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중추원의원 선거

갈라드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6월 30일 (목) 14:38 판 (→‎배경)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파일:투표.png 대한국의 주요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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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대한국 중추원 의원 총선거
1885년 4월 10일
초대 선거
1891년 3월 7일
2회 선거
투표지역 한성부, 기호지방
투표율 98.7%
선거 결과
정당 의석수 비율
입헌당 27석 30.0%
황국협회 20석 22.2%
위정회 13석 14.5%
관료의원 30석 33.3%

개요

대한국 중추원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첫 선거이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선거이자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이다.

중추원을 선거로 구성하려는 김홍집 초대 총리의 구상이 처음으로 실현된 선거였으나 당시 보수파의 반발과 기술적 한계로 인해 한성부와 그 주위 지방에 거주하는 귀족 남성만 투표권을 갖고 있었다.

배경

중추원 자체는 1870년에 설립되었지만 당시에는 문관과 무관등 관료로 구성된 협의체 기구에 불과했다. 문조 황제가 내각구성권까지 넘겨주면서 관료들끼리 추천, 투표를 통해 각부의 대신을 선출할 권한까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관료들만의 기구였다. 개혁파들은 황제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헌법 제정에 착수했지만 보수파들의 만류로 인해 황제가 이들에게 헌법 제정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라고 명하면서 미뤄지고 말았으나 이들은 헌법 제정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당시 공부부대신이었던 김홍집의 집에서 뜻이 맞는 관료들을 모아 헌법 조문 제정을 조율하는 활동을 했다. 물론 이것은 황제의 묵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김홍집의 저택 한켠의 이름이 삼화당(三和堂)이었으므로, 이들을 대외에서는 삼화당파라고 칭했다. 이 삼화당파는 훗날 입헌당의 주류 세력이 되며, 현대 국민당의 조상격 당파이다. 삼화당파는 70년대 내내 보수파와 싸우며 정치경제적 개혁을 단행했다. 공장을 세우고 무역을 확대하면서 근대적 경제구조로 탈바꿈시키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귀족자본가와 신사(新士)로 불리는 신진 관료 계급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귀족이거나 부유한 무역상인 출신들이었는데 개혁 정책에 찬성하는 진보파들이었다. 반대로 보수파 귀족은 개혁에 대한 반감과 기득권을 잃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무역 정책 확대에 따른 피해를 보고 있던 보부상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대가 바뀌어 헌종이 즉위하고 좀더 급진적인 정책을 지원하자 드디어 총선거 실시를 위한 때가 무르익었다 판단한 김홍집은 황제에게 헌법 초안을 올렸으며 황제가 이를 승인하며 1884년 드디어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가 반포되었다. 이에따라 중추원 선거가 실시되어야 했고 김홍집은 우선 한성과 주위 지방인 기호지방에서만 선거를 치르기로 합의했다. 원래 김홍집은 한성부에서만 선거를 치르기를 원했고 보수파들은 전국에서 치르길 원했으나 이를 절충하여 기호지방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후 김홍집은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규합하여 입헌당을 창당하였고 이에 맞서 보수파 귀족은 위정회(為正會)를, 일부 양반과 보부상들은 황국협회를 세워 선거에 나서게 되었다.

과정

투표권이 남성 귀족에게만 주어져 보통선거라고 할 수는 없는 선거였다. 신분에 상관없이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는 것은 1895년 국민원이 설치되고 나서이며, 모든 국회의원을 보통선거로 선출하게 되는 것은 1921년 선거부터이다. 중선거구제로 의원을 선출하여 특정 부목군현을 묶어 여러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었으며 지역별로 정당에 투표하면 그 정당의 득표율대로 당선자수를 배정하는 식이었다. 현대의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효시인 셈.

한성부와 기호지방의 성인 귀족 남성의 수는 약 7,926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이중 7,833명이 선거에 참여하였다. 다만 입헌당 지지자 이외에는 대부분 가까운 사람들의 설득에 표를 던졌다고 전해진다.

결과

입헌당이 원내1당을 차지하긴 했지만 황국협회와 위정회의 막강한 지역 사회 영향력으로 인해 30석 이상 달성은 실패한 선거였다. 그러나 황제가 임명하는 관료의원 30명이 있었고 이 관료의원들은 명목상 무소속이었으나 대부분 친입헌당 성향의 신사 계급이었기에 어찌됐든 의사 결정에 있어 김홍집과 입헌당이 방해 받을 일은 없었다.

이후

선거 이후 첫 중추원이 광화문 앞 한성부 내각부에서 열렸다. 의원 90명중 79명만이 출석했는데 가장 첫번째 안건은 내각총리대신 추천에 대한 안건이었다. 입헌당은 당연히 김홍집을, 황국협회와 위정회는 홍순목을 추천했다. 문제는 출석하지 않은 11명의 의원은 모두 황국협회의 의원이었으며 이 당시에는 의결정족수, 출석의원과 재적의원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투표를 시작해버렸다. 당연히 황국협회는 격렬하게 반발했으며 이 문제로 입헌당과 황국협회는 임기 내내 충돌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일들을 통해 총리추천안, 헌법개정안등 중요한 안건을 처리할 때는 안건의 가부에 대해 재적의원을 기준으로 하게 되었다. 어찌됐든 역사적인 첫 의회에서의 첫 총리추천안은 김홍집 45표, 홍순목 34표로 김홍집이 추천되었으며 익일 헌종 황제는 곧바로 김홍집을 5대 총리로 임명했다. 여담으로 홍순목에게 간 표 중에서 15표는 모두 관료의원의 표로 보수파 의원들을 기분나쁘게 하지 않기 위해 입헌당이 미리 정해놓은 표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