32,554
| 1인당 GDP 명목 = $28,762
| 수입 =  
| 수입 =  
| 수출 =  
| 수출 =  
121번째 줄: 139번째 줄:
| 여행금지 =  
| 여행금지 =  
| 특별여행주의보 =  
| 특별여행주의보 =  
| 문양 = 콥트십자 금색.png
| 문양 = 콥트 십자가.png
| 문양 크기 = 50px
| 문양 크기 = 50px
}}
}}


이집트는 북동부 아프리카 일대에 위치한 입헌군주정<ref>사실상 전제군주정</ref> 국가로, 그 역사가 세계적으로 대단히 오래되었다. 수도는 [[알렉산드리아]], 최대 도시는 [[카이로]]이며 인구는 2028년을 기준해 90,436,68명이고 밀도는 107.4명/km²이다. 주거 인구의 대부분은 알렉산드리아-카이로-예루살렘 등 북부에 밀집되고 있다. 서쪽으로는 리비아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수단, 동쪽으로는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이웃해 있다. 주를 차지하는 종교는 92%의 국민이 믿는 기독교<ref>절대 다수는 알렉산드리아 콥트 정교회 신자이다.</ref>로, 수도 알렉산드리아에는 교황(총대주교)좌가 위치하고 있다. 이는 [[복음사가 마르코|복음사가 성 마르코]]로부터 약 2,000년간 이어져 왔을 만큼 유서깊다. 나머지 8%의 국민들은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포함한 기타 종교들을 믿고 있다. 이집트의 인종은 이집트인 85.4%, 유대인 14.6%, 기타 1%로 구성되고 있다. 이집트의 국가 원수는 [[파라오-바실레우스]]로, 프톨레마이오스조 당시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다. 그러나 파라오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공식 석상에서 조차도 [[바실레우스]]나 [[황제]]로 지칭될 뿐이다. 때문에 이집트 내에서는 파라오라는 호칭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집트는 유래깊은 군주정 국가로, 자그마치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현재까지 군주정이 유지되고 있다. 현재 이어져 오는 왕가는 파벨라노스 왕가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방계 가문이다. 파벨라노스 왕가는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 말기에 방계로 독립하여 일부 영지를 수여받았고 이집트 일대의 지배권을 점차 늘려나갔다. 프톨레마이오스 조가 로마에 사실상 복속되고 멸망한 이후에는 로마 제국과 이집트를 양분하여, 현재의 이집트 서부를 통치하였다. 로마 제국이 이집트에서의 통제권을 점차 잃자 로마의 영향력 하에서 독립하여 이집트의 유일한 군주임을 선포하기도 했다. 로마 영향 하에서의 독립 이후에, 파벨라노스조의 왕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군주의 호칭으로 사용했던 "파라오와 바실레우스"를 그대로 사용하되 왕권을 강화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백성들이 주로 믿는 신앙이었던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며 알렉산드리아 주교에게 대관을 받아 왕권을 강화하고, 이들에게 성당과 토지를 하사했다. 이스라엘 지역을 복속하여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한 이집트는 대대적인 기독교 숭상 정책을 펴고 다른 종교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유대교와 같이 다른 신앙을 믿는 백성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유대 지방 장관령이 설치되고 점차 기독교의 비율이 사회적으로 우위에 서자 탄압 정책이 완화되면서 반발은 줄어들었다. 이후 이집트는 칼게돈 공의회 이후 콥트 교회를 정통으로 인정했고, 로마 제국의 영향력 하에서 벗어나면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이 심화되었다.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은 초반에는 이집트의 수도 직전까지 함락될 정도로 위기에 봉착했으나, 점차 지원군들이 모인 이후 명장군들의 뛰어난 전술과 전투 승리가 이어지면서 결국 이집트가 승리하고, 결국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 진입에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강화를 맺으면서 현재에까지 이집트와 그 일대 아프리카는 기독교 국가로써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가장 거룩한 이집트 제국'''({{llang|el|ο Πιο Ιερά Βασιλεία Αιγύπτιος|_}}, {{llang|en|The Most Holy Basileo-Empire of Egypt|더 모스트 홀리 바실레오-엠파이어 오브 이집트}}) 혹은 '''이집트'''({{llang|el|Αίγυπτος|_}}), {{llang|en|Egypt|이집트}}, '''가장 거룩한 나라'''({{llang|el|Πιο Ιερά|_}}), {{llang|en|Most Holy|모스트 홀리}})는(은) 북동부 아프리카 일대에 위치한 입헌군주정<ref>사실상 전제군주정</ref> 국가로, 그 역사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수도는 [[알렉산드리아|가장 거룩한 도시 알렉산드리아]], 최대 도시는 [[카이로|카이로 광역도시]]이며 인구는 2021년 7월 인구총조사 기준 155,010,381명이고 국가 주거 인구의 대부분은 알렉산드리아-카이로(나일강 유역)-예루살렘 등등 북부의 비옥한 지역과 바다 혹은 강에 밀집하고 있다. 서쪽으로 마주보는 국가로는 리비아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수단 공화국, 동쪽으로는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등이 있다. 주를 차지하는 종교는 92%의 국민이 믿는 기독교<ref>절대 다수는 알렉산드리아 콥트 정교회 신자이며, 이들은 자신의 신앙과 교회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여 다른 신앙으로 개종시키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한다.</ref>로,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는 교황(총대주교)좌가 위치하고 있는데, 알렉산드리아 교황좌는 [[복음사가 마르코|복음사가 성 마르코]]로부터 약 2,000년간 이어져 왔을 만큼 유서깊다. 기독교 이외 나머지 8%의 국민들은 유다이아교와 이슬람교를 포함한 기타 종교들을 믿고 있다. 역사적으로 국교가 기독교인 사회여서 다른 종교는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았고, 또한 기독교가 세를 넓히고 있어 근 500년간 유다이아교 신자는 정체, 이슬람교 신자는 소폭 감소하는 추세다. 이집트의 인종은 이집트인 85.4%, 유다이아인 14.6%, 기타 1%로 구성되고 있다. 이집트의 국가 원수는 [[바실레우스]](황제)로, 프톨레마이오스조 당시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며 현직 황제는 [[아우구스토스 트라야노스 3세]]이다. 또한 현직 [[이집트 최고수상대신|최고수상대신]]은 [[아야디르 요한 말레야암]]으로, 약칭 최고수상은 내각과 정부를 책임진다.<ref>명목상으로는..</ref>


이집트는 유래깊은 군주정 국가로, 자그마치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현재까지 군주정이 유지되고 있다. 현재 이어져 오는 황가는 파벨라노스 황가로, 프톨레마이오스 황가의 방계 가문이다. 파벨라노스 황가는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 말기에 방계로 독립하여 일부 영지를 수여받았고 이집트 일대의 지배권을 점차 늘려나갔다. 프톨레마이오스 조가 로마에 사실상 복속되고 멸망한 이후에는 로마 제국과 이집트를 양분하여, 현재의 이집트 서부를 통치하였다. 로마 제국이 이집트에서의 통제권을 점차 잃자 로마의 영향력 하에서 독립하여 이집트의 유일한 황제임을 선포하기도 했다. 로마 영향 하에서의 독립 이후에, 파벨라노스조의 군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황조가 군주의 호칭으로 사용했던 바실레우스를 그대로 사용하되 황권을 강화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백성들이 주로 믿는 대중적 신앙이었던 알렉산드리아 전례의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이후 이집트 군주들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며 알렉산드리아 주교에게 대관을 받아 황권을 강화하고, 이들에게 새 성당과 토지를 하사했다. 유다이아/이스라엘 지역을 복속하여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한 이집트는 대대적인 기독교 숭상 정책을 폈으며 다른 종교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유다이아교와 같이 다른 신앙을 믿는 백성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유다이아 지방 장관령이 설치되고 점차 기독교의 비율이 사회적으로 우위에 서자 탄압 정책이 완화되면서 반발은 여러모로 줄어든 상태다. 다만 이집트 정부가 유다이아 지역의 기독교화를 단념한 상태는 아니고, 점차 이들을 동화시켜 기독교화 시키고자 하고 있다. 의외로 이 동화정책은 유다이아교가 오랜 기간 탄압받으면서 개종에 의지가 없는 유다이아인들은 모두 국외로 이주한 상태였기 때문에 개종의지가 있는 상당수 유다이아인들로부터 효과를 보고 있다.
이후 이집트는 칼게돈 공의회 이후 콥트 교회를 정통으로 인정했고, 로마 제국의 영향력 하에서 벗어나면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이 심화되었다.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은 이집트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슬람의 초대 칼리파인 무함마드의 세가 강해져 이집트를 침공하자 이집트군과 이슬람 군대는 시나이 반도에서 전선의 변동 없이 교전하게 되었고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그 후계자를 정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세력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이집트군이 파죽지세로 올라갔고, 이슬람 제국의 침공을 억제하고 세력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에 아라비아의 여러 통치자들이 여러번 이집트를 넘보았으나 이슬람 세력과의 1차 전쟁 이후 여러 교훈을 얻은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 일대에 이집트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라 불리는 시나이 성벽(Τείχος του Σινά)을 쌓은데다가, 아르카디오스 멘나르코스, 카르코스 유로스와 같은 유능한 장군들이 성공적인 방어 전략을 수립하여 아랍군의 공격을 막아낸 덕분에 아랍 이슬람 왕조의 이집트 정복 시도는 미수에 그쳤으며, 이후 이집트는 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지대의 명실상부한 기독교 강대국으로 그 위치를 굳혔다.
{{목차}}
{{목차}}
===국명===
===국명===
영어 명칭 "Egypt"는 고대 그리스어 아이굽토스(Αίγυπτος, 에귑토스)에서 유래하여 라틴어 애급투스/아이깁투스(Aegyptus, 에귑투스)를 통해 전해진 말이다. 개신교의 구약과 신약 번역 성경에서는 '''애굽'''이라는 말로도 찾아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기'''가 가장 유명하고, 신약에서는 예수가 아기 때 헤로데 왕을 피해 피신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인용문1|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br><br>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 (마태오 복음서 2,15) }}
===현실에서는===
이슬람 제국의 정복 이후에는 씨족정의 원리에 의해 정식 국호로써의 이집트는 약 천년간 사라졌다. 이는 대체로 왕조 이름을 따르는 아랍 이슬람 왕조들의 등장(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아이유브 왕조, 오스만 제국) 때문이다. 이집트가 다시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된 것은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이다. 물론 당연하지만 비공식적인 국호로써는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역사===
===역사===
{| class="wikitable"
|-
| [[파일:피라미드.jpg]][[파일:4대문명.png]]
|-
| <sup>(1)</sup>이집트의 피라미드.<br><sup>(2)</sup>고대 세계 4대 문명으로 꼽히는 '''고대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
|}
이집트는 그 어떠한 국가들보다도 유구한 문명과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이다. 기원전 32세기부터 풍요로운 나일강과 주변 덕에 급속도로 문명이 발전했으며, 곧이어 국가가 등장해 그 일대를 장악했다. 고대 이집트는 기원전 15세기 이후 절정의 국력을 자랑했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발현한 여러 제국이나 그리스 지방의 도시국가들, 에티오피아 지방의 악숨과도 교류했다. 고대 이집트 제국은 기원전 3,200여년경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년 간 존재했으나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멸망당했으며, 이후 이집트는 헬레니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와 여러 지역의 왕, 그리고 이집트의 파라오로 군림한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그가 정복한 여러 지역은 그의 군사적 심복들이었던 디아도코이(Διάδοχοι)들이 나눠 가지게 되었는데 이중 이집트는 부하 장군 중 한명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Πτολεμαίος Α΄ Σωτήρ)가 파라오 자리에 올라 군림했다. 이 시대가 이집트 헬레니즘의 정점이며, 이집트의 제32왕조이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라고 부른다.
현재 이집트에서 군림하고 있는 파벨라노스 왕조는 바로 프톨레마이오스의 혈통에서 나온 것이다. 파벨라노스가(家)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방계 가문이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제2대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둘째 아들 리시마코스가 시조이다. 본래 파벨라노스 일가는 이집트 중앙부와 서부의 비옥한 영지를 물려받아 파라오 밑에서 통치하는 일종의 봉신이었다. 그러나 후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혼란과 로마 제국의 복속 야망으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가 멸망하자 영향력이 커진 파벨라노스 일가는 로마 밑에서 자치권을 보장받아 대대로 이집트 지역의 통치를 지속했고 내부에서는 여전히 바실레우스의 위치로써 군림했다. 395년 로마의 동서분열과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종말 이후 발생한 “7세기의 혼란”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해외 영토 통치력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이슬람 세력과의 방어 전쟁 이후에 로마 제국의 이집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에 이르자, 마침내 이집트는 로마의 영향권에서 사실상 독립하는 데에 성공했다.
초기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 이후 이집트는 수세기 동안 아라비아에서 발흥했거나 아라비아 일대에 큰 영향력을 미친 이슬람 제국들(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아이유브 왕조, 오스만 왕조)과 신경전을 펼쳤는데, 절제된 무역분쟁이나 조공국 혹은 괴뢰국을 이용한 간접전쟁의 형태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전쟁이 발발했을 때 괴멸적인 피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직접 전쟁이 발발하지는 않았다. 근세에 이르면서 이집트와 이슬람 제국간의 협력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양측 모두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와 오스만 간의 우호 움직임이 보여지면서 이집트와 프랑스 간의 관계도 상당히 개선됐는데, 16세기 이집트-오스만-프랑스(발루아 왕조)의 전략적 동맹 관계는 그 어느 시대보다 우호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자연환경===
===자연환경===
나일강 유역의 땅에서 생산되는 식품들이 전체 이집트 인구의 풍족한 식사를 책임질 정도로 기름지고 좋으며, 이외 가나안 지역 바다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유전과 천연가스들이 이집트의 부를 한층 높이고 있다. 한편, 이집트 서부의 사막지대들은 인구가 살기에 대단히 부정적인 환경으로, 이집트 인구는 지방별로 몰린게 아닌 특정 지역에 몰려사는 경향이 있다.
===정치===
===정치===
이집트의 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는 내각ㆍ양원ㆍ3제의 법원, 즉 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내각은 각료수반인 최고 재상 휘하에 있는 것으로, 헌법상으로는 이들이 행정상의 권한을 갖고 있다. 의회의 동의를 받아 황제에 의해 임명된 재상은 내각 관료들을 임명할 수 있다. 의회는 이집트의 입법부로 귀족원과 민의원이 나뉘며, 민의원의 경우 각 지방의 모든 국민들이 선출하여 뽑힌 500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귀족원은 1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이 중 100명은 헌법상으로 황제가 임명할 수 있다. 민의원의 임기는 4년이고, 귀족원의 임기는 6년으로, 둘 다 직접 연임이 2회까지 가능하며 중임 역시 가능하다. 사법부는 대체로 이집트의 고유 제도가 존재했으나 이후 유럽 국가들과 많이 교류하면서 로마의 법제가 이집트에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서양의 사법제도와 유사하면서도 이집트 고유의 사법제도가 조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3제법원은 지역법원, 고등법원, 최고법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최고법원장은 임기 6년의 고등법원장을, 최고법원장에 의해 임명된 고등법원장은 임기 4년의 지역법원장을 임명한다. 최고법원장은 별도로 정해진 임기가 없고 종신직이다. 고등법원장과 지역법원장의 임기는 연임할 수 없다.
====황제====
{{역대 이집트 황제}}
사실상의 전제군주정 국가인 이집트에서 내각ㆍ의회ㆍ법원은 황제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수천년간 이어져온 황제의 권위는 다수의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 큰 반발에 부딪힐 여지가 있으며 더불어 [[바실레우스|황제]]가 어마무시한 권한들을 영유하고 있기 때문인데, 물론 헌법이 황제가 대놓고 그 권한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기 때문에 황제 역시 자유롭게 사용은 하지 못하며, 극도의 필요 시에만 그 권한을 사용하거나 혹은 완전히 비밀리에 사용하고 있어 반발은 없는 편이다.
[[바실레우스]]라 불리는 이집트의 황제는 헌법상으로 국가원수이자 국군의 최고통수권자로, 국가의 통합과 국민의 화합을 보전한다. 또한 의회의 동의를 받아 최고 재상을 임명, 이외 귀족원 의원 임명, 최고 법원장 임명ㆍ경무청장 임명ㆍ국가 헌병대장 임명ㆍ유다이아 및 아라비아 지방장관 임명 등등, 정치적으로 3부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총대주교들을 불러 교회 공의회를 소집하는 등 종교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제위의 계승은 보통 황제의 장자나 (아들이 없을 경우)장녀가 계승한다. 그러나 이는 황제가 별다른 유언 없이 죽었을 경우의 이야기이고, 죽기 전에 제위의 계승자를 발표한다면 계승법과 다르더라도 유언에 따라 계승된다.
===최고재상대신===
{{역대 이집트 총리}}
이집트의 내각을 통솔하는 최고 재상 대신직은 1668년 알렉산드로스 6세의 기획으로 신설되었다. 약칭 재상은 군주인 바실레우스를 보좌하여 바실레우스의 동의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고, 국정 상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지며, 내각장관들을 임명하고 장관들을 이끈다. 재상직의 정해진 임기는 없기 때문에 바실레우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히지 않은 이상 장기집권을 할 수 있다.
===경제===
===경제===
이집트는 수정자본주의를 국가의 경제체제로 채택했다. 19~20세기에는 별다른 게 없는 일반 자본주의 국가였으나 20세기 후반에 부분적인 계획경제 도입으로 국가전역의 복지정책을 획일적으로 증강시키면서, 21세기에 들어 수정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집트의 전체 GDP(국가총생산)은 $4,170,788,578,322, 1인당 GDP(국가총생산) $28,762로 전체 GDP로 보았을 경우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에 이어 세계 4대 경제대국이다.
===종교===
===종교===
{{본문|콥트 정교회}}
이집트의 종교는 역사적으로 [[콥트 정교회|콥트 오리엔트 정교회]], [[콥트 정교회|콥트교]]라고도 불리며 복음사가 성 마르코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및 [[콥트 교황]]을 필두로 하는 이집트 국교회가 '''지배하고 있다'''. 전체 국민이 믿는 신앙 중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황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교회의 지도자인 알렉산드리아 콥트 총대주교, 즉 [[콥트 교황]]은 거대한 교회를 관리하고 신앙을 보호하기 위하여 현실보다 더 큰 종교적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집중적으로 조명되며, 교황과 교회의 성직자들은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과 존경을 받고 있다. 983년부터 986년까지 실시된 제1차 알렉산드리아 공의회에서는 콥트 정교회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교황)만이 알렉산드리아의 마르코좌를 잇는 유일한 총대주교임이 재확인되며 정교회의 현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는 2만명 가량의 신자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소수교파 상태다. 그나마 기존에는 자치권이 인정되었으나 1054년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칼게돈파)간의 대분열이 발발하면서 이집트는 알렉산드리아의 칼게돈파 정교도들을 모두 동로마 제국이나 이외의 정교회 국가로 추방해버려서, 현재 이집트에는 칼게돈파 정교회 신자가 없다. 비칼게돈파 교회 중에서 가장 많은 신자수를 보유하고 있는 콥트 교회는 (비칼게돈파)시리아 정교회,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아비시니아 테와히도 정교회 등과 협력하며 비칼게돈파 교회의 보존과 번영을 위해 비칼게돈파의 수장격으로써 지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로마 교황의 교도권을 따르는 가톨릭교회와 콥트 전례의 가톨릭교회는 중세 이후 이집트와 교황청 간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이집트 내 소수교파로써 다양성의 존중과 자치권을 보장받았으며, 현재 이집트 내 가톨릭교회는 콥트 교회의 정책에 수용과 협조를 진행하면서 이집트 국내에서의 평가를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데, 일례로 양측의 관계가 대단히 개선되면서 역사적으로 콥트 교황과 로마 교황이 여러번 만나 협력을 결의하고 실행중인 상태다.
===문화===
===문화===
이집트의 문화 역시 세계적이며, 이 경우 고대부터 융성하였다. 고대 이집트 문명부터 발전한 문화ㆍ예술은 헬레니즘이 정착한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에서 정점을 찍었다. 프톨레마이오스조가 멸망한 이후 이집트 동부 지역에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로마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는 곧 그리스 문화와 접목되면서 이집트ㆍ로마ㆍ그리스 3문화라는 화려한 문화 예술 양식이 발전하였다. 반면 이집트 서부는 여전히 헬레니즘의 피를 이어받은 파벨라노스조가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집트만의 독특한 헬레니즘 문화를 발달시켰다. 로마 제국령에 있던 동부 이집트에서 고대 이집트의 문화는 사라져 갔으나, 파벨라노스조 이집트에서는 여전히 고대 이집트의 문화는 융성했다. 이는 건축 분야에서도 눈에 띄게 알 수 있으며, 로마령 이집트의 수도에서는 로마식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는 반면 파벨라노스 이집트의 수도에서는 고대 이집트와 헬레니즘 건축 양식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었다.
이집트 동부 지역이 로마의 통제력 하에서 벗어나자 파벨라노스조가 동부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파벨라노스조 이집트는 로마의 문화예술과 건축양식을 받아들여 이를 자국의 양식에 결합시켰다. 이로 인해 탄생한 것이 현재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등등 대도시들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이집트 양식"이다. 고대 시대가 끝나고 중세 시대가 들어서면서 이집트는 더 많은 유럽 국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베네치아의 문화예술과 건축양식을 보고 감탄하였으며, 이를 그대로 이집트에 소개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비잔티움 건축양식은 기존에 있던 이집트 양식과 접목되어 더 크고 웅장하면서도, 신앙적인 내용을 그림 그대로를 담을 수 있는 건물양식으로 발전하였다.
근세에 들어 이집트 양식은 고딕과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비잔티움 혼합양식과 결합하면서 서유럽의 웅장한 건축ㆍ문화ㆍ예술양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며, 근현대에 들어 보다 신박하고 새로운 예술가들의 등장으로 지금까지 내재된 발전과 더불어 이집트만의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키고 있다.
===각주===
===각주===

2022년 6월 6일 (월) 17:14 기준 최신판

이 문서는 Bluepavels의 공식 설정입니다.
이 설정에 대한 권리는 작성자인 에게 있으며 무단 편집시 반달 행위로 간주될 수 있지만, 단순 오타수정의 경우는 제외합니다. 오타 수정을 제외하고 이 틀이 있는 문서의 경우 작성자 본인에게 승인되지 않은 편집은 시행하지 마십시오. 이 틀이 붙은 문단의 글을 복사하는 것은 엄금이며, 위반 시 엄정하게 처리합니다.


©Bluepavels 2021 ~ 2024

• 본 문서는 블파에게 소유권이 있습니다. 문서 제작자: 블파 | 분류: 국가/설정


위대한 애긥토스-가장 거룩한 이집트 제국
Πιο Ιερά Βασιλεία Αιγύπτιος
Πιο Ιερά Αυτοκρατορίας της Αιγύπτιος
국기 국장
Ⲓⲏ̅ⲥ̅ Ⲡⲭ̅ⲥ̅ ⳿ⲡϣⲏⲣⲓ ⳿ⲙ⳿ⲫϯ
Ⲓⲏⲥⲟⲩⲥ Ⲡⲓⲭⲣⲓⲥⲧⲟⲥ ⲉⲡϣⲏⲣⲓ ⲉⲙⲉⲫⲛⲟⲩϯ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상징
국가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았다
이집트, 만세!
국수
성 마르코의 사자
수호성인
聖 복음사가 마르코
위치
width: calc(100% + 5px)
역사
[ 펼치기 · 접기 ]
  • 이집트 문명 B.C. 32C ~ 4C
  • 프톨레마이오스조 B.C. 305 ~ B.C. 30
  • 파벨라노스조 B.C. 154 ~ 현재
  • 유다이아 지방 상실 A.D. 1세기 초
  • 로마 제정 하의 이집트(동부) B.C. 30? ~ A.D. 405
  • 기독교 공인 A.D. 313
  • 기독교 국교 천명 A.D. 395
  • 파벨라노스조의 이집트 유일군주 선언 A.D. 451
  •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의 국교화 A.D. 505
  • 유다이아 지방 재복속 A.D. 532
  • 골고다 언덕 위에 그리스도 대성당 준공 및 건물 축성 A.D. 582
  • 對이슬람 방어 전쟁 A.D. 629 ~ 634
  • 유다이아 지방장관령 설치 A.D. 650
  • 그리스어를 "유일"의 국어로 지정 A.D. 654
  • 콥트 성모 대성당 시공 A.D. 662
  • 콥트 성모 대성당 완공, 축성 A.D. 1066
  • 초대 최고재상(총리) 임명 A.D. 1654
  • 제국 헌법 제정 A.D. 1742.01.13
  • 현재의 국기ㆍ국장 제정 A.D. 1806
  • 콥트 성모 대성당 붕괴 A.D. 1814
  • 2차 헌법 A.D. 1828
  • 콥트 성모 대성당 재건 및 증축 A.D. 1869
  • 알렉산드리아-카이로 지방지하철 개통 A.D. 1908
  • 전국 도로 정비 사업 A.D. 1918 ~ 1937
  • 현행 헌법 A.D. 1945
지리
[ 펼치기 · 접기 ]
인문환경
[ 펼치기 · 접기 ]
인구
총 인구
155,010,381명
밀도
자료없음명/km2
인종
이집트인 85.4%, 유다이아인 14.6%, 기타 1%
공용어
에굽 그리스어
지역어
콥트어, 히브리어, 암하라어
공용 문자
그리스 문자
종교
국교
비칼게돈파 기독교-콥트 정교회
분포
기독교 92%, 기타 8%
군대
이집트의 군대
하위 행정구역
[ 펼치기 · 접기 ]
황제령
3개 (바실레우스령, 산하 지방장관령)
왕령
1개 (누비아-블레미야 연합왕국)
16개
28개
63개
정치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입헌군주정[1], 전제군주정[2], 정교일치, 의원내각제
국가 원수 (전 이집트의 황제)
아우구스토스 트라야노스 3세 바실레우스 폐하
정부
요인
교황
타와드로스 2세 교황 성하
최고 재상
요안니스 말레니암(Γιάννης Μαλένιαμ)
각료수반 각하
유다이아 지방장관
글라우코스 넬로카스(Γλαῦκος Νελόκας)
아라비아 지방장관
가브리엘 스테노스(Γαβριήλ Στενός)
환관성 장관
루카트 막시밀리트(Λουκάρτ Μαξιμίλιτ)
외무성 장관
아우구스토스 카를리니(Αύγουστος Καρλινική)
내무성 장관
카티코스 멜리자크(Κάτικος Μελιζάκ)
재무성 장관
마르코스 앙겔로스 디마리(Μάρκος Άγγελος Δημάρι)
국군성 장관
메이로스 알렉산드로스(Μάινος Αλέξανδρος)
민족성 장관
베네토스 크레토니(Μπενέκος Κρητώνη)
여당
전진하라 이집트여!(Προχώρα Αίγυπτος!)
연립 여당
이집트당(Αιγυπτιακό κόμμα)
신임과 보완
이집트 민주당(Δημοκρατικό κόμμα της Αιγύπτου)
원내 야당
환경당(Περιβάλλον πάρτι)
경제
[ 펼치기 · 접기 ]
경제 체제
수정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GDP
(명목)
전체 GDP
$4,170,788,578,322
1인당 GDP
$28,762
화폐
공식 화폐
이집트 드라크마
ISO 4217
EDM
단위
[ 펼치기 · 접기 ]
법정 연호
콥트 교회력
그레고리력
시간대
UTC+2
도량형
SI단위
ccTLD
.eg, .me
국가 코드
MOE[3], PEA[4], EGY[5]
전화 코드
+20


가장 거룩한 이집트 제국(그리스어: ο Πιο Ιερά Βασιλεία Αιγύπτιος _[*], 영어: The Most Holy Basileo-Empire of Egypt 더 모스트 홀리 바실레오-엠파이어 오브 이집트[*]) 혹은 이집트(그리스어: Αίγυπτος _[*]), 영어: Egypt 이집트[*], 가장 거룩한 나라(그리스어: Πιο Ιερά _[*]), 영어: Most Holy 모스트 홀리[*])는(은) 북동부 아프리카 일대에 위치한 입헌군주정[6] 국가로, 그 역사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수도는 가장 거룩한 도시 알렉산드리아, 최대 도시는 카이로 광역도시이며 인구는 2021년 7월 인구총조사 기준 155,010,381명이고 국가 주거 인구의 대부분은 알렉산드리아-카이로(나일강 유역)-예루살렘 등등 북부의 비옥한 지역과 바다 혹은 강에 밀집하고 있다. 서쪽으로 마주보는 국가로는 리비아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수단 공화국, 동쪽으로는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등이 있다. 주를 차지하는 종교는 92%의 국민이 믿는 기독교[7]로,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는 교황(총대주교)좌가 위치하고 있는데, 알렉산드리아 교황좌는 복음사가 성 마르코로부터 약 2,000년간 이어져 왔을 만큼 유서깊다. 기독교 이외 나머지 8%의 국민들은 유다이아교와 이슬람교를 포함한 기타 종교들을 믿고 있다. 역사적으로 국교가 기독교인 사회여서 다른 종교는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았고, 또한 기독교가 세를 넓히고 있어 근 500년간 유다이아교 신자는 정체, 이슬람교 신자는 소폭 감소하는 추세다. 이집트의 인종은 이집트인 85.4%, 유다이아인 14.6%, 기타 1%로 구성되고 있다. 이집트의 국가 원수는 바실레우스(황제)로, 프톨레마이오스조 당시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며 현직 황제는 아우구스토스 트라야노스 3세이다. 또한 현직 최고수상대신아야디르 요한 말레야암으로, 약칭 최고수상은 내각과 정부를 책임진다.[8]

이집트는 유래깊은 군주정 국가로, 자그마치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현재까지 군주정이 유지되고 있다. 현재 이어져 오는 황가는 파벨라노스 황가로, 프톨레마이오스 황가의 방계 가문이다. 파벨라노스 황가는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 말기에 방계로 독립하여 일부 영지를 수여받았고 이집트 일대의 지배권을 점차 늘려나갔다. 프톨레마이오스 조가 로마에 사실상 복속되고 멸망한 이후에는 로마 제국과 이집트를 양분하여, 현재의 이집트 서부를 통치하였다. 로마 제국이 이집트에서의 통제권을 점차 잃자 로마의 영향력 하에서 독립하여 이집트의 유일한 황제임을 선포하기도 했다. 로마 영향 하에서의 독립 이후에, 파벨라노스조의 군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황조가 군주의 호칭으로 사용했던 바실레우스를 그대로 사용하되 황권을 강화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백성들이 주로 믿는 대중적 신앙이었던 알렉산드리아 전례의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이후 이집트 군주들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며 알렉산드리아 주교에게 대관을 받아 황권을 강화하고, 이들에게 새 성당과 토지를 하사했다. 유다이아/이스라엘 지역을 복속하여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한 이집트는 대대적인 기독교 숭상 정책을 폈으며 다른 종교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유다이아교와 같이 다른 신앙을 믿는 백성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유다이아 지방 장관령이 설치되고 점차 기독교의 비율이 사회적으로 우위에 서자 탄압 정책이 완화되면서 반발은 여러모로 줄어든 상태다. 다만 이집트 정부가 유다이아 지역의 기독교화를 단념한 상태는 아니고, 점차 이들을 동화시켜 기독교화 시키고자 하고 있다. 의외로 이 동화정책은 유다이아교가 오랜 기간 탄압받으면서 개종에 의지가 없는 유다이아인들은 모두 국외로 이주한 상태였기 때문에 개종의지가 있는 상당수 유다이아인들로부터 효과를 보고 있다.

이후 이집트는 칼게돈 공의회 이후 콥트 교회를 정통으로 인정했고, 로마 제국의 영향력 하에서 벗어나면서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이 심화되었다.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은 이집트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슬람의 초대 칼리파인 무함마드의 세가 강해져 이집트를 침공하자 이집트군과 이슬람 군대는 시나이 반도에서 전선의 변동 없이 교전하게 되었고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그 후계자를 정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세력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이집트군이 파죽지세로 올라갔고, 이슬람 제국의 침공을 억제하고 세력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에 아라비아의 여러 통치자들이 여러번 이집트를 넘보았으나 이슬람 세력과의 1차 전쟁 이후 여러 교훈을 얻은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 일대에 이집트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라 불리는 시나이 성벽(Τείχος του Σινά)을 쌓은데다가, 아르카디오스 멘나르코스, 카르코스 유로스와 같은 유능한 장군들이 성공적인 방어 전략을 수립하여 아랍군의 공격을 막아낸 덕분에 아랍 이슬람 왕조의 이집트 정복 시도는 미수에 그쳤으며, 이후 이집트는 아프리카와 소아시아 지대의 명실상부한 기독교 강대국으로 그 위치를 굳혔다.

국명

영어 명칭 "Egypt"는 고대 그리스어 아이굽토스(Αίγυπτος, 에귑토스)에서 유래하여 라틴어 애급투스/아이깁투스(Aegyptus, 에귑투스)를 통해 전해진 말이다. 개신교의 구약과 신약 번역 성경에서는 애굽이라는 말로도 찾아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기가 가장 유명하고, 신약에서는 예수가 아기 때 헤로데 왕을 피해 피신해 살던 곳이기도 하다.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태오 복음서 2,15)

현실에서는

이슬람 제국의 정복 이후에는 씨족정의 원리에 의해 정식 국호로써의 이집트는 약 천년간 사라졌다. 이는 대체로 왕조 이름을 따르는 아랍 이슬람 왕조들의 등장(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아이유브 왕조, 오스만 제국) 때문이다. 이집트가 다시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된 것은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이다. 물론 당연하지만 비공식적인 국호로써는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역사

(1)이집트의 피라미드.
(2)고대 세계 4대 문명으로 꼽히는 고대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

이집트는 그 어떠한 국가들보다도 유구한 문명과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이다. 기원전 32세기부터 풍요로운 나일강과 주변 덕에 급속도로 문명이 발전했으며, 곧이어 국가가 등장해 그 일대를 장악했다. 고대 이집트는 기원전 15세기 이후 절정의 국력을 자랑했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발현한 여러 제국이나 그리스 지방의 도시국가들, 에티오피아 지방의 악숨과도 교류했다. 고대 이집트 제국은 기원전 3,200여년경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년 간 존재했으나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멸망당했으며, 이후 이집트는 헬레니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와 여러 지역의 왕, 그리고 이집트의 파라오로 군림한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그가 정복한 여러 지역은 그의 군사적 심복들이었던 디아도코이(Διάδοχοι)들이 나눠 가지게 되었는데 이중 이집트는 부하 장군 중 한명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Πτολεμαίος Α΄ Σωτήρ)가 파라오 자리에 올라 군림했다. 이 시대가 이집트 헬레니즘의 정점이며, 이집트의 제32왕조이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라고 부른다.

현재 이집트에서 군림하고 있는 파벨라노스 왕조는 바로 프톨레마이오스의 혈통에서 나온 것이다. 파벨라노스가(家)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방계 가문이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제2대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둘째 아들 리시마코스가 시조이다. 본래 파벨라노스 일가는 이집트 중앙부와 서부의 비옥한 영지를 물려받아 파라오 밑에서 통치하는 일종의 봉신이었다. 그러나 후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혼란과 로마 제국의 복속 야망으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가 멸망하자 영향력이 커진 파벨라노스 일가는 로마 밑에서 자치권을 보장받아 대대로 이집트 지역의 통치를 지속했고 내부에서는 여전히 바실레우스의 위치로써 군림했다. 395년 로마의 동서분열과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종말 이후 발생한 “7세기의 혼란”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해외 영토 통치력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이슬람 세력과의 방어 전쟁 이후에 로마 제국의 이집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기에 이르자, 마침내 이집트는 로마의 영향권에서 사실상 독립하는 데에 성공했다.

초기 이슬람 제국과의 전쟁 이후 이집트는 수세기 동안 아라비아에서 발흥했거나 아라비아 일대에 큰 영향력을 미친 이슬람 제국들(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아이유브 왕조, 오스만 왕조)과 신경전을 펼쳤는데, 절제된 무역분쟁이나 조공국 혹은 괴뢰국을 이용한 간접전쟁의 형태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전쟁이 발발했을 때 괴멸적인 피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직접 전쟁이 발발하지는 않았다. 근세에 이르면서 이집트와 이슬람 제국간의 협력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양측 모두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와 오스만 간의 우호 움직임이 보여지면서 이집트와 프랑스 간의 관계도 상당히 개선됐는데, 16세기 이집트-오스만-프랑스(발루아 왕조)의 전략적 동맹 관계는 그 어느 시대보다 우호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자연환경

나일강 유역의 땅에서 생산되는 식품들이 전체 이집트 인구의 풍족한 식사를 책임질 정도로 기름지고 좋으며, 이외 가나안 지역 바다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유전과 천연가스들이 이집트의 부를 한층 높이고 있다. 한편, 이집트 서부의 사막지대들은 인구가 살기에 대단히 부정적인 환경으로, 이집트 인구는 지방별로 몰린게 아닌 특정 지역에 몰려사는 경향이 있다.

정치

이집트의 행정부ㆍ입법부ㆍ사법부는 내각ㆍ양원ㆍ3제의 법원, 즉 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내각은 각료수반인 최고 재상 휘하에 있는 것으로, 헌법상으로는 이들이 행정상의 권한을 갖고 있다. 의회의 동의를 받아 황제에 의해 임명된 재상은 내각 관료들을 임명할 수 있다. 의회는 이집트의 입법부로 귀족원과 민의원이 나뉘며, 민의원의 경우 각 지방의 모든 국민들이 선출하여 뽑힌 500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귀족원은 15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이 중 100명은 헌법상으로 황제가 임명할 수 있다. 민의원의 임기는 4년이고, 귀족원의 임기는 6년으로, 둘 다 직접 연임이 2회까지 가능하며 중임 역시 가능하다. 사법부는 대체로 이집트의 고유 제도가 존재했으나 이후 유럽 국가들과 많이 교류하면서 로마의 법제가 이집트에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서양의 사법제도와 유사하면서도 이집트 고유의 사법제도가 조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3제법원은 지역법원, 고등법원, 최고법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최고법원장은 임기 6년의 고등법원장을, 최고법원장에 의해 임명된 고등법원장은 임기 4년의 지역법원장을 임명한다. 최고법원장은 별도로 정해진 임기가 없고 종신직이다. 고등법원장과 지역법원장의 임기는 연임할 수 없다.

황제


이집트의 바실레우스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파벨라노스 1세 파벨라노스 2세 파벨라노스 3세 알렉산드로스 1세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파벨라노스 4세 필리포스 1세 필리포스 2세 필리포스 3세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파벨라노스 5세 파벨라노스 6세 필리포스 4세 카시오페이아 1세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아폴론 1세 아폴론 2세 필리포스 5세 파벨라노스 7세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솔론 1세 아폴론 3세 제논 카시오페이아 2세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파벨라노스 8세 필리포스 6세 솔론 2세 파벨라노스 9세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콘스탄티노스 1세 솔론 3세 다니엘 1세 솔론 4세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다니엘 2세 파벨라노스 10세 필리포스 7세 콘스탄티노스 2세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파벨라노스 11세 파벨라노스 12세 콘스탄티노스 3세 콘스탄티노스 4세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파벨라노스 13세 필리포스 8세 솔론 5세 콘스탄티노스 5세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다니엘 3세 테오도로스 1세 콘스탄티노스 6세 솔론 6세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다니엘 4세 파벨라노스 14세 요안니스 1세 다니엘 5세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솔론 7세 솔론 8세 필리포스 9세 파벨라노스 15세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다니엘 6세 솔론 8세 알렉산드로스 2세 필리포스 10세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다니엘 7세 파벨라노스 16세 파벨라노스 17세 솔론 9세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다니엘 8세 알렉산드로스 3세 카시오페이아 3세 알렉산드로스 4세
제65대 제66대 제67대 제68대
솔론 10세 파벨라노스 18세 다니엘 9세 파벨라노스 19세
제69대 제70대 제71대 제72대
파벨라노스 20세 파벨라노스 21세 필리포스 12세 솔론 11세
제73대 제74대 제75대 제76대
요안니스 2세 솔론 12세 요안니스 3세 요안니스 4세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파벨라노스 22세 다니엘 10세 카시오페이아 4세 솔론 13세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알렉산드로스 5세 테오도로스 2세 테오도로스 3세 파벨라노스 23세
제85대 제86대 제87대 제88대
솔론 14세 아우구스토스 트라야노스 1세 솔론 15세 알렉산드로스 6세
제89대 제90대 제91대 제92대
요안니스 5세 필리포스 13세 레온 1세 알렉산드로스 7세
제93대 제94대 제95대 제96대
필리포스 14세 테오도로스 4세 레온 1세 알렉산드로스 7세
제97대 제98대 제99대 제100대
카시오페이아 5세 테오도로스 5세 필리포스 15세 솔론 16세
제101대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레온 2세 알렉산드로스 9세 요안니스 6세 필리포스 16세
제105대
아우구스토스 트라야노스 3세

사실상의 전제군주정 국가인 이집트에서 내각ㆍ의회ㆍ법원은 황제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수천년간 이어져온 황제의 권위는 다수의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 큰 반발에 부딪힐 여지가 있으며 더불어 황제가 어마무시한 권한들을 영유하고 있기 때문인데, 물론 헌법이 황제가 대놓고 그 권한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기 때문에 황제 역시 자유롭게 사용은 하지 못하며, 극도의 필요 시에만 그 권한을 사용하거나 혹은 완전히 비밀리에 사용하고 있어 반발은 없는 편이다.

바실레우스라 불리는 이집트의 황제는 헌법상으로 국가원수이자 국군의 최고통수권자로, 국가의 통합과 국민의 화합을 보전한다. 또한 의회의 동의를 받아 최고 재상을 임명, 이외 귀족원 의원 임명, 최고 법원장 임명ㆍ경무청장 임명ㆍ국가 헌병대장 임명ㆍ유다이아 및 아라비아 지방장관 임명 등등, 정치적으로 3부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 또한 총대주교들을 불러 교회 공의회를 소집하는 등 종교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제위의 계승은 보통 황제의 장자나 (아들이 없을 경우)장녀가 계승한다. 그러나 이는 황제가 별다른 유언 없이 죽었을 경우의 이야기이고, 죽기 전에 제위의 계승자를 발표한다면 계승법과 다르더라도 유언에 따라 계승된다.

최고재상대신


이집트 최고재상대신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필리포스 오스케 이레오스 스펠론 가브리엘 로카노스 루카논 막시모스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콘스탄스 스펠론 요안니스 케오스 막시모스 루카스 마르코 필리케스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요안니스 카로스 세르코스 로마노스 수에피로스 아노스 타케스 레키오스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레온 디카스 마르코 바르도스 요안니스 칼게토스 루카스 테오코스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심레온 디메테르 아르키오스 케론 막시모스 로데스 요안니스 제레오스
바실레우스

이집트의 내각을 통솔하는 최고 재상 대신직은 1668년 알렉산드로스 6세의 기획으로 신설되었다. 약칭 재상은 군주인 바실레우스를 보좌하여 바실레우스의 동의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고, 국정 상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지며, 내각장관들을 임명하고 장관들을 이끈다. 재상직의 정해진 임기는 없기 때문에 바실레우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히지 않은 이상 장기집권을 할 수 있다.

경제

이집트는 수정자본주의를 국가의 경제체제로 채택했다. 19~20세기에는 별다른 게 없는 일반 자본주의 국가였으나 20세기 후반에 부분적인 계획경제 도입으로 국가전역의 복지정책을 획일적으로 증강시키면서, 21세기에 들어 수정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집트의 전체 GDP(국가총생산)은 $4,170,788,578,322, 1인당 GDP(국가총생산) $28,762로 전체 GDP로 보았을 경우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에 이어 세계 4대 경제대국이다.

종교

이집트의 종교는 역사적으로 콥트 오리엔트 정교회, 콥트교라고도 불리며 복음사가 성 마르코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및 콥트 교황을 필두로 하는 이집트 국교회가 지배하고 있다. 전체 국민이 믿는 신앙 중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황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교회의 지도자인 알렉산드리아 콥트 총대주교, 즉 콥트 교황은 거대한 교회를 관리하고 신앙을 보호하기 위하여 현실보다 더 큰 종교적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집중적으로 조명되며, 교황과 교회의 성직자들은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과 존경을 받고 있다. 983년부터 986년까지 실시된 제1차 알렉산드리아 공의회에서는 콥트 정교회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교황)만이 알렉산드리아의 마르코좌를 잇는 유일한 총대주교임이 재확인되며 정교회의 현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는 2만명 가량의 신자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소수교파 상태다. 그나마 기존에는 자치권이 인정되었으나 1054년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칼게돈파)간의 대분열이 발발하면서 이집트는 알렉산드리아의 칼게돈파 정교도들을 모두 동로마 제국이나 이외의 정교회 국가로 추방해버려서, 현재 이집트에는 칼게돈파 정교회 신자가 없다. 비칼게돈파 교회 중에서 가장 많은 신자수를 보유하고 있는 콥트 교회는 (비칼게돈파)시리아 정교회,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아비시니아 테와히도 정교회 등과 협력하며 비칼게돈파 교회의 보존과 번영을 위해 비칼게돈파의 수장격으로써 지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로마 교황의 교도권을 따르는 가톨릭교회와 콥트 전례의 가톨릭교회는 중세 이후 이집트와 교황청 간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이집트 내 소수교파로써 다양성의 존중과 자치권을 보장받았으며, 현재 이집트 내 가톨릭교회는 콥트 교회의 정책에 수용과 협조를 진행하면서 이집트 국내에서의 평가를 긍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데, 일례로 양측의 관계가 대단히 개선되면서 역사적으로 콥트 교황과 로마 교황이 여러번 만나 협력을 결의하고 실행중인 상태다.

문화

이집트의 문화 역시 세계적이며, 이 경우 고대부터 융성하였다. 고대 이집트 문명부터 발전한 문화ㆍ예술은 헬레니즘이 정착한 프톨레마이오스조 이집트에서 정점을 찍었다. 프톨레마이오스조가 멸망한 이후 이집트 동부 지역에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로마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는 곧 그리스 문화와 접목되면서 이집트ㆍ로마ㆍ그리스 3문화라는 화려한 문화 예술 양식이 발전하였다. 반면 이집트 서부는 여전히 헬레니즘의 피를 이어받은 파벨라노스조가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집트만의 독특한 헬레니즘 문화를 발달시켰다. 로마 제국령에 있던 동부 이집트에서 고대 이집트의 문화는 사라져 갔으나, 파벨라노스조 이집트에서는 여전히 고대 이집트의 문화는 융성했다. 이는 건축 분야에서도 눈에 띄게 알 수 있으며, 로마령 이집트의 수도에서는 로마식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는 반면 파벨라노스 이집트의 수도에서는 고대 이집트와 헬레니즘 건축 양식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었다.

이집트 동부 지역이 로마의 통제력 하에서 벗어나자 파벨라노스조가 동부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파벨라노스조 이집트는 로마의 문화예술과 건축양식을 받아들여 이를 자국의 양식에 결합시켰다. 이로 인해 탄생한 것이 현재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등등 대도시들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이집트 양식"이다. 고대 시대가 끝나고 중세 시대가 들어서면서 이집트는 더 많은 유럽 국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집트의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베네치아의 문화예술과 건축양식을 보고 감탄하였으며, 이를 그대로 이집트에 소개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비잔티움 건축양식은 기존에 있던 이집트 양식과 접목되어 더 크고 웅장하면서도, 신앙적인 내용을 그림 그대로를 담을 수 있는 건물양식으로 발전하였다.

근세에 들어 이집트 양식은 고딕과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비잔티움 혼합양식과 결합하면서 서유럽의 웅장한 건축ㆍ문화ㆍ예술양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며, 근현대에 들어 보다 신박하고 새로운 예술가들의 등장으로 지금까지 내재된 발전과 더불어 이집트만의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키고 있다.

각주

  1. 명목상
  2. 사실상
  3. Most holy egypt
  4. Pope Alexandria
  5. Egypt
  6. 사실상 전제군주정
  7. 절대 다수는 알렉산드리아 콥트 정교회 신자이며, 이들은 자신의 신앙과 교회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여 다른 신앙으로 개종시키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한다.
  8. 명목상으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