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테크 그룹
FutureTech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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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ture with U
당신과 함께하는 미래
국가
정식 명칭 퓨처테크 그룹
이전 명칭 미래기술 그룹
영문 명칭 FutureTech Group
FT Group(약칭)
한문 명칭 未來技術 그룹
창립일 1879년 3월 4일(2028년 기준 149주년)
미래음악사 (現 퓨처테크 음악사업부) 창립
그룹 출범일 1933년 2월 8일 (2028년 기준 95주년)
미래기술 그룹 (現 퓨처테크 그룹) 창립
주소
창업주 심복택
그룹최고회의
의장
심재복
그룹최고회의
부의장
김준식
이사회장 심재복
(그룹최고회의 의장이 겸임)
유형 복합 기업, 다국적 기업
지주회사 없음
그룹 자체가 자기 자신의 지주회사 역할
자회사 퓨처테크 음악사업부
퓨처테크 전기전자사업부
퓨처테크 연극영화사업부
퓨처테크 자동차사업부
퓨처테크 운송사업부
퓨처테크 네트워크사업부
퓨처테크 게임사업부
퓨처테크 그래픽사업부
퓨처테크 철강사업부
퓨처테크 화학사업부
퓨처테크 수소사업부
퓨처테크 인공지능사업부
분야 및 업종 예술, 전기전자, 공업, 금융, 화학 등
브랜드 (작성중)
상징색 Future Green (#6DD947)
Tech Blue (#0DC0FF)
홈페이지 https://futurete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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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시장 (설정 협의중)
상장유무 상장기업
직원 584,186명 (2028년)
매출액 486,189,238,241,120원 (2028년)
자산총액 1,024,197,211,210,720원 (2028년)
시가총액 719,293,583,693,280원 (2028년)
영업이익 50,912,384,205,000원 (2028년)
순이익 42,998,319,238,850원 (2028년)
자본금 2,984,183,294,000원 (2028년)

개요

녹색 첨단 기술로 세계를 선도하는 봉래국의 초대형 복합 기업입니다.
네이션즈 세계관 FutureTech Group 등록 게시글

설화가 2020년 2월 13일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세계적 규모의 복합 기업이다. 네이션즈 내에서 연재되고 있었으나, 연재자가 네이션즈를 떠나게 되면서, 현재는 국적국 설정이 비어 버린 상태로 남게 되었다. 설화가 현재 굉장히 신경쓰고 있는 기업으로써, 네이션즈를 떠나도 퓨처테크 설정은 유지하겠다고 자주 언급해 왔다.

역사

주의: 네이션즈 이탈로 인하여 국적국 설정이 비어버려, 현실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국가들의 명칭을 사용했다. 단, 대한제국은 일제강점기 없이 그대로 존속하는 것으로 했다.

그룹 결성 이전 (제1기)

미래음악사 창립

FutureTech 제1대 CEO인 심복택은 유학파 작곡가로, 의복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던 집안의 장손이였다[1]. 덕분에 심복택은 풍족한 환경에서 여유롭게 작곡을 배울 수 있었다. 1866년 독일 유학을 마친 심복택은 일본을 본거지로 약 13년간 작곡가로 활동했다.

그러던 1878년, 심복택은 미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휴가를 떠나 마음을 비우고 다양한 것들을 보던 와주, 실린더 레코드를 처음 보게 되었다. 음악을 녹음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유심히 쳐다보던 심복택은 문득 이걸 귀국할 때 가지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레코드와 재생기를 몇 개 사서 귀국했다. 심복택은 이 물건을 지인들에게 보여주었고, 지인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몇 몇 사람들은 아에 이걸 팔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을 정도였고, 이 제안을 받아들여 1년 후 자본금 1만원으로 음반 도매와 그 재생기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미래음악사를 결성했다. 그때가 1879년 3월 4일이였다.

사세 확장

심복택은 미래음악사를 차리며 본거지를 모국이였던 대한제국으로 본거지를 옮겨 기업 운영과 작곡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3년 동안의 활동으로 일본에서 큰 인기를 받고 있어, 작곡과 기업 운영을 동시에 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심복택은 고민 끝에 미래음악사의 운영을 도와 줄 동료, FutureTech 제1대 CFO인 박복자를 섭외했다. 박복자는 심복택과 미래음악사를 같이 운영하다가, 1897년 결혼했다.

집 안에서 편안히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부자들 사이에서 퍼지면서, 음반과 재생기가 많이 비쌌지만 차차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1887년 손익분기점을 넘긴 이후, 1888년 미래음악사는 대한제국 곳곳과 일본에 여러 분점을 냈다. 모든 분점들이 영업을 잘 했던 것은 아니였지만, 몇몇 분점들은 좋은 수익을 거두었고 이 분점들은 현재까지도 음악 앨범을 판매하는 플래그쉽 스토어로 이어져 오고 있다.

미래음악사는 1889년 3월 4일, 창립 10주년을 기념해서 연극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동안 적자를 면하진 못했지만, 서서히 수익이 늘고 사업이 안정화되게 되었다. 이에 탄력을 받은 미래음악사는 1892년 일본 등 외국에도 진출했으나 큰 적자를 내고 다음 해 바로 철수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내에서의 연극 사업은 호황을 누렸고, 창립 5년만인 1894년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처음에는 외화를 수입하는 배급사의 역할만 담당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예술가들과 협력하여 자체적인 연극을 만들어 상영하기도 했다.

1895년 SP(표준시간 음반)이 개발되었고, 미래음악사는 SP의 수입에 앞장섰다. 음반 판매로 많은 수익을 얻은 미래음악사는 음반 제작도 시도하게 되었다. 마침 심복택 본인도 작곡가이니, 지인들과 모여 여러 곡을 작곡해 실린더 레코드와 SP에 실어 발매하였다. 이 음반은 천 부 이상 팔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 음반 제작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음반 제작용 스튜디오인 '미래음악사 경성음악녹음실'을 차렸다. 이 음악 녹음실은 미래음악사 자신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내 다른 음악인들도 종종 사용하고는 했다. 현재도 이 곳에는 퓨처테크 음악사업부가 운영하는 스튜디오가 위치하고 있으며, 1층에는 미래음악사 경성음악녹음실을 보존하여 놓았다.

미래전자 창설

미래음악사는 1899년 3월 4일, 창립 2주년을 기념해서 새로운 음반 재생기를 발표했다. 이 음반 재생기는 경쟁 제품들보다 작고 가벼워 나들이 때 들고 나갈 수 있었다. 대부분의 판매는 손으로 돌리는 일반형 모델이였으며, 배터리가 장착된 고급형 모델은 조금밖에 팔리지 않았다. 당시 혼수로도 많이 각광받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 제품을 계기로 미래음악사는 이러한 전기 제품들의 개발에 신경을 쓰게 되었으며, 1902년 8월 7일 전기 제품들의 보다 전문적인 개발을 위해 미래전기전자를 분사했다. 심복택은 음악만 알던 음악 바보였기 때문에, 또 다른 협력자를 구할 수 밖에 없었고, 지인들 중 전자제품에 관심이 많은 김병국을 미래전자의 대표, FutureTech Group 제1대 CTO로 임명했다.

미래전자는 제품의 개발과 도매를 하며 사업을 키워나갔다. 이 덕분에 미래음악사는 다시 음악 사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음악사는 신디사이저에 관심을 가져, 신디사이저 본품과 공사비로 큰 금액을 지불하며 녹음실을 한 달 가까이 쓰지 못하는 일까지 감수하며 미래음악사 경성음악녹음실에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를 한 대 비치했다. 비싼 대가를 지불한 것과 달리 처음에는 별 일을 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신디사이저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쓰이며 대한제국의 음악 수준을 한 층 높혀 주었다. 이후 미래음악사는 미래음악사 부산음악녹음실을 세우고 최신 모델의 신디사이저를 몇 대 들여 놓았다.

미래연극영화 분사

외화를 수입하고 때로는 연극을 직접 제작하며 이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미래음악사는 외국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영화 시장에 관심을 가졌다. 긴 고민 끝에 1907년 미래음악사는 큰 자금을 투입하여 대한제국 경성의 번화가에 영화관 한 곳[2]을 차리고, 당시 외국 연극을 번역하던 부서에 외화의 번역을 맡겼다. 처음에는 영화 필름을 다룰 장비도, 인력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번역한 자료를 외국의 기업에 넘겨서 가공한 뒤 들여오는 수 밖에 없었다. 최초의 상영은 1907년 10월 28일로, 첫 반응은 좋지 못했다.

미래음악사 경영진들은 막대한 자금 손실을 입을 것으로 예상했고,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수 시간의 대책회의 끝에 일단 반응을 지켜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다음 날, 첫 상영을 보고 영화에 대한 소문이 퍼져 영화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미래음악사 경영진들은 안심할 수 있었고, 당초 예정했던 상영 기간을 두배나 늘려 총 1달간 상영했고 그 성과는 대단했다. 좋은 반응을 얻은 미래음악사는 영화 사업에 조금 더 집중해 보기로 했다.

미래음악사는 2년 후 부산에도 영화관 한 곳[3]을 차렸다. 또한 경성에 영화 필름을 취급하는 시설을 설치해서 외국에 번역 자료를 넘기고 다시 필름을 받아오는 귀찮은 작업 없이 영화를 번역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을 줄여 더 많은 시도를 해 볼 여력이 생겼다. 영화 사업의 규모가 꽤 커지자 1917년 1월 1일 미래음악사의 연극영화 부서는 미래연극영화로 분사했다.

미래기술 그룹 결성 (2기)

미래기술 그룹의 결성

기업이 미래음악사, 미래전자, 미래연극영화 이 3개로 나뉘면서 기업 지도부가 셋으로 나뉘게 되자 심복택은 기업 통솔에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에 집안에서 운영하던 화정의류의 경영에까지 관련되게 되어 기업 운영과 작곡을 병행하기엔 너무 바빴다. 또한 세 기업과 화정의류의 담당 분야가 제각각이라 기업 통솔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심복택은 박복자와 김병국, 그리고 미래음악사와 미래전자, 미래연극영화의 고위 인사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이 논의는 현재의 그룹최고회의의 시초가 되었다.

대책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은 복합 기업으로의 전환이였다. 그 결과 1925년 4월 3일 미래음악사, 미래전자, 미래연극영화와 화정의류[4] 총 4개 계열사를 산하에 둔 미래기술 그룹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업의 효과적인 통솔을 위하여 체계적인 지휘 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때 성립한 그룹 체제는 현재까지 조금씩 변화를 겪어오며 존속하여 현재의 퓨처테크 그룹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첫 CEO 교체

시대에 비해 장수했던 심복택이지만, 이미 70세가 된 심복택은 슬슬 은퇴를 고려할 시기가 되었다.

그룹 상징

로고

색상

지향 목표

지배 구조

기타

  1. 훗날 심복택의 집안이 운영하고 있던 의복 회사는 그룹이 결성될 때 그룹에 합류했다가 2000년대의 경제 위기로 매각했다
  2. 現 FutureFilm Theater 1호점
  3. 現 FutureFilm Theater 부산1호점
  4. 훗날 미래의류로 이름을 변경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