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사건 정보 |사건 = 1.25 폭동 |그림 = 1.25 사태.jpg |그림크기 = |그림설명 = 폭동 지역을 불시검문하는 해영국군. |날짜 = 1947년 1월 25일 ~ 3월 4일 |시간 = |위치 = {{국기나라|해성국}} [[해성행정시]] 전지역 |지리좌표계 = |최초 보고자 = |참여자 = 해성민주당원 및 반정부 준군사조직인 자유정의대를 비롯하여 대략 3,000명의 폭동자 |원인 = 왕정체제 및 [[이성훈 내각]]에 대한 불만 |결과 = [[이성훈 내각]]의 붕괴 및 사회적 내란 분위기 조성 |전체 인원 이름 = |생존자= |사상자1 = |사상자2 = |사상자3 = |보고된 사망자 = 223 명 |보고된 부상자 = 413 명 |보고된 실종자 = |보고된 생존자 = |보고된 재산 피해 = |매장지 = |조사 = <!-- 사건에 대한 조사 여부, 결과 --> }} '''1.25 폭동'''은 공화주의자 및 반왕정주의자들이 [[이성훈 내각]]에 대해 불만을 품고 반정부 준군사 조직인 [[자유정의대]] 및 일부 시민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다. 해영국 내부에 사회적 질서 붕괴를 야기하였으며, 사상자만 600명 단위가 넘어가는 대규모 사건이었다. ==개요== 공식명칭으로는 '''1.25 사태'''라고 표현하나, 정부 혹은 민간에서는 "1.25 폭동"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뚜렷한 목적 없이 내각이 왕정을 지지한다는 모호한 이유만으로 유혈 사태를 일으킨 것에 대한 현대인들의 반감이 명칭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사건을 이후로 1951년, 공화 쿠데타 직전 동안 해영국은 극도의 사회적 혼란과 과도기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50년대의 침체기를 맞이하는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경과== ==결과== ==영향==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국기나라 (원본 보기) 틀:국기나라/구현 (원본 보기) 틀:나라자료 해성국 (원본 보기) 틀:사건 정보 (원본 보기) 틀:일반 기타 (원본 보기) 틀:정보상자 (원본 보기) 틀:정보상자/행 (원본 보기) 모듈:InfoboxImage (원본 보기) 1.25 폭동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