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der of Might: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1번째 줄:
'''Order of Might''' 세계관은 1888년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지 않고 자유주의 개혁을 진행하면 어떻게 세계가 변했을 지에 대한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Order of Might'''는 1960년을 배경으로 미국과 유럽 간에 벌어지는 냉전을 다루는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서술 시점은 1960년 11월 7일<ref>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전날</ref>이다.
[[리반]]님과 함께 현재 구상 단계에 있다.
== 구상 ==
<span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4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purple; font-size: 0.9em">'''[[사용자:guide550|{{color|white|모니터링}}]]'''</span> 독일 제국은 1888년 즉위한 프리드리히 3세와 제국의 통일을 주도한 비스마르크 간의 충돌로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한 상태였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시민의 권리에 대해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민의를 대표하는 제국의회를 무시하며 정책을 진행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특히 그가 발의한 1878년의 반사회주의법은 프리드리히 3세가 보기에 시대에 뒤쳐진 반동주의적 인물이라고 보이기에 충분했다.
 
즉위와 동시에 프리드리히 3세는 비스마르크를 불러 사퇴를 종용했으며, 결국 1888년 7월, 황제의 명령을 받은 비스마르크가 모든 인민에 대한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어떠한 검열도 금지한다는 제국 인민의 권리법, '''제국인권법'''을 발의하고 수상직을 사퇴하며 본격적인 독일의 민주주의가 시작된다.<ref>비스마르크는 황제의 사퇴 종용으로 불려간 후 곧 수상직을 잃을 것을 직감하고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가기 위해 1888년 4월,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반사회주의법을 통해 해체해버린다. 오히려 이 조치가 프리드리히 3세의 사퇴 압박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ref> 또한 프리드리히 3세는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완전 비례대표제를 의회에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며 의원들을 압박했다. 보수당과 제국당은 법안을 재고해달라며 애원했지만 중앙당과 전국자유당이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 시키면서 새 선거법이 제정되었다.<ref>보수당과 제국당은 어쩔 수 없는 처사였는데, 지금까지는 소선거구에 결선투표제였기 때문에 득표율이 높게 책정됨과 동시에 의석을 일부 지역에서 고정적으로 얻어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f>
 
급진적으로 이루어진 개혁과 함께,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과 함께 세계적으로 벌어진 제2인터네셔널이 발족하면서 불과 1년 전 해체되었던 독일의 사회민주당이 이곳에 가입한다. 당시 인터네셔널에서는 독일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독일이 당시 열강 가운데서 유일하게 사회주의 운동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등이 사회민주당의 휘하에 존재하고, 평의회를 개최해 사회민주당의 당론을 의결하고 이를 따르는 제1인터네셔널과 같은 체제를 독일 내에서 구축했기 때문이다.<ref>물론 평의회에서 결정되어서 따랐을 뿐, 당시 주류인 라인철강노조를 제외하고는 평의회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낸 노조는 별로 없었다. 또한 노조들의 성향도 제각각이어서 애초에 평의회 위에 사회민주당이 있는 게 아니라 평의회 아래에 사회민주당이 있어야한다는 파벌도 존재했을 만큼 내부 잡음도 많았다. 다만 1888년의 '''베를린의 여름'''이라 불리는 새 시대 앞에 모두 잠시 이권을 내려놓았을 뿐이다.</ref>


== 구상 ==
그리고 1890년 2월 2일, 프리드리히 3세의 사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8차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득표율 35.27%로 대약진하며 397석 중 무려 140석이라는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좌익자유주의 정당인 자유사상당과 인민당을 합치면 무려 210석 즉 과반을 확보해 연립여당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 정당의 정권 창출을 볼 수 없었던 좌우익 자유주의 정당과 중앙당이 연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선거에서 최고로 많은 지지를 받은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민의를 왜곡한다고 생각해 제국 신문의 투고란에 황제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란 무엇 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투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ref>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프리드리히 3세는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과 자신의 왕권의 정당성 중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이 더 높다고 보았다. 결국 선출된 권력은 국민의 선택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러한 권력의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1890년의 선거 이후 프리드리히 3세는 황제로서의 정치적 발언을 되도록 자제하였으며, 신문에 투고하고 가끔 기자들의 익명의 취재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정치 개입의 끝이었다.</ref>
* 독일
 
이 선거는 또 당시 각 세계의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의 친목단체 정도로만 운영되던 제2인터네셔널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제2인터네셔널의 목표인 합법적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 정권 창출이라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준 선거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불어넣은 사회민주당은 독일을 중심으로 제2인터네셔널의 총평의회를 다시 구성할 것을 세계에 타진하였고, 1891년 12월 25일 독일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연합 대회()에서 총평의회 의장을 선출하였는데, 그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70이 넘은 엥겔스는 노구를 이끌고 단상에 서서 다시 한 번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운동을 역설했다.


== 각주 ==
== 각주 ==

2021년 4월 29일 (목) 03:04 판

Order of Might는 1960년을 배경으로 미국과 유럽 간에 벌어지는 냉전을 다루는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리반님과 함께 현재 구상 단계에 있다.

구상

모니터링 독일 제국은 1888년 즉위한 프리드리히 3세와 제국의 통일을 주도한 비스마르크 간의 충돌로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한 상태였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시민의 권리에 대해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민의를 대표하는 제국의회를 무시하며 정책을 진행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특히 그가 발의한 1878년의 반사회주의법은 프리드리히 3세가 보기에 시대에 뒤쳐진 반동주의적 인물이라고 보이기에 충분했다.

즉위와 동시에 프리드리히 3세는 비스마르크를 불러 사퇴를 종용했으며, 결국 1888년 7월, 황제의 명령을 받은 비스마르크가 모든 인민에 대한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어떠한 검열도 금지한다는 제국 인민의 권리법, 제국인권법을 발의하고 수상직을 사퇴하며 본격적인 독일의 민주주의가 시작된다.[1] 또한 프리드리히 3세는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완전 비례대표제를 의회에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며 의원들을 압박했다. 보수당과 제국당은 법안을 재고해달라며 애원했지만 중앙당과 전국자유당이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 시키면서 새 선거법이 제정되었다.[2]

급진적으로 이루어진 개혁과 함께,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과 함께 세계적으로 벌어진 제2인터네셔널이 발족하면서 불과 1년 전 해체되었던 독일의 사회민주당이 이곳에 가입한다. 당시 인터네셔널에서는 독일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독일이 당시 열강 가운데서 유일하게 사회주의 운동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등이 사회민주당의 휘하에 존재하고, 평의회를 개최해 사회민주당의 당론을 의결하고 이를 따르는 제1인터네셔널과 같은 체제를 독일 내에서 구축했기 때문이다.[3]

그리고 1890년 2월 2일, 프리드리히 3세의 사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8차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득표율 35.27%로 대약진하며 397석 중 무려 140석이라는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좌익자유주의 정당인 자유사상당과 인민당을 합치면 무려 210석 즉 과반을 확보해 연립여당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 정당의 정권 창출을 볼 수 없었던 좌우익 자유주의 정당과 중앙당이 연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선거에서 최고로 많은 지지를 받은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민의를 왜곡한다고 생각해 제국 신문의 투고란에 황제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란 무엇 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투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4]

이 선거는 또 당시 각 세계의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의 친목단체 정도로만 운영되던 제2인터네셔널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제2인터네셔널의 목표인 합법적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 정권 창출이라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준 선거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불어넣은 사회민주당은 독일을 중심으로 제2인터네셔널의 총평의회를 다시 구성할 것을 세계에 타진하였고, 1891년 12월 25일 독일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연합 대회()에서 총평의회 의장을 선출하였는데, 그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70이 넘은 엥겔스는 노구를 이끌고 단상에 서서 다시 한 번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운동을 역설했다.

각주

  1. 비스마르크는 황제의 사퇴 종용으로 불려간 후 곧 수상직을 잃을 것을 직감하고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가기 위해 1888년 4월,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반사회주의법을 통해 해체해버린다. 오히려 이 조치가 프리드리히 3세의 사퇴 압박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2. 보수당과 제국당은 어쩔 수 없는 처사였는데, 지금까지는 소선거구에 결선투표제였기 때문에 득표율이 높게 책정됨과 동시에 의석을 일부 지역에서 고정적으로 얻어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물론 평의회에서 결정되어서 따랐을 뿐, 당시 주류인 라인철강노조를 제외하고는 평의회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낸 노조는 별로 없었다. 또한 노조들의 성향도 제각각이어서 애초에 평의회 위에 사회민주당이 있는 게 아니라 평의회 아래에 사회민주당이 있어야한다는 파벌도 존재했을 만큼 내부 잡음도 많았다. 다만 1888년의 베를린의 여름이라 불리는 새 시대 앞에 모두 잠시 이권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4.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프리드리히 3세는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과 자신의 왕권의 정당성 중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이 더 높다고 보았다. 결국 선출된 권력은 국민의 선택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러한 권력의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1890년의 선거 이후 프리드리히 3세는 황제로서의 정치적 발언을 되도록 자제하였으며, 신문에 투고하고 가끔 기자들의 익명의 취재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정치 개입의 끝이었다.