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세계 대전

제3차 세계 대전
第三次 世界 大戰 | World War III
기간
2114년 12월 3일 ~ 2121년 2월 12일
장소
전 지구
원인
키보토스 프로젝트
대륙 간 갈등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생존권 확보
시베리아 내전
교전국
아시아메리카
[ 펼치기·접기 ]
유럽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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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병력
피해
결과
아시아메리카의 승리
영향
인류 20% 절멸
유럽 연합의 해체
키보토스 프로젝트 바탕의 국가 연합 구상
한국 중심의 동아시아 통합
핵무기의 사실상 무력화

개요

제3차 세계 대전은 유럽 연합과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의 동맹인 아시아메리카의 전쟁이다. 키보토스 프로젝트의 이름에서 딴 키보토스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날짜를 따서 123 전쟁이라고 부르거나, 대륙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과는 키보토스 프로젝트로 전 국민의 신체를 강화한 대한합중국이 소속된 아시아메리카의 승리이다. 전쟁은 주로 무인 무기 위주로 투입되었다. 그럼에도 인력이 필요한 부분에서 인간이 투입되었고, 강화 인간에게 밀린 유럽의 패배가 사실상 확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쟁으로 아시아 인구 20%, 유럽 인구 40%, 아메리카 인구 30%가 사망하며 인류 20%가 절멸했다. 이는 직접적인 교전이 아닌 핵무기 사용으로 인한 결과이다. 이미 핵분열 폭탄은 사장되어 사용되지 않고, 수소 핵융합 폭탄이 사용되어 방사능으로인한 피해는 적었다. 그럼에도 수소폭탄의 위력이 워낙 강대해 한 발만으로 도시 하나가 소멸하는 수준이다.

원인

전쟁으로부터 24년 전, 한국에서 키보토스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키보토스 프로젝트는 인간의 신체를 극단적으로 강화하는 프로젝트이다. 약물로 인간의 신체를 강화하는 형태이다. 프로젝트로 강화된 신체는 총알같은 원시적인 무기는 간단하게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프로젝트를 국민들에게 적용하기를 원했지만, 미국 국민들의 큰 반대로 인해 오랜시간 프로젝트를 시행하지 못했다. 국가에서 키보토스 프로젝트를 수입하려는 시도가 있으면 프로젝트를 견제하는 세력이 있기마련.

21년 전, 유럽은 유럽 연합이라는 경제공동체를 국가 연합으로 확장하게 된다. 2093년, 유럽 연합이 출범한 날로 부터 100주년에 맞춘 것이다. 스위스를 제외한 전 유럽은 유럽 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되었다. 미국과 한국의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라 예상했던 연합은 그 예상과 다르게 엇나가기만 했다. 유럽은 대서양에서, 그리고 지중해에서 미국과 갈등한다. 미국의 지브롤터 통행을 방해하고, 유럽의 해역에서 미국의 화물선을 나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도 유럽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건에 대해 큰 관세폭탄을 맞으며 손해를 본다. 두 대륙의 우두머리에게 태클을 건 것.

유럽 연합이 이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한 대륙을 통일한 본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것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편입한 멕시코와 퀘벡 지역에서 지속적인 갈등과 테러를 겪고 있었고, 한국 역시 일본과 만주에서 난립하는 민족주의 세력에게 피해를 입고 있었다. 키보토스 프로젝트 이후 두 열강은 가장 큰 쇠퇴기를 맞이한 것이다. 유럽 연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두 열강을 견제해 약화시키고, 다시금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을 노리고 있었다. 애초에 유럽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며 앞으로도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날동안 미국과 한국에 밀려 그러지 못한 설움을 해소하고자 다시 지구의 패자가 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유럽의 패기는 좋았다. 분명 유럽 전체를 합친 국가 연합은 미국에도 밀리지 않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지닌 거대 국가이다. 이는 유럽 내부에서도 역사적으로 유럽을 통일하는 세력을 막으려한 이유 중 하나이다. 유럽을 통일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주무르고 군림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유럽은 이제 이 두려움을 자신들이 아닌 외부 세력이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키보토스 프로젝트는 유럽 연합의 큰 위협이었다. 신체가 강화된 인간과의 전투는 무조건 패배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미 키보토스 프로젝트를 전 국민에게 적용한 한국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에 암약해 키보토스 프로젝트 반대 여론을 지속적으로 퍼뜨리는 방법을 택했다. 한국을 상대로는 키보토스 프로젝트를 수출하지 못하도록 보수주의 의원들을 매수해 수출을 금지하도록 했다. 이는 200년 넘게 한국에 장기집권중인 대한연방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어었다. 한국 국민들도 키보토스 프로젝트가 자신들만을 위한 기술로서 남기를 바랐다. 기술을 훔쳐 재사용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키보토스 프로젝트가 워낙 극비리에 진행되어 한국에서도 원천기술을 아는 사람이 몇 없었다. 약물을 훔치기도 했지만, 어떤 기술이 사용된지 모르니 분석도 불가능하였다.

다른 원인으로는 해수면 상승이 있다. 21세기, 그야말로 산업화의 시대. 그 시대에 배출된 탄소는 여전히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인류는 이미 탄소중립과 탄소 포집 기술을 완전히 사용가능했다. 그러나 이미 배출된 탄소로 인한 빙하의 해빙은 막을 수 없었고, 그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여전히 인류의 생존을 위협했다. 당시에는 다시금 빙하의 크기가 확장하며 해수면이 낮아지고 있었으나, 인류는 참을성 없는 종족이다. 모든 인류는 당장의 생존이 급한 것이다. 특히 인구 과밀화 현상으로 땅이 부족한 유럽이 그 특성을 가장 크게 보이고 있었다. 유럽은 오래전부터 많은 인간이 거주하는 대륙이다. 하지만 그 면적은 별로 크지 않다. 러시아는 2차 대전에서 시베리아를 잃으며 우랄 산맥 서쪽만을 지킬 수 있었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던 러시아는 단독 세력을 포기하고 유럽 연합에 가입한다. 22세기, 유럽 연합은 원래 러시아의 영역인 시베리아를 되찾아 생존권을 확보하기로 한다.

발단

전쟁의 불씨는 비교적 작게 타오른다. 시베리아 공화국 한티-만시 자치구에서 우랄 산맥을 등반하던 유럽 연합(러시아) 국적의 30대 남성, 키릴 드미트리예비치 볼코프(Кирилл Дмитриевич Волков)가 실종되면서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유럽 연합 정부가 한 명의 실종을 가지고 시베리아 공화국을 심각하게 비난하기 시작한다. 뉴스 기사 한 줄로 끝날 정도의 사건을 정부가 나서서 불을 붙이고 떡밥을 던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유럽의 의도는 단순했다. 이를 외교적 갈등으로 심화해서 시베리아를 침공할 명분을 만드는 계획이었다. 유럽에게 키릴 볼코프는 그저 총알에 불과했다. 키릴 볼코프로 우선 시베리아를 타격하고 당황한 사이 새로운 명분으로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유럽의 목적이다. 이후 키릴 볼코프의 사망이 시베리아 정부에 의해 공식 확인되자 공격 수위는 더 거세졌다. 키릴 볼코프의 사망 이후부터는 유럽 국민들까지 시베리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이 사건에 대해 유럽 국민의 사망에 애도를 표하면서도 동맹국인 시베리아를 향한 공격적 비난을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도 너무 강한 비판을 하기에는 유럽의 국민이 사망한 사건에 정치적 비난을 가하면 역풍이 불 것을 우려할 수 밖에 없었다.

2114년 9월 7일, 유럽에게 꿈같은 기회가 찾아온다. 시베리아에서 아시아를 규탄하고, 유럽과 손을 잡자는 친유럽 시위가 폭동으로 격화된다. 그 폭동에 시베리아군 일부가 합류하면서 내전으로 번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