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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7|'''하늘이 청나라를 저버렸구나! 청나라의 명이 다하였구나!'''<br>(天棄淸! 淸命絶!)|헌무제가 [[신안대전]]에서 패한뒤 내뱉은 탄식}}
{{인용문7|'''하늘이 청나라를 저버렸구나! 청나라의 명이 다하였구나!'''<br>(天棄淸! 淸命絶!)|헌무제가 [[신안대전]]에서 패한뒤 내뱉은 탄식}}
[[옹청]] 초대 황제이자, 청나라의 2대 순현친왕. 묘호는 성조(成祖),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연호는 선통(宣統). [[세조 (동방)|세조]] 황제는 헌무제를 정식 황제로 인정하여 헌무황제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적법한 절차를 통해 제위를 승계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묘호는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1978년 옹청측에서 올린 묘호와 시호를 인정하였고 위패를 태묘에 모셨다. 시호는 태황제이지만, 한국 민간에서는 절대다수가 헌무제로 부른다.
[[옹청]] 초대 황제이자, 청나라의 2대 순현친왕. 묘호는 성조(成祖),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연호는 선통(宣統). [[세조 (동방)|세조]] 황제는 헌무제를 정식 황제로 인정하여 헌무황제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적법한 절차를 통해 제위를 승계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묘호는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1988년 옹청측에서 올린 묘호와 시호를 인정하였고 위패를 태묘에 모셨다. 시호는 태황제고, 여타 청 황제는 연호+제로 부르는 관습상 '선통제'로 호칭해야 하나 한국 민간에서는 절대다수가 헌무제로 부른다.


[[광서제 (동방)|광서제]]의 선양으로 청나라가 실질적으로 멸망한 뒤에도 각지의 친황실 세력을 이끌어 중국 섬서, 감숙, 사천 일대에서 청조를 재건한뒤 초대 황제가 되었다. 이후 서조남민북공(西朝南民北共)<ref>천하를 서부의 청나라, 남부의 중화민국, 북부의 중국 공산당이 가른다는 의미</ref>를 구호로 내걸고 천하삼분지계를 이룩하려 하였으나 [[신안대전]]에서 공산군에게 참패한뒤 서안에서 내응한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교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유능했던 인물이고 국가의 기반을 닦은 명군이었으나 전투 하나로 몰락하여 최후를 맞이한 군주라는 점에서 전진 세조 부견에 비교되기도 한다.
[[광서제 (동방)|광서제]]의 선양으로 청나라가 실질적으로 멸망한 뒤에도 각지의 친황실 세력을 이끌어 중국 섬서, 감숙, 사천 일대에서 청조를 재건한뒤 초대 황제가 되었다. 이후 서조남민북공(西朝南民北共)<ref>천하를 서부의 청나라, 남부의 중화민국, 북부의 중국 공산당이 가른다는 의미</ref>를 구호로 내걸고 천하삼분지계를 이룩하려 하였으나 [[신안대전]]에서 공산군에게 참패한뒤 서안에서 내응한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교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유능했던 인물이고 국가의 기반을 닦은 명군이었으나 전투 하나로 몰락하여 최후를 맞이한 군주라는 점에서 전진 세조 부견에 비교되기도 한다.

2021년 10월 26일 (화) 12:05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청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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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청 초대 황제
成祖 宣統帝
성조 선통제
묘호 성조(成祖)
시호 창성계명헌소유의이현평세충영헌무태황제
(昌聖係明獻昭裕義彛玄平世忠營憲武皇帝)
출생 1883년 2월 12일
청나라 직예성 북경
사망 1953년 6월 2일 (70세)
청나라 섬서성 서안시
능묘 경릉(敬陵)
재위 청 감국섭정왕
1910년 5월 2일 ~ 1939년 12월 31일
옹청 황제
1940년 1월 1일 ~ 1953년 6월 2일
연호 선통(宣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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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자이펑(載灃, ᡯᠠᡳ ᡶᡝᠩ)
부모 부친: 조문왕 애신각라 혁현
친모: 소복진 유가씨
형제 이복형 덕종 광서제
배우자 효정황후 구왈기야씨
문귀비 텅자씨
자녀 말제외 3남 7녀

개요

하늘이 청나라를 저버렸구나! 청나라의 명이 다하였구나!
(天棄淸! 淸命絶!)
헌무제가 신안대전에서 패한뒤 내뱉은 탄식

옹청 초대 황제이자, 청나라의 2대 순현친왕. 묘호는 성조(成祖), 시호는 태황제(太皇帝), 연호는 선통(宣統). 세조 황제는 헌무제를 정식 황제로 인정하여 헌무황제라는 시호를 올렸으나 적법한 절차를 통해 제위를 승계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묘호는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1988년 옹청측에서 올린 묘호와 시호를 인정하였고 위패를 태묘에 모셨다. 시호는 태황제고, 여타 청 황제는 연호+제로 부르는 관습상 '선통제'로 호칭해야 하나 한국 민간에서는 절대다수가 헌무제로 부른다.

광서제의 선양으로 청나라가 실질적으로 멸망한 뒤에도 각지의 친황실 세력을 이끌어 중국 섬서, 감숙, 사천 일대에서 청조를 재건한뒤 초대 황제가 되었다. 이후 서조남민북공(西朝南民北共)[1]를 구호로 내걸고 천하삼분지계를 이룩하려 하였으나 신안대전에서 공산군에게 참패한뒤 서안에서 내응한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교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유능했던 인물이고 국가의 기반을 닦은 명군이었으나 전투 하나로 몰락하여 최후를 맞이한 군주라는 점에서 전진 세조 부견에 비교되기도 한다.

생애

각지의 복벽파 세력(특히 감숙, 섬서, 사천, 호북, 하남성 지역의)을 이끌고 청조 재건에 힘썼다. 이후 조카인 한국 만주왕으로 있던 베키투를 청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그가 훙하자 주위 신료의 설득에 직접 청 황제 자리에 올랐다.

다행히 헌무제의 유해를 무사히 빼돌린 옹청 신하들은 유해를 한국에 있던 만왕 일가에게 송환했고 1954년 2월 7일 심양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1. 천하를 서부의 청나라, 남부의 중화민국, 북부의 중국 공산당이 가른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