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정변

정사정변
丁巳政變
The Jeongsa Coup

경운궁을 지키는 관군 병사들과 그에 맞서 싸우는 경사연 소속 병사들의 전투를 그린 기록화

시기 1857년 5월 3일
장소 한성부 일대
원인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로 인한 민심 악화
교전국 대조선국 반란세력
전력 5군영 5,300명

훈련도감 2,000명
어영청 1,000명
총융청 500명
금위영 1,500명
수어청 800명




총합: 5,400명

경사연 3,600명
의군부 2,100명
교문부 900명
간성부 300명
재무부 200명
연락부 300명




총합: 3,800여명[1]
지휘관 철종[2]
이상범
김병학
신도현
김익주
철종
김좌진
정학유
윤상호
박유승
결과 반란세력의 승리
영향 세도정치의 종말
조선의 멸망
대한제국의 건국

개요

1857년(철종 8년) 5월 3일 오전 1시부터 4월 4일 오전 9시[3]사이에 일어난 정변으로 이 전쟁을 통해 465년이라는 오랜시간동안 존속했던 조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배경

1800년대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과 식민지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각국을 개방시키고 이권을 선점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는 조선에도 점차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철종(1831~1873)은 즉위 후 초기에는 개혁적 의지가 존재했으나, 하지만 곧 풍양 조씨 등 세도 가문의 권력 장악으로 왕권은 무력화되버렸다 이 와중에 1850년대 중반, 삼정의 문란(전정·군정·환곡), 지방 관권의 부패, 과중한 세금, 민란 발생 등이 이어지며 국정은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졌다.

이때 지방에서 성장한 중인·실학자·북학파 계열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개혁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양무운동,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 사상, 서양 군사기술에 관심을 가지며, 근대적 질서 도입 필요성을 절감하게된다. 그리고 결국 1856년 10월 2일, 개혁파는 수도 한성 내에서 반란세력 경사연(京師聯)을 결성한다. 이들은 한성 북부 성균관과 남산 중턱의 무기고에서 입헌군주제 도입, 의회 수립, 군제 개혁을 목표로 외국 상인들과 접촉하여 신식 무기 밀수입, 서양식 군제 도입, 병참기지를 극비리에 마련하였고, 이 소문을 들은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계열 일부가 위기감을 느끼게된다.

전개

전초전

1857년 2월 28일 밤, 경사연 연락부의 통신장교 출신들로 구성된 인원 20여명이 철종과 접촉해 철종을 설득해서 정사정변에 대한 암묵적 동의를 얻어냈다. 이 결정에는 철종의 어릴 적 스승 중 일부가 북학파 계열이였고, 이들이 개혁파의 중심인물로 연결되어 있었던게 큰 영향을 미쳤다. 철종은 정변 전날 새벽, 치열한 전장이 될 경운궁에서 경희궁으로 행차하며, "병으로 와병 중"이라는 형식적 명분을 세웠으며, 이는 정변의 발생 시 그가 즉각 피해갈 수 있는 장치로 작용했다. 또 철종은 비변사에 정예 병력 일부를 정변 하루 전 비번으로 돌림으로써, 정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반응이 늦도록 유도하는등 알게 모르게 경사연의 쿠데타가 성공하도록 도움을 많이 준 인물이다.

철종의 동의도 얻어냈겠다. 경사연은 계획을 점점 더 가속시키며, 6월초쯤 진행될 예정이였던 쿠데타를 5월 초로 앞당겨 진행하고자 했다. 4월 초쯤부터 경사연의 결집과 활동 강화가 시작되었으며, 북학파 및 중산층 사족들이 비밀리에 경사연을 확대시키며, 평안도·황해도·강원 일대 출신의 개혁적 무관, 신지식인들이 한성으로 입경했다.

또한 한성부 외곽 지역[4]에서 서양식 교범을 기반으로 병사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하였으며, 청의 신식강군 교본과 더불어, 프랑스 군사 교범 번역본 일부를 활용했다. 사열, 제식, 진형 운용 등에서 서양 군대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도입했으며, 전열보병식 사격훈련(일렬사격, 교대사격)과 총검술 훈련등을 실시했다.[5]

그러나 4월 초쯤부터 이런 일련의 징후들을 수호파 정보망도 포착하기 시작했다. 4월 10일, 경사연이 주도한 일부 개혁 상소문이 유출되어 시중에 회람했다. 세도정권은 이를 역모적 의도로 간주하고 관련자 체포령을 검토했다. 경사연은 내각제 도입 초안을 작성하며 또 한번 철종과 비밀리에 연계하는걸 시도하게된다. 그러나 4월 20일에 벌어진 강화 훈련도감 무기 탈취사건으로 수호파가 한성 내 경계 강화를 지시하면서 경사연의 계획이 조금씩 틀어지게된다. 그리고 4월 26일엔 예상치 못한 공세를 받아 경기감영·한성부 순무영 소속 친정부 군관중 경사연 관련 인물 20여 명 급습·구금되기까지했다. 경사연은 이를 명백한 탄압 행위로 간주하고 자위권 발동을 선언했고, 4월 28일, 경사연의 병력 배치가 시작되었다. 경사연은 수하 병력 약 2,000명 규모의 민병조직을 한성 북부에 집결시켰으며, 이들 중 일부는 서양식 총기와 신식 복장 착용하여, 시민들 사이에 화제로 떠올랐다. 여기에 더해 군기시·금위영 내 동조자들이 무기·화약 일부 은밀히 넘겨줌과 동시에 훈련도감에 심어놨던 병력 약 800명 가량이 경사연 지휘로 이탈하게된다.

5월 1일 새벽, 철종과 경사연 내 연락선 통해 철종 측근 일부와 접촉해 반란 시행일과 계획을 알렸으며, 철종은 "민심을 따르라"[6]는 암시성 발언을 전달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알리고, 이후 병가를 핑계로 외성으로 행차한다.

5월 2일 밤, 수호파 병력인 중부 순찰대 1,200명, 금위영 정예 800명이 경복궁 및 한성 남문 부근에 배치되었다. 이동안 경사연 병력은 북부 및 동부 관할 장악, 동십자각 부근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그리고 일부 시장 상인·학생들은 철종 대신에 정치를 하던 세도가들에 대한 분노가 차있었고 경사연 쪽에 붙어 우호적 시위를 진행하면서 여론은 완전히 경사연쪽으로 넘어오게되었다.

5월 3일 새벽, 경사연이 한성부 관아를 접수했으며, 수표교와 육조거리를 차단했다. 시내는 병사들 사이의 대치로 인해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고, 준비가 완료됐다고 생각한 경사연 지휘부는 드디어 "내각책임제 실시", "세도 제거"를 대의로 정사정변 개시를 선언했다.

경운궁 함락작전

첫 교전은 1시경 경운궁 앞 계동로에서 시작되었다. 그날은 봄비가 멎은 회색 새벽이었다. 찬 기운이 바닥에 깔려 있었지만, 계동로를 진격하는 병사들의 발걸음은 거칠게 울렸다. 경사연, 개혁파의 깃발이 서울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선봉대는 좌익 전진과 궁궐 북문을 차단을 명령했다. 화승총과 신식 머스킷이 어깨에 걸쳐있었고, 그 뒤로 중인 계층에서 자원한 의용군들이 창을 들고 따라붙었다. 길목마다 민가에서는 문이 굳게 닫혔다.

경운궁 성문 앞에 관군들 수천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푸른 유생복을 입은 무관들과 구식 창대를 든 병졸들. 세도가의 사병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철종의 이름으로, 아니 세도가 김병학의 이름으로 궁을 사수하라는 명을 받았다. 경사연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발사를 명령하며, 한성 도심 한복판에서 총성이 울렸다. 관군들중 전투 경험이 없는 이들은 당황했다. 일부는 그대로 흩어졌고, 일부는 창을 들고 돌격했다. 이때 개화파 무기상들이 몰래 수입한 미제 M1841 산악곡사포를 운용하던 경사연 포병들이 쏜 포도탄이 경운궁 벽에 맞으면서 산탄이 흩뿌려지며 관군 대열의 일부가 무너졌고, 그 속으로 경사연 병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궁궐 안에서도 포격이 날라와 일대의 혼란이 벌어졌고 사도가의 궁 내부의 병력은 점점 후퇴했다. 그렇게 5월 3일 오후 3시, 세도파의 백기가 경운궁위로 흩날리며, 정사정변이 실질적 성공에 도달했음을 알렸다. 경운궁이 함락되었고, 김병학, 이상범과같은 세도가가 대거 체포되며, 조정의 중심은 개혁파의 손으로 넘어갔다.

전후 수습

정변은 거의 반나절 사이에 끝나버렸지만 이 정변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한성부 내의 가옥 100여채가 파괴되었고, 특히 경운궁은 복구가 불가능할정도로 훼손되었으며, 관군측에서는 1,000여명, 경사연 측에서도 800여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단 경사연측 수뇌부는 병가를 핑계로 경희궁에간 철종에게 정변 성공을 통보하고, 경복궁으로 귀환토록했다. 5월 4일 새벽에 귀환한 철종은 자신의 앞길의 막던 세도가가 사라진것에 대해 기뻐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변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한 것에대한 걱정을 하는듯이 보였다. 5월 4일, 아침이 밝자 철종은 공식적인 전투종료령 선포했다. 5월 4일 자정, 경사연의 이서우는 한성 시내에 격문을 배포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백성이 굶주리고 나라가 혼미하니,
이제 그릇된 근왕 세력을 걷어내고 새 정치를 열고자 함이다.”

격문은 인쇄되어 종묘 앞, 서소문, 동대문 등에 부착되었으며, 이로인해 정변사실이 조선 전체로 널리널리 퍼지게 되었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김병희, 이범석등 의금부에서 자결한 몇을 제외한, 살아남은 일부는 세도세력들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홍문관, 승정원, 병조 등의 수장도 교체되었다. 정사내각이 새로이 구성되었다. 내각은 영국의 의회제도를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제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북학파 계열의 유림들, 실학자, 개화 관료들이 주축이 되었다.

평가

매체에서

여담

  1. 정변 당시 민병조직들도 많이 합류했기 때문에 더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2. 실질적인 지휘관은 이상범이였고, 후술하겠지만 철종은 오히려 정변에 동조했다.
  3. 사실 대부분의 조선 정부군들은 5월 3일 오전 12시 이내로 완전히 소탕되었기 때문에 5월 4일이 종료일이라고 보는시각도 있다. 그러나 정식으로 정변이 끝난것은 5월 4일 오전 9시경, 경복궁에서 철종이 전투종료령을 선포한 시점임으로 이 위키에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4. 대표적으로는 마포, 용산, 성산, 창동, 망우리 일대가 있다.
  5. 물론 기본적으로는 전열보병의 형태를 유지했지만, 무기와 훈련에서 점진적으로 개혁적 요소가 도입되었다. 대표적으로 퍼커션 캡을 사용해 장전하는 브라운 베스 후기형과 M1843 홀-노스 카빈을 소수 수입해서 산개훈련 특히 대도시 전투(한성 시가전)를 염두하고 훈련시켰다.
  6. 이 말은 1978년, 한국 사극계의 전설이 된 드라마 <정사정변>으로 널리알려지게 되었고, 한동안 유행어로도 활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