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근대화사 (푸른 오얏꽃2):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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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 시대 ==
== 제국 시대 ==


27대 왕 [[고종 (푸른 오얏꽃2)|고종]](재위 1864~1919)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른 이후 선왕들이 지속해온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표적으로는 삼항(부산, 인천, 원산)의 개항으로 당시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던 여러 인재를 동원하여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물론 시대의 흐름으로는 불평등조약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니 이것은 훗날 치르는 [[한청전쟁 (푸른 오얏꽃2)|한청전쟁]]과 [[의화단의 난 (푸른 오얏꽃2)|의화단의 난]]으로 재조정된다. 삼항의 개항과 더불어 정부 차원에서 조선은 여러 방면의 개혁을 추진했고, 이를 황제가 된 고종의 연호에서 따와 [[광무개혁 (푸른 오얏꽃2)|광무개혁]]이라 불렀다. 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전면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했고, 당시로써는 신박한 정책들을 내보였다.
27대 왕 [[고종 (푸른 오얏꽃2)|고종]](재위 1864~1919)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른 이후 선왕들이 지속해온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표적으로는 삼항(동래, 인천, 덕원)의 개항으로 당시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던 여러 인재를 동원하여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물론 시대의 흐름으로는 불평등조약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니 이것은 훗날 치르는 [[한청전쟁 (푸른 오얏꽃2)|한청전쟁]]과 [[의화단의 난 (푸른 오얏꽃2)|의화단의 난]]으로 재조정된다. 삼항의 개항과 더불어 정부 차원에서 조선은 여러 방면의 개혁을 추진했고, 이를 황제가 된 고종의 연호에서 따와 [[광무개혁 (푸른 오얏꽃2)|광무개혁]]이라 불렀다. 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전면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했고, 당시로써는 신박한 정책들을 내보였다.


그렇게 개혁을 추진하던 1890년 12월, 만주의 청나라 관리가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이 바로 간도 한국인 살인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종속국'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얻으려 했던 고종은 청에 무리한 배상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지만, 서태후와 광서제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대한은 자국민 보호를 근거로 하여 청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러나 청군 내부에서는 비리와 부패로 인한 심각한 내부분란이 있었으며 그들이 압록강 변에 도달했을 때에는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조선군보다 열악한 무장과 교리는 청군의 승산을 낮추었고, 조선군에게 격퇴당하는 굴욕을 겪게 된다.
그렇게 개혁을 추진하던 1890년 12월, 만주의 청나라 관리가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이 바로 간도 한국인 살인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종속국'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얻으려 했던 고종은 청에 무리한 배상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지만, 서태후와 광서제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대한은 자국민 보호를 근거로 하여 청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러나 청군 내부에서는 비리와 부패로 인한 심각한 내부분란이 있었으며 그들이 압록강 변에 도달했을 때에는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조선군보다 열악한 무장과 교리는 청군의 승산을 낮추었고, 조선군에게 격퇴당하는 굴욕을 겪게 된다.

2022년 1월 14일 (금) 22:29 기준 최신판

근대화의 기초

조선 근대화의 시작은 제22대 국왕인 성조(재위 1762~1776)의 치세부터 시작된다. 성조는 영조의 차남으로, 조선의 중흥을 이루어낸 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조는 붕당정치를 타파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 '근대화'의 초석이라고 불리는 조건 중 하나를 마련했다. 그 밖에도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상공업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소비재를 장려했다.

조선의 23대 왕인 정조(재위 1776~1816)는 부친과 조부가 닦아놓은 기틀을 잘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치세에 내정을 정비하였으며, 서구 국가의 정세와 동향을 알고자 국왕 직속 기관으로 조선 익문사를 설립하였다. 익문사 요원들은 일본, 중국의 항구 등지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서구 국가의 소식을 입수한 뒤 정조에게 보고하였고, 정조는 이를 참고하여 근대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치·경제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진행한 과정과 일련의 대사건을 후대에선 정미개혁이라 불렀다. 조선 익문사는 훗날 제국익문사, 대한조선국 익문사로 이어지는 정보기관의 시초가 되었다.

24대 왕인 순조(재위 1816~1834) 또한 내려져 온 기틀을 유지, 보수하였다. 그는 사림들 주도로 굴러가던 향촌 사회를 국왕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바꿨으며 과거 태종 때 실행하였던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임진왜란 이후 비정상적으로 쏠린 권력을 나누는 데 성공하였다.

개혁 시대

25대 왕인 헌조(재위 1834~1849)는 익문사를 통해 수집한 정보로 대청 시대가 지난 것을 명백히 깨달았다. 북벌을 하자는 일부 대신이 있었으나 조선은 당시 자체적인 힘이 없을뿐더러 청이 아무리 약해졌다 한들 여전히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다. 당연히 헌조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북벌을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대신들이 주장했던 군제개혁은 필요성을 느껴, 동방의 고요한 땅인 조선을 세계무대 위로 올릴 개혁을 준비하였다.

26대 왕 철종(재위 1849~1864)은 아편전쟁으로 권위가 떨어진 청나라의 눈을 피해 서방과의 접촉을 가속하였다. 미숙한 조선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무역을 펼치며 서양 열강들 사이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그레이트 게임'의 상황을 철저하게 이용했고,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이루어내며 차근차근 조선의 국력을 강화했다. 이후 1864년 철종이 붕어하여 익성군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조선 27대 왕이자 대한제국 태황제 고종이다.

제국 시대

27대 왕 고종(재위 1864~1919)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오른 이후 선왕들이 지속해온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표적으로는 삼항(동래, 인천, 덕원)의 개항으로 당시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던 여러 인재를 동원하여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물론 시대의 흐름으로는 불평등조약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니 이것은 훗날 치르는 한청전쟁의화단의 난으로 재조정된다. 삼항의 개항과 더불어 정부 차원에서 조선은 여러 방면의 개혁을 추진했고, 이를 황제가 된 고종의 연호에서 따와 광무개혁이라 불렀다. 제국 선포 이후 고종은 전면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했고, 당시로써는 신박한 정책들을 내보였다.

그렇게 개혁을 추진하던 1890년 12월, 만주의 청나라 관리가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이 바로 간도 한국인 살인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종속국'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얻으려 했던 고종은 청에 무리한 배상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지만, 서태후와 광서제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대한은 자국민 보호를 근거로 하여 청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러나 청군 내부에서는 비리와 부패로 인한 심각한 내부분란이 있었으며 그들이 압록강 변에 도달했을 때에는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조선군보다 열악한 무장과 교리는 청군의 승산을 낮추었고, 조선군에게 격퇴당하는 굴욕을 겪게 된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대한은 정미개혁 이후 근대화에 성공하였다는 징후로 받아들였고, 열강으로 진입하면서 8년 후 의화단 운동에도 열강 연합으로 개입하였다. 또한, 청으로부터 남만주를 얻는 과정에서 삼국간섭을 벌인 러시아와 일본, 영국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연해주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러시아와 영토 분쟁을 시작했다. 일본과는 군사적인 우위를 점하고 삼국간섭과 같은 외교적 압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일 해군력 경쟁을 시작하였다. 이때 일본이 끌어들인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영국 다음으로 공업이 발달한 독일과 한독동맹을 체결한 것은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이 아시아까지 번지는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