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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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공업 집중 육성==
==경공업 집중 육성==
농업 개혁이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것을 확인한 안드로포프는 고질적인 소비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경공업 육성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소련은 중화학공업에 치중한 나머지 국민들의 높아진 구매력을 충족시킬만한 소비재 생산력을 갖추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배급 신청 후 수 개월, 길게는 수 년을 기다려야 구매할 수 있었다. 생필품과 가공식품들도 소진되는 속도에 비해 재고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아 구매하려면 상점 앞에서 긴 줄을 서야했다. 지방 중소도시들의 사정은 더욱 심각해 중소도시 시민들은 주변 대도시까지 가야 생필품을 구할 수 있었다.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으로 생활의 질 자체는 높은 것처럼 보였지만 생필품이 떨어져도 구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농업 개혁이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것을 확인한 안드로포프는 고질적인 소비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경공업 육성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소련은 중화학공업에 치중한 나머지 국민들의 높아진 구매력을 충족시킬만한 소비재 생산력을 갖추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배급 신청 후 수 개월, 길게는 수 년을 기다려야 구매할 수 있었다. 생필품과 가공식품들도 소진되는 속도에 비해 재고가 채워지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 구매하려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야했다. 지방 중소도시들의 사정은 더욱 심각해 중소도시 시민들은 주변 대도시까지 가야 생필품을 구할 수 있었다.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으로 소련 국민들의 생활의 질 자체는 높은 것처럼 보였지만 생필품이 떨어져도 바로 구매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소비재 산업의 생산력이 국민들의 구매 욕구를 따라가지 못하자 결국 1970년대 초부터 암시장과 같은 지하경제가 활성화되었고, 전반적인 소련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했다.


1980년, 안드로포프는 페레스트로이카 1단계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음을 선언하며 2단계인 대대적인 경공업 육성에 나섰다. 안드로포프는 중화학공업에 투자하던 국가 예산을 줄여가면서까지 경공업 육성에 집중했다. [[칼리닌그라드]]를 시작으로 그동안 소외되었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지역,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극동 지역까지 전국적으로 경공업 공단을 건설했다. 또한 소비재의 원할한 공급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장과 [[바이칼-아무르 철도]] 건설로 철도를 통한 물류 운송을 확대했고 철도역과 연계해 소련 곳곳으로 혈관처럼 뻗어나가는 [[유라시아 고속도로]]체계를 구축했다. 개선된 교통망의 확보로 소련의 물류 운송량은 획기적으로 늘어났고 경공업 성장과 더불어 소비재 부족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또한 경공업 공단이 지어진 도시들 역시 폭발적인 경제와 인구 성장을 이뤘다.
1980년, 안드로포프는 페레스트로이카 1단계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음을 선언하며 2단계인 대대적인 경공업 육성에 나섰다. 안드로포프는 중화학공업에 투자하던 국가 예산을 줄여가면서까지 경공업 육성에 집중했다. [[칼리닌그라드]]를 시작으로 그동안 소외되었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지역,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극동 지역까지 전국적으로 경공업 공단을 건설했다. 또한 소비재의 원할한 공급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장과 [[바이칼-아무르 철도]] 건설로 철도를 통한 물류 운송을 확대했고 철도역과 연계해 소련 곳곳으로 혈관처럼 뻗어나가는 [[유라시아 고속도로]]체계를 구축했다. 개선된 교통망의 확보로 소련의 물류 운송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며 빠르게 생필품난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또한 경공업 공단이 들어선 도시들 역시 폭발적인 인구 성장을 이루며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부상했다. 1984년, 경공업 생산량이 중화학공업 생산량의 85%까지 성장하면서 끈질기게 소련을 괴롭혀오던 생필품 부족 현상을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부분적 경제 개방==
==부분적 경제 개방==
==긴장 해소==
==긴장 해소==
==현대화==
==현대화==

2021년 10월 26일 (화) 01:3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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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스트로이카 기념 우표

페레스트로이카(러시아어: Перестройка)는 '재건'의 의미를 가진 러시아어 단어로, 1975년 11월 혁명을 통해 집권한 유리 안드로포프 서기장의 주도하에 실시된 소련의 경제 및 사회 개혁 정책이다. 안드로포프 서기장은 5단계 개혁 과제를 제시하며 신중하고 순차적인 개혁개방을 계획했다. 당시 소련은 중공업 중심의 산업 구조로 만성적인 소비재 부족에 시달렸고 계속된 농업 정책의 실패로 매년 막대한 양의 곡물을 수입해야했다. 안드로포프는 소련 경제의 약점이었던 농업과 경공업에 집중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실시한 글라스노스트와 함께 소련의 변혁을 상징하는 정책이 되었다.

농업 자율화

안드로포프가 계획한 페레스트로이카의 5단계 개혁 과제 중 첫 번째 단계는 농업의 부흥이었다.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소련 국민경제발전 5개년 계획부터 지속된 농업 개혁의 실패와 콜호스와 같은 집단 농장의 생산력 저하로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겪었다. 결국 소련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막대한 양의 곡물을 수입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경제적으로 큰 낭비였다. 안드로포프는 소련의 농업 정책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판단했고 블라디미르 레닌니콜라이 부하린신경제정책을 참고해 농업을 자율화하기 시작했다. 1976년, 안드로포프는 모든 콜호스의 해체를 지시하며 농민들에게 무기한 임대 형식으로 토지를 분배했다. 또한 농민들의 자율적인 경작을 허용하며 중앙 통제적인 농업에서 탈피했고, 당에서 지정한 최소 생산량을 제외한 잉여 농산물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을 허용했다. 농민들은 자신의 몫이 된 농산물의 시장 판매를 시작했으며, 그 결과 소련의 농업 생산량은 엄청난 속도로 상승했다. 농민들은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위해 생산량 확대에 주력했고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된지 불과 4년 만인 1980년, 소련의 농산물 생산력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까지 성장했다.

경공업 집중 육성

농업 개혁이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것을 확인한 안드로포프는 고질적인 소비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경공업 육성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소련은 중화학공업에 치중한 나머지 국민들의 높아진 구매력을 충족시킬만한 소비재 생산력을 갖추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자동차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배급 신청 후 수 개월, 길게는 수 년을 기다려야 구매할 수 있었다. 생필품과 가공식품들도 소진되는 속도에 비해 재고가 채워지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 구매하려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야했다. 지방 중소도시들의 사정은 더욱 심각해 중소도시 시민들은 주변 대도시까지 가야 생필품을 구할 수 있었다.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으로 소련 국민들의 생활의 질 자체는 높은 것처럼 보였지만 생필품이 떨어져도 바로 구매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소비재 산업의 생산력이 국민들의 구매 욕구를 따라가지 못하자 결국 1970년대 초부터 암시장과 같은 지하경제가 활성화되었고, 전반적인 소련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했다.

1980년, 안드로포프는 페레스트로이카 1단계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음을 선언하며 2단계인 대대적인 경공업 육성에 나섰다. 안드로포프는 중화학공업에 투자하던 국가 예산을 줄여가면서까지 경공업 육성에 집중했다. 칼리닌그라드를 시작으로 그동안 소외되었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지역,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극동 지역까지 전국적으로 경공업 공단을 건설했다. 또한 소비재의 원할한 공급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장과 바이칼-아무르 철도 건설로 철도를 통한 물류 운송을 확대했고 철도역과 연계해 소련 곳곳으로 혈관처럼 뻗어나가는 유라시아 고속도로체계를 구축했다. 개선된 교통망의 확보로 소련의 물류 운송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며 빠르게 생필품난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또한 경공업 공단이 들어선 도시들 역시 폭발적인 인구 성장을 이루며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부상했다. 1984년, 경공업 생산량이 중화학공업 생산량의 85%까지 성장하면서 끈질기게 소련을 괴롭혀오던 생필품 부족 현상을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부분적 경제 개방

긴장 해소

현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