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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전
中國內戰 / Chinese Civil War
기간 1990년 7월 16일1993년 9월 5일
장소 중국 대륙
원인 아시아 혁명과 대동아공영권의 붕괴 및 일본 철수. 그로 인한 일련의 혼란 및 군웅할거
교전국 및
교전 세력
호국군 화북 인민회의
중화민국
지원국
미국[1]
중화국
지원국
일본[2]
만주국[3]
태국[4]
지휘관 장쩌민
마잉주
쑨궈슝
우방궈
리펑
후진타오
원자바오
자오쯔양
병력 632만 4,000명 564만 6,000명
피해 사상자 95만 8,000명 사상자 77만 4,000명
결과 쌍방 휴전,중화민국, 중화국 성립
영향 중국의 분단


개요

대일본제국 붕괴 이래 행정력을 상실했던 중국에서, 1990년 7월부터 1993년 9월까지 남부군과 북부군 간에 벌어진 내전. 일본에서 대중적인 명칭은 지나 내전(支那内戦)

상세

전개

일본의 철수와 혼란

아시아의 피지배 민족들이 저항하고 아시아 혁명이 발생. 난징 정권(왕징웨이 정권)이 장쩌민이 이끌던 호국군에 의해 멸망하자 중국 대륙은 급격한 혼란으로 접어들었다. 1988년 6월부터 시작된 자유 혁명이 전 동아시아로 확장되는 가운데 1989년 12월 26일 태평양 자결권 선언을 발표하자 대동아공영권은 몰락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산동의 반환을 약속하는 한편 중국에서 철수를 선언하였다. 사실 중국에 있어서, 일본의 그토록 쉬운 굴복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직 일본은 상하이는 물론이고 강남에선 광동 식민지, 또한 화북에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일본의 철수는 중국에 충격과 혼한을 가져온 것이었다.

일본은 11월에 화북 지역에 화북정무위원회를 설치해 직접 군정으로 전환했었으나, 일본 본국의 갑작스런 자결권 선언으로 일본군은 순차적으로 철수했다.

일본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아직 장쩌민에게 장악되지 않은 지역은 패닉에 빠졌다. 일본군 및 일본인들이 우수수 빠져나갔으며 경찰들은 지휘부를 잃자 임무 수행 의지를 상실하고 치안이 붕괴되었다. 일본 측은 철수하면서 자국민 이외에 중국인의 이후 생활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저 내버려두고 도망갔다는 말이 옮았다.[5]

이때 화북과 구 산동 측에선 일본이 물러난 가운데 화북지역을 포괄하는 정치체제를 창설해 정국을 정리하기로 하였고, 허베이성의 성장으로서 화북의 거두로 떠오른 리펑을 내세워 화북인민회의를 구성, 1990년 3월 후지나와 유지 일본 주둔군 사령관에게서 행정권을 일임받았다.

남북 갈등

내전 직전, 중국의 대략적인 판도.


장쩌민은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가기 시작하자 아직 본인이 장악하지 못한 화북지역에 대한 욕심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화북인민회의 측에 신중국 건설을 위한 협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북의 군벌들은 장쩌민과 난징의 통제를 거부했다.

일본은 신쿄 조약에서 "왕징웨이가 세운 중화민국 남경정부가 무효임을 확인하고 군민관(軍民官) 일본 국민을 철수시키며, 지나의 정치적 독립을 승인한다."고만 했을 뿐 주권을 반환받는 주체는 명시하지 않았다. 장쩌민의 세력은 정식 국가를 선포하지 않았기에 그가 중국의 대표자라고 할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쩌민은 가장 많은 영토를 가진 자신이 중국의 주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군벌들이 따를 리 없었다. 이후 군벌들은 군벌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난징에 복종하는 형식의 타협안을 제시하나 장쩌민은 일본인들과 앞장서 싸운건 나이며, 또한 내가 중국이다.(與日本人並肩作戰的是我,也是中國。)라는 한마디로 이를 물리쳤다.

당시 군벌들은 장쩌민이 북상하면 그대로 각개격파당할 판이었고, 1990년 3월에 베이핑을 비롯한 허베이 지방의 일각을 차지하던 대군벌 리펑을 원수 의장으로 추대한 화북인민회의를 구성했다. 비록 군벌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으나 장쩌민으로서는 상당한 강적을 만나게 되었다.

화북의 결속 이래 중국의 남북갈등이 점점 수위를 높여가자 주요 열강이 중재에 나섰다. 미국은 양자 합의로 새로운 중국 정부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일본의 경우도 아직 많은 일본인이 철수하지 않은 상태로 자국민 안전이 위험했기에 중재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이견은 좁혀질 기미가 없었으며, 1990년 7월 10일 양측 대표단의 최종 협상이 결렬되었다. 그리고 장쩌민은 7월 16일에 전격적인 북벌을 시작할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개전

그럼에도 대부분의 군벌들은 신중국에 협력하여 장쩌민과 남북 협상을 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허베이 성장이자 당시 화북 최대 군벌 리펑을 화북 정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일본군 철수를 위한 신사협정 기한이 끝난 1990년 3월부터 화북 군벌들에게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며 모든 권력을 반납하고 신중국 건설에 협력하라며 강압적으로 나왔다.

이에 리펑과 인민회의 측은 화북 인민회의가 중화민국의 자치정부로 합류하는 타협안을 제시하나 장쩌민은 오로지 중국 완전통일만을 부르짖었고, 남북의 갈등이 첨예해지는 가운데 1990년 7월 16일 장쩌민이 일방적으로 협상을 깨고 북벌을 선포하면서 중국 내전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한편 장쩌민은 본래 4월경 공격하려 했으나 일본인 철수가 완료되지 않았을때 공격하면 일본과 충돌이 생긴다는 의견을 채택되어 공세가 7월로 연기됐다.[6][7]

장쩌민은 베이징을 빠르게 점령한다는 계산 하에 군대를 북상했고, 1990년 9월 황하까지 당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리펑은 이를 기점으로 군벌들에 대한 권위를 확립해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한편, 북중국이 무너질 시 적대적인 남중국과 만주국이 맞닿는 것을 우려한 일본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일본은 당시 제국 붕괴와 가네무라의 민주화 선언으로 인해 정국이 영 좋지 못했기에 직접적인 지원을 하지 못했지만 무기를 일부 양도해주었고, 리펑은 일본제 무기로 자신의 중앙군을 편성해 황하에 방어선을 전개했으며, 치열한 공방 끝에 1990년 12월 겨울이 찾아오자 남중국군이 황하에서 퇴각하며 숨통이 트였다.

이후 1991년 3월부터 다시 역으로 남하하여 상하이 부근까지 진격했지만, 장쑤성 북쪽에서 진격을 멈춘 채 고착화를 노렸다. 한편 리펑은 초반 남중국의 공세로 군벌들이 타격을 입은 통에 군벌 숙청을 단행하게 했다.

그는 북중국이 전후에도 생존하려면 군벌연합체 성격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고 1992년 3월 15일. 그는 베이징에 군벌들을 모아놓고 3월 친위쿠데타를 벌여 그 자리에서 군벌들의 신변을 확보한 뒤 군사권을 모두 회수하고 거부할 시 국가반역죄로 다스린다는 동원감란시기임시조강을 발표했으며, 대부분의 군벌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남중국의 장쩌민에 이어 자신의 독재 훈정체제를 구축했다.

휴전

이후 전쟁은 전선에서 양측이 무의미한 전투를 주고받는 교착상태로 전개됐다. 1992년부터 미국의 제안으로 휴전 협상 테이블이 열렸다. 당시 상황을 중재한 열강으로는 미국을 비롯해 일본, 독일, 이탈리아까지 총 4개국이 채택되었다.

장쩌민은 아직 북진을 부르짖었으나, 화북이 리펑의 지도 아래 단결된 이상 통일중국의 총통이 되겠다는 그의 야망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휴전협상 속에 명목상은 열강 4개국이 중립적 입장에서 중재를 했으나, 북중국이 일본에게 대량의 원조를 받은것을 모두가 아는 이상 일본은 북중국을 비호했고, 미국은 남중국의 이용 가치를 알아 남중국의 입장에서 협상을 했다. 이때 쟁점은 국경이었는데, 일본은 북중국이 화북평원을 담보받을수 있는 고지대가 완충으로서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양국 간의 적절한 타협을 통하여 중국의 국경은 휴전 발효 시 양측이 차지한 전선을 국경으로 정하는 것으로 합의했고, 이 중국 정전협정 합의가 타결된 1993년 8월 15일로부터 20일 뒤인 1993녕 9월 5일까지를 전투기한으로 정해, 당일이 되자 전투가 종료되고 남북간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후

여담

일본의 개입

미국의 개입

  1. 일부 공중 지원, 무기 및 자금 지원
  2. 일부 공중 지원, 무기 및 자금 지원
  3. 무기 및 자금 지원
  4. 지지 의사 표명
  5. 경찰, 공무원, 군인이나 그 가족 등 친일파로 몰릴 가능성이 있는 중국인들은 알고 지내던 일본인의 보증으로 일본으로 따라 도망치기도 했다. 물론 호국군에 장악된 지역에선 군대의 심사로 철저히 일본 국적이 입증되어야만 보내주었고 한간은 여지없이 색출했다. 이때문에 강남에서 친일 중국인들의 일본 여권 위조가 횡행했다 한다. 후에 이들은 자연히 재일 중국인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6. 물론 일본 측에서 일본인과 일본군의 철수가 완료되지 않았을때 화북을 공격하면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정하자 그런 것도 있었다.
  7. 물론 귀국을 천천히 하려하다가 중국 내전에 휩싸인 일본인들도 있긴 했다. 이들은 "잔류 히키아게샤"라고 불리며 중국내전 개전 시 약 2만 명 가량이 남아있었다. 이는 6월3일까지도 철수하지 않은 일본인들은 일본 정부에서도 사실상 유기하고 알아서 돌아오게 했기 때문이다. 이후 북중국에서는 1998년, 남중국은 2001년에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본인이 희망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일본으로 대부분 복귀했다. 이때까지도 잔류를 택한 이들 중에는 다이완 계열인 경우가 많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